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의 법칙'과 '바람에 실려', 이 예능이 보여주는 것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본래 리얼리티쇼는 일반인들이 출연해 그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사생활 노출에 대해 갖는 우리 대중들의 정서는 예민한 편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한창 리얼리티쇼가 붐을 이룰 때조차 우리네 방송은 쉽게 그것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일반인을 연예인으로 대체했고, 연예인의 사적이 부분들이 노출되지만 거기에 캐릭터쇼라는 안전한 가면을 씌웠다. '무한도전'이 성공한 것은 이 서구적인 리얼리티쇼의 형식을 우리네 정서에 맞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로 코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대중정서가 변한 것일까.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익숙해진 대중들이 이제는 좀 더 강한 리얼리티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최근 들어 리얼리티쇼가 심심찮게 방송을 타고 있다. '짝'이나 종영한 '도전자'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들 리얼리티쇼들에 대해서 대중들의 시선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적응되어 있던 대중들이 리얼리티쇼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리얼리티쇼와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보여주는 것도 다르고 보여주는 방식도 다르다. 즉 리얼리티쇼는 실제로 벌어진 상황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특정 가상 상황 속에서의 반응을 보여준다. 리얼리티쇼가 조금은 어두운 현실의 이면까지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면,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상황극이라는 설정 속에서 하나의 우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현실 자체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무한도전'이 그 안에 아무리 적나라한 얘기들을 꺼내도 그것은 결국 '도전'이라는 판타지로 귀결되는 안전함이 있다. 하지만 '짝' 같은 프로그램은 '결국 짝을 결정하는 건 스펙'이라는 식의 현실 그대로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건 최근 이 리얼리티쇼가 일반인만이 아닌 연예인으로까지 넓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임재범의 '바람에 실려'와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이다. 물론 이 두 프로그램은 리얼리티의 강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바람에 실려'는 그래도 예능의 틀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반면, '정글의 법칙'은 심지어 다큐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리얼리티에 더 천착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두 프로그램에서 임재범과 김병만은 우리가 음악 프로그램이나 개그 프로그램을 통해 봐왔던 모습과는 다른 실제의 모습을 포착해낸다는 점에서 리얼리티쇼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바람에 실려'에서 미국에 도착한 임재범이 즉석 공연 도중 음이탈을 한 후 갑자기 잠적해버리는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상황으로 임재범이라는 가수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존의 규범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진짜 '바람' 같은 성정이 보여졌고, 이것 때문에 당황해하고 화를 내는 다른 멤버들의 모습도 그대로 보여졌다. 하지만 그래도 예능의 유지하기 위해 임재범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연출해 넣은 것은 이 프로그램이 완전한 리얼리티쇼라기보다는 하나의 예능임을 고집한다는 뜻이다.

임재범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어쨌든 이 프로그램은 확실히 리얼 버라이어티쇼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대중들의 이 실제 모습으로서의 임재범에 대한 호불호는 엇갈린다. 이것은 프로그램에 대한 호불호로도 이어진다. 당연한 일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기대했던 시청자라면 이 리얼리티쇼 같은 부분이 불편했을 것이고, 리얼리티쇼를 기대했다면 어색한 예능적인 연출이 어딘지 맞지 않는다 여겨졌을 테니까.

새로 시작한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좀 더 리얼리티쇼에 가깝다. 김병만은 '달인'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가 아니라 김병만 자신의 얼굴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었다. 리키 김과의 팽팽한 갈등과 대립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 속에서 김병만이라는 인물이 가진 고집스러움도 동시에 보여졌다. 역시 대중들의 마음은 갈릴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은 상황극이나 콩트 속에서 대중들이 친숙하게 봐왔던 그런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극도 강하고 물론 역으로 리얼리티가 주는 감동도 커질 수 있다. 이것이 리얼리티쇼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연예인 리얼리티쇼는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효리가 출연했던 '오프 더 레코드' 같은 프로그램도 셀러브리티 다큐적 속성을 갖는 리얼리티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홍보적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과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정글의 법칙' 같은 리얼리티쇼는 확연히 다르다. 한 때 신비화되기까지 했던 연예인들은 차츰 리얼리티의 시대를 맞아 지상으로 내려왔고 그 맨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장점으로 부각된 캐릭터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이들은 이제 캐릭터가 아닌 진짜 얼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대중들은 그 진면목을 확인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여전히 판타지로서 연예인을 보고 싶어할까, 아니면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짝', 진짜 짝짓기 프로그램의 자극

