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엄마들의 포르노? 로맨스가 더 세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붙은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캐치 프레이즈는 확실히 강렬하다. 주로 남성들에 의해 소비되는 것으로 치부됐던 포르노라는 단어에 엄마들이 수식어로 붙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포르노는 남성들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뉘앙스가 이 표현 속에는 담겨 있다. 그것은 도대체 뭐가 다를까.

 

사진출처 :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성적 쾌감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물리적이기보다는 화학적인 반응들이 더 많이 전제된다. 즉 처음 순수한 영문학도인 아나스타샤가 억만장자인 그레이를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그런 성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무언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한 신비로운 인물 그레이에게서 아나스타샤는 살짝 묻어나는 우울과 자책 같은 것들을 읽어낸다. 그 말 몇 마디와 눈길을 주고받는 과정에 생겨나는 설렘 같은 화학작용은 아마도 여성들에게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성적 쾌감보다 훨씬 더 자극적일 수 있다.

 

게다가 이 그레이를 둘러싼 매끈하고도 우아하며 귀족적으로 잘 정돈된 세계는 여성들의 로망을 자극한다. 그레이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아나스타샤에게 토마스 하디 쪽이냐 아니면 제인 오스틴 쪽이냐를 물을 정도로 감성적인 면모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성은 그가 아나스타샤에게 토마스 하디의 <테스> 초판본을 선물해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통해 더욱 부각되는 면이 있다.

 

그는 뭐든 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원한다면 시애틀의 밤 풍경을 전용 헬기를 태워보여 줄 수도 있고 자동차 하나쯤은 졸업선물로 줄 수도 있는 능력자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경제적 조건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 사실은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자기만의 제국에서 은밀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묘한 동정심과 모성애를 일깨운다.

 

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 가진 치명적인 성적 취향은 그래서 이 로맨틱이 심지어 포르노같은 파국과 갈등하고 긴장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즉 이 로맨틱한 그레이의 겉면과 어찌 보면 짐승 같은 본능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포르노같은 성적 세계는 마치 존립이 불가한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로맨틱을 전제하지만 성적 본능은 때론 포르노 같은 세계로 관계를 이끌어간다.

 

흥미로운 건 도무지 그 포르노같은 가학-피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던 아나스타샤가 기꺼이 그 세계로 들어가려 하게 되는 것은 단지 그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레이가 겪었던 그 어린 시절의 상처를 똑같이 공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포르노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그것을 감당해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그런 점에서 보면 포르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로맨스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원작 소설은 훨씬 더 엄마들의 포르노에 적합한 자극들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시각보다는 청각, 혹은 문학적 상상력이 오히려 여성들의 성감대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상당 부분을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작품이 그려내는 감각적 묘사들의 우아한 자극을 영상을 통해 100% 구현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지나치게 성적인 영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남녀 간의 로맨틱한 화학작용에 치중한 건 그래서일 게다. 어쨌든 로맨스에 포인트를 맞춰 본다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로서의 흥행성공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

 

범접할 수 없는 경지 보여준 <유나의 거리> 김운경 작가

 

요즘 드라마 중견작가들에게는 찬사보다는 비난이 더 가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어느새 부턴가 시청률 좇는데 쓰고 있는 중견작가들이 많아진 탓이다. 특히 최근 들어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한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의 전면에 나선 작가들이 다름 아닌 중견작가들이라는 점은 씁쓸하다. 임성한, 문영남, 서영명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임성한 작가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드라마 문법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유나의 거리(사진출처:JTBC)'

중견 작가 중에서도 김수현 작가는 거장이다.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김수현 작가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여러모로 김수현 작가답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다. ‘세 번째 결혼은 나와 한다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문학적일지는 몰라도 드라마로서는 너무 작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도 김수현 작가는 지킬 것은 지키는 작가다.

 

사실 중견 작가로서 오랜 세월 자리하면서 현 세대와 소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또한 그 정도의 공력을 쌓아왔다면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세계가 여전히 지금도 통한다는 것 역시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종영한 <유나의 거리>는 김운경 작가의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면서 동시에 지금의 세대와도 소통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나의 거리>를 쓴 김운경 작가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라 부르는 건 그의 작품이 그 어떤 작가도 따라할 수 없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나의 거리>는 그저 소소한 가족드라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하나의 사건으로 흘러가는 극적 구조도 아니다. 또 우리가 흔히 봐왔던 재벌가 이야기나 그저 그런 신데렐라 이야기는 아예 찾아보기도 힘들다. 바로 우리 옆에서 살아갈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상적인 수준에서 다루는데 이처럼 흥미진진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운경 작가가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력에서 비롯된다. 제목이 유나가 아니라 <유나의 거리>가 된 데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거리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착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는 <유나의 거리>를 통해 보기 드물게 건실한 청년 창만(이희준)은 물론이고 한 때 소문난 조폭두목이었지만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만복(이문식), 과거엔 잘나가던 건달이지만 마지막엔 치매를 앓으며 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가는 장노인(정종준), 그밖에도 개장수 홍계팔(조희봉), 칠쟁이 변칠복(김영웅) 등등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로 우리의 마음에 남았다.

