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은 우리 대중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이 대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 담긴 정서를 한 마디로 담은 게 아닐까. 감독이 말했듯 문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다. 아침마다 그 곳으로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저녁에 돌아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재난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등굣길에 우연히 만난 사내 소타. 그는 폐허를 찾아다닌다. 스즈메는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이 알려줬던 폐허를 찾아갔다가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해주는데, 그것은 이승과 저승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이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문 앞에 놓인 고양이석상을 뽑아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문이 열리지 않게 몸으로 봉인해온 고양이신 다이진이었다. 문이 열리면 그 곳으로부터 미나미라는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오고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지진이 일어난다. 

 

문을 본 후 스즈메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미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거대한 미나미가 폐허에서 솟아나오는 걸 본 스즈메는 그 곳을 찾아가 애써 문을 닫으려 하는 소타를 발견한다. 소타는 미나미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단속을 하는 소임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도망친 다이진이 소타를 스즈메 엄마의 유품인 세발 다리 꼬마의자에 가둬버리고 도망치자, 스즈메는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다이진을 찾아 나선다.

 

말하는 고양이이자 신이 등장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는 문이나 저주를 받아 꼬마의자가 된 사람이 나오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판타지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지진이라는 재난상황은 일본에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아픈 현실적 상처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했다. 이 작품은 그래서 대지진이라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아름다운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지진이 남긴 상처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다. 

 

스즈메는 어린 시절 대지진으로 인해 엄마를 잃었고, 며칠을 엄마가 살아있다며 울며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타가 하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고 앞장선다. 문을 닫기 위해서 그 문이 있던 자리가 폐허가 되기 전 사람들이 나눴을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그래야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이 생겨난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난이 파괴해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그래서 이 순간에는 더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영화는 스즈메와 소타가 사라진 다이진을 찾아나서는 로드무비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여정 중 도처에서 열린 문으로 미나미가 튀어나오는 걸 두 사람이 막는 긴박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처럼 끔찍한 재난이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까지 보이는 두 사람의 여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해 마치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점이다. 그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스즈메를 챙겨주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온기를 전해준다. 

 

즉 이 이중적인 변주가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고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의미’ 같은 메시지를 강화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미나미가 보이지 않아 너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정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정조를 띤다. 그것은 곧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일상에 깃든 작은 빛들마저 축복처럼 느껴지게 구현해낸다. 심지어 도시나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이나 설렘, 두려움 같은 감정들까지 그가 그려낸 영상을 통해 전해질 정도다. 

 

반면 스즈메와 소타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 지진 때문에 엄마를 잃은 그 충격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소타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소타가 마침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되는 저주는 그래서 엄마가 만들어준 꼬마의자라는 점에서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세발 다리 꼬마의자는 뒤뚱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어 재밌는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 불안정함과 그럼에도 누군가 그 위에 앉으면 애써 버텨내는 소타의 모습을 통해, 재난이라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과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은유한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스즈메의 여정 속으로 들어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비극 같은 허망함 앞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결국 스즈메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폐허 위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다니는 어린 스즈메를 끝내 안아준다. 그리고 아이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 상황은 미래에서 온 스즈메가 과거의 어린 스즈메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어린 스즈메가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스즈메가 마주하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아마도 우리 식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에게 벌어졌던 그 많은 인재들을 대입해보면, 제대로 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한 미래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최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사 관련 문제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된 과거를 마주하지 않고 과연 미래의 문은 열릴까. 나라마다 다른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그걸 넘기 위해서는 저마다 과거에 벌어졌던 그 일들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비로소 과거의 문이 닫히고 미래의 문이 열릴 테니까. (사진:영화'스즈메의 문단속')

‘더블캐스팅’ 김지훈의 ‘귀환’, 무엇이 우리 마음을 울렸을까

 

노래를 듣던 멘토들도 자신의 역할을 잠시 잊고 눈물을 흘렸다. 절절하지만 담담하게 불러내는 노래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도 시청자들 역시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단 몇 분 동안 흘러나오는 노래지만, 그 노래 가사 하나 하나가 저마다의 머릿속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끄집어냈을 테니 말이다.

 

tvN <더블캐스팅> 톱12가 선보인 ‘한국 창작 뮤지컬’ 미션에 26살 김지훈이 고른 곡은 <귀환>의 ‘내가 술래가 되면’이라는 곡이었다. 이 뮤지컬은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주제로 한 것으로, ‘내가 술래가 되면’이라는 곡은 참전용사 승호가 퇴직 후 전사한 친구들의 유해를 찾아 산을 헤매는 내용을 담았다.

