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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결합의 실험도 좋지만, 우리 정서는 어쩌나

 

KBS <블러드>에 이어 <오렌지 마말레이드> 그리고 이번에는 MBC <밤을 걷는 선비>. 흡혈귀, 즉 뱀파이어 소재의 드라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블러드>4%(닐슨 코리아) 정도에 시청률에 머물렀고, <오렌지 마말레이드>는 지금 현재 2% 대 시청률을 전전하고 있다. 소재의 특성상 시청률은 낮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과 화제도 그리 크지 않다.

 


'밤을 걷는 선비(사진출처:MBC)'

만듦새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가장 큰 건 소재의 낯설음이다. 물론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대중들에게 낯선 건 아니다. 이미 미드를 통해서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나 뱀파이어는 하나의 클리셰가 나올 수 있을 만큼 많이 소재로 다뤄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네 콘텐츠에서다. 우리에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낯설다. 한때 뱀파이어 붐을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흡혈형사 나도열> 같은 우리 식의 뱀파이어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참패했다.

 

OCN에서 방영한 <뱀파이어 검사>는 비상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시청률도 최고 4%가 넘는 선전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케이블이 가진 특성과 어울리는 면이 있었고, 또한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걸 통해 들여다보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완성도 높은 영상과 어우러져 거둔 성과였다.

 

문제는 지상파들이 뱀파이어 소재를 그 플랫폼에 걸맞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렌지 마말레이드>에도 살짝 등장했지만 <밤을 걷는 선비> 역시 사극 속의 뱀파이어를 다룬다. 사실 사극이라는 단어와 뱀파이어라는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밤을 걷는 선비>에서는 흡혈귀라고 소개하면서 그걸 서양에서는 뱀파이어라고 부른다는 지칭까지 굳이 대사에 집어넣는다.

 

이종결합의 실험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실험이 그저 이색적인 볼거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근거가 스토리나 주제의식 속에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즉 조선시대라는 배경 속에서 뱀파이어가 활동한다는 그 스펙터클적인 요소에 집착한다면 시청자들의 눈길 한 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정서적 공감을 가져가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특히 사극은 최근 들어 판타지까지 장르적 변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런 사극들이 성공한 예는 드물다. 사극은 상상력의 틈입이 이제 허용된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상상력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정서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장금>은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이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현재의 여성으로 대변되는 약자들의 일과 성장스토리에 닿아 있어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밤을 걷는 선비>가 다루고 있는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지금 현재의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을까. 첫 회를 통해 모든 걸 판단하긴 어렵지만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복수극과 멜로의 틀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복수와 사랑은 왜 지금 뱀파이어라는 소재까지 사극에 들여서 대중들에게 보여져야 할 것인가. 왜 우리의 괴물들, 이를테면 구미호나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 아니고 뱀파이어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주지 못한다면 사극까지 들어온 뱀파이어 이야기는 단순한 이종결합의 스펙터클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늘 터지는 구혜선의 연기력 논란, 무엇이 문제일까

 

구혜선이 극 초반에는 유리타라는 캐릭터의 성격 때문에 대사 처리에 다소 과장을 했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유리타 역시 성격의 변화가 있을 예정이기에 그때 구혜선의 연기에 대한 논란도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블러드(사진출처:KBS)'

또 연기력 논란이다. KBS <블러드>에 출연하고 있는 구혜선에게 여지없이 연기력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녀가 드라마에 출연할 때마다 연기력 논란이 벌어지다보니 무슨 음모론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녀만 나오면 무조건 연기력 논란을 부추기는 것만 같은.

 

하지만 <블러드>의 첫 회 정도만 봐도 구혜선의 연기력 논란은 어느 정도 예상하게 되는 일이다. <블러드> 제작사인 IOK미디어 신인수 대표가 이 논란을 극 초반 캐릭터 성격 문제로 얘기하면서 극 전개와 함께 있을 성격 변화로 연기력 논란이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 공감하기 어려운 연기력이다.

 

신인수 대표의 말처럼 구혜선이 연기하는 유리타라는 캐릭터는 극 초반 안하무인의 의사로 등장한다. 태민그룹 회장의 조카이자 태민 암 병원 간담췌 외과 전문의다. 제멋대로인 캐릭터를 초반에 표현하고 싶었다면 그저 목소리만 신경질적인 톤으로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박지상(안재현)과 서로 각을 세우는 장면에서 구혜선의 연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흉내내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 연기의 첫 인상이 영 몰입이 안됐던 또 다른 이유는 상대 역할인 안재현 역시 박지상이란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 한쪽이 채워주거나 리드를 해줘야 그 빈자리가 채워질 텐데 양쪽이 얄팍하게 캐릭터를 해석하고 있으니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 대사의 주고받음을 듣는 것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연기력 논란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블러드>는 결코 연기가 호락호락한 작품이 아니다.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이 가상의 존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관점이다. 이걸 해석하기 위해서는 뱀파이어가 인간의 어떤 욕망과 좌절을 상징하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가 가졌을 욕망과 좌절을 자기 안에 있는 그것과 매치시켜 끌어내야 제대로 된 연기를 해낼 수 있다.

