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특강을 요청 받아서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데, 그 곳을 굳이 가야할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한국의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나를 불렀다는 건, 그 곳에도 한류 열풍이 있다는 걸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곳에서 환대해준 러시아 한국어 교수들(행사에 심사를 맡은 러시아안들이다)은 유창한 한국어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빗대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농담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전쟁과 평화’ 중입니다. 전쟁 중이라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우니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그저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깊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푸쉬킨 같은 대문호를 가진 자부심이 대단한 그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한국의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김호연 작가의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한국 소설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통해 당시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 중에는 사도세자 이야기나 정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들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도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고 소설을 보게 됐다고 했고, 정조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룬 ‘이산’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한국어가 통번역이 특히 어려운 언어라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앞부분에 하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뒤에는 수식어를 붙이는 방식이라 동시통역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는 마지막 한 마디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모두 뒤집을 수 있어서 끝까지 들어야 겨우 통역이 가능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그래서 이제는 그 관심이 먹거리부터 패션, 여행 등등 한국문화로까지 옮겨가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멋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을 로케이션으로 작품을 찍는 외국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리우면 골목 하나도 다 그림이 된다는데,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글의 아름다움이다. 한국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 가사 그대로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작품 자체의 뛰어난 성취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흐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놀라울 정도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그 과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약 40년 간 한 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인류 문명사의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며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 후 반공국가, 경제발전, 민주화, 사회정의와 인권을 차례로 요구해온 대한민국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각각의 욕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존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내는데, 콘텐츠들이 이걸 다양하게 담아냄으로써 보다 폭넓은 글로벌 공감대가 가능해졌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여전히 성장서사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지만, 동시에 양극화 문제가 고도화된 서구권 국가들은 이 문제들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콘텐츠들이 인기를 끈다. 한국은 실로 성장과 분배, 경쟁사회에 대한 애증, 속도와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러한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아픔과 상처들을 온전히 자신 속으로 끌어안아 문학으로서 품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은 이야기지만, 저마다의 욕망의 단계에 따른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 세계인들 또한 공감하게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한강 작품들은 국내 출판가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수상 이후 닷새간 종이책만 97만2천부가 팔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을 모두 한강의 작품이 채웠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국내 출판가에도 기대감을 만드는 모양새다. 최근 ‘텍스트 힙’이니 ‘독파민’이니 하는 새로운 독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지금이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쏠림현상이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변을 넓힐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시대의 압축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면, 최근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한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을 기대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깊이가 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기를. (글:이데일리, 사진:Nobel Prize)

'날씨가 좋으면', 이 시국에 시골 힐링 멜로에 더 눈길 가는 이유

 

"겨울이 와서 좋은 이유는 그저 한 가지.
내 창을 가리던 나뭇잎이 떨어져 건너편 당신의 창이 보인다는 것.
크리스마스가 오고, 설날이 다가와서 당신이 이 마을로 며칠 돌아온다는 것."

 

JTBC 월화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북현리 굿나잇 책방을 운영하는 임은섭(서강준)의 목소리로 목해원(박민영)에 대한 그의 마음을 담는다. 책방 창가에서 버드나무 가지 너머로 보이는 호두하우스. 그 곳이 서울살이에 지친 목해원이 도망치듯 떠나와 지내게 된 그의 이모네 펜션이다. 추운 겨울 그는 큼지막한 트렁크를 끌고 북현리의 굿나잇 책방을 지나 호두하우스로 오르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의 마음도 겨울이었다.

 

그가 언덕길에 나타났을 때 임은섭은 겨울철 논을 얼려 운영하는 부모님의 스케이트장에서 그를 봤다. 아닌 척 애썼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목해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딘가 춥디 추운 계절을 마음 한 구석에 숨기고 살아온 듯한 목해원을 은근히 따뜻하게 데워주는 임은섭은 녹여낼 수 있을까. 겨울을 버티는 버드나무에 봄볕이 내려앉듯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드라마다. 굿나잇 책방이라는 카페 겸 책방이 떠올리게 하는 감정들이 그렇고, 거기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를 낭송하는 모임이 그러하며, 늘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살아가는 한 때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모 심명여(문정희)의 미스터리한 신비감이 그렇다.

