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다 되는 세상, <베테랑>의 서민 판타지

 

영화는 영화다. 하지만 때로는 영화가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베테랑>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배 기사(정웅인)를 재벌3세가 사무실로 데려가 두들겨 패고는 마치 맷값이나 된다는 듯이 돈을 건네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이미 어느 재벌가의 이른바 맷값 폭행 논란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사진출처:영화 <베테랑>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위신을 지켜야 할 회장님이 아들 보좌 제대로 못한다고 상무 직함을 달고 있는 부하직원을 엎드리라고 한 후 매질을 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점원에게 아들이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한 굴지의 재벌 회장님이 보복폭행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베테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어서 너무 영화적인 장면들은 우리에게 전혀 영화 같은 허구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최근 몇 년 간 벌어진 이른바 재벌가의 각종 갑질 논란은 심지어 그 안에 조폭과 분간이 가지 않는 폭력의 양상까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서민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맷값이라는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듯이 돈이 있으면 누구든 팰 수 있다는 그 생각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폭과 유사하지만, 그것이 주먹 vs 주먹도 아닌 vs 주먹이라는 점에서 서민들을 더욱 치 떨리게 만든다.

 

<베테랑>이 포착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을 개 패듯 패고는 마치 개에게 먹이 던져주듯 돈을 던지고, 돈을 뿌려 공권력을 움직이고 언론을 장악하고, 심지어 돈과 자리를 매개로 부하 직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가려는 비뚤어진 갑의 의식. 도무지 이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는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들을 영화에서나마 시원하게 두들겨보자는 것.

 

류승완 감독의 액션은 정평이 나 있는 일이지만, <베테랑>의 액션이 특히 폭발력을 만드는 건 이러한 갑질 사회 속에 늘 당하는 입장에만 서 있는 대다수 을들의 정서를 이 영화가 제대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고 말하는 서도철(황정민)이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돈을 채워 보낸 명품 백을 쏟아 부으며 거부하는 그의 아내 주연(진경)쪽팔리게 살진 않으려 한다는 일침은 그래서 답답했던 서민들의 마음을 뻥 뚫어주는 속 시원함을 선사한다.

 

그래서 영화는 액션보다 이런 갑질 하는 현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인물들의 면면으로 인해 더 유쾌해진다. 윗선 눈치 보면서도 부하직원을 끔찍이 챙기는 오팀장(오달수)이 회사원들의 팀장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면, 홍일점인 미스봉(장윤주)은 약자로서의 위치에 서곤 하는 여성들의 판타지다. 이들의 액션은 그래서 단순히 나쁜 놈 멋지게 때려잡는 카타르시스에 머물지 않는다. 발길질 하나만 날려도 그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정서적 공감 때문에 그 액션의 카타르시스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역시 영화는 영화다. <베테랑>은 그 영화 같은 현실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전혀 현실같지 않은 판타지로 죄지은 놈은 재벌이라도 벌을 받는다는 걸 보여주지만, 과연 진짜 현실도 그럴까. 비록 실제 주먹은 아니라고 해도 잔뜩 혹사시켜놓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노동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돈이면 사람도 팰 수 있다는 이 황당한 현실 앞에 서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베테랑>에 대한 열광은 그 분노를 판타지로 풀어냈기에 가능한 결과가 되었다



<소수의견>,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운 까닭

 

<소수의견>이 영화 시작과 동시에 자막으로 넣어놓은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기는 거꾸로 들린다. 오히려 그 자막은 이 영화가 특정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얘기처럼 보인다. 철거와 대치하는 원주민과 전경들, 그리고 투입되는 용역깡패들, 화염병과 물대포, 그리고 그 대치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 이런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굳이 용산참사를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네 현대사에서 이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진출처: 영화 <소수의견>

철거는 아마도 포크레인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도시들의 화려한 겉면 속에 남겨진 깊은 생채기일 것이다. 포크레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가 뜯겨져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 위에 다른 걸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증거를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 상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포크레인이 뜯어낸 곳에서 두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 한 명은 경찰이고 다른 한명은 철거에 대항하던 원주민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경찰을 죽게 한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원주민이다. 두 개의 관점이 쟁점화된다. 검찰은 경찰이 죽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 이 사건은 원주민의 의도적인 살해라고 주장한다. 한편 변호인은 아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밝혀 그 경찰의 죽음이 정당방위에 의한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려 한다.