'짝'(사진출처:SBS)

짝짓기. '동물의 암수가 짝을 이루거나, 짝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또는 교미하는 행위.' 이 단어는 사람들의 만남에 쓰이는 게 아니다. "짝짓기를 합니다" 흔히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듣는 단어. 그런데 우리는 남녀가 나와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마지막에 가서 커플이 되는 그런 프로그램을 '짝짓기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사실 의미 그대로 생각해보면 이 '짝짓기 프로그램'이라는 지칭 속에는 이 자극적인 성향에 대한 약간의 비판적 뉘앙스가 들어있는 셈이다.

'사랑의 스튜디오'나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 같은 예전 짝짓기 프로그램 속에도 일반인들의 사생활 노출이나 꺼내기 민망한 속내를 끄집어내는 자극적인 구석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에는 어떤 안전장치 같은 것이 있었다. 즉 프로그램은 물론 실제상황이지만 그 상황이 다분히 게임적인 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대한 '짝짓기'적 시각의 자극은 바로 이 게임처럼 다루어지는 틀로 인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게임이란 출연자들이 속내를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숨길 수 있는 도구도 됐던 셈이다.

하지만 '짝'은 다르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껏 본격적으로 지상파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리얼리티쇼'의 첫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얼리티쇼가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면서도 우리네 지상파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것은 그 일반인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는 그 정서가 어딘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짝'의 출현은 다큐멘터리로 시작됐다. 마치 남녀의 심리를 탐구하는 다큐처럼 애정촌에 일단의 남녀를 투입하고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약간의 분석적(?) 시각으로 만들어냈던 것.

하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리얼리티쇼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리얼리티쇼에 가깝다는 것을 '감지'했고, 그러자 아예 '짝'은 노선을 바꾸었다. 어느 정도의 논란을 감수하더라도(어쩌면 논란을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진짜 '짝짓기 프로그램'을 선보이려 한 것이다.

마치 해외의 도촬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처럼 애정촌에 남자들와 여자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하는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 카메라가 달라붙는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지극히 본능적인 욕망들이 그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노출된다. 일반인 사생활 노출이 갖는 자극을 극대화하는 것. 게다가 간간히 제작진은 그들의 속내를 끄집어내기 위한 미션을 부여한다. 이것은 남녀의 심리를 파악하겠다는 연구의 목적을 갖는다면 어떤 실험적인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자극으로 끄집어내 보여주겠다고 하면 노골적인 '짝짓기' 중계가 된다. 성행위가 없지만(해외의 리얼리티쇼는 이것도 보여준다), 구애행위를 하는 그들의 모습 역시 본능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큰 자극인 셈이다. 게다가 때로는 자극적인 속내를 꺼내기 위해 익명성을 장치로 사용하기도 한다. 쪽지에 각자 궁금한 점을 적고, 그것을 무작위로 뽑아서 남자를 세워두고 질문하는 건 그래서 대단히 자극적인 장치가 된다. 이런 미션에서, '속궁합'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건 그래서 놀랄 일이 아니다.

이름이 아니고 남자○호, 여자○호로 불리는 것은 분명 그들의 최소한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한 장치다. 또 가끔씩 거기 출연자들의 행위나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심리론을 덧붙이는 것도 자극을 유화시키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이것은 장치이자 명분이기도 하다. 진짜 '짝짓기'를 날 것으로 보여주기에는 아직 대중정서가 이를 용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당한 포장이 필요한 것이다.

'짝'은 자극적이다. 우리가 막연히 감추어놓았던 그 사적인 것들을 카메라가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적인 것들은 결혼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남녀 관계의 세계를 '짝짓기'의 본능적인 세계로 바라보게 만든다.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기 출연자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욕망을 대리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그들의 사생활이 벗겨지는 것은 또한 우리들이 숨겨놓은 사생활이 벗겨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만들어내는 논란은 끝이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본능을 바라보고픈 욕망도 커져가는 것이 사실이다. '짝'은 어쩌면 전통적으로 용인된 짝짓기 프로그램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 방송에는 좀체 들어오기 힘들었던 리얼리티쇼를 조금씩 중독시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짝'이 향후 점점 더 많아질 지상파의 리얼리티쇼의 첨병처럼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팬덤 문화 논란에 가려지는 실체, 표절 논란

‘MBC 가요대제전’의 오프닝 컨셉트가 스마프의 공연 컨셉트와 같다는 데서 불거져 나온 표절 논란은 MBC측의 “표절이 아닌 패러디였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유야무야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봐도 이해될 수 없는 패러디라는 면죄부는 결국 스스로가 자신에게 준 셈이다.

