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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들의 수다 <비정상회담>, 연예인 토크보다 낫네

 

JTBC에서 새로 시작한 토크쇼 <비정상회담>의 상승세가 심상찮다. 2회 만에 2%에 육박하는 시청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참신한 형식이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간에 방영된 SBS <힐링캠프>는 지상파라는 플랫폼 우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4%대까지 추락했다. 항간에는 이제 연예인 신변잡기 토크쇼는 식상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토크쇼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들 말한다. 주중 11시대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던 토크쇼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유재석이 이끌던 <놀러와>가 폐지되었고 강호동의 <무릎팍도사> 역시 폐지되었다. 이 양대 스타 MC가 현재 출연하고 있는 <해피투게더><별바라기> 역시 시청률은 물론이고 화제성에 있어서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토크쇼가 고개를 숙인 이유는 물론 토크쇼라는 형식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이다. 아무래도 스튜디오에서 말을 중심으로 하는 소통은, 요즘의 리얼리티 카메라 시대에 진정성의 면에서나 영상적인 측면에서나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태생적인 한계만이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 토크쇼는 최근 생긴 트렌드가 아니고 오랜 세월을 버텨냈던 방송의 고전적인 형식이다. 중요한 건 형식 자체가 아니라 시대에 맞는 진화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JTBC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놓은 일련의 토크쇼들은 토크쇼의 추락이 태생적인 형식의 한계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썰전>, <마녀사냥> 그리고 최근 시작한 <비정상회담>이 그 새로운 토크쇼들이다. <썰전>은 토크쇼의 지평을 정치와 비평 분야로까지 넓혔고, <마녀사냥>19금 연애 토크쇼의 새장을 열었으며 <비정상회담>은 해외 각국의 청년들을 출연시킨 글로벌 토크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최근 시작한 <비정상회담>은 그 형식과 기획면에서 토크쇼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토크쇼가 <비정상회담>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미녀들의 수다>가 그런 시도를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미녀가 아닌 미남들을 출연시킨 부분은 이 토크쇼의 괜찮은 차별화라고 여겨진다. <미녀들의 수다>가 문화 다양성을 알려주는 좋은 취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편하게 여겨졌던 건 미녀라는 출연자들 구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다. 때로는 마치 성 상품화하는 듯한 느낌에 논란이 생긴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미남들(?)이 출연하면서 이런 불필요한 논란의 소지는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들이 함께 모여 나누는 대화의 주제 역시 훨씬 과감해졌다. 혼전동거를 소재로 심지어 자신들의 동거 경험을 커밍아웃하는 이야기는 <미녀들의 수다>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좀체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이것은 비지상파로서 JTBC가 갖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소재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마녀사냥>이나 <썰전> 역시 그 형식의 참신함과 도발성은 지상파가 다룰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썰전>의 정치 토크는 그렇다 치고 예능심판자같은 코너는 지상파 3사를 모두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바깥에 있는 종편이나 케이블 같은 방송사들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형식이다. <마녀사냥>19금 토크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지상파에서 시도하려 했다가 불편함만 잔뜩 양산했던 <화신>이나 <매직아이> 파일럿은 그 단적인 사례다. <비정상회담>에서도 새로운 형식 위에 파격적인 토크 주제를 얹을 수 있는 건 그것이 종편이라는 틈새 플랫폼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비정상회담>은 연예인이 아닌 여러 나라의 외국인청년들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예인 토크쇼의 신변잡기에 지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것은 또한 토크쇼의 경제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비정상회담> 같은 토크쇼는 초호화 게스트 섭외에 열을 올릴 필요가 거의 없다. 그만큼 비용 대비 효과도 좋다는 얘기다.

 

지상파 토크쇼의 추락. 이것은 어쩌면 지상파가 가진 역설적인 한계인지도 모른다. 한때는 적은 비용으로 그만한 효과를 거둔 효자상품이었던 토크쇼는 이제 종편이나 케이블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뒷북치듯 따라 하기 바쁜 지상파 토크쇼들의 태만 역시 그 이유로 지목된다. 위기의식을 좀 더 느낀다면 지금처럼 여전히 연예인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토크쇼를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불황이 만들어낸 마이너리티 감성