 

이것은 뱀파이어의 상대역인 유리타 역할의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뱀파이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기본이다. 이런 탐구 없이 어떻게 그런 특별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그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구혜선의 연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연기하는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기는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게 아니다. 대신 자신 안에 있는 캐릭터를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뱀파이어를 사랑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그녀의 연기력 논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가 무려 11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중견이라는 점이다. 안재현이야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라 1년 만에 주인공을 꿰찬 벼락스타라고 하더라도(물론 이 캐스팅 역시 적합했다 말하긴 어렵다) 구혜선은 다르다. 그녀는 적어도 안재현을 리드해줘야 할 만큼의 많은 작품을 거쳤다.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연기력 논란이 불거지고, 또 그럴 때마다 그 연기력 논란이 구혜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캐릭터 때문이라는 변명이 여지없이 등장한다. 한두 번은 연기력 논란이 아니라 캐릭터 논란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반복되는 연기력 논란의 이야기를 단지 캐릭터 논란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더더욱 안타까운 건 우리네 드라마사에서 희귀하게 다뤄지는 뱀파이어 소재의 드라마가 이런 연기력 논란으로 인해 그 소재적인 가치조차 평가 절하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늘 나오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는 마음으로 연기력 논란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도 이 문제는 끝없이 구혜선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구혜선으로서는 좀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더키앙

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Posted by 더키앙

타자에 대한 시선, 공포에서 공감으로

"들어가도 돼?"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소년에게 묻는다. 소년은 망설인다. 그 소녀가 뱀파이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물어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 하지만 소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온 소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다. 그러자 소년이 소녀를 꼭 껴안는다. 이 짧은 장면은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서 있는 공포와 공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문지방 하나, 벽 하나의 차이일 뿐이지만,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이 서 있는 거리는 그만큼 멀다. 소년은 소녀를 두려워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소녀의 처지를 공감한다.

'렛미인'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그 가운데 그어진 어떤 선을 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운명은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한 왕따 소년을 만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공감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인간들의 사회에서 타자로 내몰려진 뱀파이어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왕따 소년을 같은 선 상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절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공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공포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라면 살아있거나 죽어야 하는데, 좀비는 그 중간에 걸쳐져 있다. 즉 시체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 따라서 이 인간과 다르다는 차이는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게다가 이 좀비들은 인간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 물어뜯긴 인간이 그들과 같은 좀비가 된다는 이 설정은 마치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나 피의 욕망 앞에 흡혈귀로 변신하는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파괴되고 제거되어야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로베르토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영화에서 좀비와 뱀파이어를 때려 부수는 장면들은 유희적인 성격까지 띤다. 어찌 보면 좀비와 뱀파이어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세워두는 것으로(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구 도륙하는 장면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콘텐츠들의 시각은 이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일찍이 뱀파이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트와일라잇'은 인간과 뱀파이어 그리고 늑대인간 같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면서.

'렛미인'은 이렇게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공포에서 공감으로 바뀌어가는(혹은 공존하는) 최근 경향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질성을 보던 것에서 동질성을 보는 방향으로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도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바라보는 콘텐츠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E.T.' 같은 영화가 그렇다. 그 전까지 외계인 하면 공포의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지구인의 친구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의 후예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존재로 분리하는 시각이 가져온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핏 속 깊이 각인되었을 테니까. 즉 20세기에도 이런 동질성을 찾는 콘텐츠들이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화의 경향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는 건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단지 해외의 문화 콘텐츠들만의 경향이 아니다. 최근 드라마화 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처럼, 구미호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인간은 이제 대결하기보다는 사랑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최근 연재되고 있는 강풀의 새로운 만화 '당신의 모든 순간'은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좀비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만화는 이들 좀비와 싸워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그 좀비들 틈에서 자신의 형을 발견하고는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좀비들에게서 인간과 다른 점을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고 여전히 그 대치국면으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 타자에 대한 공포와 공감은 늘 뒤얽혀있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시절에 우리는 저네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보듯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산가족이 만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 역시 우리의 형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연평도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한 시간 여의 포격은 우리를 다시 혼란 속에 빠뜨린다. 이들과 우리는 과연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공존을 생각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결국면으로 되돌리려는 이 역행을 우리는 어떻게 또 넘어서야 할 것인가. 뱀파이어 소녀 앞에 서 있는 소년처럼 당혹스럽다.

