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해줘’, 이 멜로에 담긴 만만찮은 문제의식

사랑한다고 말해줘

“입시 미술도 지겹고 말 많은 애들도 질색인데 여긴 뭔가 좀 다를 거 같아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태호(한현준)는 차진우(정우성)가 아트센터에서 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수업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수업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말로 소통이 되지 않아 불편할 수 있는 수업을 굳이 태호가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 많은 애들도 질색’이라는 이야기 속에는 그를 둘러싼 폭력적인 세상이 담겨 있어서다. 

 

태호는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일진들에게 당하는 피해학생을 보다못해 선생님에게 그들과 분리해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오히려 폭력의 대상이 됐다. 불의를 그냥 넘기지 못해 나선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불똥이 되어 돌아온 거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어른들이었다. 버스 안에서 자신이 일진들에게 갖은 폭언과 폭력을 당하는데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차진우는 이를 만류하려 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아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가해학생들은 마치 들으라는 듯 비아냥 댔다. “역시 어른이셔. 봤냐? 실실 쪼개면서 쌩까는 성숙한 태도. 건들면 좆된다는 걸 아니까 어른인거야. 알겠냐? 남일에 나대다가 현생 좆망한 새끼야. 아우 우리 태호 언제 저런 훌륭한 어른 될래?” 그런 이야기에도 그냥 내리는 차진우를 그래서 태호는 오해했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해가 풀린 건 정모은(신현빈) 덕분이었다. 정모은이 태호에게 차진우의 인터뷰가 실린 아트센터 잡지를 보낸 것. 그걸 보고 태호는 차진우의 수업을 들으러 오게 된 거였다. 

 

그런데 태호가 농인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점점 회복되어가고 얼굴이 밝아지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만만찮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시끄럽고 폭력적인 말들이 오가는 세상. 그걸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오히려 농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눌 때 더 잘 소통하고 진정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를 통해 현실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듣지 못하는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고 연기하는 정모은의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시끄럽고 폭력적인 세상 앞에 그것과 대비되는 ‘침묵’과 ‘고요’의 세계가 마치 대결을 벌이는 듯한 치열한 문제의식 또한 담고 있다. 차진우의 벽화는 그런 세상에 대한 소리없는 대결이나 마찬가지다. 철거를 앞둔 지역에서 남몰래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애써 기억하려는 듯 그는 벽화를 그려넣는다. 그 그림은 세상에 침묵하는(혹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작고 가녀리며 소외된 존재들의 소리없는 외침인 셈이다.

 

시끄러운 세상에 묻혀진 작은 소리들을 들어주는 것. 그래서 그 소리에 담긴 작지만 큰 외침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주고 또 알려주는 것. 그것을 이 드라마는 차진우와 정모은이 서로의 진가를 알아가고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담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이 하고 있는 그림, 연기 그리고 음악(정모은의 친구 윤조한(이재균)이 하는)이 큰 소리 내지 않아도 그 무엇보다 크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려내려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장애라는 이름으로 치부하며 때론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하는 저들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메시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야 말로 진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좀 부럽기도 해요. 귀가 늘 열려 있다는게 괴로울 때도 많거든요. 들리는 모든 순간이 다 감사하진 않아요.” 태호의 그 말에 차진우도 공감한다. “그래 가끔은 못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떤 말은 듣지 못해서 새긴 상처보다 더 깊은 흉터를 남기니까.” 그러면서 태호의 등을 차진우가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이 드라마가 우리의 등을 토닥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사진 : 지니TV)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조선도 현대도 일하는 이세영이 빛나는 이유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박연우란 이름은 늘 내 것이 아니었소. 그래서 부러웠어요. 새 조선 사람들이 누구든 제 이름으로 사는 것이.” MBC 금토드라마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에서 박연우(이세영)가 그렇게 말할 때 불쑥 이세영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 겹쳐진다. “여기선,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설령 사소한 거라도 좋아. 선택이란 걸 하며 살고 싶어.” 어린 성덕임은 자신의 이름으로 서는 주체적 삶에 대한 갈망을 그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이 이산 정조(이준호)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세 번이나 거절의 의사를 표한 이유는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며 자신을 거부하는 성덕임에 오히려 이산은 더 애틋해지고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에서 현대로 훌쩍 넘어온 박연우가 자수에 남다른 능력을 보이고, 그것으로 계약결혼을 하게 된 강태하(배인혁)를 오히려 돕는 존재가 되면서 이 인물은 점점 빛나기 시작한다. 