 

다세대주택에서 이들이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저 돈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우리네 삶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누구나 고민 한 자락씩은 갖고 있고 그럼에도 서로서로 기대며 보듬고 사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는 걸 드라마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이런 것이 어쩌면 우리가 중견작가들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 게다. 중견이라면 적어도 삶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이 생길만한 위치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리는 드라마는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살생부를 휘두르며 비상식적인 드라마 전개로 시청률만을 노리는 중견이라면 없느니만 못할 것이다.

 

김운경 작가는 확실히 문학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번 <유나의 거리>에도 곳곳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상황들을 마주할 수 있다. 마치 소설가 이문구의 소설을 읽는 듯한 해학적인 상황들이 <유나의 거리>에서는 번뜩인다. 한창 잘나갈 때 서로 구역 다툼으로 으르렁대던 주먹들이 나이 들어 병원에 나란히 누운 채 서로의 몸을 걱정하는 장면 같은 건 인생이 갖는 시간의 무게감을 느껴보지 못한 젊은 작가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김운경 작가는 <유나의 거리>를 통해 중견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를 지금 세대와 소통하려 애쓰는 그 모습에서는 중견의 품격이 느껴진다. 모쪼록 많은 중견들이 이런 노력을 보여주기를.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를 제대로 빛내주는 일이고 또 후배들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드라마가 발견한 문학의 가치, '신데렐라 언니'

"은조야-" '신데렐라 언니'에서 은조(문근영)의 이름을 부르는 이 대사는 여러 번 반복된다. 하지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한 이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와 의미는 사뭇 다르다. 독하게 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회초리를 맞고는 술도가 창고에서 술독에 귀를 대고 왠지 서글프고 왠지 편안해지는 그 술 익는 소리를 듣는 그녀에게 기훈(천정명)은 맞지 말고 앞으로는 도망치라면서 은조를 부른다. "은조야. 대답 좀 해주지. 은조야. 응. 아프지?" 그 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 맘을 열지 않았던 은조는 "어"하고 답을 해준다.

"은조야"라고 묻고 "어"하고 답을 해주었을 뿐인데, 그 소통의 순간이 짠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 "은조야" 라는 부름 속에 들어가 있는 기훈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며, 그렇게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어'라고 답하는 그녀의 조금은 열려진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술독 안에서 아프게 익어가며 제 소리를 내는 '술의 노래'는 이 짧은 순간의 추억을 다양한 차원의 감각으로 기억되게 만든다. 이 짧은 순간의 강렬함은 훗날 기훈이 소식 한 점 없이 떠나간 날, 은조의 독백으로 이어지며 시적인 여운마저 남긴다.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 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이것은 드라마라기보다는 한 편의 문학작품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이 문학적인 방식은 다이내믹한 스토리 전개보다는 정중동의 압축적이고 폭발적인 대사의 힘으로 흘러가는 '신데렐라 언니'가 가진 특징이다. 효선(서우)이 뭐든 자신보다 잘하는 은조에게 절망감을 느끼면서 내레이션과 대사가 서로 상반되게 터져 나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맹세하는 건데 내가 얘한테 뱉은 말은 100% 거짓말이었다.' "언니야. 언니야 죽지마라. 죽지마라 언니야." '죽어버려라. 말이 헛나온 거다.' "언니야. 내가 잘 할게. 내가 너 예뻐해줄 게. 죽지마라 언니야" '너 코 파다가 코피난거지 이렇게 묻고 싶은 게 내 진심이었다.' 글로 적어놓으면 좋은 소설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드라마 대본이라면 흔하디 흔하게 적혀있을 '온다', '웃는다', '간다' 같은 말들도 '신데렐라 언니'에서는 그 속에 많은 감정과 의미들이 겹쳐져 다가온다. 대성(김갑수)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던 기훈이 절에서 사죄하듯 삼천 배를 하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다 문득 은조를 마주치는 장면에서 은조는 단 두 마디만을 속으로 내뱉는다. '왔다. 웃는다.' 하지만 이 두 마디가 주는 울림은 크다. '왔다'는 언젠가 굳게 닫혀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열게 해주고는 훌쩍 가버린 기훈이 '왔다'는 그 의미이고, '웃는다'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던 은조에게 아침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그 기훈의 웃음을 본다는 의미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어. 하지만 가더라. 그런데 또 간대. 차라리 잘됐어. 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않겠지. 다시 오지 않으면 다신 가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와서 웃음을 지어주는 기훈이 또 떠난다는 사실에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는 은조에게 '간다'는 의미는 이처럼 남다르다.

'신데렐라 언니'가 구사하는 대사는 그저 마구 던져지는 대화체의 문장들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인물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관계의 감정들이 더깨처럼 앉아 있다. 흔하다 못해 상투가 되어버린 그런 단어들조차 깊은 울림으로 만드는 그 마법은 바로 문학의 힘이다. 흔히들 문학은 죽었다고들 말하고 또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어디 그럴까. 세상이 죽은 상투어로 점점 쌓여갈수록 우리는 어쩌면 상투어마저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문학의 힘을 갈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신데렐라 언니'는 드라마지만, 바로 그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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