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최민식의 인생 도박 모험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

카지노

역시 최민식은 최민식이다. 3회까지 첫 공개된 디즈니+ <카지노>는 한 마디로 최민식의 아우라가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과, 깡패들 사이에서 보여주는 살벌함과 더불어, 최민식 특유의 쓸쓸하고 처연한 정서가 더해져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은 종횡무진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툭하면 사고를 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깡패 아버지와 그에게 돈도 뜯기고 연일 두드려 맞으면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 사이에서 거친 삶과 동시에 인간적인 연민도 가진 인물, 차무식. 그의 80년대와 2000년대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카지노>의 서사다. 그는 어쩌다 필리핀까지 가게 되어 그 곳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대부가 되는 인물로, 그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도박판 위에서 그가 순간순간 던지는 레이스에 가깝다. 

 

시청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 인생 도박 모험의 롤러코스터를 바로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체험하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 수백억씩 되는 돈을 주무르는 욕망의 레이스도 있지만, 돈과 연결된 범죄의 어두움과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살벌한 누아르적 분위기도 빠지지 않는다. 최민식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인 얼굴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친구들에게는 끈끈한 친구의 얼굴이지만, 여지없이 살벌한 범죄자의 얼굴이기도 하고 때론 어머니를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이 여러 얼굴을 프리즘처럼 보는 와중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험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그의 과거에 깃들인 복고적 풍경들과 사건들이 향수를 자극하고, 이미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이라면 차무식이 하는 어떤 선택들이 일으킬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면서 보게 되는 기대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도박, 폭력이라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지만 <카지노>에 감성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건 차무식의 이런 다차원적인 얼굴이다. 최민식의 아우라가 <카지노>를 쥐락펴락하며 끌고 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 

 

스타일로 보면 <카지노>에는 여러 결들이 겹쳐져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같은 누아르적 분위기가 묻어나고, 마치 <나르코스> 같은 다큐 영상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연출이 더해져 있다. 또 80년대와 2천 년대를 오가며 당대의 시대적 풍경을 담아내는 지점에서는 <파친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카지노>를 <카지노>로 만드는 건 역시 최민식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칠면서도 감성적인 정조가 <카지노>만의 차별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물론 최민식 이외에도 <카지노>에는 벌써부터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이 즐비하다. 무식의 아버지 역할의 김뢰하는 물론이고 무식의 청년시절을 연기한 이규형, 필리핀에서 무식과 카지노 동업을 시작하는 민석준 역할의 김홍파, 국세청 조사 팀장 강민정 역할의 류현경, 무식의 진정한 은사로 짧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진선규 등등 조연들의 활약이 빛난다. 그 누구보다 무식이 필리핀에서 만난 상구 역할의 홍기준은 <카지노>가 발견해낸 보석같은 배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본 게임에 들어올 배우들은 아직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동휘, 손석구, 허성태, 김주령 같은 향후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3회만 먼저 공개되었지만 이미 서사의 몰입감은 다음 주를 못내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촘촘하게 쌓였다. <범죄도시>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액션 연출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물의 감정을 촘촘히 그려내면서 서사를 쌓아가는 실력도 만만찮다는 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작품으로서는 분명 모두가 기대할만한 수작이다. 과연 디즈니+가 가장 기대했던 만큼, 그만한 파장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이라는 건 분명해졌다. 그간 좋은 작품을 내고도 생각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디즈니+가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디즈니+)

‘나의 해방일지’가 해방시킨 배우들의 무한 매력들

나의 해방일지

김지원 하면 먼저 떠오르던 작품이 <태양의 후예>였다. 윤명주라는 캐릭터는 서대영(진구)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사랑받았고 김지원은 인생캐릭터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김지원의 인생캐릭터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으로 경신되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라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대사가 한동안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따라다닐 것일 테니 말이다. 

 

좋은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 마련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간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무한한 매력을 해방시키고 있다. 김지원이 염미정이라는 인생캐릭터로 툭툭 던지는 엉뚱한 말들은 묘하게도 이 배우가 가진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배우의 매력을 해방시키는 건 예사롭지 않은 대사들이다. “날 추앙해요”도 그렇지만 염미정이 구씨(손석구)와 함께 밤중에 산길을 오르며 깔리는 내레이션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염미정과 함께 이른바 ‘추앙커플’로 불리는 구씨도 만만찮다. 아마도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이 인물은 대사도 별로 없고 일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 갑자기 멀리 뛰기 선수처럼 훌쩍 어떤 무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더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는 자신을 염미정이 “쫄게 한다”는 말로 기막힌 추앙의 감정을 드러낸다. 

