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2

“넌 그 비행기를 탔어야 했어.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2’는 프론트맨(이병헌)이 기훈(이정재)에게 하는 경고로 문을 연다. 그건 ‘선택’에 대한 경고다. 시즌1 엔딩에서 미국으로 가려던 기훈(정재)은 발길을 돌리며 프론트맨(이병헌)에게 전화로 선전포고한 바 있다.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그래서 궁금해. 너희들이 누군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난 용서가 안돼. 너희들이 하는 짓이.” 만일 기훈이 그대로 비행기를 탔다면 어땠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저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은 흘러갔을 게다. 하지만 발길을 되돌린 그는 저들과 맞서려 하고 이 잔혹한 게임을 끝장내려 한다. 프론트맨의 경고와 기훈의 선전포고. 시즌2는 이 두 흐름의 부딪침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시즌2에서 저들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딱지남을 찾는 기훈이 사채업자들을 움직이는 광경은 저 ‘오징어 게임’의 방식들을 연상시킨다. 무려 2년 간이나 지하철 곳곳을 수색해온 사채업자들은 회의감을 느끼지만 기훈이 성공보수 10억을 내걸자 눈빛이 달라진다. 눈앞에 놓인 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이건 자본의 전형적인 작동 방식이다. 그렇게 드디어 찾아낸 딱지남은 게임에 미친 인물로 노숙자들에게 다가가 빵과 복권을 내밀며 선택하라고 한다.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을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대부분은 복권을 선택한다. 빵을 선택하면 모두가 나눠먹을 수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극히 확률이 낮은 복권을 선택할까. 거기에는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가치로 추구되는 자본의 방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은 바로 그 자본의 방식을 게임이라는 틀을 통해 보여준다. 456명이 참여해 1인당 1억씩 배정된 목숨값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적립해 최후의 1인이 456억을 독식하는 게임이다. 저 복권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게임은 그 욕망한 결과가 실패로 돌아올 때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달라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건 고도화된 자본화가 승자독식의 틀 안에서 운용될 때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몇몇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이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려 죽어간다. 기훈이 공항에서 발길을 돌린 건, 자신이 우승상금으로 받은 456억이 저들의 목숨값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다. 

 

‘오징어 게임’ 시즌1이 그래서 그 자본의 잔혹한 작동방식을 게임을 통해 알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시즌2는 그 게임과 맞서는 이야기다. 기훈은 말이 아닌 사람으로서 대항하려 한다. 그래서 다시 게임에 들어가려 하고, 저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살려내고 또 설득하려 한다. 그저 놀이로 알았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실제로 참가자들이 사살되는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기훈은 그래서 죽을 위험까지 무릅쓰며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시즌2에 새로이 도입된 룰은 매 게임 후 다음 게임을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투표에서 한 사람이라도 ‘X’가 더 나오면 게임은 중단되고 그간 적립된 돈을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나눠갖고 나갈 수 있게 된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게임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게임이라는 걸 강조하는 이 룰은 그래서 이 게임을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이 방식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더 많은 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그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의 방식은 저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자본의 방식을 가진 게임 앞에 번번히 무력해진다. 참가자들은 나눠가질 돈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한 판 더’ 게임을 하겠다는 ‘O’에 투표한다. 자신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한 채. 

 

게임을 멈추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는 프론트맨이 오영일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에 참가한다는 점이다. 오영일은 기훈의 조력자처럼 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이 게임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인물이다. 자본의 방식을 대변하는 프론트맨이 민주주의 방식으로 게임을 멈추려는 기훈 옆에 붙어 있는 이 설정은 그래서 민주주의 시스템 안으로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본의 힘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자본 앞에 민주주의라는 촛불은 연약하게만 보인다. 