 

죽은 두 아들들에게는 모두 살아있는 아빠들이 있다. 그래서 이 법정싸움은 당연히 이 아빠들 간의 대립이 될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경찰의 뒤에는 그들을 그렇게 움직인 권력자들이 있고, 그 권력자들을 움직이는 건 그 철거가 가져올 이익이다. 그러니 마치 포크레인이 땅을 푸고는 서둘러 그걸 덮어버리는 것처럼 권력자들은 검찰이든 경찰이든 법이든 언론이든 뭐든 이용해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 한다.

 

그러니 법정싸움은 아빠들의 대립이 아니다. 그건 이 사안을 만들어내고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덮으려는 국가와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소수 개인의 대결이 된다.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는 발상은 이 사건이 어느 개인의 부딪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무수히 얽혀 있는 권력과 관계자들에 의해 생겨난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정작 아빠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다. 죽은 경찰의 아빠가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한 대목은 영화가 왜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즉 아빠들이나 죽은 자식들은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그들을 대립하게 했고 희생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였다. 누군가에게 의해 내몰리면서 벌어진.

 

권력의 부패나 누군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화라는 이름의 개발은 국민을 희생자로 만든다. 도시화라는 미명하에 포크레인을 들이대고는 그 안에서 쏟아지는 서민들의 피눈물은 금세 마치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린다. 때로는 희생자는 가해자가 되어 법정에 세워지기도 한다. 약자로서의 서민들은 늘 소수의견취급 받는다.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만 덮어버리면 무시되는 소수의견.

 

영화는 그 소수의견이 절대 무시될 것들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또 서민과 서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걸 통해 이득을 가져가려는 저 뒤편의 움직임들을 이 영화는 조망하게 해준다. 끊임없이 서민들의 이야기를 소수의견으로 치부하며 덮으려는 시도들이 영화 속에서 반복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은 그것이 영화 속 극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면>이 드러내는 세 가지 가면

 

변지숙(수애)은 서민의 딸이다. 아버지 때문에 사채 빚 독촉에 내몰려 있는 그녀는 어느 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겪게 된다. 자신의 도플갱어인 서은하의 삶을 가면을 쓴 채 살아가라는 것. 대가는 어마어마한 재산과 지위다. 그거라면 지긋지긋한 빚쟁이들로부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악마의 유혹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본래 변지숙이었던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가면(사진출처:SBS)'

변지숙이 쓴 가면은 서민의 가면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절망적으로 선택한 거짓의 삶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 땅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 가진 가면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근할 때 그들은 누구나 저 마다의 가면을 꺼내 쓰고 나간다.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도 웃고, 웃음이 터지는 상황에서도 무표정을 연기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변지숙의 가면과, 그 가면이 벗겨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건 그 설정이 서민들의 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변지숙이 서은하인 줄 알고 정략 결혼한 민우(주지훈) 역시 가면의 삶을 살고 있다. 쇼윈도 부부로서 기업 간 합병하듯 결혼을 선택한 그의 삶은 거짓이다. 게다가 그는 신경증을 앓고 있다. 언제 자신 속에 있는 괴물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 그는 전전긍긍한다. 그는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하다. 가면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우의 가면은 상류층이라고 해도 쓰기 싫어지는 가면이다. 그 위치가 만들어내는 가면으로 심지어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씌워진다. 때로는 조작된 가면이기도 하다. 그를 전복시켜 부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석훈(연정훈)이 정신과 주치의를 이용해 민우에게 씌운 가면은 정신병자의 그것이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민우는 그래서 이런 가면이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민우가 가면을 쓴 채 정략 결혼해 만난 변지숙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기막힌 아이러니다. 만일 변지숙이 아닌 진짜 서은하였다면 민우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은하 가면을 썼어도 서민적 삶을 버리지 못하는 변지숙의 모습은 민우의 가면에 균열을 일으킨다. 정략결혼이 점점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은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가면을 조금씩 벗는 과정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메피스토펠레스 석훈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너무 많은 가면을 쓰고 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평범한 가장처럼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변지숙을 협박하고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끔씩 비뚤어진 그의 사랑 내지 욕망이 엿보인다. 변지숙을 통해 과거 그가 사랑했던 서은하를 보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가 변지숙과 민우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기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야심을 채워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옛사랑을 떨궈내야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석훈이 쓴 이 이중적인 가면은 야망과 개인적인 행복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류사회에 이제 막 진입한 서민 야심가의 자화상이 담겨져 있다.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의 갈등.