 

<마더>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했던 손석구는 <최고의 이혼>에서 이엘과 호흡을 맞추며(그러고 보니 <나의 해방일지>로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멜로가 체질>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로 이어진 손석구의 이런 분위기 있는 연기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드디어 귀결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염미정의 언니로 왜 날 아무도 사랑하지 않냐며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어딘가 그래서 귀여운 염기정 캐릭터를 입은 이엘과, 그 염기정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이 되어가는 조태훈(이기우) 역할을 연기한 이기우도 마찬가지다. 차였지만 찬 것 같은 기분에 좋아하는 조태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염기정이 드디어 조태훈과 연인 관계가 되는 순간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박해영 작가의 대사로 두 캐릭터가 빛을 발했다. 

 

엉뚱하게도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고 결심했다는 염기정에게 조태훈이 던지는 대사가 심쿵 그 자체다.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머리 밀지 말라는 대사도 곱씹어보면 너무 웃기고, 아무나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이토록 심쿵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싶다. 이러니 이 배우들까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인생캐릭터’를 이야기하며 염창희 역할의 이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조잘조잘 투덜대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물. 그런데 이 인물이 끝없이 던지는 이야기들은 기상천외하고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차, 그것도 5억이나 가는 차를 구씨를 통해 얻어 타게 된 염창희가 그런 경험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꿔놓았다고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할머니 산소, 동네 저수지 같은 곳을 혼자 그 차를 타고 다녔다는 염창희는 의외로 자랑하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털어 놓는다. “몰랏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어려서 사회과부도 보는 거 좋아했거든? 희한하게 그것만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머릿속으로 막 다녀. 춘천도 가고 광주도 가고 부산도 가고 울릉도까지. 꼭 그 때 같애.” 갈망할 때는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하게 되니 여유로워지는 마음. 그걸 ‘다정’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로 염창희라는 캐릭터가 그걸 입은 이민기라는 배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남매의 동네 친구로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을 질깃질깃하게 살아내는 지현아 역할의 전혜진, 염기정의 동창이며 조태훈의 누나인 조경선 역할의 정수영, 염기정 회사의 로또 선물하는 이사로 갈수록 매력을 드러내는 박진우 역할의 김우형, 진짜 그런 곳에서 싱크대를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염제호 역할의 천호진, 역시 딱 진짜 같은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할의 이경성,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네 카페 사장 오두환 역할의 한상조, 가끔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석정훈 역할의 조민국까지... 배우들이 저마다 빛난다. 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인생캐릭터라니... 배우들이 추앙할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에 대한 추앙이 말해주는 것들

나의 해방일지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되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은 구씨(손석구)에게 뜬금없이 ‘추앙’이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붕뜬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2회 말미에 ‘추앙’이라는 대사가 나온 후 2주가 지나 5회 정도에 이르자 이 대사는 어딘가 유행어처럼 될 조짐을 보인다. 적어도 “날 추앙해요”라는 말 한 마디로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을 쉽게 구분할 정도다. 

 

추앙이라는 단어는 미정이 뱉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구씨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으로 추앙이라는 단어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라는 뜻을 찾아보는 구씨. 그리고 뜬금없이 미정에게 “확실해?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돼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있을 거라며?”하고 툭 던지는 말이나, “하기로 한 건가?”하고 미정이 묻자 “했잖아. 아까 낮에.”라며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갖다 주려 넓이 뛰기 선수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던 일을 말하는 구씨.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라는 캐릭터는 독보적이다.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인물이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투, 말까지 예사롭지 않다. 누군가 던지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가 갑자기 온몸으로 보이는 ‘추앙의 행위’는 그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만큼 더 강력한 힘으로 터져 나온다. 

 

미정네 집 밭일과 공장일을 도와 주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멀리 걸어 나가야 있는 마트에서 결국은 술이 모자라 또 나가야 할 걸 알면서도 꼭 두 병씩만 사서 집에 돌아오는 사람. 그리고 홀로 평상에 앉아 산 저편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러려니 멍하니 그 비를 맞고 있는 사람. 이상하게도 마음이 측은해지고 ‘추앙’ 같은 비일상적인 단어도 막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구씨다. 