 

과연 기훈은 프론트맨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자본의 무자비한 방식들을 민주주의는 극복해낼 수 있을까. 프론트맨과 기훈으로 대변되는 자본과 민주주의의 대결과 좌절을 그리는 ‘오징어 게임2’는 그래서 시즌3로 가는 빌드업이다. 그래서 좀더 시원시원한 결말 같은 걸 원했던 시청자들이라면 미진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시즌1의 이야기에서 보다 확장된 세계로 나온 시즌2의 서사는 여전히 흥미롭고 대결의식은 더 팽팽해졌다. 특히 현 탄핵 정국에서 우리가 느끼는 민주적 절차에 대한 희망과 무력감을 떠올려본다면, ‘오징어 게임2’가 던지는 ‘선택’에 대한 질문은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게다. (글:중앙일보, 사진:넷플릭스)

“우리가 막는 게 아니야. 시민들이 도와야 돼.” 김성수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이 다리들 전부 방어하려면 최소 사단 병력 이상이 필요합니다.” 서울로 진격해오는 반란군이 한강을 건너는 걸 막아야 한다는 이태신(정우성)의 말에, 강동찬(남윤호) 보좌관은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이태신이 말한다. “아니야, 우리가 막는 게 아니야... 시민들이 도와야 돼...”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오는 이 장면은 민주주의의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탱크를 몰고 진격해 오는 반란군들의 무력 앞에 이를 막으려는 이태신 같은 군인이 존재하지만, 진짜 힘은 깨어있고 행동하는 시민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걸 이태신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12일, 그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군사 반란을 마치 실시간 중계하듯이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 ‘서울의 봄’은 무려 1300만여 명이 관람했다. 사실 역사를 통해 이미 그 결말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모르는 관객은 없었을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그 많은 관객들이 봤던 건,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오래도록 겪은 아픔들을 되새기고,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게다. 

 

작년 말 이 영화가 개봉한 지 1년여가 지난 올해 12월3일 밤,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갑작스레 선포된 비상계엄은 ‘서울의 봄’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45년 전과 사뭇 달랐다. 무장한 채 난입하는 계엄군들을 국회 보좌진들이 막아세웠고, 모든 상황들은 현장의 시민과 기자들에 의해 실시간 중계되었다. 결국 6시간만에 상황이 종료된 건, 저 이태신이 말했던 시민의 힘 덕분이었다. ‘서울의 봄’이 아닌 ‘서울의 밤’.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아침을 맞았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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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3’, 소피스트도 울고 갈 이야기꾼 유시민과 김영하

“정치적 삶(공동체의 삶)은 오직 말과 행동으로 이뤄진다. 말을 통해서 공공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 tvN <알쓸신잡3>에서 앞서나가던 그리스가 왜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는가를 묻는 질문에 김영하는 한나 아렌트의 그 말을 꺼내놓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말과 정치의 참여를 죄의 근원으로 보고 ‘관조’를 중시하게 만들었다는 것. 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적인 삶으로서 기도하고 관조하는 삶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던 유시민은 당시 공공교육이 전혀 존재하지 않던 그리스에서 사설교육을 담당하던 소피스트들이 부당하게 폄하된 면이 있다고 했다. 말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던 당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태동을 소피스트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유시민은 “내가 그 때 태어났으면 나도 일타강사를 했을지 모른다.”는 농담을 던졌다.

사실 그리스가 그토록 서구 문명의 발상지라고 말할 만큼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가 고작 100년이 지난 후 스러지게 된 그 과정을 단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김영하나 유시민과 김영하의 이야기가 던지는 소피스트가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그리스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도 ‘일타강사’ 같은 표현으로 지금의 시각으로 풀어 이야기해주니 귀에 쏙쏙 박힐밖에.

소피스트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리스가 몰락하게 되는 징후로서 파악하고 있는 유시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천박한 표현인가를 강변한다.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독배를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죽음의 일화는 ‘잘못된 법도 법이니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폴리스가 절차에 따라 결정한 일을 내가 억울하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게 하면 폴리스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굉장한 비극적 정조를 상상하지만 유시민도 김영하도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 의연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태도도 보였다고 했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우는 제자들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며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시오?”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는 것.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는 말은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오피스를 거론하며, 육체가 주는 병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음으로 바라봤던 그의 생각이 담긴 말이었다. 유시민은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산 것”이고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죽는 행위가 아니고 사는 행위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시민이 소크라테스 덕후를 자처하며 내놓은 이야기들이 그리스의 흥망성쇠를 이해할 수 있는 쉽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면, 김영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통해 그리스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흥미롭게 추론해냈다. 그는 <일리아스>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리스가 승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헥토르의 아버지 트로이의 프리아모스왕이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손에 입을 맞추며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화해를 신청했고, 그 모습에서 아킬레우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 김영하는 그래서 <일리아스>가 그리스의 승리가 아니라 프리아모스왕이 보여준 ‘인간성’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러한 “적조차 포용하는 자세”가 그리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주는 건 다른 문제다. 제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알쓸신잡3>에서 유독 유시민과 김영하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건 같은 지식이라도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한 번 곱씹어져 나온 것이라,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져 있어서다. 당대의 일타강사 역할을 했을 소피스트들도 울고 갈 이야기꾼의 면모가 이들에게는 느껴진다.(사진:tvN)

