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원은 어떻게 소지섭을 압도했을까

 

곽도원의 무엇이 우리를 빠져들게 했을까. 사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곽도원이 악질검사 조범석으로 출연해서 더 악질인 최익현(최민식)을 발로 밟을 때부터 ‘이 존재감은 뭐지’ 했던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2시간 넘는 영화에서 짧게 치고 들어오는 미친 존재감 정도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매주 방영되는 드라마는 다르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진짜 중심은 소간지, 소지섭이 아닌가. 그런데 차츰 소간지보다 더 집중되는 캐릭터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미친 소, 곽도원이었다.

 

'유령'(사진출처:SBS)

<유령>에서 곽도원은 소지섭과 정확히 상반되는 캐릭터로 포지셔닝 되었다. 소지섭이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의 CSI풍 과학수사의 사이버 수사대 형사라면, 곽도원은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먼 일단 문부터 부수고 들어가는 전형적인 우리네 강력계 형사였다. 외모에서도 소지섭이 조각 같은 얼굴에 식스팩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곽도원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외모에 원팩의 몸을 가진 전형적인 아저씨 이미지였다.

 

수사방식도 정반대였다. 소지섭은 끊임없이 추리하고 사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면서 상대방과 두뇌게임을 한다면, 곽도원은 발품을 팔고 몸으로 부딪치는 수사를 펼친다. 용의자 앞에서도 예의를 차리는 소지섭과 달리 곽도원은 일단 욕을 날리고 엄포를 놓는다. 당연히 곽도원의 밀어붙이는 카리스마는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곽도원이 기존 마초형 형사들과 다르게 보였던 것은 그 와중에도 치밀한 면모가 있으면서도 가끔 여린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는 인간적인 냄새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유령>이라는 드라마는 확실히 소지섭보다는 곽도원에게 유리한 지점을 부여한 게 분명하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사이버 범죄들과 그 속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전문용어들은 보통의 시청자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것일 수 있었다. 게다가 잠시라도 놓치면 전체 맥락을 잃게 되는 촘촘한 드라마 구조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어려운 드라마로 인식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곽도원이라는 존재는 이런 어려움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입에 붙은 듯한 “-고 나발이고”식의 말투는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한 시점을 제공했다.

 

곽도원이 더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이연희의 연기력 논란도 한 몫을 차지했다. 본래 이 작품에서 멜로 구도가 만들어진다면 소지섭과 이연희가 그 역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극 초반에 생겨난 이연희의 연기력 논란은 이 드라마에서 아예 멜로 구도를 지워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연희의 존재감만큼 사라진 것이 소지섭의 존재감이 되었다. 소지섭은 형사로서 날카롭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멜로구도를 통해 친숙한 이미지를 덧붙였어야 그 캐릭터가 살 수 있었다. 멜로구도가 사라진 소지섭은 그저 사이버수사의 중심축을 맡은 역할로 감성적인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이 부분을 채워준 것이 곽도원이다. 이른바 미친 소와 쪼린 감자 사이에 생겨난 미묘한 감정에 대한 열광은 소지섭-이연희 라인이 깨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요구일 수 있다. 곽도원과 송하윤의 멜로라인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로써 곽도원은 좀 더 친숙한 형사로서 극의 중심에 섰을 뿐 아니라, 주연도 갖지 못한 멜로라인도 갖게 되었다. 사실상 주인공이 바뀐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것은 그만큼 곽도원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단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서 그가 행운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런 행운이 왔다고 해도 준비되지 않았다면 곽도원이 그 행운을 쟁취할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외곽에서 미친 존재감을 보이던 곽도원은 <유령>을 통해 확실히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지섭과 이연희의 존재감이 흐릿해질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대중들은 <유령>에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다. <유령>을 통해 우리는 곽도원이라는 배우를 얻었다.

작품이 배우를 따라주지 못할 때

‘카인과 아벨’에서 소지섭의 눈빛 연기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슬쩍 웃기만 해도 뭇 여성들의 가슴이 설렐 정도라는데, 남자가 봐도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죽여?”하고 소리치며 분노에 충혈된 눈을 볼 때면 이 광기의 배우가 가진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새삼 가늠하게 만들기도 한다. ‘카인과 아벨’에 소지섭이 있다면, ‘미워도 다시 한번’에는 최명길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순간 무너지면서 보여지는 아픈 속내를 드러낼 때면 그 고통이 뼛속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물론 이들 드라마에는 소지섭과 최명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는 앙상블이어서 받쳐주는 사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칫 드라마에 독만 된다. ‘카인과 아벨’에서 소지섭을 받쳐주는 악역으로서의 신현준이나, 상대역으로서의 한지민의 연기도 발군이다. 마찬가지로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최명길과 대립각을 이루는 전인화나 적과 아군을 넘나드는 최윤희 역할의 박예진 역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연기에 ‘명품 연기’라는 호칭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명품 연기’에 걸맞는 명작일까. 이 질문에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카인과 아벨’은 지나치게 많은 소재와 장르들을 덧붙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의학드라마에 복수극에 가족극에 액션, 멜로까지 거의 모든 소재와 장르들이 드라마의 전반부를 장식하며 온갖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종반에 다다른 시점에서 이 드라마는 그 많은 소재에 어느 것 하나 깊이 있는 접근을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전반부를 사로잡았던 기억의 문제는 후반부의 피투성이 형제간의 싸움 속에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또 의학드라마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는’ 의학이라는 측면은 어떤 고민이 배제됨으로써 그저 복수극의 한 방식으로만 활용된 측면이 있다. 멜로에 있어서도 그 중심축이 본래는 형과 아우 사이에 서 있는 김서연(채정안)에 초점에 맞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오영지(한지민)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출생의 비밀이나 서자와 적자 간의 대결 같은 소재는 이제는 좀 식상한 면이 있다.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도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악역 최치수(백승현)가 너무 쉽게 처리되는 모습에서는 어떤 허탈함까지 느끼게 만든다.