게다가 연달아 터져 나온 ‘무한도전’의 표절 논란으로 슬그머니 화제에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표절논란도 금세 방향을 틀어 ‘라인업’ 표절 논란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또한 잘못된 팬덤 문화와 결합하면서 ‘라인업’ 조작방송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치 정치적 사건들이 연달아 터질 때, 점점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져오는 것처럼 이 논란도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란 속에서 정작 논란을 제공한 제작진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는 점이다. ‘가요대제전’의 담당PD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로 침묵하고 있고, ‘무한도전’의 김태호PD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며 그 불똥을 경쟁 프로그램인 ‘라인업’으로 날렸다. “‘무한도전’ 컨셉트 자체를 따라하는 국내 프로그램은 ‘무한도전’과 경쟁한다고 하면서, 단지 몇몇 장면이 비슷하다고 ‘무한도전’은 표절이라고 말한다”고 했던 것.

이 인터뷰 내용은 ‘김태호PD 발끈, 무한도전은 표절이고 라인업은 경쟁인가’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기사에 대해 ‘라인업’의 박상혁PD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의 어디를 따라했는지를 해명하라고 하면서 “‘무한도전’의 표절 시비에 대한 해명을 하는데 왜 상대 프로그램을 걸고넘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공방의 양상을 보면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모두 표절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표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들 프로그램들에 대한 표절 논란이 인터넷을 들쑤시고 있는 것일까. 때지도 않은 굴뚝에 왜 연기가 나느냐는 말이다. 경쟁 프로그램을 무조건 비하하고 욕하는 일부 잘못된 팬덤 문화에서 나온 억울한 누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수긍할만한 이야기다. 현재 지나친 프로그램에 대한 비방이 오가는 이른바 '빠 문화’는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대한 제작진들의 대응은 그다지 시청자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표절이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분명한 해명을 하는 것이 그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보다는 납득할만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런 대응은 표절 논란을 뒤로 밀어버리고 문제를 잘못된 팬덤 문화로만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리얼리티쇼 전성시대에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보다 높은 신뢰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똑 부러지는 명료함이 있어야 비로소 의혹을 벗어내고 리얼리티쇼로서의 신뢰성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오락 프로그램들이 버젓이 해외의 프로그램들을 노골적으로 베껴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같은 공론과 검증의 장으로서의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을 너무나 잘 알고, 오히려 그런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PD들이 이런 정도의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그것이 실제 표절이든 아니든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여전히 과거의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한편 네티즌들은 수없이 쏟아지는 영상의 홍수 속에서 끝없이 유사한 영상들을 찾아낸다. 그것은 때론 실제 표절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한다. 물론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훌륭하고 놀라운 능력은 때론 비뚤어진 팬덤 문화와 만나면서 눈에 불을 켜고 경쟁 프로그램의 흠집을 찾아내는데 활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것의 진위가 드러나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리얼리티쇼 전성시대를 요구했던 네티즌들이 영상의 신뢰성에 극도로 민감한 반면, 표절이 나와도 패러디라 변명하며 덮어버리는 제작진들의 마인드는 상대적으로 둔감해 보인다. 이 간극이 결국 표절과 조작 공방의 밑그림을 제공한 셈이다. 모든 문제가 잘못된 팬덤 문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한도전’에서 ‘무릎팍 도사’까지

짐 캐리가 트루먼으로 나온 영화,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는 거의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트루먼의 샐러리맨으로서의 삶과 사랑은 그 자체로 드라마이며, 그가 술집이든 집이든 직장이든 누군가를 유쾌하게 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농담은 그 자체로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트루먼이 매력적인 것은 굉장한 스타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이 트루먼을 24시간 엿보는 것만으로 감동과 슬픔, 분노, 행복, 유쾌함, 웃음 같은 TV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게된다. 이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 TV가 변화하고 있는 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TV라는 가상의 세계는 점점 더 실재의 세계를 넘보고 있고 그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리얼리티’를 부르짖는다.