Posted by 더키앙

무수한 경계 위에 선 영화, ‘박쥐’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밟고 있는 지점은 실로 애매모호하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엉뚱하게도 송강호의 성기노출이 논란이 되면서 영화는 마치 에로틱한 어떤 것으로 비춰졌다. 그것은 마치 이안 감독의 ‘색계’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거장이 만들었으니 작품성이 뛰어날 것이고, 그러면서도 무언가 파격적인 성 노출이 스펙타클로 보여지는 그런 영화. 이런 분위기는 실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적인 호기심과 함께 자극적인 호기심까지.

‘박쥐’는 물론 대단히 에로틱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나 에로틱한 그 무엇으로만 정의되기는 어렵다. 뱀파이어물이 갖는 에로틱함과 공포스러움을 동시에 껴안고 있으니까. 살갗을 물어  뜯거나 칼날로 그어 피를 내는 장면은 하드고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끔찍하지만, 그 피나는 살을 쭉쭉 소리를 내며 빨아대는 장면은 그 어떤 정사장면 만큼이나 에로틱하다. 영화는 이 두 지점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양극단을 공존시켜 나타나는 기묘한 느낌이 주는 쾌감을 선사한다.

‘박쥐’가 주는 이런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의 공존은, 어쩌면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비상하는 새와 어둠 속을 기어다는 쥐의 상반된 이미지를 한 몸에 가진 박쥐, 그 박쥐에서 뽑혀져 나온 인간과 괴물의 이미지를 한 몸에 가진 뱀파이어. 영화 속 주인공 상현(송강호)은 이 중간지대에 선 인물이다. 그는 신부라는 인간적인 존재와 종교적인 존재 사이에 서 있는 인물이며, 누군가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신부이면서 동시에 파멸로 끌고 들어가는 흡혈귀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상현이 그려내는 고뇌하는 흡혈귀라는 캐릭터다. 하드고어적인 잔혹함이 넘치면서도 순간 유머가 번뜩이는 것은 바로 이 상현의 인간적인 면모 덕분이다. 상현은 신부처럼 삶과 구원에 대해 고민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 뇌사상태에 빠진 자의 피를 마치 빨대로 뽑아내듯 빼먹으면서 사실 그 사람은 본래부터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눠주는 걸 즐거워했다고 변명을 해대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의 피를 빨아주면서(?) 그것이 그 사람을 편히 가게 해준다고 말하는 장면은 우습지만 인간의 실존을 담아낸다.

이 영화는 밤과 낮 사이에서, 그 타락과 구원 사이에서, 살육과 생존 사이에서, 물과 햇볕 사이에서, 육욕과 사랑 사이에서 그 수많은 경계의 지점에서 딜레마에 빠져버린 인물들을 그린다. 자살은 상현이 신부로서 말했던 것처럼 가장 극악한 죄이지만, 이 딜레마에 빠져버린 인물들에게는 유일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단의 딜레마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건 단지 영화 속 흡혈귀의 실존만은 아닐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수많은 상반된 이미지를 한 프레임 안에 녹여내는 그 매력적인 연출은, 송강호, 김옥빈의 빛나는 연기로 형상화된다. 송강호는 가장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구원을 향한 진지한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특유의 허무와 유머가 뒤섞인 얼굴로 연기해낸다. 상현이란 인물은 송강호를 만나 ‘넘버3’같은 비속함에서부터 ‘밀양’의 진중함,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엉뚱함을 모두 표현해낸다. 김옥빈은 에로틱함의 극단에서 섬뜩함을 뽑아내는 그녀 영화 인생 최고의 연기를 해낸다.

이 영화에 쏟아지는 양극단의 평가는 바로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어느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경계 위에 서려는 그 안간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에로틱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간 관객이라면 그 하드고어적 영상이 충격적일 것이고, 뭔가 진지한 성찰을 꿈꾸고 간 관객이라면 순간순간 보여지는 위악적인 이미지들(성찰을 거부하는 듯한)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장르와 인물과 이미지를 내파시켜 하나로 혼융하는 면모에서 박찬욱만의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기대의 배반이라기보다는 기대 그 이상의 것을 늘 보여주는 그런 힘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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