 

26살 김지훈에게는 결코 쉬운 선곡이 아니었다. 이 노래를 부르는 극 중 인물은 60대기 때문에 그 감성을 20대인 김지훈이 담아낼 수 있을까에 멘토들도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냥 노래로 할 건가요? 아니면 나이 배역으로 할 건가요?” 이지나 멘토의 이런 질문에 김지훈은 “승호라는 인물도 그리움을 갖고 있지만” 자신도 그리움이 있다며 그 감정을 담아 소년시절의 승호로 돌아가 부르려고 한다고 했다.

 

유해를 찾아다니는 승호의 심경을 어린 시절 자주 술래가 되어 친구들을 찾아다녔던 기억을 통해 전하는 노래였다. 그 가사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있던 그리움의 정조를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단풍나무 그늘 아래 여긴가, 산등성이 돌탑 뒤에 여긴가, 휘파람이 들리는 곳 여긴가, 다 어디 숨었니? 해 떨어지는데- 종이접어 비행기를 날리고, 작은 신발 구겨 신고 웃었지, 책갈피에 그림 한 장 품고서, 다 어디 숨었니? 해 떨어지는데-” 웬만한 강심장이라고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가사와 정조였다.

 

이런 가사와 정조를 김지훈은 26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면서도 애절함을 담아 고스란히 관객을 향해 전하고 있었다. 노래 실력을 보여주려는 것보다도 그 그리움의 감정을 노래를 통해 전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멘토들은 그 마음을 온전히 느꼈을 게다. 마이클 리와 차지연의 눈이 붉어졌고, 특히 죽음 저 편에 가 있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전하는 대목에서 엄기준은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어딘가 살아있다면, 그래서 여기 없다면, 나에게 소식 전해줘. 나 여기 있을 게. 밤 깊어가는 데, 혹시나 길을 잃어서, 잠든 채 숨어 있다면, 이제는 나타나 줘. 집에 가야지. 밤 깊어가는 데.”

 

아마도 <더블캐스팅>이라는 프로그램의 존재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낸 무대가 아니었나 싶다. 뮤지컬 오디션이 다른 건 그저 노래 실력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 극이 가진 인물의 감정을 전하는 연기에 있었다. 우리가 뮤지컬 가수라 부르지 않고 ‘뮤지컬 배우’라 부르는 건 그런 의미였다. 김지훈의 무대가 감동적이었던 건 그 짧은 순간에 뮤지컬이 가진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부를 때 어떤 감정이었냐고 묻는 엄기준에게 김지훈은 “사무쳤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기준은 노래를 듣다 “세월호랑 겹치면서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마이클 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노래 한 곡에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저마다 가진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힘. 그것이 뮤지컬이 가진 힘이 아닐까.(사진:tvN)

세월호부터 촛불집회까지, ‘한끼줍쇼’에서 이런 이야기 들을 줄이야

용산구 한남동에서 펼쳐진 JTBC 예능 <한끼줍쇼>는 쉽지 않은 난관들이 많았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집들이 많았고, 특히 외국인들이 사는 곳에 많아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두 팀이 모두 실패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문을 열어준 두 집 덕분에 극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만큼 힘들게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게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한남동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의 가정이 많아서였을까. 이번 <한끼줍쇼>는 그 이야기가 지금껏 봐왔던 여타의 동네들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주목을 끈 건 강호동과 유병재가 들어가게 된 남편은 한국인이고 아내는 싱가포르인인 다문화가정이었다. 

남편은 사진을 찍고 아내는 싱가포르 언론의 기자였던지라, 한류가 매개가 되어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했다. 아내인 창메이춘은 그 싱가포르 매체의 1호 한국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 일한 지는 3년 정도 됐다고 했지만, 그 3년 동안 한국은 꽤 큰 사건들이 계속 벌어져 정신없이 보냈다고 했다. 마침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벌어졌던 터라 그는 더 바쁜 나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어딘지 당차고 자기 주관이 확실히 보이는 그에게 강호동은 진짜 궁금하다며 “한국에서 수많은 기사를 썼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이 너무나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는 세월호 1주기에 남편과 함께 단원고에 방문했을 때 너무나 슬펐던 마음을 이야기했고, 위안부 할머니 만나기 위해 나눔의 집에 방문했을 때는 한 할머니가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려다 다친 상처를 보여줘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물론 기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우리도 직접 찾아보지 않은 우리의 아픔을 외국인이 찾아가 가까이서 들여다봤다는 사실은 어딘가 아이러니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외국인을 통해 듣고 있다는 사실도 그랬다. 아마도 그런 자리를 갖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그 날의 밥동무 강호동과 유병재가 그의 말에서 느꼈을 뭉클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강호동은 문득 “외신기자의 눈에 비춰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창메이춘은 차분한 목소리로 ‘촛불집회’의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사에서 제가 첫 특파원이었어요. 제가 이 곳에 온 이후 모든 일들이 정말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수많은 대형뉴스들이 터졌고 그건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었습니다. 제가 오기 전 대부분의 싱가포르 사람들이 영화, 드라마, K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한국에 온 이후 사람들은 한국을 한 국가로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음.. 촛불집회죠? 당시 제 친구가 물어보더라고요. 100만 명의 군중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데 어떤 폭력도 없었고, 모두 대통령 탄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니... 그 뭉친 국민에 모두가 감명을 받았어요. 대단해요. 한국사람 어떻게 이런 일 할 수 있는지.”

