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한여진과 김태희의 반전은 가능할까

 

무릎 꿇어!” 한여진(김태희)의 이 한 마디는 <용팔이> 핏빛 복수극의 서막이 될까. VIP 병동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한여진의 개인병동은 병실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최첨단 시설들이 들어차 있다. 마치 SF 장르에 나오는 미래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최첨단의 공간은 그간 한여진을 묶어 놓는 감옥이었다. 그녀는 그 곳에 눕혀진 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용팔이(사진출처:SBS)'

그런데 이제 깨어나 다시 그 병실로 돌아온 한여진에게 그의 아버지는 그 곳이 바로 너의 왕좌라고 말했다. 눕혀져 있던 병상은 세워져 왕좌가 되어 있었고, 그 곳에 앉은 한여진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한신그룹의 비자금 내역을 손에 쥐고 회사의 모든 중역들과 정재계 인물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병상을 용상으로. <용팔이>에서 이 한여진의 병실은 중요한 이중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반 서민들의 병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첨단 시설이 들어간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관에도 불구하고 한여진은 그 시설에 갇히고 묶여진 존재로 그려졌다. 만일 이 화려한 병실이 부유한 삶이 가진 자본의 풍경을 표징하는 것이라면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기구함은 재벌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본에 포획된 기구한 운명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한신그룹이라는 재벌가는 그래서 마치 자본 쟁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본기계들의 정글이다. 고사장(장광)이 자본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범죄자의 얼굴을 갖고 있고, 그와 모의하는 한도준(조현재) 회장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마치 조폭의 세계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자본의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결국 <용팔이>에서 이 비정한 자본의 세계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은 한여진이다. 그녀는 오랜 동안 병상에 묶여진 사슬을 끊고 나와 이제 그 곳을 용상으로 바꾸려 한다. 물론 그녀의 옆에서 그녀가 싸울 수 있게 지지해주는 김태현(주원)이란 존재가 있지만, 그녀의 핏빛 복수극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 지가 <용팔이>의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되는 셈이다.

 

<용팔이>가 초반의 그 몰아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김태현이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됐다. 스스로 속물의사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돈 없으면 살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는 병동에서 어떻게든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이 숨은 휴머니스트의 안간힘에 시청자들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김태현이라는 휴머니스트의 동분서주에만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이 한신병원으로 표징되는 자본의 부조리한 세계와 그 폭력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 열쇠를 쥔 인물은 결국 한여진이다. <용팔이>의 후반부 이야기가 한여진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늘 누워 있고, 깨어나서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실어증을 가장한 채 한신병원에 숨어들어 있는 한여진이란 존재는 마치 연기자 김태희의 처지를 그대로 닮았다. 물론 그 누워 있는 연기가, 얼굴을 가린 채 실어증을 가장하는 연기가 쉬운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자로서 드라마에서 확실한 자기 존재를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병상을 용상으로 바꾸려는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변신과 누워만 있다가 이제 깨어나 핏빛 복수극을 시작하려는 김태희라는 연기자의 반전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과연 한여진은 병상을 용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한 김태희는 이 연기를 통해 자신의 연기자로서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까. 한여진과 김태희의 반전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연예인, 그들만의 세상에 무슨 공감대가 있으랴

 

<아빠를 부탁해>는 지금 최대의 위기다. 시청률이 쭉 빠져 일요일 예능 대결에서 계속해서 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더 안 좋은 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예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여기 출연하는 아빠들의 삶이 마치 우리네 삶처럼 다가왔었고, 그래서 그 아빠를 바라보는 딸들이 그토록 예쁠 수가 없었다.

 


'아빠를 부탁해(사진출처:SBS)'

하지만 이런 공감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버렸다. 프로그램 초기만 해도 아빠와 딸이 그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빠에게도 하나의 도전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미 어느 정도 소통을 하게 된 아빠와 딸들의 관계 속에서 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소통이라기보다는 그저 놀러 다니는 것처럼 비춰지게 되었다.

 

딸 다은이와 함께 남이섬을 찾은 것에 대해 강석우는 과거 <겨울 나그네>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강석우와 다은이의 방송분 어디에서도 그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강석우와 다은이가 짚와이어를 타는 장면과 번지점프를 하려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장면만 있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모로 지난 리마인드 웨딩을 했던 강석우네 가족의 이야기에 쏟아진 비판을 의식한 면이 있다.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너무 사적인 일에 방송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 작정한 듯한 느낌이 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이섬까지 갔던 그 본래의 의도를 모두 지워버리는 건 이 프로그램이 가진 자의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면면을 드러낸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조재현의 딸 조혜정이 연기연습을 위해 오빠에게 가발을 씌우고 미용 실습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조혜정이 드라마에 미용사 역할로 캐스팅되어 그 준비를 하는 장면이다. 물론 조재현은 그러한 딸의 연기연습이 연기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지만, 사실 이런 내용이 <아빠를 부탁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거기에서 과연 우리네 보통 50대 아빠들의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까.

