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선옥이, 엄마, 잘 있나? 이거 들리나? 어.. 엄마 비오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영월의 MBS 방송국에 라디오 DJ로 가게 된 최곤(박중훈)은 한때 스타였던 자신이 이런 곳에 있다는 게 너무나 싫다. 그래서 대충대충 방송을 하고 급기야 라디오부스에 다방 커피까지 시키는데, 김양(한여운)에게도 한 마디 해보라고 한다. “기억나? 나 집 나올 때도 비 왔는데 엄마 그거 알아? 나 엄마 미워서 집 나온 거 아니거든. 그때는 내가 엄마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지금 나와서 생각해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밉고 엄마만 안 밉더라? 그래서 내가 미웠어.” 갑작스런 엄마 이야기에 방송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방송을 듣던 영월 주민들도 숙연해진다. 비에 촉촉이 젖어가는 영월의 풍경들 위로 김양의 목소리도 점점 젖어든다. “엄마 나 비오는 날이면 항상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 해보거든? 근데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도 그 때 그 맛이 안나더라.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엄마, 엄마 보고싶어.”
한때 잘 나갔던 스타 최곤과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이야기를 담은 ‘라디오 스타’의 명대사는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로 주로 기억된다. 그 대사는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빛날 수 있게 하는 것도 그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어서다. 그런데 ‘라디오 스타’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김양의 에피소드다. 타지생활의 설움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든든한 내편. 명절이 좋은 건 그래서가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내 편 하나는 누구나 있다는 것. 함께 모여 부침개라도 부쳐 먹으며 마음을 나누길.(글:동아일보, 사진:영화'라디오스타')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가 하는 이 대사는 스타가 빛날 수 있는 게 무엇 때문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 스스로 빛나서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빛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빛난다는 것이다. ‘라디오스타’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게 스타를 빛나게 하는 존재로서 매니저 박민수를 말하지만,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최애인 유명 아티스트 류선재(변우석)를 빛나게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임솔(김혜윤) 같은 열성 팬들이라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선재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임솔이 선재를 되살리고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 더해져 15년 전 과거로 되돌아가고 그렇게 과거를 바꿔 현재의 비극을 막으려는 이야기가 바로 ‘선재 업고 튀어’이기 때문이다. 최근 타임리프 같은 판타지를 장치로 활용한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는데, ‘선재 업고 튀어’는 여기에 ‘팬심’이라는 강력한 동인을 소재로 끌어왔다. 최애와 팬의 사이가 그것이다. 팬이라면 최애의 비극을 막기 위해 뭐든 못할까.
‘선재 업고 튀어’는 이처럼 타임리프라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장르로 끌어왔지만, 그 비현실이 만드는 황당함 같은 것들을, 그걸 훌쩍 뛰어넘는 팬심으로 채우는 드라마다. 팬들이라면 심지어 가상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진짜처럼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을 다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선재 업고 튀어’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두 가지다. 임솔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선재에게 진심인가 하는 걸 믿게 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재가 임솔이 그렇게 최애할 정도로 멋지게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걸 소화해내는 연기력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선재 업고 튀어’는 그걸 성공시킴으로써 최근 시청률 급상승과 더불어 화제성에서 압도하는 드라마로 떠올랐다. ‘눈물의 여왕’이 방영 내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던 화제성을 그대로 이어받는 드라마가 됐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 5월 1주차 TV-OTT 드라마 화제성 조사결과 1위의 드라마로 등극한 것. 또 주인공 역할인 변우석과 김혜윤에 대한 화제성도 급상승해 각각 출연자 화제성 1,2위를 차지했다.
