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콘텐츠, 어떻게 봐야할까

1996년도에 제작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동성애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주먹을 입에 대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대신 묘사한다. 아마도 직접적인 표현, 즉 남자들이 진짜 딥키스를 하는 장면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화적으로 연출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식으로 대신 표현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당시 대중들에게는 그 직설적인 장면연출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애 코드도 아닌 동성애 자체의 문제를 포착한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이처럼 표현 수위에 있어서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2008년 개봉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동성애자로 출연하는 민선우(김재욱)는 자신의 사랑에 당당하다. 물론 성적인 묘사는 그다지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동성애자로서의 선우에게 그다지 특별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 영화의 태도에 있다. 이 영화는 마치 "넌 여자를 좋아해? 난 남자를 좋아해! 그게 어때서?"하고 말하는 듯이, 동성애적 상황 자체를 일상적인 공기처럼 다뤄버린다.

사실 영화 속으로는 이미 이러한 동성애가 꽤 빈번히 다뤄졌었다. 동성애는 '로드무비'나 '후회하지 않아'같은 우리네 작품들이 있기 전부터, 해외에서 들어온 영화들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소재가 되었다. '크라잉 게임'이나 '해피투게더'같은 작품들을 비롯해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우리네 문화 전반에서 특히 영화가 동성애를 더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해외의 작품들을 통해 영화 속에 상대적으로 어떤 개방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의 특성상, 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구획되는 점이 좀 더 과감한 성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TV는 이제 공공연히 동성애라는 단어를 드러내고 있다. '커피 프린스 1호점' 나 '바람의 화원'같은 작품들이 동성애 콘텐츠가 아니라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선보였다면 그 연장선 위에 '개인의 취향' 같은 작품이 있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간 자리에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다. 그만큼 동성애에 관대해졌다는 이야기일까.

동성애 콘텐츠와 동성애 코드 콘텐츠?
간단한 구분이지만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그리고 '개인의 취향'은 동성애 콘텐츠가 아닌 동성애 코드 콘텐츠이다. 이 드라마들에는 동성애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남장여자들이 등장하거나, 동성애자로 오인 받는 남자가 등장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뿐이다. 이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은 그가 사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드라마가 가져온 것은 동성애 코드이지 동성애 자체가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서 동성애자로 오인 받는 전진호(이민호)는 오히려 그 설정이 판타지로 작용한다. 그와 동거하게 된 박개인(손예진)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스스럼이 없고 오히려 남녀관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다. 남자를 성적인 구분 없이 친구로 둘 수 있다는 것은 이 여성이 동성애자를 어떤 판타지로까지 여기게 되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는 물론 동성애 코드지만 과거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에서 간접적으로 다뤄지던 동성애자들이 겪는 아픔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대중들이 갖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심적인 허용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성애 코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때론 재미있는 설정(질척한 성적 관계를 벗어난 남자친구가 주는 판타지, 그것도 이민호 같은 남자라면!)으로 오히려 즐기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후회하지 않아' 같은 작품에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수현 작가의 새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실로 파격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진짜 동성애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도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 드라마는 동성애자를 가족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한다. 태섭(송창의)은 자신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유채영(유민)에게 어렵게 커밍아웃을 하고, 유채영은 그 상황을 힘겹게 받아들이면서 "미안하다"는 태섭에게 "그것이 네 잘못은 아니잖아"하고 말한다.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유채영과 그런 그녀를 두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 눈물을 쏟아내는 태섭은 이들이 남녀 관계를 넘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김수현 작가가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다. 수많은 사랑이 있고,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다를 뿐, 틀린 사랑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공감까지 일으키고 있는 걸 보면 지금 확실히 우리가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걸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동성애 소재의 콘텐츠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것이 점점 직접적으로 소수의 성을 다룬다고 해서 우리네 성 의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커밍아웃을 한 후 오히려 삶이 더 어려워진 동성애자들의 사례들은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문화 속에서 동성애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는 있지만 성 소수자로서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 동성애 콘텐츠들이 많아질까
그렇다면 여전히 편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동성애가 대중문화 속에서 공기처럼 퍼져나가고 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성애, 즉 이성 간에 벌어지는 멜로가 어느덧 식상한 어떤 것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깔려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삼각 사각의 멜로나 신파조의 설정들은 이런 인식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영화로서는 늘 연말이 되면 쏟아져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 역할을 했을 터이다.