 

공감이 사라진 지점에는 저들만의 세상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삶을 왜 시청자들이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만 남을 뿐이다. 50대 아빠들의 공감대를 목적으로 했던 이 프로그램이 자꾸만 딸 연예인 시키려는 방송이라고 오인 받게 되는 건 그래서다. <아빠를 부탁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초심, 즉 우리네 보통의 50대 아빠들이 갖는 삶의 여러 측면들을 프로그램이 공감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삶이 아닌 저들만의 세상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나갈 때 시청자들의 이탈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연예인들의 실제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연예인 가족 관찰카메라는 그래서 쉬워보여도 결코 쉽지 않은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즉 어쨌든 카메라는 그들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 닮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잘 사는 집이 비춰질 때면 시청자들로서는 부러움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화감을 느끼게도 된다. 이 차이는 전적으로 프로그램이 본래 갖고 있던 기획의도를 잘 지켜내고 있는가 아닌가에서 결정된다.

 

이것은 현재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나마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이 역시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여러 차례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준 적이 있다. 갖가지 PPL의 전시장이 되거나 똑같은 육아라고 해도 저들만의 화려한 삶의 일단이 발견되는 지점에서 시청자들은 고개를 돌리게 된다.

 

제 아무리 위장막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삶이 우리네 보통의 삶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가려져 있던 것들이 차츰 오래 반복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조금씩 시청자들에게는 그것이 이질감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연예인들이 잘 사는 것이야 그것만으로 무에 잘못된 것이 있을까. 중요한 건 그 잘사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지고 방송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삶이 힘들다고 얘기하지만 기획의도를 벗어나는 순간 서민들의 눈에는 그것이 놀면서 돈 버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힘들다는 얘기가 실제 치열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빠를 부탁해><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연예인 가족 관찰카메라에 대한 공감이 갈수록 사라지는 건 그래서다. 보편적인 육아나 가족관계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할 때 그것은 저들만의 세상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서민들의 공감대는 있을 수 없다



내 일 같은 <동상이몽>, 과한 편집도 수긍되는 까닭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눈꽃열차를 타는 거라고 말하는 엄마는 강원도가 미지의 세계라고 하셨다. 광주에 살면서 고작 강원도를 미지의 세계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런 여행조차 갈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거의 뛰듯이 하루 종일 일 속에서 사셨다.

 


'동상이몽(사진출처:SBS)'

딸은 그런 엄마를 걱정했다. ‘눈꽃열차를 좋아할 정도로 예쁜 걸 좋아하시던 엄마가 일 때문에 그런 감성조차 잊고 사시는 걸 걱정했다. 새벽에 녹초가 되어 쓰러진 엄마 대신 마치 우렁각시처럼 집안일을 해놓고 잠이든 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가 들려준 이야기는 빠른 엄마와 느려터진 딸 사이의 갈등이었지만 거기에는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두 사람의 입장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일하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며 조금은 느리게 살았으면 하는 딸의 입장.

 

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은 지금 우리네 보통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쉬지 않고 달려야 되는 결코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옆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부모들의 노동. 그래서 몸이 아파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입만 열면 자식 걱정 가족 걱정이지만 정작 자기 걱정을 하지 않는 엄마가 그러나 딸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한 삶이 몸에 배어버린 엄마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그 엄마를 걱정해주는 건 역시 딸뿐이라는 이야기는 힘겨운 현실을 마주한 서민들의 삶이 그래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말해준다. 결국 그 힘겨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것 역시 가족의 힘이라는 것.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마트를 운영하며 정육 일을 하면서 몸에 익어버린 칼질에는 <생활의 달인>에서 느껴지곤 하는 그 삶의 신산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놀라운 정육 기술에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지만 그 달인이 되어버린 기술 이면에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게 노력하며 살았을까.

 

문이 닫힌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마트를 운영하는 엄마에게 여전히 눈꽃열차는 이루기 힘든 꿈처럼 다가온다. 예쁜 하이힐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는 뛰어다닐 수 있는 운동화를 신어야 되는 엄마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엄마가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그 마음을 낡은 운동화와 예쁜 하이힐에 담은 그림을 선물해주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딸이 엄마에게 가장 바라는 건 그냥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건 아마도 지금의 대다수 서민들이 바라는 것일 게다.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가족끼리라도 함께 조금의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는 그런 여지. 강원도 눈꽃열차가는 소소한 일이 심지어 꿈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는 그런 삶.

