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2'의 내적 외적 성공요인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MBC '목표달성토요일'에서 진행됐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악동클럽'은 소소하게 지나가 버렸고, 2006년 박진영이 진행한 스타 메이킹 프로그램 '슈퍼스타 서바이벌'은 전국과 해외에 걸친 사전 오디션과 서바이벌 형식, 시청자들의 직접 투표방식 등 작금의 '슈퍼스타K'와 상당히 유사한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다지 화제를 몰고 오지는 못했다. 2007년도 MBC에서 방영됐던 신인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 '쇼바이벌'은 쇼의 형식으로 신인들의 무대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역시 반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슈퍼스타K'는 다르다. 케이블 채널 엠넷에서 방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케이블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두 자리 수를 훌쩍 넘어섰다. 도대체 이 오디션 프로그램은 뭐가 다른 것일까.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즉 현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상에서나마 실현시켜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슈퍼스타K2'에 몰린 1백만 명이 훌쩍 넘는 지원자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경쟁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살 떨리게 재현한다. 그런데 그 엄청난 지원자들이 선정되는 기준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연예인의 자식이라도, 또 학벌이 출중하다고 해도 실력이 없다면 심사위원들은 가차 없이 '불합격'을 준다. 초기에 심사위원으로 앉은 이하늘은 '철이와 미애'의 신철의 조카를 떨어뜨리면서 "너는 철이형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하늘은 "이 오디션이 실력은 있지만 등용문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란 점을 반복해서 말한다. 살벌한 경쟁 현실의 리얼함 위에, 불공정한 세상을 뒤집는 판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 대중들의 몰입은 생겨난다.

하지만 단지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에 의해 '슈퍼스타K2'가 거둔 경이적인 대중적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외적인 환경은 기획적인 것이지만, 이 기획을 실현시키는 것은 내적인 완성도다. 그런 점에서 '슈퍼스타K2'가 거둔 성과의 반은 바로 이 끊임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프로그램 내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음악의 본질인 노래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퍼스타K2'는 물론 간간히 댄스를 가미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래 실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슈퍼위크를 거쳐 마지막 11인에 뽑힌 경쟁자들 중에서 댄스와 함께 노래를 한 후보자는 이보람과 김소정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개성적인 보컬로 경쟁에 임했다. 기존의 노래들을 이들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해내는가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특별한 재미다.