변우석이 출연자 화제성에서 1위로 떠오른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변우석은 2017년부터 다양한 작품들에 얼굴을 보였지만 두드러졌던 건 2020년 ‘청춘기록’을 통해서였다. 그 후로 ‘힘쎈여자 강남순’에서 악역을 선보였지만 생각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비로소 ‘선재 업고 튀어’로 현재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신인배우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변우석이 이러한 인기를 순식간에 얻게 된 데는 물론 그가 가진 매력과 노력이 우선되었기 때문이지만 김혜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보인다. 김혜윤은 임솔 역할로 변우석이 맡은 선재를 더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연기를 보여줬다. 가만 있어도 멋진 배우이긴 하지만 끝없이 애정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김혜윤의 몰입하게 만드는 연기를 통해 변우석이라는 배우에 입덕하게 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선재 업고 튀어’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래서 처음 팬심을 공감시키는 김혜윤의 연기에 빠져들고, 그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변우석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선재 역시 임솔을 처음부터 사랑해온 첫사랑 순애보의 주인공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선재에 대한 매력이 갈수록 커졌고 그건 고스란히 변우석에 대한 인기로 이어졌다.
김혜윤은 지금껏 해온 작품들 속에서,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좋고 그걸 표현하는데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는데다 명확한 딕션에 의한 대사 전달력 또한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래서 이번 ‘선재 업고 튀어’에서도 그렇지만 시시각각 감정 변화가 많은 연기에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곤 했다. 때론 소녀처럼 수줍어했다가 때론 명랑하고 때론 슬픔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런 다양한 감정 표현들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내는 저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김혜윤의 첫 주연작이었던 ‘어쩌다 마주친 하루’는 이러한 그의 역량이 온전히 돋보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만화 속 단역인 은단오와 자아를 가진 은단오 그리고 작가의 전작만화 속 은단오라는 1인3역을 연기했는데, 만화 속 세계를 그리고 있는 판타지의 난점까지 생각해본다면 이 작품이 김혜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 때도 김혜윤은 특유의 다양한 감정연기를 선보이면서 극중 상대역할들을 돋보이게 했다. 이 작품에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로운, 이재욱 같은 배우들이 그 후로 인기가 급상승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혜윤은 이제 27세의 나이지만 2012년부터 다양한 단역, 조연 등을 거치며 배우로서의 길을 넓혀왔다. 공식 데뷔작은 2013년 SBS에서 방영된 ‘TV소설 삼생이’로 그 후로 ‘야왕’,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한 가정부’, ‘왕가네 식구들’, ‘나쁜 녀석들’, ‘오만과 편견’, ‘펀치’, ‘닥터스’, ‘푸른바다의 전설’, ‘쓸쓸하고 찬란하시니 도깨비’ 등 다양한 작품들을 거쳤다. 꽤 유명한 성공작들이지만 대부분 단역을 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던 김혜윤은 2018년 ‘SKY 캐슬’을 통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이 작품을 연출한 조현탁 감독이 “김혜윤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설득시킨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는 드디어 주연으로서의 김혜윤이라는 배우의 역량을 분명히 보여줬고, 영화 ‘불도저를 탄 소녀’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제작협회상, 대종상, 들꽃영화상 등에서 신인여우상을 휩쓸었다. 아직도 교복을 입고 나오는 학생 역할에 어울릴 정도로 동안인데다 20대의 나이지만 연기 폭은 꽤 넓다. ‘SKY캐슬’과 ‘어쩌다 발견한 하루’ 그리고 ‘불도저를 탄 소녀’의 캐릭터가 모두 상이한데다 그 연기 색깔도 다르다는 점은 이 배우가 가진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혜윤의 페르소나가 특히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는 ‘라디오스타’의 대사처럼 연기도 삶도 앙상블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로 떠오른 건, 그 역시 함께 연기해온 배우들을 빛나게 해주는 그의 연기 덕분이었다. 타인을 빛나게 해줌으로써 자신 또한 빛날 수 있다는 앙상블의 힘을 김혜윤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도 없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최근 방송인 남희석은 SNS를 통해 MBC 예능 <라디오스타>의 김구라가 하는 방송의 방식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김구라의 방송태도가 게스트에 대한 '배려 없는 행동'이라고 했고 출연자들이 김구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구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라디오스타> 제작진이 나서서 "김구라는 무례한 MC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남희석의 공개 비판은 이례적인 일이다. 연예계에서 동료에 대해 어떤 불만이나 불편한 지점을 느낀다면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흔하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희석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된 건 그것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종업계 후배들과도 관련된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개비판 이후 남희석은 이 SNS의 글이 갑자기 쓴 게 아니라 "몇 년을 지켜보고 고민하고 남긴 글"이라며 "콩트 코미디하다가 떠서 <라디오스타> 나갔는데 개망신 당하고 밤에 자존감 무너져 나 찾아온 후배들 봐서라도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약자들 챙기시길"이라 덧붙였다.
