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바보상자에서 똑똑한 TV까지

상자 속의 바보상자, 그저 물건의 하나였던 TV

엉뚱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TV에 대한 가장 강렬한 첫 기억으로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물쇠'라고 말할 것이다. 70년대 내가 아이였을 때, 큰맘 먹고 아버지가 모셔온(?) TV는 방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도무지 접근 불가의 물건이었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가구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TV라니! 지금으로서는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시 그 TV는 가구와 일체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TV를 보려면 먼저 가구에 달린 커다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양옆으로 연 후에야 비로소 그 속에 놓인 TV를 볼 수 있었다. 이른바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이 공공연했던 시절, 교육열이 유난히도 뜨거웠던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바보상자에 상자를 또 하나 덧씌웠던 것이다. 지금은 우스워 보이는 이 풍경은 그러나 당시엔 당연해 보이는 어떤 것이었다.

 

흑백 TV의 화질은 마치 심한 스크래치를 입은 것처럼 조악했고, 그것마저도 TV 안테나의 상태에 좌우되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거나, 비라도 올라치면 화면은 끊임없이 눈꺼풀을 깜박거렸고, 때론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옥상 지붕에 올라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이제 잘 나오니!"하고 묻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도 결국은 아버지가 그 자물쇠를 풀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 들어있어서였을까. TV는 어린 내게 어떤 신비한 물건으로 보였던 것 같다. 마치 보물창고 속에 숨겨진 만화경 같은.

 

이때의 TV는 아직까지는 우리의 생활과는 유리된 어떤 물건이었다. 그것은 늘 저편에 있었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늘 우리의 손길이 일일이 닿아야 하는 구체적인 물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드드득 소리를 내는 다이얼을 손으로 잡고 돌려야 화면이 바뀌었고, 채널 중간을 차지하는 모래알 같은 지직대는 영상은 TV 저편 세계의 이물감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계였다. "거 신기하네. 요 조그만 상자에 난쟁이들이 저렇게 많이 있다니." 할머니의 말은 아직 TV가 인간의 시각의 확장이라는(텔레비전 Tele-vision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운 곳으로 끌어들여 본다는 '원격현전'의 의미가 담긴 용어였다) 인식이 생겨나기 전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그러니까 어른들은 당시 TV가 지금처럼 스마트폰 속으로 쏙 들어와 우리 생활의 일부, 아니 몸의 일부(감각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에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 TV는 그저 우리 몸의 감각과는 유리된 재미난 바보상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서랍장 속에 숨겨야 할 어떤 존재일 뿐이었다.

흑백TV 시청하는 가족(출처:국가기록원)

새로운 감각에 눈뜨다, TV가 해방시킨 감각

하지만 못 보게 한다고 안 볼 우리들(나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 전부가 그랬으니)이 아니었다. 저녁 시간마다 TV를 볼 수 있는 친구 집으로 달려간 우리들은 탁 소리와 함께 브라운관의 작은 점이 한참이 지나야 영상으로 바뀌는 그 시간을 못 기다려 발을 종종 대곤 했다. 그렇게 켜진 TV 화면 속에 등장한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달려라 번개호' 같은 일본에서 들어온 만화들은 지금과 비교해 보면 꽤 조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집 서랍장 속에 고이 모셔둔 TV 때문에 밖을 전전하는 내게 백기를 든 아버지는 저녁 한 시간 동안 감금된 TV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 순간,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저 바깥세상과 유리된 채 살아가던 우리들의 눈과 귀도 해방되었다. 그것은 바보상자이기는커녕 온갖 진기한 세상 일들을 바로 눈앞에 가져다주는 놀라운 알라딘의 마술램프였다. 프로레슬러 김 일 선수가 일본선수에게 연실 박치기를 해댈 때마다 온 마을이 들썩거렸고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메달을 땄을 때는 집집마다 동시에 터져 나온 그 환호성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바보 영구를 흉내 내던 우리들을 조용하라고 하시며 슬그머니 눈가를 훔치게 만들었던 드라마 '여로', 그리고 '짜자자잔짜잔 -'하는 특유의 시그널송이 울리면 당연히 그 앞에 앉아 봐야만 했던 '수사반장'에 대한 국민적인 열광은 이 작은 TV의 위력을 어린 나이에도 실감하게 만들었다.

