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 논란의 최대 피해자는 김병만이다

 

공든 탑도 무너진다. 심지어 땀으로 차곡 차곡 쌓아놓은 탑이라고 할지라도. <정글의 법칙>의 계속되는 논란과 그로 인해 눈물 흘리고 있는 김병만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김병만은 과연 무슨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우리에게 진짜 ‘달인’으로서 개그를 훌쩍 뛰어 넘는 그 땀과 노력에 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그였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또 정글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나나를 따 먹고, 나무를 해서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배를 띄우고, 통발로 잡은 물고기로 라면 스프 넣은 어죽을 해서 멤버들과 나눠 먹었던 그였다. 콩가 개미에 물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도 촬영을 강행하려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렇게 하나 하나 땀으로 세워놓은 자기만의 세계가 한 순간에 거짓으로 매도당하게 되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병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 매체가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양 폭로한 것처럼, <정글의 법칙>에 등장했던 많은 장소들은 관광 상품으로도 존재한다. 사실 그 어느 오지라고 하더라도 관광 상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히말라야도 그렇고 사하라 사막도 그러하며 툰드라 지대라고 그렇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상황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 상품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다만 관광 상품으로 가는 것과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낯선 길을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관광 상품이 있는 루트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처음 가는 이들이 스스로 겪게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를 수 있다. 사전에 그 길이 어떤 것이든 가보지 않은 김병만으로서는 그 낯설고 뭐든 개척해가야 할 길이 진짜 힘겨운 길이었을 게다.

 

‘관광 상품’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너무 포괄적이며 자극적이다. 마치 <정글의 법칙>이 지금껏 지나온 길들이 그저 돈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그것도 관광이니 즐길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다)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오지를 체험하는 여행과 도시 여행은 다르고, 군대 체험과 시골 체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 그 여행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꾸리고 계획하느냐에 따라서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저 ‘관광 상품’이라는 표현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의도적이고 자극적인 행위다. 특히 김병만이 영상에서 보여줬던 때로는 피가 나고 때로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위험천만했던 상황들이 모두 조작이며 ‘관광 상품’ 체험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 과한 일이다.

 

김병만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한 죄밖에는 없다. 죄가 있다면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100% 리얼을 강조했다는 것일 게다. 아무리 수사적인 의미라고 하더라도 김병만이 말한 것처럼 카메라가 돌아가는 데서 100% 리얼이란 있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수많은 리얼을 표방한 프로그램들이 리얼리티 논란을 겪는 이유이기도 하다. 논란은 그것이 100% 리얼이 아니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굳이 100% 리얼이라고 강조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제작진들은 리얼을 강조함으로써 영상의 실감과 자극을 높이려는 목적이지만 이것은 때론 부메랑처럼 돌아와 리얼리티 논란으로 불거지곤 한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도 리얼리티 논란을 겪은 적이 있고 실제로 일부 장면에서는 재연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전에 이미 ‘생존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재연된 장면도 일부 있습니다’ 같은 자막으로 설명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이런 어느 정도의 연출이 없이 모든 걸 말 그대로의 리얼로 찍는다면 그것은 안전성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을 시청률을 위해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윤리적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 실감 그대로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에서도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흔히들 이렇게 묻는다. 100% 리얼이 아닌데 왜 정글에 가는 걸까. 이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리얼 자체가 아니라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은 사전 자막 고지에 들어 있는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생존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 목적에 부합하고 효과적이라면 재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목적을 보지 않고 리얼이 주는 자극을 먼저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정글의 법칙>의 목적도 리얼 그 자체가 아니다. <정글의 법칙>은 도시를 벗어나 정글이라는 상황 속에서 생존을 넘어선 공존의 의미를 찾아보는 목적을 갖고 있다. 원주민과의 만남은 그들이 문명과 이미 접촉한(대부분이 그럴 것이지만) 이들이라고 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풍습들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어떤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에 더 의미가 있었을 게다. 이 의미를 보지 못하면 결국 자극만 남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얼 공방 속에는 자극에 대한 제작진과 시청자 사이에 놓여있는 모종의 약속이 깨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정글의 법칙>의 가장 큰 잘못은 연출이 가능하고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프로그램을 통해 사전 고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제 아무리 다큐와의 접목을 추구했다고 해도 결국은 예능 프로그램의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예능은 어떤 식으로든 특유의 스토리텔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자막은 상황을 좀 더 극대화시키고 편집은 아무런 의미 없어 보였던 행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재미를 추구하는 예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매번 리얼리티 논란이 나올 때마다 먼저 드는 느낌은 달을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리얼리티냐 아니냐는 자극의 틀은, 결국 제작진으로 하여금 100% 리얼처럼 보이려는 비뚤어진 욕망을 만들어내고, 시청자로 하여금 그 욕망만을 소비하게 만든다. 리얼리티 논란 속에서 <정글의 법칙>이 가졌던 본래의 좋은 기획 의도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으로 의도치 않은 피해를 보게 된 건 바로 김병만이라는 사실이다. 제작진이 사전에 준비해놓은 정글 속이라고 해도 김병만이 그 속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제아무리 편집되고 연출된 영상이라고 해도 이미 대중들이 방송을 통해 무수히 봐왔던 것들이다. 결국 그렇게 찍은 영상을 요리하는데 있어서 생겨난 문제라면 그것은 제작진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정글2>, 그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결합