‘무한도전’, 쇼를 하라! ‘생(生)쇼’를 하라!
‘무한도전’이 ‘리얼버라이어티쇼’를 주창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면면히 방영되어온 리얼리티쇼의 새로운 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전 리얼리티쇼의 대부분은 이른바 사연을 보낸 시청자의 문제를 풀어주는 솔루션 리얼리티쇼였다. “이랬던 집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하면 와하며 놀라는 얼굴로 감동하는 사람들. 대표적인 솔루션 리얼리티쇼가 ‘러브하우스’였다. 이것은 국민공감프로젝트란 기치를 걸고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던 ‘느낌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루션 리얼리티쇼에서 연예인들은 도우미의 역할이었지 어디까지나 그 중심은 사연을 보내온 시청자들의 리얼리티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 와서 그 리얼리티는 연예인 당사자에게 맞춰진다. 유재석, 정준하, 박명수, 노홍철, 하하, 정형돈으로 구성된 연예인단에게 미션이 떨어지고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가감 없이(?) 담는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의도. 그간 오락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기획 연출된 재미에 질력이 난 시청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필요한 것은 던져진 상황에 따라 넘치는 끼로 재미를 만들어 가는 캐릭터이지 기획된 대본에 맞춰 대사를 읊는 출연자가 아니었다. 연출보다 중요해진 것은 순발력과 애드립이었다. 좌충우돌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져야 했기에 자막은 또 하나의 출연자가 되었다. 그 틀 안에서 여섯 명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트루먼처럼 생(Live, 生)쇼를 한다. 그 안에서는 유재석과 마봉춘 나경은 아나운서와의 열애사실 같은 개인적인 사생활도 가십처럼 쏟아져 나온다. 연예인의 리얼리티쇼라는 점에서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시 프로그램 안에서도 다루어진다.

리얼리티에 도전한 ‘무한도전’의 한계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저 트루먼처럼 날 것의(生) 쇼일까. 여기에 ‘무한도전’이 갖는 리얼리티쇼로서의 의미와 한계가 드러난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리얼리티란 진짜 개인으로서의 맨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실제 얼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그것이 실제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보통의 TV스타들이 당시 지향하던 신비주의의 반대방향으로 ‘무한도전’은 무한질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을 거쳐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과거와 달리 ‘굴욕을 당하는’ 현재의 캐릭터들로 만들어졌다. 그 굴욕은 도전이란 의미로 상쇄되고 그 도전은 반응을 끌어내면서 각자에 맞는 캐릭터가 창출되었다. 출연자들의 캐릭터는 끌어내려지면 내려질수록 리얼리티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문제는 ‘무한도전’이 인기를 끌면서 그 출연자들 역시 인기가 상승되었다는 데 있다. 인기를 얻기 전의 굴욕적인 모습들은 더 이상 ‘무한도전’ 속에서 다루어지기 어려워졌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이 리얼리티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자가당착이다. 무한도전은 이미 톱스타가 되어버린 캐릭터들의 리얼리티에 걸맞는 도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패션모델이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톱스타가 톱스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자 ‘무한도전’의 리얼리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청률 하락의 원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트루먼쇼화 되어 가는 TV의 모습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과도기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어쨌든 식상한 기획 프로그램을 넘어서기 위해 TV의 리얼리티라는 미션을 두고 벌인 ‘도전 한 판’은 성공적인 셈이다. 이제 그 바통은 ‘무릎팍 도사’가 이어받는다.

도사가 무릎 꿇린 연예인의 맨 얼굴
무릎팍 팍팍! 이 단순한 구호는 마치 주문 같다. 이 주문 앞에 연예인들이 그간 숨겨온, 혹은 숨기고 싶었던 맨 얼굴은 TV라는 마법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공개된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폭탄선언을 한 연예인들의 말들이 기사가 되어 뉴스를 장식한다. 쇼는 쇼일 뿐이라고? 적어도 ‘무릎팍 도사’의 경우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쇼는 바로 리얼리티며, 그 리얼리티는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의 일상처럼 연예인들의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기사거리가 된다. 현실과 쇼가 묘한 동거를 시작하는 곳, 바로 ‘무릎팍 도사’라는 코너다.