 

서랍장 속에서 TV가 밖으로 나오고, 그 TV를 자주 접하면서 우리 몸은 TV가 전해주는 매개된 감각에 점점 익숙해졌다. TV가 제공하는 시각과 청각에의 몰입은 여러 다른 감각들을 매개하기 시작했고, 때론 현실적인 감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어떤 사건에 공분하고 어떤 국가적인 쾌거(주로 스포츠에 이런 표현들이 많았다)는 TV를 통해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집단적인 도취감을 맛보게 했다. 개발시대의 한복판, 애국, 민족, 국가라는 단어는 TV가 애용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단지 머릿속에만 빙빙 도는 그런 단어가 아니라 TV를 통해 우리네 감각과 인식까지도 바꿔놓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TV는 여전히 흑백이었지만 '배달의 기수'에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라 이름 붙여진 자들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감각은 TV에 상당 부분 포섭되어 있었다.

컬러 TV와 리모컨, 안방극장 시대

80년대 서울로 전학 왔을 때, 나는 그 서울이 주는 속도감을 좀체 적응할 수가 없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던 나는 늘 비닐봉지를 준비해 갖고 다녔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인파가 물결처럼 파도치는 거리를 다닐 때면,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 속도감의 어지러움은 아마도 처음 내가 TV를 보았을 때 느꼈던 피로감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다. 여러 개의 프레임들에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영상의 속도감은, 도시에서는 이미 생활이었다. 그것도 총천연색의 생활.

 

80년대 컬러 TV시대가 열리자 그때까지 TV 속으로 무채색으로만 존재하던 세상은 색을 입기 시작했다. TV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그 신비감이 깨져버린 것은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명암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흑백 TV만의 독특한 아우라는 컬러영상 속에서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냄으로써 조금씩 휘발되었다. 컬러시대와 함께 광고들은 더 현란해졌고, 영상은 점점 대중화되었다. 우리의 눈은 점점 피곤해졌지만, 그것은 또한 속도의 시대로 진입하는 우리의 몸을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멀미로 울렁증을 앓는 시골소년이 더 이상 아니었다.

 

때마침 등장한 리모컨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광고들로부터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프로그램 전에 방영되던 수십 개에 달하는 광고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TV 앞으로 가서 드륵드륵 채널을 돌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리모컨의 등장과 함께 TV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그만큼 줄어들었고, 그것은 TV라는 물건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물건 속의 영상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TV는 꺼져있을 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거기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있다가, 비로소 켜짐으로써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 그런 영상이 되어갔다. 컬러 영상은 TV의 영상으로서의 존재감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었다.

6백만불의 사나이

그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채널을 바꿔주는 리모컨은 멀찌감치 놓인 소파와 한 세트를 이루면서, TV 시청을 새로운 여가문화의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에서부터 '게리슨 유격대', '맥가이버'에 이르는 미국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은 그 한참 후에 벌어졌던 미드 열풍처럼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거나 비디오를 빌려야 볼 수 있었던 당대에 '주말의 명화'는 안방극장이란 말을 탄생케 했다.가족들은 이제 대부분의 여가생활을 집에서 TV를 통해 하기 시작했다. 리모컨을 누가 쥐는가는 그 가족의 헤게모니를 누가 잡고 있느냐를 대변했고, 그것에 따라 가족들은 멜로드라마를 보며 울거나, 스포츠를 보며 열광하거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웃곤 했다. 오랜 시간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TV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고, 심지어 핵가족화되고 개인화된 공간으로 사라진 가족을 대리해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른바 '또 하나의 가족'이 된 것이다.