남녀가 등장하면 으레 생겨나는 이러한 멜로적 상황이 대중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영상 콘텐츠들은 오히려 동성을 그 자리에 대치시켜 멜로가 아닌 인간애를 다루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남녀 주인공을 세우려했다가 결국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준익 감독은 이미 전작 '왕의 남자'에서도 두 남자의 동성애를 끌어들여 예술혼과 인간애로 콘텐츠가 가진 주제를 확장시킨 전례가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란 영화가 단지 성 소수자들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동성애가 가진 인간애로의 확장 가능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남녀로 구분되던 성별구분이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명확히 나눠져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농경사회에서의 성별 역할의 차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육체적인 노동력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력을 사용하는 정보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사라진다. 오히려 여성들의 노동력이 섬세한 정보사회의 업무에 더 적합해진다.

남녀 구분은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으로 바뀌게 된다. 남자라도 여성성이 많은 사람이 있고, 여자라도 남성성이 많은 사람이 지금 시대에 남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동성애는 바로 이 시선 속에 자연스러움을 얻게 된다. 남성이지만 강한 여성성이 실제 생물학적 성까지도 변모시킨 존재로서 동성애자는 외계인이 아닌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 사회의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시각으로 보면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프린스들이나, '개인의 취향'의 전진호 같은 캐릭터가 사실은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진 남성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문화 콘텐츠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여성성이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신모계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창조적인 생각과 감성적인 접근,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여성성은 사회를 바꾸는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바로 이 키워드를 어쩌면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이 동성애 콘텐츠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은 가장 모호해지고 대신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이 더 명징해진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동성애 콘텐츠에 깔린 성 상품화의 확장이다. 사실 동성애라 얘기한다면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는 우리네 문화 콘텐츠 속에서 늘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왜 그 콘텐츠들은 동성애 콘텐츠라고 구획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는 남성적인 시선을 위한 성 상품화로 나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우리가 동성애가 자주 등장한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남성과 남성 간의 동성애를 의미한다.

이렇게 남성들 간의 동성애가 이제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화구매자들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의 위상이 그만큼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등장하는 남성들이 모두 꽃미남들인 점은 과거 여성들의 성 상품화가 이제는 남성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동성애 콘텐츠, 중성적 사회로 가는 지표
확실히 우리의 문화는 이제 동성애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소재로서 아무 거리낌없이 활용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는 경향까지 생겼다. '미인도' 같은 영화는 동성애 코드를 자극적으로 활용하여 성 상품을 극대화시킨 경우다. 이 영화는 신윤복이 남장여자였다는 설정 자체도 파격적이지만, 그 남장여자의 신윤복(김민선)이 남성의 옷을 벗어버리고 김홍도(김영호)와 과감한 섹스를 하고, 한편으로는 여성들끼리의 성적인 장면을 동시에 연출하는 그 지점이 더 파격적이다. 이 영화에서 남장여자, 즉 동성애 코드는 오로지 이 에로틱한 성적 상상을 위해서만 활용된다.