 

물론 목해원과 임은섭이 함께 가게 된 동창회에서 만나게 돈 이장우(이재욱) 같은 친구들과의 유쾌한 시간들과, 은섭을 “야”라고 부르며 친구처럼 대하는 동생 임휘(김환희) 같은 발랄함과 가족애가 뚝뚝 묻어나는 은섭의 부모 임종필(강신일), 윤여정(남기애)의 따뜻함이 드라마에 부여하는 기분 좋은 느낌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이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드라마를 더더욱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포인트들을 살려 연출해내는 한지승 감독의 영상이다. 추운 겨울의 바깥 풍경이 스산함을 부여할 때, 굿나잇 책방에서 따뜻한 커피를 내려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대비효과 때문에 차가움과 따뜻함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저절로 마음이 열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홀로 굿나잇 책방을 지나 호두하우스로 걸어 올라갈 때의 목해원이 추운 겨울 홀로 걸어가는 쓸쓸함을 차갑게 담아낸다면, 어두운 밤 손전등으로 목해원이 가는 길을 따라 배웅하며 함께 걸어가는 임은섭의 장면은 가로등마저 따뜻한 느낌으로 영상에 담긴다. 비 내리는 밤 풍경의 스산함 다음에 문 두드려 들어가게 된 굿나잇 책방의 커피 한 잔이나, 그 손님 없는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랍시고 홀로 고적하게 책을 읽다 문득 창문을 열었을 때 왈칵 다가오는 바깥 저편 스케이트장에서의 소음들은 시청자들의 감성을 건드린다.

 

이런 영상 언어들이 주는 감정을 건드리는 감각적 연출들은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문학적 감수성을 배가시킨다. 아마도 도시에서 번잡하게 버텨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의 한적함을 보며 어떤 위로를 받지 않을까. 그것은 한적해보여도 거기 담겨지는 마음과 감정들이 영상 언어를 통해 충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봄은 성큼 다가왔지만 마음은 스산한 겨울이다. 이런 시국에 드라마에 눈이 갈까 싶지만,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의 다소 고적하고 정적인 풍경 속에서의 편안함과 아늑함, 그리고 따뜻함은 그 자체로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는 면이 있다. 임은섭이 책방 이름을 ‘굿나잇’이라 붙인 이유로 제시된 고교시절 그가 써놓은 글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잘 자는 건 좋은 거니까. 잘 일어나고 잘 먹고 잘 일하고 쉬고 그리고 잘 자면 그게 정말 좋은 인생이니까. 그러니 모두 굿나잇.’(사진:JTBC)

‘미스터 션샤인’의 독특한 정조는 문학적 코드에서 나온다

김은숙은 문학적 코드들을 작품 속에 담는 걸 즐기는 작가다.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하지원)에게 사랑을 느끼는 김주원(현빈)이 읽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대표적이다. 김주원은 독백을 통해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며 자꾸만 끌리는 길라임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 문학적 코드를 활용해 드라마에 담아낸 바 있다. 

또 그 작품에서는 길라임을 향한 김주원의 마음이 그의 서재를 채운 시집의 제목을 통해 다뤄지기도 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김성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황인숙),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황동규), 가슴 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홍영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진동규)’의 문구가 그것이다. 문학작품이 가진 그 특유의 진지함이 드라마의 상황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정조를 그려냈다.

이러한 문학적 코드의 인용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시집을 읽는 김신(공유)이 문득 “아저씨”를 외치며 달려오는 지은탁(김고은)을 보며 읊조리는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 그것이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업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꿈꾸는 문학적 상징들은 이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분위기 있는 개화기 ‘하오체’와 엮어지면서 독특한 정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에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다 그리 살던데”라며 유진 초이(이병헌)가 애신(김태리)이 선택한 의병으로서의 삶을 안타까워하자 애신이 하는 답변이 그렇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요.”

또 유진 초이가 애신에게 자신이 노비임을 밝히는 장면 역시 문학적 코드들이 대사와 연출을 통해 들어가면서 아련한 느낌을 만들었다. 도요지를 찾아가던 길에서 처음 같은 배에 동승했던 그들이 한 겨울 꽁꽁 언 그 얼음 위를 함께 걸어가는 장면 자체가 그렇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신분의 벽이 가져올 관계의 위태로움을 살얼음판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유진 초이가 던지는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라는 대사는 그 상징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절절함이 더해졌다. 