 

<정글의 법칙2>가 보여주는 자연은 이중적이다. 한없이 맑은 하늘과 점점이 떠다니는 구름,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 모래사장, 신비롭게까지 여겨지는 블루 톤의 호수(블루홀)나 태곳적 신비를 머금은 듯한 동굴까지. 막연히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판타지가 된다. 저런 곳이라면 한번쯤 고생이라도 각오하고 싶은 그런 판타지.

 

'정글의 법칙2'(사진출처:SBS)

하지만 이 판타지 너머 제작 현장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살 떨리고 멘탈 붕괴가 일어날 정도로 힘겨운 야생 그대로의 리얼리티가 있다. 어떤 이는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저 간단하게 보이는 강물 건너기조차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비를 머금은 진창은 그잖아도 천 근 만 근 같은 발목을 척척 감아쥐고,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는 위험 앞에 몸은 극도로 긴장하게 된다. 당장 배고픔과 추위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끈적거림 속에서 판타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즉 TV 화면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그만한 거리가 존재한다. 시청자들이 편안하게 심지어 판타지를 느끼는 그 장면들 속에서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은 엄청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정글의 법칙> 시즌1과 시즌2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이 대비효과가 훨씬 강해져 있다는 점이다. 시즌1이 적응단계였다면 아마도 시즌2는 프로그램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적응기를 지나 진화단계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정글로드에서 보석처럼 발견한 블루홀마저 신비의 말말부족을 찾아가는 이들에게는 건너야 할 강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넝쿨을 이어 강 양쪽에 묶고 한 사람씩 건너는 장면은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정글의 법칙2>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망중한(忙中閑). 그 고달픈 여정 위에서 잠시 나마 어린아이들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 타잔처럼 물 속으로 다이빙을 하거나, 넝쿨을 잡고 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별 것도 아닌 듯한 장면은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도시를 정글로 표현한 많은 이들이 그 생존경쟁의 장에서 탈출을 권하지 않았던가. 그 살벌한 공간을 잠시 떠나 취하는 여유는 그래서 모든 도시인들의 판타지가 되었다. 자신이 버는 월급 만큼의 돈을 들여서라도 단 며칠의 휴가를 계획하는 건 그 짧은 나날이 길디 긴 정글에서의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글의 법칙2>의 이지원 PD는 정글이 주는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그 곳이 주는 완벽한 편안함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도시에서라면 잠들기 전까지 별을 세다가 잘 수 있겠어요? 수시로 전화벨이 울리고 내일 아침이면 해야 할 일들에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잠도 잘 못 자는게 현대인들의 생활이잖아요. 그런데 <정글>에 가면 달라져요. 오로지 생각이 먹을 것과 잠잘 것 같은 원초적인 것들에만 머물러 있죠. 몸은 조금 피곤해도 머리는 한없이 맑아집니다."