순간 <한끼줍쇼>가 아닌 <비정상회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지난 3년 간의 시간들.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그 3년 간 엄청난 큰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졌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은 우리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 아니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들이라는 것도.(사진:JTBC)

'전참시' 방송 파문, 고의성 없었다지만 의도는 다분했다

“이 사건에서 제작진의 ‘고의성’은 없었다는 조사 결과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이고 계십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저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아 조사위원들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의 고의적인 행동이 있었다면 MBC는 그에 대한 강도 높은 책임을 물음으로써 좀 더 쉽게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누구 한 사람의 고의적 행위가 아니라 MBC의 제작 시스템, 제작진의 의식 전반의 큰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MBC로서는 한 개인의 악행이라는 결론보다 훨씬 아프고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결론입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시점>에서 세월호 뉴스보도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활용하고 거기에 ‘어묵’이라는 자막을 사용한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마무리됐다. 결론은 ‘고의성’은 없었다는 것. 하지만 이 결론에 대해 대부분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식 입장을 통해서 MBC 최승호 사장 역시 그런 반응에 대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 누가 세월호 보도 장면을 예능 프로그램에 재미를 위해 갖다 쓰면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사결과에 대한 기자간담회에서 밝혀진 것처럼, 분명 그 세월호 보도 장면을 선택하고 뒷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한 건 제작진이다. 물론 그 영상을 선택한 사람과 직접 만진 사람 그리고 그렇게 흐릿하게 처리된 영상을 허용한 사람은 다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가 다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 그 장면이 세월호 보도 장면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호 사장도 공식 입장에 이 부분에 대한 침통한 심정을 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세월호 영상인줄 알면서도 ‘흐리게 처리하면 세월호 영상인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 해당 영상을 사용한 부분입니다. 타인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 있는 영상을 흐리게 처리해 재미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식이 문제입니다. 방송의 재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편집하는 영상이 누군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고민하지 않는 안이함이 우리 제작과정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그리고 MBC의 시스템은 그 나쁜 영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만들어진 뒤에도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보도 장면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를 위해 제작진이 그걸 활용했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고의성은 없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의도’가 있긴 있었는데 그 ‘의도’가 도대체 뭐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최승호 사장이 말하는 ‘고의성은 없었다’는 데 들어가 있는 의도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이나 비하의 의도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진은 왜 하필 그 아픈 장면까지 활용하게 된 걸까. 여기서 드러나는 건 다른 의도다. 그건 바로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어떻게든 ‘재미’를 주겠다는 그 의도이고, 그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가능하다는 인식이 만들어내는 의도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재미를 위해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행위까지 하는 그런 불순한 ‘의도’들이 생겨나게 된 걸까. 거기에는 ‘경쟁적인 환경들’이 존재한다. 시시각각 시청률로 환산되며 비교되는 방송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시선을 잡아끌려는 의도. 또 방송사 내부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데서 생겨나는 도덕적 해이. 그런 의도들이다. 

아마도 이번 사태를 ‘일베’의 침투라고 결론 내리고 관련자를 처벌한다면 보다 명쾌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이 문제를 ‘외부의 적’이 만들어낸 사안으로 처리하면 ‘내부의 문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일베에서 만들어진 영상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벌어지지만, 이른바 ‘일베 논란’ 같은 사태들이 방송사에서 반복되어 터져 나오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부의 구조적 문제도 적지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방송사 내부에서 그 경쟁구도 속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때로는 상식을 넘어서는 것조차 둔감해진 채 부절절한 영상을 편집해 사용하는 그 행위가, 일베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일베는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비뚤어진 경쟁적인 시스템 안에 이미 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재미와 관심을 위해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들까지도 자행되게 된 환경. 

그래서 이번 사태는 일베가 아니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일베이고, 고의성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미 내재된 의도가 시스템 속에 이미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최승호 사장이 말한 ‘MBC의 제작 시스템, 제작진의 의식 전반의 큰 문제’는 그래서 MBC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방송사들이 이번 사안을 ‘먼 산 불구경’이 아니라 자신들 내부에 존재하는 ‘불씨’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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