 

SBS 드라마 <가면>의 관전 포인트는 그 복합적인 인물들 덕분에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 세 인물을 등가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수애도 주지훈도 연정훈도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연기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 캐릭터들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가면이라는 설정을 통해 이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때론 분노하고 아파하며 때론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그 과정들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그것은 숨겼던 가면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애와 주지훈 그리고 연정훈은 마치 연기 대결을 벌이기라도 하는 듯 극중에서 팽팽하다. 어딘지 맹한 듯 보이지만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수애나, 진짜 신경증 환자처럼 날카로워 보이지만 때론 허당처럼 따뜻해지기도 하는 주지훈, 그리고 마치 악마에 영혼을 판 듯한 연기하는 자아를 보여주는 연정훈의 연기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흥미로워지는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준다. 그들의 연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어지는 이유다.

 

손현주, 평범함을 가장 잘 연기해내는 배우

 

그는 <아저씨>의 원빈처럼 멋지게 달리지 못한다. 베테랑 스타 형사지만 달리는 폼은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 같다. 원빈은 <아저씨>라는 작품에서 전혀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지 않지만, <악의 연대기>의 베테랑 스타 형사를 연기하는 손현주는 오히려 편안한 아저씨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 이 점은 아마도 손현주라는 배우가 관객들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일 것이다.

 

사진출처:영화<악의 연대기>

드라마 <추적자>는 그의 이런 친근한 이미지가 서민들의 정서와 만나면서 폭발한 드라마였다. 백홍석이라는 형사였지만 그는 형사라기보다는 한 평범한 아빠에 가까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무참한 죽음을 발견한 그는 아저씨 같은 몸으로 뛰고 또 뛰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힘겨움과 절박함이 오롯이 시청자들에게 느껴졌다.

 

<악의 연대기>에서 손현주가 연기하는 최창식 반장은 같은 형사지만 백홍석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그는 한 때 백홍석 같은 순수한 인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권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아줄이 거의 손아귀에 닿을 즈음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건이 터진다. 무슨 일에선지 그를 죽이려 하는 인물과 사투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

 

그가 백홍석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그것은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맨바닥을 굴러 어렵게 올라선 자리에 서게 된 최창식 반장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안에서 조금씩 생겨난 악의 씨앗들이 어느 순간 표면 위로 솟아오른 것일 게다. 선과 악의 경계는 그렇게 얄팍하고 어떤 계기에 의해 불쑥 그 얼굴을 내민다. <악의 연대기>는 바로 저 한나 아렌트가 홀로코스트의 수송담당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관한 글에서 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영화다. 악인의 얼굴? 그런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악의 연대기>라는 영화의 최창식 반장 역할에 손현주만한 연기자가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악역을 연기하고 있어도 어딘지 짠한 느낌을 주는 그런 배우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여전히 옆집 아저씨 같은 그 모습과 때로는 동료들을 동생들처럼 끔찍이 챙기는 따뜻함을 가진 인물. 최창식 반장에서는 저 손현주라는 배우가 가진 인간적인 냄새 같은 것이 묻어난다.

 

<악의 연대기>는 꽤 잘 짜여진 영화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반전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긴박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바로 손현주라는 배우다. 그는 영화 속에서 악역이지만 이상하게 관객들은 그 악역이 범죄를 은폐하려 하는 그 시도들을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걱정하며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러면 안되는데하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게 만든다.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물에서 인물에 이런 몰입을 하게 해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어떤 역할을 하든 일단 심정적인 동조나 동정을 하게 만드는 건 손현주의 연기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가 과거 누군가의 평범한 남편 같은 역할에서 완전히 다른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는 여전히 그 평범함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연기자다. 다만 다른 역할이라는 옷을 바꿔 입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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