 

사실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의 초반부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조선에서 혼례를 치르지만 첫날밤 남편을 잃은 박연우가 누군가에게 보쌈을 당해 우물에 내던져지는 그 상황 속에서 이 인물의 능동적인 이야기는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우물을 통해 마치 시간의 터널을 빠져나오듯이 현대로 들어오게 된 박연우 역시 이 낯선 세계 앞에 자기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현대에 오게 되어 모든 게 낯선 상황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코미디로 주로 엮어졌다. 초코파이에 매료당하고, 문도 차문도 제대로 못여는 모습이나, 조선 사회와는 너무나 다른 일상 앞에 놀라고 무너지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게다가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곳에서 집도 가족도 하나 없는 이 인물이 어찌 자신의 존재를 매력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싶었다. SH서울의 부대표인 강태하(조선에서의 죽은 남편과 얼굴도 이름도 같은)의 천거를 받는 조선에서 온 신데렐라 정도랄까. 

 

하지만 조선에서의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한 한복 브랜드 미담의 이미담(김여진) 대표를 만나고, 그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박연우의 매력과 존재감은 빛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 다름 아닌 어머니에게 배웠던 자수 실력과 남다른 안목으로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이미담은 그 능력을 알아보고 박연우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고, 박연우는 이 능력으로 호시탐탐 강태하를 밀어내려는 민혜숙(진경) SH서울 대표의 공격을 막아낸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그러했지만,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에서도 이세영은 일할 때 가장 빛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가 연기한 성덕임이나 박연우 모두 일할 때 더 빛나는 건 이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 속에 그저 매몰되는 캐릭터를 더 이상 우리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일 게다. 사랑에 목매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영역이 존재하고 거기서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존재여야 지금의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다.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은 그래서 이세영이 전면에서 끌고 가는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매력이 폭발하는 순간에 시청자들도 이 드라마에 반색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5.6%(닐슨 코리아)로 시작해 박연우가 드디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6회에 9.6%로 시청률이 급등한 게 우연이 아니다. 웃음을 주면서도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세영의 매력에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사진:MBC)

‘연인’, 남궁민과 안은진의 파란만장한 사랑에 빠져드는 이유

연인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터지면서 드라마가 탄력을 받았다. 5%(닐슨 코리아)대에 머물던 시청률이 병자호란을 두고 펼쳐지는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의 긴장감 넘치면서도 절절한 서사를 기점으로 급상승했고 7회에는 드디어 10%대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처럼 <연인>이 탄력을 받은 건 전쟁 상황이 각성하게 만든 이장현과 유길채의 진면목이 매력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떨어져 있게 된 두 사람 사이에 조금씩 애틋한 마음들이 생겨나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임금을 구하겠다 나서는 이들 가운데서, 임금보다는 사랑하는 이들과 백성을 구하려 애쓰는 이장현의 선택이 현재의 시청자들을 설득시켰고, 그 전쟁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지켜낸 유길채의 납득되는 성장이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했다. 

 

이래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서사가 계속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고 피난 가던 이들은 다시 고향을 찾았다. 헤어졌던 이장현과 유길채도 다시 만났고, 유길채가 짝사랑했던 남연준(이학주)도 전장에서 살아 돌아와 경은애(이다인)와 혼례를 치렀다. 청보리밭에서 이장현과 유길채가 전쟁 전처럼 아옹다옹하다 함께 쓰러져 입맞춤을 하는 장면은 이제 또다시 전쟁 전의 달달한 사랑의 밀당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병자호란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여파가 남긴 상흔은 여전했고, 그 속에서 이장현과 유길채의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이장현이라는 인물의 본격적인 서사는 사실상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끌려가게 된 소현세자(김무준)를 따라 심양에 역관으로 따라가게 되면서 이장현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지고, 이렇게 또 다시 이역만리 떨어지게 된 이장현과 유길채의 운명적인 사랑도 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최영우)의 신임을 받는 청나라 여관 정명수(강길우)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고변을 한 이들이 오히려 대거 숙청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장현 또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의 전쟁은 계속 이어진다. 이장현이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지가 궁금하고, 이 사건으로 그가 죽은 줄 알고 절망하는 유길채가 다시 그를 만나게 됐을 때 어떤 변화를 보여줄 지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장현이 이 사건을 계기로 시시각각 위기에 내몰리게 되는 소현세자를 어떻게 보필하고 성장시킬 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역사는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된 소현세자가 점점 성장해 그 곳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쌓았고 또 이 곳에 끌려 온 조선인들을 위한 농장도 만들면서 자신의 세력과 영향력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과정에 이장현이라는 인물의 역할을 드라마는 그려낼 모양이다. 