 

디지털과의 결합, 똑똑하고 움직이는 TV의 시대

80년대 후반부터 점점 보급되면서 거의 1년 주기로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는 디지털 시대를 예고하면서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컴퓨터 모니터는 점점 TV를 향해 진화했고 결국 이 두 지점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IPTV가 등장했다. TV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 즉 TV 하면 입을 반쯤 벌리고 머리는 텅 비운 채 수동적으로 앉아서 거기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있는 바보를 떠올리는, 그런 생각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제 자신이 보고 싶은 영상을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본적으로 몰입하게 하기 위해 투명한 창처럼 구성되던 화면은 이제 선택해야 할 아이콘들이 둥둥 떠다니는 마치 모니터 창과 같은 불투명한 창으로 바뀌었다. 이 '정신분산'의 메커니즘이 그래픽으로 구현된 창에서는 TV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고, 보다가 무언가 해야 할 다른 일이 생기면 화면을 멈춰놓을 수도 있었다. 물론 지나간 장면을 되돌려보면서 좀 더 분석적으로 TV를 바라볼 수도 있었다. 이 시대에 TV 방송이 드디어 비평의 대상이 된 데는 그 막강한 영향력에 대한 어떤 균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지털과의 결합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 분석적인 시선들은 또다시 인터넷을 통해 나누어지고 그 힘이 여론으로 모아져 TV가 독주하는 것을 견제했다. 디지털 시대의 TV란 이제 늘 대상으로서 시청자를 세워놓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시청자의 참여를 통해 집중되는 존재로 변모했다. 이른바 똑똑한 TV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블릿PC로 OTT 즐기기

그리고 드디어 로컬과 글로벌의 경계를 지워버린 OTT라는 TV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전 세계가 동시에 콘텐츠를 바라보는 지구촌 개념이 실현되는 이 공간은 우리에게 '글로벌 감각'을 훈련시킨다. 북미와 남미, 유럽,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콘텐츠들이 이 공간에는 한 자리에 위계 없이 채워져 있다. 물론 그 화면에도 우선순위는 존재하지만 그건 국가나 언어, 민족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구분에 따른 순위가 아니라,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용자의 취향에 따른 순위다. 언제든 국적 불문 내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내 앞으로 끌어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21세기 개인적 취향의 시대를 감각적으로 벼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문화의 공유지대는 아직은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전 세계의 정세들을 바꿔놓을 만큼의 물리적 힘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이 문화 공유의 경험들이 축적되면 언젠가 저 바깥세상의 풍경들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을까.

 

동네에 한 대 있는 TV를 보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그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면 지금은 실로 수없이 많은 TV들(화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벽걸이 TV와 작업을 하다가도 TV로 변신하는(?) 모니터, 언제 어디든 들고 다니며 간편하게 TV가 되는 태블릿 PC,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언제든 꺼내 TV를 볼 수 있는 스마트폰까지, 이제 생활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영상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똑똑한 TV의 시대에 이제 바보상자는 저 과거의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상을 선택하고 읽어내고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앞으로 생활이 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TV의 진화는 좀 더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줄 것이 분명하다. 그 진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TV의 눈을 우리의 눈으로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 갇혀있던 TV와 눈을 해방시켰던 그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TV를 좀 더 스마트하게 보고 그 의미를 읽어내고 그 안에 담긴 모종의 의도들을 찾아내는 눈이 필요해졌다.