 

도대체 이 미스테리한 인물의 정체는 뭘까. 왜 박해영 작가는 이런 인물을 미정네 집 근처에 포진해 놓은 걸까. 미정을 추앙하는 몸짓으로 웅크렸던 날개를 펴고 날았던 일 때문에 창희(이민기)는 하루 종일 구씨 이야기를 한다. “오늘 날 진짜 뜨거웠거든? 머릿 가죽 다 벗겨지는 줄 알았거든? 인간 염창희 이렇게 고추 따다 뒤지는구나. 고추는 뭐고, 나는 뭐고, 태양은 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구씨 뛰는 거 보자마자 그냥 정신이 번쩍 드는데...”

 

창희가 추앙하기 시작한 구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작은 변두리 마을에 자신을 가둬둔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구씨라는 인물 때문에 이 변두리 마을과 서울을 오가며 매일 가짜 행복과 가짜 위안에 지쳐가며 ‘채워진 적 없는’ 미정과 창희가 조금씩 변화해간다. 미정은 대뜸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비 오고 천둥치는 날 그가 걱정되어 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창희는 구씨의 비상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삶에 작은 활기를 찾아내고, 집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구씨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구씨라는 인물은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음으로써 그와 관계하는 인물들을 반추해내는 그런 존재처럼 보인다. 미정이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말하며 겨울이 오기 전 “어떤 일이든 해야 되고” 한 번은 “채워져야”한다고 말한 건 그래서 마치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건 친구들에게 구씨 추앙을 늘어놓는 창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짜 멋지고 싶다. 멋짐을 드러내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멋진 그런 삶을 꿈꾸는 것. 

 

물론 그건 구씨의 실체가 아니다. 구씨는 결국 변두리 마을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놓은 알코올중독자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방 한 가득 채워진 빈 술병이 그걸 말해주고, 어쩌다 뜨거운 물을 발에 쏟아 다쳤어도 별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오죽 무료하면 마트에 갔을 때 네 병을 사면 한 번만 가도 될 그 길을 굳이 두 병씩 나눠 사서 또 걷겠는가. 그는 마치 시간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그런 구씨에게 미정이 다가가고, 아무 조건 없이 “좋기만 한 사람”으로 구씨를 대하려 하면서 구씨도 변화한다. 주급을 받자 미정에게 문자를 보낸다.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라고. 그 추앙의 문자 하나가 미정을 웃게 만든다. 두 사람은 변두리 당미역에서 만나 흔한 돈가스를 별 대화 없이 먹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던 사람이 보내는 문자 하나와 함께 먹는 식사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흔하게 “언제 한 번 밥 먹자”고 말하는 그런 헛소리도 아니고 매일 의미 없이 보내고 맞장구치는 허망한 문자도 아니다. 온전히 ‘채워진 말이고 문자’일 테니.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마음 속 한 구석에 무언가에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채 더 이상 달리거나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고 날개를 접고 있는 저마다의 ‘구씨’가 있는 지도 모른다. 가짜 위로와 가짜 행복 속에서 허망한 말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들을 버텨내며 꾹꾹 봉인해 뒀던 구씨.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구씨를 찾아내게 하고 추앙하게 함으로써 그 답답한 곳으로부터 해방해주라 말하고 있다. “날 추앙하라”는 말은 그래서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 거짓 속에서 함부로 대해왔던 스스로를 추앙하라고.(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망가진 이들은 과연 진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의 해방일지

“사람들은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하는데 전 이상하게 차분해져요. 드디어 세상이 끝나는구나. 바라는 바다. 갇힌 거 같은데 어딜 어떻게 뚫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다 같이 끝나길 바라는 것 같아요.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 다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어쩔 땐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더 정직한 사람들 아닐까 그래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김지원)은 이른바 해방클럽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한다. 그 해방클럽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행복지원센터에서 하도 동호회에 가입을 권유받지만 도무지 동호회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없는 세 사람, 염미정, 조태훈(이기우), 박상민(박수영)이 더 이상의 강권을 피하고자 만든 클럽이다. ‘행복지원센터’라는 지칭에 담긴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이게 정말 제대로 사는 걸까.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민으로 살아 서울 중심으로 삶으로부터 비껴가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서울에서 살면서 짐짓 웃으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진짜 행복인가를 묻는다. 하루하루 힘겹게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휴가 때 어디 놀러갈까, 놀러가서 수영복은 뭘 입을까, 비키니는 무슨 색으로 입을까를 이야기하며 버텨내는 삶.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로또 몇 장을 마치 행복전도사나 되는 듯 나눠주는 이사와 그것조차 받지 못해 “왜 나만 건너 뛰냐”고 하소연하는 삶. 언제 넘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하이힐을 신고, 시술만 하면 예뻐진다는 말에 되지도 않는 시술을 받고는 더 나빠진 상태를 애써 나아질 거라 위안하며 사는 삶.... 