종묘보다 넘치는 사직, '알쓸신잡2' 서울에 채워야할 것들


tvN <알쓸신잡2>가 본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야기는 조선에 한양을 수도로 세운 정도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북방 외세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천혜의 요새(?) 같은 한양에 수도를 세운 정도전. 당시만 해도 텅 비어있던 한양은 이제 몇 백년 만에 인구 천 만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숙정문과 남산에 올라 아마도 당시 정도전이 내려 봤을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만일 이 달라진 모습을 정도전이 봤다면 “인생 최대의 희열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구 천 만이 모여 살게 된 그 변화된 서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뿌듯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황교익이 지적한 대로 서울은 과거 정도전이 꿈꿨던 모습과는 달리 ‘이주민의 도시’가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외지인들이 들어와 사는 곳이 되었고, 그렇게 인구가 집중되면서 효율은 떨어지는 도시가 되었다. 유현준 교수는 이런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건 ‘보일러’였다는 흥미로운 관점을 말했다. 과거 온돌 생활에서는 2층 이상의 집이 불가능했는데 보일러가 들어와 고층 아파트가 가능해졌다는 것.

유시민 작가 역시 서울이 ‘화석에너지와 대량생산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걸 지적했다. 고층 아파트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인구를 수용하고, 그들이 모두 같은 패턴으로 일하고 쉬고 움직이기 위한 교통시설이 만들어진 것이 모두 화석에너지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그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지향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유현준 교수가 지적하는 서울의 도시계획 실패 이야기와 맞닿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거와 일터를 나누고 일제히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일하고 같은 시간에 쉬는 시스템 속에서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서울의 시스템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었다. 피맛골을 예로 들어 사라져가는 골목길들은 그저 길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이 갖던 많은 추억들이나 인간의 흔적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건물은 고치거나 바꿀 수 있어도 도로는 함부로 바꿀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유현준 교수의 지적은 그래서 그저 자본화되어가고 있는 서울이 보존해야할 것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장동선 박사가 다녀온 세운상가의 재탄생은 이런 과거와 현재의 공존 그리고 지향할 미래를 모두 품어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의 한 예처럼 보였다. 한때는 부의 상징이었던 곳이었으나 강남이 개발되고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며 점점 낙후되어가던 그 곳이 지금은 ‘청년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과거의 장인들과 현재의 청년들이 콜라보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변화란 단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변용할 건 변용해야 한다는 걸 이 사례는 보여줬다.

유시민 작가는 이러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가치’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냈다. 정도전이 처음 한양을 수도로 세웠을 때 만들었던 종묘와 사직이 각각 당대의 ‘도덕적 가치’와 ‘세속적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는 걸 먼저 지적한 유시민 작가는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종묘와 사직은 무엇인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유시민 작가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21세기의 종묘일 것이라며 민주화를 상징하는 한국기독교회관, 명동성당 등을 언급했다. 그리고 황교익은 광화문 광장이 그런 가치를 하나로 모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한편 21세기 사직에 대해서 유시민 작가는 ‘마천루’라고 말했고, 유현준 교수는 ‘아파트’라고 했으며 황교익은 식당이라고 해서 저마다 현재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들을 각각의 입장에서 거론했다. 유시민 작가는 우리가 저마다의 사직단을 품고 살아가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돈’이라는 걸 짚어냈다.

<알쓸신잡2>가 들여다 본 서울은 21세기 종묘와 사직단으로 표징되듯, 민주화의 흔적들이 중요한 가치로 남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는 곳이었다. 아쉬운 건 21세기 종묘의 가치들을 압도하는 사직단들에 의해 사라져가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직단들이 과거를 밀어내고 전면에 포진하면서 이제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길로 자그마한 온기를 찾아 모여드는 도시인들의 모습이 못내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물론 그 곳 역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벌어지는 또 다른 모습의 사직단이 되어가고 있지만.(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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