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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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플레이어 원', 스필버그의 역발상에 감탄할 수밖에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면 이게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인가 싶다가 본래 이게 스필버그의 색깔이었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생각해보면 <죠스>나 <레이더스>, <이티>,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들이 가진 오락성과 특수효과 그리고 그 안에서 넉넉하게 느껴지는 유머까지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으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우리가 상상으로는 해봤을 지도 모르나, 실제는 일어나기 어렵다 생각했던 그런 놀라운 장면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이를 테면 카레이싱을 하는데 도로에서 갖가지 장애물들이 튀어나오고 심지어 도로가 움직이기도 하며 갑자기 튀어나온 킹콩이 있는 대로 차들을 두드려 부수는 그런 장면 말이다. 하지만 이건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다. 건담과 아이언 자이언트 게다가 처키가 동시에 한 영화 속에 등장한다는 건 캐릭터 마니아들이라면 상상이 현실이 된 듯한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해지는 건 그것이 게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는 남루한 현실과 병치되는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의 공간으로 아바타와 가상화폐가 사람들의 욕망을 한데 모아놓은 그런 곳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접속을 통해 더 많은 가상화폐를 모아 더 좋은 아이템을 가지려 한다. 심지어 아바타가 죽어버리면 실제 자살시도를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그런데 <레이 플레이어 원>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영화가 아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특유의 동화 같은 설정을 통해 디스토피아 속에서도 꿈을 좇는 영화다. 오아시스를 설계한 전설적인 제작자 할리데이가 세 가지 미션을 푼 자에게 이 세계를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유언으로 남기자, 모두가 그 미션을 풀기 위에 게임에 돌입한다. 주인공 웨이드 와츠는 오아시스를 지배해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거대기업에 맞서 순수하게 게임의 즐거움을 모두가 공유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머지않은 미래의 가상현실 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 안은 과거 대중문화들에 대한 향수와 추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의 게임 공간이기 때문에 이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스타크래프트>, <백투더퓨처>, <아이언 자이언트>, <킹콩>, <쥬라기 공원>, <스트리트 파이터>, <기동전사 건담>, <사탄의 인형>, <샤이닝> 같은 대중문화의 단편들과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이 게임 공간 속으로 소환된다. 

결국 영화는 미래 그것도 디지털 세상에 펼쳐진 가상현실의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거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었던 대중문화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들이다. 가상공간이지만 오아시스는 결국 할리데이가 머릿속으로 꿈꾸던 세상의 구현이다. 결국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그걸 만든 사람의 기억과 추억이 깃든 새로운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래라는 것이 결국 현재를 사는 이들이 어떤 기억들을 축적하고 공유하면서 꿈꾸느냐에 따라 그려지듯이.

“사실 속으로는 대중문화를 비웃고 있잖아.” 이 영화 속 게이머 웨이드 와츠가 이 세계를 돈으로 지배하려는 거대기업의 회장에게 날리는 일침 속에는 그래서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를 압축하고 있다. 스필버그는 오아시스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실감나는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중문화들의 편린들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대중문화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들이 우리의 삶을 채워주고 있고 돈벌이가 아닌 그 세계가 주었던 진정한 행복감이 어쩌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준다고.(사진 :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건반 위의 하이에나’, 음악 이젠 만드는 과정이 궁금하다

싱어 송 라이터들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낼까. 어쩌면 KBS 추석 파일럿 프로그램 <건반 위의 하이에나>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질문이 가진 효용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그건 제작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음악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늘 결과물로만 접했던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다. 

'건반 위의 하이에나(사진출처:KBS)'

그런데 제작과정이 싱어 송 라이터들마다 다 다르다. 특히 양분되는 건 이른바 20세기 소년들이었던 윤종신과 정재형의 제작방식과 21세기 소년들인 그레이와 후이의 제작방식이다. 윤종신과 정재형은 물론 디지털 피아노를 활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창작에 있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반면, 그레이와 후이는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디지털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작곡하는 정재형의 작업 풍경과 비트를 먼저 쪼개 넣고 그 위에 멜로디를 얹어 뚝딱 만들어내는 그레이의 방식은 그래서 음악 작업 환경이 최근 몇 년 간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보여준다.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마다의 방식이 갖고 있는 장점은 분명이 있다. 정재형의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곡들이 클래식한 느낌을 준다면, 그레이의 디지털 방식으로 나온 곡은 훨씬 트렌디하다.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에서도 흥미로운 차이점을 보인다. 윤종신은 곡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인생작이라는 영화 <길>을 보며 그 감성적인 영감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정재형은 곡을 완성하기 위해 양양으로 가 서핑에 몸을 얹으며 영감을 받는다. 반면 그레이는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영감을 받고, 후이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 장면이 주는 느낌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이런 저마다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곡들은 그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 정재형의 곡이 아날로그적 피아노의 우아함을 담아 세련된 발라드의 느낌이 얹어졌다면, 그레이의 곡은 어딘지 힘을 쭉 뺐지만 세련된 힙합의 맛이 물씬 묻어난다. 후이의 곡이 아이돌 특유의 다이내믹함을 매력으로 갖고 있다면 윤종신의 곡은 1990년대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찌질한 남성의 감성이 담긴다. 