그저 해프닝처럼 보이고, 워낙 연예매체에서 동네 싸움 구경하듯 자극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보도한데다, 남희석의 과거 흑역사 들추기까지 이어지면서 애초 비판의 초점은 상당부분 흐려졌다. 마치 그러는 자신은 누구를 비판할 수 있는 입장이 되냐는 식의 인신공격으로 흘러갔지만 남희석의 지적은 김구라로서도 한번쯤 생각해봐야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이건 <라디오스타>의 문제인지 아니면 김구라의 문제인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물론 <라디오스타>는 애초부터 김구라가 거의 상징적인 존재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인터넷방송으로 독설을 날리던 그가 '독설의 시대'를 맞아 지상파로 들어와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그 흐름은 <라디오스타>의 흥망성쇠와 거의 닮았다.
애초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에 살짝 발을 얹는 정도로 시작한 <라디오스타>였다. 10분 남짓의 방송시간 때문에 할 이야기도 별로 못하고 끝나기 일쑤였던 <라디오스타>는 바로 그 마이너정서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고, 대중적인 지지도 오를 수 있었다. 약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어서 보다 과감한 토크들이 가능했고, 시청자들도 그걸 허용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은 흘러 매체환경도 대중들의 정서도 상당부분 바뀌었고, <라디오스타>나 그 프로그램의 상징적 존재인 김구라의 위상도 바뀌었다. <라디오스타>는 이제 온전히 한 프로그램으로 자리했고 그것도 여기 출연하면 무명의 게스트가 단박에 스타로 등극하기도 하는 힘을 발휘했다. 김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상파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출연했고 <라디오스타>에서 그가 언급하고 심지어 독설을 퍼부은 연예인은 오히려 주가가 올라가는 기현상까지 만들었다. 그만큼 <라디오스타>도 김구라도 더 이상 약자가 아닌 권력자의 위상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비판이나 독설이 순기능을 가지는 건 그 대상을 권력을 향해 쏟아낼 때다. 정반대로 비판과 독설을 하는 이가 권력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건 정반대로 약자를 핍박하는 방식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남희석이 쓴 "약자들 챙기시길"이란 말의 뉘앙스가 새롭게 들린다.
김구라는 자신의 캐릭터인 독설과 비판을 여전히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위상도 바뀌고 그래서 대중들의 정서도 달라진 <라디오스타>에 여전히 어울리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할 필요가 있다. 유튜브에서 하는 <구라철>이나 한때 시사예능의 전면에 서 있었던 <썰전> 그리고 아쉽게 종영했지만 <막나가쇼> 같은 프로그램에서의 김구라는 여전히 핫하고 시원시원한 면이 있다. 그건 이제는 힘이 실린 그의 독설이나 비판이 합당한 대상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디오스타>는 어떨까. 낮은 위치도 아니고 한껏 기득권을 갖게 된 이 프로그램에서 이제 갓 신인으로 등장한 이들을 게스트로 초대해 놓고 홀대하는 김구라의 모습이 과연 시원함을 줄 수 있을까. 오래 방송이 지속되어오는 동안 시대가 바뀌었고 위상이 바뀌었다. 김구라와 <라디오스타>가 과거처럼 찰떡궁합이 되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사진:MBC)
이준익 감독의 신작 영화 <변산>은 ‘청춘 3부작’으로 불린다. 최근 이준익 감독이 만든 <동주>, <박열>에 이은 청춘의 초상을 담은 작품이란 의미에서다. 