 

물론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결국 생존하게 된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3달도 못되어 사망한다. 그건 드라마 속 인물인 이장현의 삶에도 또 그와 점점 애틋해질 유길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긴 삶의 여정을 통해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는가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 뭉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천진하고 때론 장난치길 좋아하는 이장현과 유길채가 보여준 드라마 초반의 모습은 그래서, 이들이 긴 세월을 거쳐 완전히 달라질 모습과 마주하게 될 때 소회가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건 이들의 삶이 병자호란만이 아니라 평생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놓이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비장함이다.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의 이야기가 갈수록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다.(사진:MBC)

 

끝내 마음에 그려진 김다미와 전소니의 우정, 아니 사랑(‘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하은(전소니)은 미소(김다미)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자신의 마음을 봤을까. 민용근 감독의 영화 <소울메이트>는 하은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미소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그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필로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그 선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을 그린 하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울메이트>는 그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 그림으로 끝난다. 그림 속 미소의 얼굴은 학창시절 하은과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와 함께 제주의 어느 산길을 오르다 찍힌 사진이다. 돌아보는 미소를 순간 찰칵 찍어낸 하은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미소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게다. 풋풋한 청춘의 건강함이 묻어나는 미소의 그 얼굴은 어딘가 놀란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덥고, 지루하고 졸리고 나른하던 어느 날 전학 온 미소는 오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가 바다가 보이는 뚝방 위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런 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엄마마저 그 아이를 제주에 남겨 놓고 떠났다. 외롭게 괴로웠을 미소지만, 그는 이름처럼 늘 생글생글 웃으며 하은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성장한다. 

 

미소는 그가 ‘찐’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스 조플린을 닮았다. 27살의 나이에 활활 타올랐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티스트. 같은 나이에 요절한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과 더불어 3J로 불리며 이른바 ‘27살 클럽’의 멤버 중 하나로 불리는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 그는 미소에게는 자유의 존재로 읽힌다. 제니스 조플린의 명곡 ‘Me & Bobby McGee’에 나오는 가사 내용 중 ‘자유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 left to lose)’이라는 대목이 미소가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자유’의 면면을 잘 설명해준다.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 성북동 달동네 위에 있는 도시 속 섬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소는 하은에게 자유로운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바이칼 호수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그 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엽서를 가져온다. 미소는 결코 제니스 조플린처럼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자유를 늘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엄마마저 돌아가셔 남은 가족조차 없는 미소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었지만, 퍽퍽한 삶은 그 어디도 그를 날게 해주지 않았다. 

 

반면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하은은 미소의 그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조차 타지 못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 그리지만 제주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지낸다. 제주와 서울로 떨어져 지내며 하은과 미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보듬으면서 우정 그 이상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다른 삶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하은은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반면, 그런 틀 자체가 싫은 미소는 입시 미술 학원에서 데생을 할 때조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들이 학창시절 비 맞은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그리는 장면에서도 하은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린 반면, 미소는 추상적인 고양이의 형상에 마음까지 그려 넣는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일 뿐, 재능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하은과 미소의 그림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소울메이트>는 그림을 매개로 해서 서로를 완성하고 채워가는 하은과 미소의 우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아낸다. 맞다. 그건 사랑이다. 그저 이성과 동성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폴더폰이나 싸이월드, MP3, 펌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오브제들은 당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의 마음을 추억 속으로 소환시킨다. 하지만 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뉴트로를 힙하게 바라보는 MZ세대들의 마음 또한 이 작품은 툭툭 건드리고 있다. 마치 ‘인생네컷’ 사진을 통해 바로 찍은 디지털 사진을 즉석으로 인화해 손에 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픈 MZ세대들의 취향을 이 작품은 레트로한 영상과 색감, 정서 등으로 사로잡는다. 

 

그 위에 하은과 미소의 한 평생을 담아낸 마음들을 이를 연기한 김다미와 전소니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만든다. 특히 이미 <마녀>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해, <이태원 클라쓰>로 걸크러시를 보여주고는 <그해 우리는>으로 달달한 감성까지 전해줬던 김다미는 이 작품 속 미소라는 청춘의 초상을 통해 자유와 슬픔, 그리움과 행복 등이 버무려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초상을 상징하는 듯 그림 속에 얹어진 그의 얼굴로 시작해 그의 얼굴로 끝을 맺는 영화는 그래서 김다미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뇌리에 새겨넣어준다. 

 

“이젠 니 얼굴을 그리고 싶어. 사랑 없인 그릴 수조차 없는 그림 말야.”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는 하은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는 그런 미소의 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야기고, 그래서 이성애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이 쉽사리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은 그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만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찬란하면서도 슬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데서 오는 먹먹함 때문이 아닐까.(사진:영화'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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