하지만 같은 신윤복을 다루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는 '바람의 화원'을 보면, 이 동성애 코드가 한 예술가의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남성을 강요하는 조선이라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여성성을 무기로 한 평생을 싸우다 간 화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가진 남장여자의 활용은 어쩌면 가장 적절했다 판단되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이 보여주는 상황은 저 '미인도'처럼 직접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더 동성애에 대한 접근을 해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미의식(여성성)을 추구하는 자와 그를 억압하는 사회가 대립하는 상황 자체가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의 대립상황을 에둘러 말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재를 다룬 전혀 다른 결과물의 두 작품은 동성애에 대한 우리네 성 의식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하나는 여전히 하나의 볼거리이자 성 상품으로 세워지는 동성애다. 여성을 좀 더 자극적으로 벗겨내기 위해 남성의 옷을 입혀놓는 것이나, 꽃미남들이 나와 서로의 아름다운 몸을 만지고 보여주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는 사회를 보여주는 지표로서의 동성애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겉으로 드러난 성별보다는 그 내면 속에 담겨진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목하면서 그 미묘한 감정선들을 잡아낸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들보다는 어딘지 여성적인 섬세함을 가진 남성들이 점점 대중문화 속에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중성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회의 징후들이다. 그 속에서 동성애는 그 단적인 지표가 된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고 있는 동성애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가진 성 의식은, 이 두 가지 방향 즉 성 상품화와 중성적 사회로의 지향 사이에 놓여진 긴장관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성 상품화가 남녀의 성별의식을 기본 전제로 만들어진다면 중성적 사회로의 지향은 이 성별의식을 무너뜨린다. 아직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확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후자쪽으로 점점 무게중심이 이동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으로 모든 걸 투영해 내는 김수현 드라마

"당신 오늘부터 앉아서 싸." 김민재(김해숙)의 딸 양지혜(우희진)가 남편인 수일(이민우)에게 하는 이 말은 작금의 달라진 남녀 관계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수일은 과거라면 데릴사위로 있는 처지에, 차에서 내리는 딸의 문까지 열어줘야 할 정도로 아내인 지혜를 여왕 대접해준다. 물론 투덜대지만 늘 자신의 처지보다는 아내와 아내의 가족을 먼저 돌보는 그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도 엿보인다. 덜컥 갖게 된 둘째 아이에 기뻐하는 그지만, 그 아이를 지우려는 아내와, 그걸 반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아내 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낼 정도로 애처가다. 그에게서 과거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사위에 그 장인이라고, 수일의 장인 양병태(김영철)는 딸이 사위에게 앉아서 일을 보라고 했다는 말에 허허 웃는다. 오히려 장모인 김민재는 그런 사위를 안쓰러워 하지만, 양병태는 반 농담을 섞어서 "잔뜩 긴장하며 보기 때문에 (자신은)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준다. 한편 그런 수일을 "네가 남자냐?"고 비아냥대는 병태의 동생 양병걸(윤다훈)은 언뜻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그가 사실은 가족드라마에 늘 있게 마련인 감초 같은 수다쟁이 역할을(주로 여성이 맡게 마련인) 맡고 있다는 점은 역시 이 달라진 남녀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무엇보다 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아버지(최정훈)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아내(김용임)의 눈치를 보고, 집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있다가 오줌까지 지리는 장면은 가부장주의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인 양병태가 패밀리 비즈니스로서 펜션을 운영하고, 그 아들인 호섭(이상윤)이 그 일을 돕는 모습은 취업이 어려워진 두 세대(고령세대와 젊은 세대)의 새로운 대안처럼 그려진다. 집 밖으로 치열해진 취업 전쟁에서 이제 남자들은 집 안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낸 것 같은 뉘앙스가 거기서 느껴진다. 이 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병태의 동생 양병준(김상중)은 리조트 상무로 지내지만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고, 병태의 아들 양태섭(송창의)은 내과의사지만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동성애자다. 물론 동성애는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이 남성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가족을 염두에 두면, 이 동성애 또한 그다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김수현 작가가 그려내는 남자들은 작금의 변화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남자들의 모습을 저마다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성 소수자까지도.

한편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젊은 시절 온갖 마음고생을 다해온 할머니는 이제 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우뚝 서 있고, 며느리 김민재는 여전히 부엌을 꿰차고 있지만, 그 부엌은 가사 일만의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녀가 요리방송을 하는 모습은 부엌이라는 공간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보인다. 그녀는 가족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가진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녀의 딸인 양지혜는 자신의 삶을 위해, 생긴 아이를 지울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며, 막내딸인 양초롱(남규리)은 "어장에 물 반 고기 반"이라고 말하며 남자들을 저울질 할 줄 아는 대학생이다.