이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반부 중년의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듯한 스토리 라인에서 갑자기 치정극으로 치닫던 드라마는 이제 끝내 쓰지 않았어야 할 최윤희(박예진)의 출생의 비밀 카드까지 끄집어냈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이런 구조, 즉 과거의 비밀이 하나씩 카드로 제시되면서 드라마의 갈등국면을 고조시키는 이야기로 구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카드는 내연녀 은혜정(전인화)의 불륜 카드였고, 두 번째는 한명인의 첫사랑의 부활이라는 카드였으며, 세 번째는 최윤희의 출생의 비밀 카드였다. 과거의 비밀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끝없이 현재를 가로막는 이 드라마는 그 지나침 때문에 개연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명인과 은혜정이 최윤희와 며느리와 딸로 얽힐 가능성이 현실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명품 연기’는 확실히 드라마를 살린다. 스토리 구조가 아무리 어설퍼도 눈에 핏발이 서는 광기의 연기는 그 정도의 약점은 충분히 덮어준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드라마를 살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명품 연기는 돋보이지만 드라마는 묻히게 된다. 캐릭터는 보이지만 드라마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흔히들 출연료를 운운하면서 드라마 제작에 있어 배우 의존도가 너무 심하다고 말하곤 한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네 드라마는 지나치게 노동집약적(심지어 사고가 빈발하는)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부실하고 식상한 대본 위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명품연기를 볼 때마다 어떤 안타까움이 남는 건 그 때문이다.

 배우 소지섭과 한지민, 그 눈빛이 말해주는 것

연기하는 배우의 눈빛은 때론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카인과 아벨’에서 이초인과 오영지 역할을 각각 하고있는 소지섭과 한지민은 그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 김서연(채정안) 앞에서는 천진난만함으로 그 행복을 드러내던 이초인의 눈빛은, 중국의 사막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 절박함에 광기로 돌변하고, 기억상실을 겪게되면서 반쯤 풀린 눈빛이 된다. 한편 탈북해 국내로 들어온 오영지의 눈빛은 자신이 중국에서 가이드했던 이초인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떨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오빠를 보며 풀렸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초인이 자신 앞에 서자 경악과 반가움과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으로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눈은 실로 대사보다 더 깊은 감정을 드러낸다.

오영지와 이초인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면서 그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전한다. 기억을 찾아 헤매는 이초인의 눈은 마구 자란 머리카락 속에 감춰지거나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말을 건네고, 익숙한 병원 풍경 앞에서 그리고 우연히 보게된 김서연 앞에서는 그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집을 나간 이초인을 기다리다 지친 오영지의 눈은 화를 내며 운다. “당신 찾아다니다 피 말라죽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라는 대사와 어우러지는 눈빛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배는 안 고픕니까?”라는 따뜻한 질문에서 그 눈빛은 뾰로통해진다.

소지섭과 한지민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고 말하는 데는 바로 이 연기 속에 살아있는 눈빛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눈빛들을 우리는 톱스타에서 배우로 인정받은 연기자들에게서 발견한 적이 있다. ‘마이걸’과 ‘왕의 남자’로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벼락스타가 된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과 ‘일지매’에서 광기 어린 눈빛으로 꽃미남의 이미지를 넘어섰다.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에 갇혀 성장을 멈췄던 문근영은 ‘바람의 화원’을 통해 슬픔과 회한이 가득한 눈빛을 보여주며 배우 문근영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했다. 꽃미남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져 왔던 현빈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의 눈빛이 꽤 깊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트콤에서 코믹연기로 묻혀져 있던 김범의 눈빛은 ‘에덴의 동쪽’을 통해 살아났다.

톱스타로서 가지는 눈빛이 단순한 것이라면 배우로서 가지는 그들의 눈빛은 복합적이고 미묘하게 벼려져 있다. 많은 톱스타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단지 대사를 잘 읊고 지문대로 행동을 보여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보다 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눈빛으로 연기할 수 없을 때 캐릭터와 배우는 겉돌게 되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는 매개해주는 배우로 인해 캐릭터에 오히려 몰입할 수 없게 된다. 배우를 캐릭터와 시청자가 매개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로 볼 때, 캐릭터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톱스타의 눈빛을 고수하는 자는 배우가 아니다.

한지민이 ‘이산’에서보다 ‘카인과 아벨’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 북한 사투리를 써야하고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밝은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오영지라는 배역자체가 그녀의 배우로서의 눈빛을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톱스타가 배우가 되는 데는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배역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벼락스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가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인기는 배우 이민호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캐릭터 구준표에서 온 것이 맞다. 따라서 갑자기 톱스타가 된 이민호가 배우로서 자리하기 위해서는 그걸 뛰어넘은 수많은 연기자들의 그 살아있는 눈빛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톱스타의 눈빛은 단순하고 배우의 눈빛은 깊다. 생명력에 있어서 톱스타는 짧고 배우는 길다는 면에서, ‘톱스타보다 배우’의 눈빛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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