이 드라마에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는 행위는 그들의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같은 대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유진 초이가 편지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하는 마음은 그래서 그 시적인 ‘동행’의 의미가 더해져 독특한 시대적 정조를 그려낸다.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 나에겐 다시 없을 순간이라 지금이.”라는 애신의 말에 유진 초이는 편지에 ‘하마터면 잡을 뻔 했습니다. 걷자고, 저기 멀리까지만, 나란히. 조선에서 전 저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저기로, 저기 어디 멀리로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라고 적는다.

애신이 스스로 ‘불꽃’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을 때도 유진 초이는 편지에 적는다.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함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새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어색할 수 있을 이런 다소 문학적인 대사들이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마주하며 그 시대가 겪은 처연한 정조까지를 담아낸다. 김은숙 작가의 세계가 훨씬 깊은 감정적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사진:tvN)

정현종에 이은 도리스 레싱, ‘이번 생은’이 품은 문학들

드라마에 문학이 더해지자 그 울림이 커진다.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인용해 남세희(이민기)와 윤지호(정소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는가를 보여준 바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구가 어쩌다 계약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살게 된 두 사람의 우연적 만남이 사실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걸 암시해줬던 것. 

그리고 이번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드라마에 울림을 더했다. 윤지호가 20대에 읽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소설 속에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결국 모텔을 찾게 된 주인공이 그게 들키자 바람을 피웠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처음부터 현실적인 문제로 내세웠던 집, 즉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생각을 이만큼 환기시켜주는 작품도 없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당신의 방은 처음이라’라는 부제를 갖고 저마다 가진 19호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남세희와 윤지호는 같은 집에 살지만 서로의 19호실을 지켜주며 살아간다. 그것은 계약결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께 지내는 것과 혼자 사는 것 사이에서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양가적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남세희와 윤지호는 처음으로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청하고 그것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또한 자신만의 19호실을 버릴 수가 없다. 

마침 윤지호에게 드라마 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작사의 제안이 오자 그는 더 이상은 글을 쓰지 않는다며 그 이유로 “결혼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윤지호는 이내 느끼게 된다. 그렇게 결혼 핑계를 대는 것이 자신 안에 있는 19호실을 부인하고 안주하려는 것이라는 걸. 남세희는 결혼이 윤지호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결혼을 했지만 그의 19호실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걸크러시의 면면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듯 보였던 우수지(이솜) 역시 자신만의 19호실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불편한 몸으로 억척스레 일을 해 자식을 잘 키워낸 엄마라는 존재다. 그가 결혼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몸이 불편한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그는 바로 이 사적 비밀을 담은 자신만의 19호실에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의 19호실을 보게 된 남자친구 마상구(박병은)는 그 방으로 들어와 그의 엄마와 인사를 한다. 우수지는 숨기고픈 사적 비밀을 들킨 일로 화를 내지만 마상구는 그를 위로해주며 오히려 그 현실을 피해 19호실을 숨기려 하지 말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라고 해준다. 자신이 항상 옆에 있어주겠다며. 

오랫동안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온 양호랑(김가은)과 심원석(김민석)은 이별을 준비한다. 결혼을 요구하는 양호랑과 그래서 노력을 해봤지만 서로의 불행만을 확인하게 된 심원석은 어찌 보면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19호실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심원석의 이야기에서 남세희가 항상 주어가 자신이라는 걸 알려주자, 심원석은 비로소 깨닫는다. 양호랑의 19호실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헤어져야 한다는 걸.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그 19호실을 여는 것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19호실을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남세희의 19호실은 과거 첫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이다. 그는 그 곳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중이지만 우연히 윤지호의 제작사 대표가 된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남세희의 19호실에는 이제 첫 사랑도 있지만 윤지호도 새로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 시작을 집을 가졌지만 하우스푸어인 남자와 홈리스인 여자가 동거하게 되는 이야기로 열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담아낸 블랙코미디에 멜로드라마가 섞인 형태였던 것.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느새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깊은 의미를 말하기 시작했다. 공간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토록 깊어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드라마가 인용하고 있는 문학적 감성들이 더해져서가 아닐까. 삶에 대한 통찰까지 엿보이는 이런 로맨틱 코미디는 정말 최근 들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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