이처럼 김수현 가족드라마의 가족들은 저마다 변해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안식년을 주장하는 엄마가 등장하고, 로맨스 그레이를 즐기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처럼, '인생은 아름다워'에 동성애자가 등장하고, 그를 사랑하는 재일교포 채영(유민)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해진 사회 구성원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현실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오래도록 고정적인 팬층을 이어가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즉 현재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그 가족 구성원들 속으로 담아냄으로써, 그 파격을 보편적인 가족애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파격적인 갈등도 그 가족애 속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인다. 평생을 다른 여자와 살아온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 금지옥엽 키워낸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틀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족애로 대변되는 인간애. 그 굳건한 믿음 앞에 김수현 드라마의 가족은 사회 문제를 풀어내는 마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일단의 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김수현의 가족'에서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 가족의 갈등과 해결을 통해 큰 위안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매번 김수현의 드라마가 구성하는 가족을 통해 공감의 틀로 묶여지는 일체감을 경험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넓은 범주의 가족의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동성애 영화? 에로 영화? 무협 영화? NO!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쌍화점’. 제목부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이미 화제가 되었다. 유하 감독이 하는 사극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그 화제의 첫 번째는 조인성과 주진모가 벗었다는 것. 그것도 동성애를 연기하기 위해서다.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그 동성애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그것도 조인성과 주진모라니.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왕(주진모)이 왕의 호위무사인 홍림(조인성)을 사랑하고, 그래서 둘 사이의 묘한 멜로 구도가 들어가 있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소수의 성으로서 동성애자가 갖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다. 실제로 동성애자는 왕이라는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자이며, 홍림은 동성애자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왕을 보필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잃고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사를 위해 왕 대신 왕후(송지효)와 합궁을 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고 이것은 비극의 신호탄이 된다.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면, 혹 에로영화? ‘남녀상열지사’로 일컬어지는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따온 영화 제목은 당연히 이런 선입견을 갖게 한다. 게다가 실제로 홍림과 왕후의 정사장면은 노골적인데다 여러 차례 반복되어 보여진다. 적나라하게 벗은 조인성과 송지효의 몸은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 뱀처럼 서로의 몸을 휘감고 뜨거운 입김을 관객들에게 쏘아댄다.

하지만 그 장면이 노골적이라고 해서 이 영화를 에로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유하 감독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혔듯이 이 영화는 ‘감각의 제국’류의 욕망을 탐구하는 영화다. 홍림과 왕후 사이에는 아무런 사랑의 감정이 없었지만(오히려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둘은 몸의 결합을 통해 점점 감정이 불타오른다. 여러 차례 홍림과 왕후의 섹스 장면이 반복되는 것은 그 육체적 사랑을 통해 어떻게 욕망이라는 감정이 타오르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육체적인 성에 대해 눈뜨지 못했던 두 사람(물론 왕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왕후도 성 경험이 없을 수밖에 없다)은 성애에 눈을 뜨고, 그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타오른다. 후반부에 가서 그것이 단지 욕정이 아닌 감정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질투에 불타는 왕이 홍림을 거세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즉 이 영화는 시작부터 거세된 남자(왕)와 거세를 강요받은 남녀(홍림과 왕후)가 함께 궁이란 공간에 고립되어 살고 있었는데, 그 남녀가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는 그 순간, 왕이 그들을 거세시키는 영화다. 이것은 에로영화라기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을 쥐었지만 거세된 자의 빗나간 욕망이 만들어내는 비극.