 

바로 이 점이 <정글의 법칙2>에 대해 우리 같은 시청자들이 느끼는 양가감정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혹독한 정글이 주는 현실감에 몸서리치다가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는 판타지.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존재들은 바로 출연자들이다. 만일 정글이 주는 혹독함에 매몰되어버리면 그것이 살풍경한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혹독함 속에서도 늘 여유 있고 심지어 웃음을 주려고 노력하는 김병만을 위시한 그들의 모습은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핵심적인 가치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도시의 정글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잠시 동안이지만 숨 쉴 수 있는 여유로서 <정글의 법칙2>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지지 않을까

'더 로맨틱'(사진출처:tvN)

감미로운 음악, 이국적인 풍경, 달콤한 속삭임, 기적 같은 만남... 도대체 우리를 그토록 로맨틱하게 만드는 건 뭘까. 때론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하고, 현실과는 유리된 사람처럼 실제적인 시공간의 차원을 잠시 떠나버리는 이 로맨틱한 상황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놀라운 화학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신개념 러브 리얼리티쇼 tvN의 ‘더 로맨틱’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카메라에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으로 담겨질 때다.

터키.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인지 그 오묘한 풍광처럼, 이질적인 두 존재가 만나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합치점을 찾아내기엔 가장 적합한 장소처럼 여겨지는 그런 곳으로 열 명의 남녀가 여행을 떠나는 건 바로 그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비현실적 경험’ 즉 로맨틱한 상황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돈과 삶과 생존과 생계 속에서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왔던 그것. 그래서 때로는 바라보는 것마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바로 그것. ‘더 로맨틱(The Romantic)'을 찾아서.

영화나 드라마 속 로맨틱한 만남의 장면 중 하나를 선택(이른바 ‘취향셔플’로 불린다)하고 같은 선택을 한 이와 똑같은 설정으로 떨리는 첫 만남을 갖게 하는 건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인 셈이다. 아마도 서울이라는 생계의 공간에서 살아오면서 그 남녀들은 비행기 안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나, 낯선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경험,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감정으로 서 있는 곳에서 단 둘만이 온전히 같은 음악으로 연결되는 로맨틱한 체험, 거리에서 전화기 저편에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찾아 나섰던 그 설렘 같은 ‘비현실적’인 감정들은 잊고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로맨틱한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입구에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이 오리엔테이션처럼 자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로맨틱을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 영화와 드라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그저 비현실적인 것일까. 그래서 영화 속의 또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대리해주는 것을 통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더 로맨틱’이라는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누구나 그런 이국적인 공간과 이색적인 시간들 속에 던져지면 갖게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 그것이 바로 ‘더 로맨틱’이다. 잠시 간의 눈 맞춤과 몇 마디의 대화, 그리고 슬쩍 스치는 손끝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로맨틱해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 그러니 왜 당신은 ‘로맨틱’한 감정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 한 땀 한 땀 로맨틱한 순간들로 직조된 영상들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연애와 신혼의 로맨틱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마치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그 로맨틱한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내게 만드는 이 놀라운 프로그램의 도발은 그래서 그 자체로 도전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도대체 누가 현실적인 것만을 강요했는가.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그 강요를 몸에 각인시켰던가. 아니 그 누가 이것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했던가. 한참을 바라보다보면 ‘나도 저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고,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 감정의 상자를 다시 끄집어내 떨리는 마음으로 열게 만드는 그런 경험.