 

<동상이몽>은 때로는 짓궂은 편집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치곤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차례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앞부분은 과도하게 편집되어 비난받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그 비난을 뒤집어 감동으로 바꾸는 반전을 연출해낸다. 물론 때때로 이 편집은 과도해져서 불편한 악마의 편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 간의 숨겨진 사랑과 소통이 전제되기만 한다면, 조금 과한 편집조차 수긍되지 않을까. ‘눈꽃열차타는 게 꿈이라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입장에 숨겨진 가족애가 모두 공감되었던 것처럼.



싼 재료로 그럴싸하게... <집밥 백선생>이 바꿔놓은 것들

 

콩나물 100원 어치 주세요.” 3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어머니가 사온 100원 어치 콩나물로 반은 콩나물국 끓이고 반은 무쳐서 반찬을 내놓으면 그만한 밥상이 없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콩나물은 싸다. 천 원 어치만 사도 한 끼 음식으로 충분한 양이다. 5천 원이면 한 박스를 살 수 있다. 흔하고 싼 식재료라서 그런지 먹을 것 없는 가난한 밥상에 구색정도로 치부되기 일쑤인 게 콩나물이었다.

 


'집밥 백선생(사진출처:tvN)'

그런데 그 콩나물이 달리 보인다. <집밥 백선생>의 백종원 덕분이다. 백종원은 콩나물을 갖고 할 수 있는 남다른 음식들을 선보였다. 어린 시절 별식 중에 별식이었던 콩나물 밥, 술안주로도 좋고 해장으로도 좋은 얼큰 콩나물 찌개, 이게 콩나물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그럴싸한 닭갈비 소스를 이용한 콩나물 불고기... 값싼 재료라 늘 밥상 위에 올라와도 주연급(?)이 되지는 못했던 콩나물이 주인공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값 비싼 재료로 고급 요리를 만든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건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런 고급 요리를 만들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필요하다. 그러니 그런 요리를 방송으로 본다고 해서 일반 서민들에게 그만한 감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콩나물 같은 흔하디흔한 재료를 그럴싸하게 보이는 고급진(?) 음식으로 내보일 수 있는 꿀팁이라면 다르다. 가뜩이나 장바구니 물가가 들썩이는 요즘, 몇 천 원 어치 콩나물로 일과 술에 지친 남편의 해장국을 끓여주고, 아이 입맛에 딱 맞는 콩나물 불고기를 해줄 수 있다면 주부들로서는 반색할 일이 아닌가.

 

백종원의 음식은 딱 콩나물을 닮았다. 그리 특별하다거나 각별하지 않다. 그래서 굳이 요리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애매하다. 백종원 스스로도 요리가 아닌 음식이라고 말하고, 자신을 요리사가 아니라 사업가라 얘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집밥 백선생>에서 자신이 내보이는 음식이 전문 셰프들에게는 너무나 소소한 것이라는 걸 자인하곤 했다.

 

심지어 그는 음식을 선보이다가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콩나물밥을 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물을 맞추는 일인데, 미리 콩나물을 끓여 그 물로 밥을 한 후 거기에 끓인 콩나물을 얹는다는 건 발상의 전환이다. 그런데 끓인 물을 식히지 않고 밥을 하다 보니 밥이 질어진 것. 백종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이 신도 아닌데 실수할 수 있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걸 보며 아마도 백전노장의 주부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천 원어치 콩나물, 콩나물 밥 같은 흔한 음식, 그리고 때로는 예상외의 실수까지. 이것은 아마도 보통의 주부들이 늘 부엌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니 백종원을 특별한 요리사라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는 그냥 주부들이 매일 같이 하는 그 한 끼 식사를 좀 더 간단하지만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는 법을 그저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백종원 덕분에 이제 콩나물도 달리 보이게 생겼다. 어딘지 밥상 한 구석에서 구색으로 치부되며 억울해했을 콩나물을 밥상 중간으로 떡 하니 세워놓는 일. 늘 주방에서 음식을 해 내놓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 흔적도 별로 안 남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폄하되던 주부들의 식사 준비가 사실 매일 벌어지는 가족사의 중심이라는 걸 되새겨주는 일. 무엇보다 먹을 게 없어 콩나물국만 주야장천 끓여내며 자조해온 가난한 주부들에게 그 콩나물국이 얼마나 좋은 음식이냐고 알려주는 일. 그것만으로도 <집밥 백선생>에게 충분히 고마울 일이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