 

기정(이엘)은 이런 삶을 계란 흰자 같은 삶이라 농담하지만 너무 힘든데 쓰러지지도 않고 코피도 안 난다며 로또 열장을 사과하듯 챙겨주는 이사에게 그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 이사는 기정에게 심호흡을 해보라 권한다. “힘들 때 잠깐 심호흡하면 그것도 휴식이라고 괜찮아져요.” 과연 이래서 진짜 괜찮아질까. 기정은 뜬금없이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사는 끝없이 긍정을 얘기한다. “그래서 제가 쉬지 않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거든요.” 긍정한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뀔까. 삶의 본질의 문제에서 오는 답답함이 심호흡 한 번으로 괜찮아질까. 퇴근 길 전철 안에서 저 편에 보이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같은 긍정의 문구가 진짜 좋은 일을 만들어줄까.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뉜다. 너무 망가져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는 사람들과 망가졌지만 아무렇지도 않는 척 잘 사는 사람들. 점주를 고객으로 상대하는 창희(이민기)는 퇴근해서도 1시간 넘게 전화 응대를 해줘야 하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 염제호(천호진)는 계획 없이 살아서 그렇게 사는 거라 답답해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삶 역시 계획을 잘 세워서 농사에 싱크대 설치 투잡 뛰며 사느냐고 비수를 꽂는다. 일해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주눅 들며 살아가는 아버지가 아닌가. 

 

미정의 가족들은 망가졌다. 그건 단지 서울 외곽 경기도에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삶이 불행하고, 그럼에도 가짜 행복으로 채워져 가짜 위로를 던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이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위험 속에 살아간다며 그래서 안전한 반지하에 산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삶이 우리가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미정의 가족들보다 더 망가진 구씨(손석구) 같은 인물도 있다.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대화도 거의 없고, 밥도 잘 챙겨먹지 않은 채 매일 염제호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간다. 거의 유일한 낙처럼 보이는 게 저녁에 홀로 평상에 앉아 깡소주는 마시는 일이다. 그의 존재는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창희나 미정을 통해 그런 식으로 돌파구는 절대 없다고 외치는 듯하다. 심지어 이 사회 시스템 바깥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그에게 창희는 ‘로망’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그건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그저 ‘잘못 내린’ 밀려난 삶일 뿐. 

 

<나의 해방일지>는 거의 블랙 코미디에 가깝게 대사 하나하나 상황 하나하나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준다. ‘추앙’ 같은 낯선 대사를 던질 때 그것이 너무 낯설어서 어색하고 그래서 헛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인물이 얼마나 절망적이면 이런 잘 쓰지 않는 단어까지 꺼낼까 생각하게 만들면서 짠해진다. 그러면서 이 드라마는 이 답답한 가짜 행복들에 둘러싸여 사는 이곳의 삶을 뚫고 저기로 넘어갈 거라는 기대감을 준다.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미정의 이 말은 그래서 박해영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허위로 가득한 세상과 얼마나 날선 대결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바람에 훅 날아간 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빙 돌아 저편까지 갔다 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마치 넓이 뛰기 선수처럼 단번에 그걸 뛰어넘는 그런 통쾌한 비상을 그려낼 거라는 기대감. 

 

망가진 자들이 서로 연대해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며 추앙함으로서 단 한 번이라도 가짜가 아닌 진짜 행복을 느끼는 걸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길 기대한다. 구씨가 마치 새처럼 날아오르는 그 순간의 비상이 될 지라도. 그것은 지금 현재 사실은 불행하지만 우린 행복하다고 애써 강변하는 가짜 세상의 허위를 잠시라도 깨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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