만일 당신이 사회의 정신적인 뇌관을 건드리는 테러리스트라면, 우리 사회만큼 간단한 테러 목표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남자라는 단어와 '루저'라는 단어를 붙여 넣기만 하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테니까. '미녀들의 수다'의 한 여대생이 "남자 키 180cm 이하면 루저"라는 말 한 마디가 일으킨 대폭발(?)은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민감해져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불황에 남녀 구분이 있을까마는 아마도 상대적인 박탈감은 남성들이 더 할 것이다. 본래 높은 위치에 계시던 분이 진창으로 나서야 그 힘겨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 아닌가. 남성들은 가부장제적 사회 속에서 이제 조금씩 남녀평등의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중이고, 차츰 자신들이 가졌던 이성적 능력보다, 여성성이 가진 능력이 이 감성적인 시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인정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렇다고 그 박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독한 불황은 남성들의 어깨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실로 이 계속된 불황 속에서 우리네 남성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왔다. 그들은 이 이행기에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그 지위는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청년실업에서부터 조기퇴직까지 이른바 가장으로서의 남성들의 목은 댕겅댕겅 잘려나갔다. 그러니 이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에게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붙여진 '루저'라는 단어는 뇌관이 될 수밖에 없다.

'루저'는 무능력자에 회생 불가능한 폐인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상대적인 의미인 위너들과 비교될 때 분노감은 더 커지게 된다. 즉 세상은 위너들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고 '루저'들은 늘 질 수밖에 없는 패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루저'라는 말이 그저 한 때의 잘못 발화된 한 여대생의 실수담이 아니라는 것은, 유해진과 김혜수의 열애사실과 함께 드러난다. 유해진은 늘 조연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전우치'에서 전우치로 등장하는 강동원이 아니다. 그는 전우치가 데리고 다니는 개 초랭이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늘 '엣지있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당당한 미인 김혜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작년 한 해 눈에 띄게 약진한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저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던 남성들이라는 사실이 도드라져 보인다. 물론 '루저'라 지목되지는 않았지만 그 낮게 되어버린 남성들의 눈물겨운 도전과 노력에 우리는 감동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성과 '루저'가 만나면 폭탄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만큼 구조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루저'라는 말조차 농담처럼 웃으며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될까. 아직은 요원한 느낌이다.

Posted by 더키앙

‘미녀들의 수다’가 건드린 ‘루저’라는 뇌관

‘미녀들의 수다’가 또 사고를 쳤다. 모 대학 여대생이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될 지도 모르는 이 발언은 그러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비난의 목소리가 일파만파 커졌고, 결국에는 제작진까지 교체했지만 그 여진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인터넷은 온통 루저 패러디로 가득하고, 그 발언을 한 여대생은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항간에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것은 ‘미녀들의 수다’가 교양과 천박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 뉘앙스는 제목에서부터 풍긴다. ‘수다’라 함은 이 프로그램이 토크쇼를 지향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애초에 기획된 대로 외국의 여성들을 토크 대상으로 세웠다는 점은 참신하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네들의 눈을 통해 본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을 ‘교양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취지와 기획의도가 무색하게 왜 하필 ‘미녀’를 거기 세워두었냐는 점은 논쟁거리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마치 여성을 상품처럼 전시해놓은 듯한 뉘앙스를 읽게 된다. 기획의도에 맞게 진지한 토크를 했다면 그런 뉘앙스는 읽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토크쇼는 때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번 사건에서도 그 본질은 여기서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답변이 나오게 된 것은 “키가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냐?”는 천박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녀들의 수다’가 토크쇼를 표방하면서 결국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노골적인 성 상품화가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이 프로그램이 가진 위장술이 오히려 반감의 요인이 된다. 바로 이런 반감 위에 하필 ‘루저’라는 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리는 단어를 쓴 것이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이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일절(31세면 취업길이 막혀 절망하는 시대)’ 같은 신조어들이 청년 실업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 요즘, 백수니 루저니 하는 단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해졌다.

그 ‘루저’라는 단어를 그것도 대학생이라는 사람이 개념 없이 사용했다는 점은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식자라는 사람이 거기에 걸맞지 않은 발언을 한 것이 더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보면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루저’라고 한 마디 한 것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이 프로그램이 갖게 된 도덕적 불감증이 원인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불감증에서 비롯된 생각 없는 발언과 생각 없는 편집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에 그토록 취약함을 보인 이 사회가 원인이다.

게다가 이 ‘루저’라는 단어 속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즉 사회가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를 양산하고 있을 때, 그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위너들(혹은 그런 구조적 문제로 이득을 보는 이들)은 그것이 그저 ‘루저’의 논리라고 일축한다는 점이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비하하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루저’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지독하다. 그리고 이런 단어가 버젓이 공중파에서 농담처럼 흘러나오는 이 사회는 또 얼마나 지독한가.

