‘절친노트’의 김구라 vs 토크쇼의 김구라

‘절친노트’에 출연하는 김구라는 한 때 자신의 독설로 소원해졌던 문희준과 함께 화해의 모습을 넘어 절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구라는 작년부터 자신의 독설로 피해를 보았던 연예인들에게 잇따라 사과를 해왔고, 그것은 ‘절친노트’의 기획의도 자체가 되었다. 독설과 화해의 당사자들인 김구라와 문희준은 함께 MC로 자리했고, 그들이 했던 절친을 위한 사과와 화해는 프로그램의 형식이 되었다.

절친과 독설의 김구라
김구라는 작금의 쇼들이 가진 직설어법의 살아있는 캐릭터다. 작년 한 해 김구라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라 자신이 말했듯이 지금 예능이 자신 같은 캐릭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직설어법을 김구라와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김구라화되었고, 김구라는 예능 프로그램화되었다.

그런데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앞세운 ‘절친노트’에서 김구라가 화해의 따뜻한 면면을 드러내려 노력할 때, 다른 한편에서 ‘라디오스타’나 ‘명랑히어로’에 출연한 김구라는 잇따른 막말로 파문을 일으켰다. 홍석천 관련 멘트는 성 소수자 비하라는 논란을 낳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언급하며 끄집어낸 이대근, 마흥식 관련 발언도 부적절했다는 여론을 만들었다. 모두 리얼을 강조하는 이들 프로그램들 속에서 김구라는 절친과 독설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김구라의 진짜 얼굴일까. 그것은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리얼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것 역시 캐릭터라는 이름으로 연기되어지는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 상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특유의 독설 캐릭터를 가진 김구라를 예능 프로그램들이 소비하는 방식의 두 얼굴이다. 그렇다면 이 독설과 화해의 프로그램들은 과연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는 있는 걸까.

김구라의 홍석천 언급이 말해주는 것
인터넷 매체의 진짜 독설의 김구라가 지상파로 나왔을 때 그는 그 상업적 속성 때문에 본연의 아우라(?)를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왕비호(윤형빈)가 독설을 통해 오히려 호명된 연예인의 가치를 높이듯이, 김구라의 독설도 자기 스스로가 주장하듯(그가 아니면 누가 한물 간 연예인을 탑 프로그램에서 다시 거론하겠는가!) 조금씩 호명의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 부분에서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은 어쩌면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얼굴처럼 보인다. 김구라가 홍석천을 언급했을 때, 성 소수자에 대한 비하의식이 그 말 속에 숨겨져 있다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가 홍석천을 언급하기 전까지 홍석천은 철저히 대중들로부터 커밍 아웃한 성 소수자로서 외면 받아왔다. 이것은 홍석천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김구라는 홍석천과 절친한 사이라고 했고, 그래서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졌을 수도 있다. 김구라의 발언은 물론 부적절한 것이지만(사실은 편집을 하지 않은 제작진의 문제가 더 크다), 홍석천에게 진짜 형벌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호명조차 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이지 않을까.

‘절친노트’의 두 얼굴
“우리는 절친입니다.” 처음 만난 연예인들이 서로 질문과 답변을 하다가 서로 어색해지면 부르는 ‘절친노트’의 절친송. 이 노래는 이중적이다. 처음 만난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꽤 직설적이다. 김국진은 늘 그렇듯이 이혼한 사실에 대한 질문으로 공격을 받는다. 어떤 논란이나 궁금증을 갖게 했던 연예인이라면 바로 거기에 대한 질문이 날아가고 한 번으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집요하게 그 질문은 계속 반복된다.

이 절친송의 형식은 그 질문-답변 구조만을 보면 여느 직설적인 토크쇼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분위기만은 정반대다. 그것은 이 노래의 후렴구로 달라붙어 있는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선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노래의 취지에 ‘친해지기 위한’이라는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탤런트 김동현이 나왔을 때, 김국진은 막말에 가까운 말들로 그와 절친하지 않는 관계 설정을 만들었다(이 절친하지 않은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이 과감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질문과 답변의 자극성은 바로 그 절친이라는 태도로 인해 상쇄된다.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 그 속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다. 단지 쇼가 직설어법을 어떤 식으로 소비하느냐는 태도에 따라 달라 보일 뿐이다. 김구라는 바로 그 달라진 쇼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서 제대로 소비되는 프로로서의 캐릭터일 뿐이다. 따라서 김구라로 대변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김구라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현재 쇼 프로그램들이 가진 직설어법 성향을 드러내주는 얼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쇼 프로그램들은 지금 절친송을 부르고 있는 중이다. 자극적인 질문과 답변을 직설어법으로 풀어낸 후,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후렴구를 붙여서.

토크쇼에서 퇴조한 독설, 무대개그로 옮겨가는 이유

한때 토크쇼의 대세처럼 보였던 독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경규의 버럭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박명수의 호통은 기력 빠진 아버지의 지청구처럼 힘이 빠진 지 오래다. 독설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았던 김구라는 잇단 사과방송을 통해 유한 이미지를 또한 획득했다. ‘라디오스타’같은 프로그램에서 김구라는 번번이 신정환에게 당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른바 독설에 균형을 잡아갔다. 그의 독설은 과거의 그것처럼 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독설은 토크쇼가 아닌 무대개그에서 번창(?)하고 있다. 무대개그에서 왕비호(윤형빈)는 자타가 공인하는 현재의 독설가로 자리잡았다. 비슷한 유형으로 세 명이 나와 번갈아 가며 서로가 독하다고 과시하는 ‘독한 놈들’은 왕비호의 그 성공전략에 영향을 받은 코너다. 한편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은 이 독설을 연예계가 아닌 타 분야로 넓힌 사례다.

이처럼 독설이 토크쇼에서 점차 사라지고 무대개그 속으로 편입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해답은 왕비호의 그 특유한 의상에서 찾아질 수 있다. 딱 붙는 반팔 쫄티에 핫팬츠를 입고 등장하는 왕비호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하는 캐릭터다. 즉 왕비호의 독설은 일상의 리얼한 토크 속에서 우연히 던져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짜여진 틀 속에서 준비되어진 독설이다.

대본으로 준비된 독설에 사적인 감정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물론 다른 토크쇼 속에서도 김구라 같은 독설가가 사적인 감정을 실어 독설을 퍼부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리얼 토크쇼의 형식상 그의 독설은 사적인 감정까지도 리얼로 포장되곤 한다. 반면 무대개그 속에서의 왕비호는 이 사적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안전막을 여러 겹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무대, 비일상적인 의상, 분장 같은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독설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권위적인 것이 독설로 인해 유쾌하게 해체됐을 때, 그 이완감 속에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독설이 웃음의 목적을 넘어서서 실제로 타인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게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무대를 넘어서서 현실까지 영향을 주는 개그 프로그램의 독설은 웃음이 아닌 불쾌감을 주게 된다.

방송에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설은 토크쇼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는 그 독설을 받아들일 만큼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해(이것은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여유 있는 자에게 날리는 독설은 그 자체가 관심의 표현으로 변모할 수 있지만, 여유조차 없는 자에게 던져지는 독설은 그 자체가 칼날이 된다. 왕비호가 톱스타들만 그 독설의 도마 위에 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왕비호의 독설에는 정해진 룰이 있다. 그 독설은 그 틀 속에서 대중들과 웃음을 나누기 위한 어떤 게임일 뿐,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독설은 아니다. 한번 웃고 나면 그뿐, 앙금이 남지 않는 독설. 그것은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독설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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