실로 <변산>에서 ‘심뻑’으로 불리는 래퍼 학수(박정민)의 낮게 읊조리다 점점 고조되고 나중에는 폭발하는 랩을 듣다보면 그 청춘의 단상이 녹아난 가사에 ‘마음으로부터 뻑이 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저 자신의 일상을 일기를 쓰듯 꾹꾹 눌러써서 만들어낸 가사지만, 그 안에는 이들이 겪는 상처와 그럼에도 넘어지기보다는 한바탕 욕이라도 해대는 그 마음의 절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을 두고 ‘청춘 3부작’이라고 지칭하는 말에 이의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변산>은 이준익 감독 영화 중 또 다른 특징으로 보이는 ‘음악’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 연작’이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라디오스타>가 노브레인 이성우를 출연시켜 인디 록 장르를 껴안았고, <즐거운 인생>이 락밴드 활화산으로 다시금 밴드 활동을 하는 아저씨들을 통해 밴드 음악을 담으려 했다면, <님은 먼곳에>는 베트남 전쟁에 남편을 찾아 떠난 순이가 위문공연단의 보컬이 되어 노래하는 장면을 통해 신중현의 이 명곡을 담았다. <변산>은 청춘의 이야기를 힙합 랩 가사에 담고 있다.
한때 주먹으로 유명했고 도박에 빠져 인생을 탕진해버린 아버지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학수가 변산인 고향을 등지고 자신은 ‘서울사람’이라고 고집하며 살아가는 데는 그런 아픈 과거사가 있다. 하지만 <쇼미더머니>에 6년 간이나 지원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신 학수는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 한 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고향은 여전히 떠나고만 싶은 지긋지긋한 곳이지만 고교시절부터 그를 짝사랑해왔던 선미(김고은)와, 그가 좋아했던 미경(신현빈) 그리고 어렸을 때는 자신이 그토록 괴롭혔지만 지금은 잘나가는 조폭이 된 용대(고준)를 만나면서 그는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고향 마을이 주는 느낌은 그가 고교시절 끄적여 두었던 ‘폐항’이라는 시의 두 줄 싯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흑역사로 지워버리고픈 고향은 그래서 어쩌면 청춘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닮아있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허세를 스웨그 삼아 살아가는 청춘들.
그런데 영화는 그 청춘들과 폐항으로 치부되는 고향을 다독여준다.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무덤가에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학수를 어느 날 귀갓길에 보게 된 선미는 그에게 빠져들고 노을에 빠져든다. 그래서 ‘노을마니아’가 되었고 그건 선미에게 또 다른 삶의 희망이 되어준다.
처음 고향에 내려왔던 학수가 본 친구들은 그리 멋지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과 잘 어우러지지 않던 학수는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고 힙합을 하고 있어 쓰지 않으려던 사투리를 조금씩 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처음 서울에서 만났던 촌스러워 보였던 고향 친구들이 차츰 저마다 정이 넘치는 인물들이라는 걸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그 친구들 대부분이 그 어떤 청춘들보다 빛나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된다. 하다못해 조폭이 된 친구마저.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 아마도 선미가 하는 이 말이 힘겨운 청춘들에게 또래 친구들이 던지는 메시지라면, 아버지가 학수에게 하는 “잘 사는 게 복수여”라는 말은 기성세대가 청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때론 너무나 화가 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을 선택하기도 하는 청춘들에게 진짜 복수는 ‘잘 사는 것’이라 말해주는 것.
무엇보다 이토록 진짜 래퍼처럼 랩을 하기 위해 노력했을 배우 박정민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변산>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그의 랩을 듣다보면 웃다가 울다가 뭉클해지게 된다. 또 구성진 사투리로 따뜻함을 선사하며 때론 빵빵 터트리는 김고은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준익 감독의 색깔이 늘 그렇듯이, 영화관을 나올 때면 뜨거워진 가슴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영화다.(사진:영화'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