Posted by 더키앙

토크쇼 전성시대, 토크쇼가 토크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토크쇼 전성시대다. 월요일에는 MBC의 ‘놀러와’, SBS의 ‘야심만만2’, KBS의 ‘미녀들의 수다’가 경쟁을 벌이고 있고, 화요일에는 KBS의 ‘상상플러스’, 수요일에는 MBC의 ‘황금어장’, 목요일에는 KBS의 ‘해피투게더’, 금요일에는 SBS의 ‘자기야’, 토요일에는 MBC의 ‘세바퀴’ 같은 토크쇼들이 포진해 있다. 실로 거의 일주일 내내 토크쇼를 볼 수 있는 시대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토크쇼라는 형식이 비용 대비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토크쇼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크쇼가 갖추고 있는 형식, 즉 호스트가 게스트를 초청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변을 듣는 과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연예계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른바 신비주의의 해체기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연예인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고, 대중들은 그 솔직 대담한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고 있다. 이른바 리얼 토크쇼가 대세가 된 것이다.

리얼 토크쇼는 시청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그 시청자들을 등에 업은 호스트가 게스트를 압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즉 게스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시청자를 대신하는 호스트가 원하는 이야기를 게스트가 하게 된 것이 리얼 토크쇼가 등장한 배경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의 신비주의 콘셉트가 무너지면서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 인기를 끌게 되자, 게스트들의 솔직한 이야기는 자발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이 리얼 토크쇼는 또한 문제점도 갖고 있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 속에서 솔직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폭로성의 이야기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게스트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들춰내기도 하고, 심지어 게스트를 윽박질러서 울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는 집요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리얼 토크쇼가 태생적으로 갖는 단점이다. 리얼 토크쇼의 토크 양상은 자극적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바로 이 자극은 반복되면 둔감해지고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크쇼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거의 연예인들의 가십 수준에 머문다는 건, 현재 우리의 토크쇼가 가진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토크쇼는 사람을 출연시켜 그 사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솔한 모습을 추구하는 리얼 토크쇼에서는 그 사생활적인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토크쇼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끄집어내려 하거나, 또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억지로 말하게 하는 토크쇼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토크쇼가 그저 쇼가 아니라, 한 시대의 화법을 대변해 보여주고 어떤 면에서는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이들 같은 경우에 이런 형식에 반복 노출되면 대화의 방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토크쇼들도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잡담이 아닌 다른 것들을 담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릎팍 도사’는 지금 현재 가장 진취적인 토크쇼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의 화법으로 자리 잡은 직설어법을 쓰면서, 게스트에 대해 시청자가 알고 싶은 점을 피하지 않고 질문하는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그 게스트를 통해 어떤 시사점까지 찾아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 사생활은 그저 가십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사생활로 제시된 개인적인 삶이,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삶으로서 어떤 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십이 아니다. 토크쇼는 이처럼 개인에 집중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연예인으로 한정된 직업군에서 계속해서 어떤 보편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무릎팍 도사’가 시도한 게스트의 외연을 넓힌 작업은 토크쇼에 있어서 큰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도 연예인이 아닌 비연예인이 출연했을 때, 시청률이 더 높은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대중들은 좀 더 다양한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연예인에 편중된 게스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스트들도 너무 몇몇 MC에 국한되어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실제로 현재는 강호동과 유재석 이 두 개그맨이 거의 토크쇼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토크쇼의 진행 자체가 녹록치 않게 된 상황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박중훈쇼’의 추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토크쇼의 성공은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것은 시청률 보증수표인 이 개그맨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기 보다는 유명 개그맨을 기용해 쉽게 시청률을 가져가려는 것이다.

토크쇼는 문제와 해법을 계속 제시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고 지금도 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토크쇼는 과거 가장 기본적인 형식인 1인 토크쇼에서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자니윤쇼’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집단으로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서세원이 진행했던 ‘토크박스’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야심만만’이 대표적이다. 설문 형식을 가져와서 자연스럽게 연예인들의 속내를 끄집어냄으로써 새로운 토크쇼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리고 직설어법의 시대에 와서 토크는 좀 더 독해졌고 과감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것도 저물어가고 있다.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체된 느낌의 토크쇼는 이제 자극적인 웃음만이 아닌 어떤 공감을 찾고 있다. 진솔하면서도 사람의 스토리가 살아있는 토크쇼, 이런 게 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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