사실 많은 음악예능들이 지겹게 느껴지는 건 그 프로그램의 형식과 구성이 이미 시청자들의 눈에 익어서다. 대충 우리는 그 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음악에 스토리를 구성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니 거의 오디션의 틀을 반복하는 음악예능이 제 아무리 맛있는 상을 차려내도 물릴 수밖에.

하지만 음악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제작과정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기존의 음악예능들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그것은 노래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새롭게 해주기 때문에 생겨나는 재미다. 

너무 많은 음원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런지 우리들의 귀를 스쳐가는 노래들은 그렇게 나왔다 사라지기 일쑤다. 그 음원들에 특별한 애착이 없다면 아무리 좋아도 귀에 달라붙지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는 너무 많은 아이돌들이 쏟아져 나와도 애착 없이 바라보면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프로듀스101>처럼 아예 그들이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봐야 비로소 달리 보이게 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건반 위의 하이에나>는 그런 점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시청자들을 동참하게 해 그 음악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봉준호와 GD, 혁신보다 중요한 건 대중들에 대한 배려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두 개의 풍경. 영화와 음원이 향후 어떻게 제작되고 또 어떤 경로로 유통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 두 개의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옥자>와 지 드래곤의 USB 앨범이 그것이다. <옥자>는 영화관을 통한 상영과 동시에 넷플릭스를 통한 전 세계 방영을 하게 되는 국내 최초의 영화가 됐고, 지 드래곤의 USB 앨범은 물론 이전에도 이벤트 성격으로 몇몇 아티스트들이 내놓긴 했지만 CD시대에서 USB 시대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뉴스룸(사진출처:JTBC)'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의 진입 속에서 두 명의 아티스트가 저마다의 혁신적 방식을 들고 나왔지만 그것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봉준호 감독이 기존의 시장이 가진 입장들을 대부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이 새로운 혁신적 방식을 추구했다면, 지 드래곤은 USB 앨범을 음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음콘협(한국음악콘텐츠산업협회)의 해석에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봉준호 감독은 멀티플렉스 3사가 <옥자>를 보이콧한 사실에 대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드러냈고, 자신 역시 “멀티플렉스의 수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지 않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또한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 자동차 극장까지 포함해 100여 곳에서 상영되게 되는 <옥자>가 오히려 멀티플렉스 이외의 극장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에도 “독립영화 코스프레”를 하고 싶지 않다며 다만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가 그간 잊고 지냈던 정겨운 극장들”이 알려지는 건 반갑다는 입장을 내놨다. 

반면 음콘협이 내놓은 입장에 대해 지 드래곤은 “누군지도 모르는 어떠한 사람의 결정에 따라 한 아티스트의 작업물을 그저 ‘음반이다/아니다’로 달랑 나뉘면 끝인가”라며 “LP, 테이프, CD, USB 파일 등 포인트가 다르다.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은 겉을 포장하고 있는 디자인적인 재미를 더한 그 형태가 아니라 그 누가 어디서 틀어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악, 내 목소리가 녹음된 바로 내 노래”라고 말했다.

대부분 지 드래곤의 이런 입장에 대해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지만, 그 USB 앨범이 음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링크’ 형태로 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대중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즉 음원이 아니라 링크로 되어 있다면 그저 음원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지 굳이 왜 USB 앨범을 살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고, 이어 링크 형태라면 ‘음이 유형물에 고정된 것’으로 정의되는 음반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넷플릭스 동시 방영이나 지 드래곤의 USB 앨범 같은 선택은 현재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화 소비 방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어쨌든 향후 우리의 대중문화 유통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적인 선택은 항상 기존 시스템과의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갈등에서 사실상 혼란을 겪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소비자인 대중들이다. 

혁신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받아 들여야 하는 대중들에 대한 배려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영화와 음원 시장의 두 풍경이지만,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건 바로 이런 혁신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겸손과 과신의 차이는 아티스트가 대중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그 태도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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