쟁쟁한 기성가수들의 노래가 이제 첫발을 디디는 이들에 의해 거침없이 재해석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대중들을 열광한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문세가 '조조할인'을 부른 허각에게 "저보다 더 잘 불렀네요"라고 심사평을 말할 때, 윤종신이 장재인의 노래를 듣고는 "좋은 가수가 될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 쾌감은 극대화된다. 심사위원들의 노래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서서히 찬사로 바뀌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이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가 좀 더 폭넓은 세대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뽑힌 11명이 첫 생방송 무대에서 부여받은 미션은 명곡들의 재해석이었고, 8명으로 좁혀진 경쟁자들이 치르게 된 미션은 이문세의 노래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쇼바이벌'이 그랬던 것처럼 노래들이 지나치게 젊은 층에 치중되었다면 '슈퍼스타K2'는 이처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좀 더 넓은 세대를 포괄할 수 있는 노래들을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이 프로그램은 젊은 세대들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빠져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노래 자체의 매력과 그것을 절절히 표현해내는 경쟁자들의 만만찮은 노래 실력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힘을 만들어냈다면, 이 힘에 더 강한 추진력을 부여하는 건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 같은 이 프로그램만의 형식이다. '슈퍼스타K2'는 노래를 빼놓고 보면 한 판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관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사회자로서의 김성주 아나운서(그가 예전 스포츠 캐스터였다는 점이 이채롭다)가 심판처럼 서 있고 경쟁자들이 나와 실력을 보이면 그것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준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형식은 100만 명이 넘는 지원자에서 단 한 명으로 서서히 좁혀져가는 과정을 통해 시쳇말로 '쪼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이렇게 좁혀지는 과정에서 가수들(캐릭터)은 성장한다. 스타일리스트가 붙으면서 스타일이 업그레이드되고, 보컬트레이너가 붙으면서 노래가 세련되어지는 과정은 게임에서 캐릭터가 성장할 때 바뀌어지는 갑옷처럼 대중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지지 않았다면 매번 진행될 때마다 이처럼 프로그램이 상승곡선을 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지는 구조가 '슈퍼스타K2'에 마치 연속극을 보는 것 같은 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지원자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고 무대 위에 오른다. 허각이나 김지수가 갖고 있는 힘겨웠던 가족관계의 이야기는 노래로 승화된다. 때론 애인을 생각하며 때론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의 모습은 노래 이면의 스토리를 구축한다. 게다가 함께 합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은 그들만의 스토리 또한 만들어간다. 함께 연습해서 무대에서 부른 후, 둘 중 한 사람을 떨어뜨리는 경쟁 형식은 이런 스토리에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슈퍼스타K2'의 경이적인 성공을 단 한 가지 요소로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음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힘과 그 음악을 세대적으로 배려하는 섬세한 연출, 마치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구성해놓은 무대 그리고 차츰 성장해가는 인물들의 스토리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물론 한 몫을 하는 것은 케이블이라는 채널이라는 특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심사라고 하지만 이승철이 지원자들 앞에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은 지상파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직설어법이 이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간에는 "왜 우리는 저런 프로그램을 못하냐"는 질책으로 '슈퍼스타K2'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요인들을 분석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다 년 간의 무대 노하우가 거기에는 있고, 케이블만이 자유롭게 해온 실험정신이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지극히 상업적이면서도 그것이 용인되는 케이블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이 들어가 있다. '슈퍼스타'는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사실은 명명백백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이 가진 힘이 너무나 약해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블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기된 학력의혹은 타블로 당사자에게 처음엔 우스워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분명 자신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누군가 나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언제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온 타블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들이 네티즌이 제기한 학력의혹을 기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점점 경쟁적으로 이를 기사화하면서 여기에 대응을 하지 않는 타블로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수상함'은 곧이어 '사실'로 둔갑한다. 뒤늦게 타블로는 결국 사실을 제시하면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몇 가지 증거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걸? 사실들은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이 놀라운 마술 상자는 증거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커다란 의혹으로 돌아오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왜 한 쪽은 사실이라고 증거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사건은 검찰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 타블로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연예인들(실제로 현재 몇몇 연예인들은 이 소통의 문제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팩트(fact)의 시대에서 스토리(story)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팩트의 시대에 사실 그 자체는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즉 증거 제시는 그 자체로 사건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시대에 상황은 달라졌다. 팩트는 그저 스토리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정보들이 소문에 의해 증폭되고 변질되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던지는 팩트란 오히려 스토리만을 더 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진원지는 정보의 과잉이다. 팩트의 시대에 정보들은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그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는 자체적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매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이 매체 속에서는 과거 수용자로 존재하던 대중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정보는 과잉일 수밖에 없다. 이 정보의 과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 필요도 없었던 어떤 이들의 사적인 생활까지를 정보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를 더욱 과잉되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정보로 생산되는 시대. 그리고 이미 트위터나 미니홈피 등으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혼재가 일반화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이 무수히 많아진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쏟아지는 정보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쓰레기(공해)가 되어버린다. 마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그 별과 별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별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의 과정이 바로 팩트가 스토리가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무수한 정보의 별들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중요해진 것은 그 별이라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그 별과 별들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별자리다. 카더라 통신이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그 통신이 제공하는 스토리가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블로 사건처럼 그 스토리가 사적인 영역을 침투해들어갈 때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즉 팩트의 시대에 진실처럼 보였던 공적인 영역은 이미 스토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화 경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적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대중들이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 발표된 자료에 대해 사적인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스토리는 더욱 진짜처럼 믿어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내밀함을 정보가 드러낼 때(혹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정보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가 종이신문의 콘텐츠를 대하는 것보다 블로그나 트위터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하다못해 제품의 기능에 대해 어떤 전문가가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신문의 정보들보다, 한 주부가 직접 쓴 사용기가 더 신뢰가 높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시대가 진실을 매도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스토리가 가진 힘은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 스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통해 구체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잇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류가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스토리화의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부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쁜 스토리가 나쁜 미래를 가져오듯이 좋은 스토리는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시대에 대한 이해다. 어떤 정보의 왜곡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이제는 스토리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곡이 벌어진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왜곡이 말해주는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즉 타블로 사건에서 팩트(사실)는 학력의혹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스토리는 병역문제나 국적문제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늘 하는 태도로서 몇몇 네티즌들을 악플러로 몰아가는 자세 역시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해 사건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은 합당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싸잡아 모두를 악플러로 모는 것은 소통을 불통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실이 중요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실 뒤에 놓여진 스토리를 바라봐야 하는 시대다.