혹자는 사극에 칼이 춤을 추는 예고편을 통해 혹 무협영화 같은 액션이 이 영화의 주는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 영화를 너무나 단순하게 보게 만드는 편견이 될 수 있다. 물론 화살이 날아와 머리에 꽂히고 한껏 힘을 모아서 순식간에 내리치는 칼과 그 굉음이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과 홍림, 그리고 꽃미남 호위부대 건룡위가 사용한 검의 수만 5백 자루가 넘는다 하니 이 영화를 무협의 반열에 세워도 무방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쌍화점’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장면은 그저 물리적인 부딪침이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액션의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장면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 다른 대화로서 표현되는 검의 말이다. 칼과 칼이 부딪칠 때, 거기에는 왕의 질투와 사랑이 묻어나고, 홍림의 억눌렸던 감정과 그래도 남은 애증이 느껴진다. 칼은 보이지 않는 이 인물들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해내는 하나의 무용과 같은 표현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동성애도 아니고 에로도 아니고 무협도 아닌 이 영화는 도대체 무얼까. ‘쌍화점’의 제작진들은 이 영화를 ‘대서사극’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다른 버전으로 읽히지만 그 깊이가 그리스 비극 같은 서사극에 닿아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흔히 멜로라 하면 남녀 간의 사랑 정도를 생각하겠지만 여기서는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의 감정들이 어떤 파국을 향해 가는가를 그려내는 멜로가 번뜩인다. 베드신과 액션신은 그 감정들을 최고조로 그려내는 장치가 된다. 여기에 서사극으로서의 비장미는 인간의 욕망을 탐구하는 그 자세에서 비롯된다.

‘쌍화점’은 보는 이에 따라 저마다의 해석과 저마다의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다. 혹자는 재미도 없고 그저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선입견들을 능가하는 영화다. 낯설지만 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

‘바람의 화원’에서 ‘쌍화점’까지 달라진 동성애 시선

SBS 2008 연기대상에 베스트커플 후보 부문에 ‘바람의 화원’에서 화제를 모았던 닷냥커플(문근영-문채원)이 후보에 올랐다. 당초에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단지 남녀 커플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는 네티즌 여론에 따라 그렇게 결정된 것. 어쩌면 이것은 그저 이벤트적인 후보 선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금의 여러 대중문화 속에 자리하는 동성애에 대한 달라진 시선을 생각하면 꼭 단순한 이벤트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바람의 화원’의 러브라인에서 닷냥커플은 사제커플(박신양-문근영)보다 오히려 사랑을 받았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멜로가 어딘지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면, 정향과 신윤복의 멜로는 그 자체로 절절한 감정이 묻어났다. 정향이 가야금을 뜯고 신윤복이 그 정향을 화폭 속에 담는 장면은 남녀 간의 그 어떤 멜로 연출보다 더 뛰어나게 감정을 표현해냈다. 즉 닷냥커플은 그저 여여커플이라는 겉으로의 시각 그 이상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작년 동성애 코드를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화제를 모았던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가장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대사는 아마도 한결(공유)이 결국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은찬(윤은혜)에게 “갈 때까지 가보자”라고 한 말일 것이다. 이 대사는 남녀의 성을 넘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에 손을 들어주는 것. “네가 남자라도 사랑한다”는 절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반드시 동성애를 지지하는 시청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성 구분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이러한 코드들은 적어도 대중문화에서는 이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개봉했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서는 이러한 동성애의 시선이 거의 일상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천재 파티셰인 선우(김재욱)는 동성애자로서 가게 사장인 진혁(주지훈)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해 왔던 인물. 물론 진혁은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대화는 마치 동성애를 하나의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과거 무겁기만 했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변화이다.

앞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쌍화점’은 동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사랑과 질투의 대서사시다. 왕(주진모)의 총애를 받는 왕의 호위무사 홍림(조인성)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자라나지만, 동성애자로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왕을 대신해 왕후(송지효)와 합궁을 하게된다. 그 때부터 홍림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그제야 알게되고 왕후와 사랑에 빠져들고 점점 질투의 화신이 되어가는 왕은 상황을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전제가 성적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미묘한 지점에 서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역시 중요해지는 건 성별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다.

이제 적어도 대중문화 속의 멜로 구도에서 성별 구분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간 남녀 간의 멜로가 자진 상투적인 식상함을 벗어나 어떤 신선한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남녀의 역할구분은 이제 이 사회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것은 물론 동성애 자체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녀구분에 대한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지금은 닷냥커플도 베스트 커플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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