형식은 간단하다. 연예인이 도사 앞에 질문을 가지고 등장하고, 무릎팍 도사 강호동과 거만한 도사 유세윤, 그리고 올라이즈 밴드는 거침없는 질문공세를 퍼부어 출연자의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인터뷰 형식이 대결구도를 가진다는 점. 무릎팍 도사 측은 출연자가 얘기하지 않으려는 당혹스런 부분을 끄집어내 진실(?)을 밝히려 하고 출연자는 거기서 벗어나려 때론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론 공세를 취해 강호동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시도는 이미 ‘야심만만’을 통해 실험된 적이 있다. ‘야심만만’은 어떤 안건에 대하여 마치 설문조사를 하는 듯 포맷이 구성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질문들을 통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야심만만’은 질문 자체나 출연자를 영화나 드라마 홍보의 수단으로 만들면서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한없이 떨어뜨렸다. ‘무릎팍 도사’는 리얼리티 떨어진 ‘야심만만’이 갖고 있는 약점을 대결형식과 좀더 과감해진 질문, 그리고 인터뷰형식의 관건인 적절한 출연자 선정으로 보완한다. ‘연예인의 맨 얼굴 드러내기’라는 리얼리티쇼의 본질을 ‘야심만만’처럼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무릎팍 도사’, 연예인 탈신비주의와 손잡다
질문은 시청자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노골적인 질문공세는 마치 저 ‘제리 스프링어쇼’를 연상할 정도.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연예인들이 왜 무릎팍 도사의 부름에 기꺼이 출연해 무릎을 꿇는 것일까. 그것은 달라진 연예인들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다. 이제 연예인들은 더 이상 스타로서 저 하늘 꼭대기에만 있어서는 전혀 빛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의 스타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을수록 빛을 발했다면, 현재의 스타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여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연예인들의 스타로서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와 함께, ‘생얼’과 깨는 이미지의 ‘직찍사’가 유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는 연예인들의 신비주의가 이제는 위험한 이미지 관리방법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한몫을 차지한다. 누구나 손에 휴대폰이라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그렇게 우연히 찍힌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유포되는 세상에서 신비주의를 주창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온 새로운 전략은 신비주의와 탈신비주의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다. 이효리는 뮤직비디오와 스테이지 위에서는 섹시코드의 대명사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바로 탈신비주의로 돌아간다. 편안한 누나 같고 털털한 여자친구 같은 이미지를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가 ‘무릎팍 도사’와 거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무릎팍 도사’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또한 달라져야 하는 연예인의 탈신비주의 전략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는 누구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털털한 보통사람이 되는 마법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과거 방송을 통해 어떤 문제를 일으켰거나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들은 기꺼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감췄던 그 문제를 오히려 들추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릎팍 도사’는 살벌한 질문들을 통해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한바탕 살풀이를 하게된다. ‘무릎팍 도사’의 복장과 캐릭터 설정이 신기 오른 무당을 표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살풀이를 하는 기능과도 맞닿는다.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그런데 TV 속에서 벌어지는 이 살풀이는 그저 쇼가 아니다. 다음날이면 대문짝만하게 인터넷을 장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 역시 저 ‘무한도전’이 그러했듯이 연예인들의 실제 맨 얼굴이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청자와 연예인이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것은 리얼리티가 된다.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속의 출연자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해 그들의 인기상승과 함께 프로그램의 인기하락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진 반면, ‘무릎팍 도사’는 매번 외부인물을 끌어다가 인터뷰 배틀이란 형식으로 외부 출연자의 리얼리티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고정 출연자에게 있다.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하는 질문이 과연 진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해명을 위한 질문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후자로 가게된다면 이 트루먼쇼는 가짜임이 판명날 것이고 그 결과는 저 ‘야심만만’이 가게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TV는 더 이상 그저 그 앞에 사람을 멍한 표정으로 앉혀놓는 상자가 아니다. TV 속의 ‘난장이들’은 이제 현실세계로 빠져나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화면 속에 비춰지는 세계는 화면 밖의 세계가 되었다. 쇼가 일상이 되었다는 걸 알리듯 TV는 소리친다. 쇼를 하라! 생쇼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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