스토리의 풍부함이 다른 '자이언트'와 '동이'

'자이언트'의 급상승, '동이'의 추락. 무엇이 이 희비쌍곡선을 만들었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스토리의 풍부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이언트'는 25회 한 회가 다룬 스토리만 보더라도 실로 긴박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강모(이범수)는 제임스 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숨긴 채 본격적으로 건설 사업에 뛰어든다. 사채업자인 백파(임혁)를 찾아가 고효율 시멘트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며 투자를 제안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실험 끝에 흙을 단단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한편 강모가 정식(김정현)과 조민우(주상욱)에 의해 죽게 됐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꿈꾸는 정연(박진희)은 만보건설의 후계자를 뽑는 임시주총에서 주주들을 설득해 결국 후계자로 뽑힌다. 보궐선거를 앞둔 조필연(정보석)은 성모(박상민)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의심하지만 성모는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넘긴다.

'자이언트'의 25회 한 회 스토리는 이처럼 무려 세 가지의 굵직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굵직한 에피소드 사이사이에는 강모 남매들의 끈끈한 가족애도 들어가 있고, 정연과 정연의 친모인 경옥(김서형) 사이에 놓여있는 모성애도 있다. 게다가 새롭게 시작된 조민우와 이미주(황정음)의 멜로 라인도 흥미진진하다. 어느 하나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성찬은 '자이언트'라는 음식에 복잡 미묘한 맛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흩어지지 않고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재빠르게 흘러가는 묘미는 이 드라마에 다이내믹함을 더한다.

그렇다면 '동이'의 이야기는 어떨까. '동이' 41회가 다룬 내용은 실로 앙상하다. 그 내용은 검계가 동이(한효주)를 살해하려 하지만 실패하는 에피소드와 동이가 찾던 수신호의 비밀이 밝혀지는 에피소드. 동이의 어릴 적 동무인 검계의 수장 게둬라(여현수)와 동이가 해후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두 에피소드 간에 연결고리가 별로 없이 갑작스럽게 동이가 수신호의 비밀을 풀어낸다는 점은 지금 '동이'의 이야기가 어떤 큰 흐름의 맥락을 잘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스토리가 풍부하지 못하다보니 이야기의 진행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검계의 동이 살해기도와 게둬라와 동이의 만남이 회고조로 드라마의 한 회 분량의 거의 반을 채우고 그 와중에 숙종과 동이의 늘상 같은 반복되는 로맨스, 그리고 한 번씩 들어가기 마련인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코미디가 들어가고, 다음 회와의 연결고리로서 수신호의 비밀 에피소드가 제시된다. 드라마의 도입부분이 전편과의 이어짐이고 후반부가 다음 편과의 연결고리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동이'의 에피소드는 지나치게 단순한 편이다.