카메라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포착될 수 없었던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도 이제는 영상 속에 담겨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리얼한 영상이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로맨틱한 순간들’을 발견하고 끄집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그래서 이 비현실적 시공간 속에 놓여진 남녀들의 화학작용이 지극히 현실적인(리얼한) 것이라 여겨질 때 그것은 마치 기적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질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더 로맨틱한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전하는 프로그램, ‘더 로맨틱’이다.

리얼 예능에서 설정이 가진 힘과 한계

때 아닌 참돔 하나가 '패밀리가 떴다'를 논란에 빠뜨렸다. 김종국이 아침식사를 위해 낚시를 하다가 잡은 20만 원 상당의 참돔이 조작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청자들의 단순한 의문부호에서 시작됐다. 초보자가 이처럼 거대한(?) 참돔을 잡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의견이었지만 이 이야기는 차츰 조작이 아니냐는 방향으로 커졌고, 여기에 대해 '패떴'측은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며 부인했다. 하지만 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잠수부가 미리 잡은 참돔을 끼워줬다"는 한 블로거가 쓴 우도 여행기로 인해 상황은 일파만파로 커져버렸다.

'패떴'측은 그런 일은 절대 없었고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이 블로거의 글이 '패떴' 우도편이 방영되기 4일 전인 21일에 발행되었다는 점, 참돔은 본래 잘 잡히지 않고, 김종국이 잡은 참돔에 낚싯바늘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끼워졌다는 점을 들어 방송조작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모 매체에서는 "그 날 바다 속에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우도 현지에 있는 다이빙 업체와의 전화통화 내용을 기사화했다. 이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참돔의 등지느러미가 또 논란이 되었다. 화면에 포착된 김종국이 잡은 참돔에 등지느러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참돔 한 마리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 지느러미까지 비교하게 되는 정도까지 커져가는 것에는 좀 과도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사건의 진위가 어떻든 김종국이 20만 원 상당의 참돔을 잡은 것이 이 프로그램에 얼마나 이득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우연히 잡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패떴' 우도편을 살릴 만큼 커다란 사건이라고 보기 어렵다. 참돔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들과 그다지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그 정도의 무리수까지 띄워가며 조작을 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돔 논란은 방송 내용으로 보자면 지엽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패떴'의 열혈 시청자가 아니라면 때 아닌 참돔 논란은 우스개처럼 여겨질 정도로 과도한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참돔 논란의 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논란이 이렇게 일파만파의 상황으로 커져가게 된 사정에 있다. 즉 '패떴'이 지금껏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일련의 모습들이 참돔 논란을 키운 원인이라는 점이다.

'패떴'은 지금껏 그것이 리얼이냐 아니냐가 늘 도마 위에 올려지곤 했다. 대본의 존재는 물론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패떴'의 주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설정을 통한 상황극이 가진 한계다. 상황극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도 흔히 보는 것이고, 또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의 과도함은 의도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상쇄시키기도 한다. 처음부터 야생의 리얼을 주창하기보다, '패떴'은 인물들과 관계가 주는 웃음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설정을 통한 상황극이 주는 웃음은 반복을 거듭하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다. 즉 상황극이 자꾸 의도적인 느낌을 주게 된 것이다.

'패떴'에 갑자기 불어 닥친 참돔 논란은 그 자체보다도 이 프로그램이 지금껏 보여준 상황극 예능의 양상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최근 들어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은 무언가 웃음을 주기 위해 강박적으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그저 내버려두고 바라보는 것으로 되도록 자연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자의 자격'이나 '천하무적 야구단', 또 '청춘불패'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큰 웃음에 집착하기보다는 소소한 리얼함으로 호평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근 들어 관계가 주는 상황만큼 새벽일을 두고 벌이는 게임에 더 주력하는 것은 '패떴' 역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패떴'의 참돔 논란은 과도하다. 하지만 그 과도함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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