그렇다면 '자이언트'와 '동이'가 가진 이야기의 풍부함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캐릭터다. '자이언트'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쏟아놓는 반면, '동이'에서 이야기를 내놓는 캐릭터는 거의 동이에 국한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동이라는 한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꿰어놓는 작업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에피소드가 동이로만 귀결되는 것은 이야기를 단조롭게 만든다. 만일 '동이'에서 동이의 주변인물들, 예를 들면 서용기(정진영)나 인형왕후(박하선), 차천수(배수빈) 같은 캐릭터가 동이에만 몰두하지 않고 좀 더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냈다면 이야기는 좀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이 두 작품을 가른 것은 캐릭터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풍부함이 가진 차이다.

'동이' 27회의 스토리는 무엇이었을까. 장희빈(이소연)이 동이(한효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가 돌아와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자작극을 벌인 것? 그래서 향후 폐비(박하선)에게 누명을 씌워 아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사건? 만일 이것이 '동이'가 한 회분 사건이라면 이 스토리는 과거 흔하디 흔한 장희빈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동이'는 스스로 기획의도에서 밝힌 듯이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가 될 동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27회 한 회 동안 동이가 겪은 사건은 무엇일까.

궐 밖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이(한효주)가 의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도성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동이는 무수리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폐비의 누명을 벗겨줄 증좌를 왕에게 직접 건네기 위함이다. 한 회분의 스토리로 치자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왜 동이가 꼭 스스로 궁으로 들어가 그것도 숙종(지진희)에게 직접 증좌를 건네려는 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장희재(김유석)와 오윤(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동이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동이는 왜 다른 인물을 통해 증좌를 대신 왕에게 건네려 하지 않는가. 또 궁에 들어왔다면 감찰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을 동이는 왜 찾아가지 않는가.

서용기(정진영)와 차천수(배수빈)는 왜 갑자기 동이가 찾을 수 없게 사라졌는가. 우연히 도성 저자에서 보게된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뒤를 좇는 인물들은 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그들이 주식과 영달을 미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이'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은 의문을 남긴다. 논리적으로 비약도 많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모든 사극이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 사극은 좀 더 인물의 감정라인을 통해 논리적인 허점을 메워야 한다. 즉 동이가 왕을 직접 만나려 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동이의 왕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마음을 감정이입시켜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동이'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지금 '동이'는 스토리가 잘 보이질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스토리는 있지만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활에 맞고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의주의 한 상인에 의해 살아남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그 상인이 동이를 붙잡아 두려하고 마침 나타난 장희재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갑자기 심운택(김동윤)이 나타나 그녀를 돕는 이야기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동이가 왕의 행차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애끓는 토로를 하는 장면이거나, 심운택의 캐릭터다. 즉 이야기보다는 외적인 것들에 더 치중해 있다는 것이다.

'동이'가 초반부에 그나마 촘촘했던 스토리에서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연출이다. 사실 동이가 도성으로 돌아와 궁으로 들어간다는 이 한 회 분의 간단한 스토리를 그나마 긴박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의 힘 덕분이다. 동이가 돌아오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왕의 심경이나 장희빈의 심경을 배치하면서 그 단순함을 조금씩 비껴가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엔딩 부분에서 마치 숙종이 동이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장면 같은 것이 삽입되는 것은 연출을 통해 지속적인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하지만 사극이 연출의 힘만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 '동이'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상을 깨는 의외성이 없을 때, 이 사극은 그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왕실암투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성장하는 동이의 심심한 이야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흔히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쉽게 멜로라인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은 이 사극이 처한 가장 큰 위기다. 숙종과 동이의 멜로는 이 사극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이 사극은 아무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심지어 차천수라는 인물까지 동이의 오라버니에서 남자로 변하려는 모습은 그래서 위험하다.

'동이'는 지금 스토리 실종상태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구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동이만의 스토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동이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이만이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또 동이의 약점은 무엇일까. 이런 부분들이 다시 세워지고 그 위로 이야기가 다시 구축될 때 '동이'는 잃었던 스토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동이'가 그저 숙종과의 멜로드라마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