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를 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만든 변화들

"'1박2일'의 힘은 스토리텔링에서 나옵니다." '1박2일'의 이명한 PD는 그 힘을 스토리에서 찾았다. 파편적으로 뚝뚝 끊어지는 몇몇 재미들만으로는 '1박2일' 같은 파괴력은 나올 수 없다는 것. 이것은 2009년 들어와 소재적으로도 세대적으로도 폭이 넓어진 예능 프로그램의 한 특징이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버라이어티쇼들은 이제 전통적으로 웃음에만 천착하던 틀을 벗어나 이야기 자체가 주는 다양한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 같은 경우, 만일 웃음이라는 포인트로만 본다면 그다지 재미있는 소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소재는 버라이어티쇼가 이제는 웃음을 넘어서 서스펜스 같은 새로운 영역의 재미를 끌어 들였다고 볼 수 있다. '1박2일'은 여행이라는 큰 소재가 있지만 각각의 편에 들어가면 말 그대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는 예능의 본분인 웃음은 기본이고 그 위에 감동도 있고, 때로는 추격전이나 심리전이 주는 긴박감도 있다.

이른바 이들 버라이어티쇼들은 모든 극적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먼저 이 쇼들에는 주인공들인 캐릭터들이 있다. 캐릭터란 저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 캐릭터들이 매번 다른 상황을 만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중첩되면서 캐릭터를 성장시킨다. 여기에는 캐릭터 간의 얽혀져가는 관계가 주는 극적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쇼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또한 한 편의 드라마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이야기성을 내재하고 있다.

버라이어티쇼가 이야기를 추구하면서 2009년 예능에 등장한 쇼들은 저마다 각각의 이야기가 가진 재미들을 내세워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다이내믹한 이야기, 각본 없는 드라마가 가장 큰 매력이다. "예능 좀 하란 말이오. 야구만 하지 말고." 이 구호는 이 쇼가 추구하는 것이 단지 이전 예능들이 추구하던 웃음만이 아니라는 것을 거꾸로 말해준다. 특별히 웃긴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담담히 이 야구단의 면면을 따라가며 때론 웃고 때론 우는 모습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진정성 있는 즐거움을 준다.

'청춘불패'는 도시의 첨단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을 대변하는 아이돌 걸 그룹들이 유치리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가 정착해 살아가며 아날로그적인 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쇼 역시 웃음이라는 포인트에 그다지 천착하지 않는다. 남희석이 "그래도 예능인데 이렇게 일만 해도 되는 거야?"하고 묻는 지점에 이 쇼가 가진 이야기성이 드러난다. 이 쇼는 유치리 주민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아이돌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고,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우리의 이웃처럼 느껴지는 유치리 주민들로 인해 그 힘을 더욱 얻어갈 수 있다.

'남자의 자격'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끌어들임으로써 중년 세대들의 공감을 얻어냄은 물론이고, 여성들과 젊은 세대까지 소통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아저씨들의 꿈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남편인 그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하프 마라톤 대회 같은 소재에서는 전편에서는 웃음을, 후편에서는 감동을 전해주는 버라이어티한 재미를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세대와 성별을 넘는 소통은 이 쇼가 가진 남다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중심에 둔 예능의 변화는 새로운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이른바 '남들 웃기려 할 때, 다큐를 함으로써' 호평을 받는 신 예능형 캐릭터의 탄생이다. '1박2일'의 김C나 '남자의 자격'의 김성민은 웃기기보다는 열심히 프로그램에 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개그맨들이 그다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예능의 환경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09년 예능의 뉴 트렌드로 자리한 '이야기에 대한 추구'는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의 층위를 다양하게 해주었다. 이제 예능은 웃음에 집착하기 보다는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 이야기, 즉 스토리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예능의 외연을 넓혀놓았고, 작금의 콘텐츠들의 특징이 퓨전과 융복합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 다가올 2010년. 예능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나길 기대한다.

볼거리만 있고 스토리는 없는 '태삼'의 문제

'태양을 삼켜라'는 애초에 기대만큼 불안감도 컸던 드라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불안감은 같은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대작,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가 기대만큼 불안감이 큰 이유는 그것이 볼거리에 지나치게 치우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왜 위험성을 내포할까. 그것은 드라마라는 장르와,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TV라는 매체를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볼거리가 주는 영상체험보다는 스토리에 더 치중되는 장르다. 우리가 과거 연속극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드라마는 그 끊임없이 찾아보게 만드는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고, 캐릭터의 내면에 집중시키는 것은 따라서 드라마가 가진 책무이자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드라마에 만들어주는 힘은 그다지 크지 않다. TV라는 매체 자체가 집중보다는 분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여지는 영상만으로는 영화만큼의 몰입도를 가져오기가 어렵다. 폐쇄된 공간에 불이 꺼진 채 대형 화면과 실감 음향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극장의 볼거리는 같은 영상이라고 해도 TV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의 몰입을 만들어주는 것은 볼거리가 아니라 스토리(그 속의 캐릭터들)가 만들어내는 감정이입으로서의 몰입이다.

물론 스토리도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면서 볼거리까지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인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차라리 볼거리는 조금 차치하고라도 일단 스토리가 탄탄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더 경제적인 방법이다. '찬란한 유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스토리가 매번 시청자들의 눈을 홀리게 만들었다. 결과는 4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로 나타났다.

'선덕여왕'은 대작으로서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하지는 않는 영리함을 보이고 있다. 백제와의 전쟁 신에서는 훌륭한 볼거리를 보여주었지만, 그 외에는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왜 전쟁 같은 스펙타클이 또 안 나오냐고 불평하기보다는, 덕만(이요원)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그 스토리나 비담(김남길)처럼 스토리성을 그 안에 갖고 있는 캐릭터의 등장이 주는 몰입감에 열광하고 있다. 결과는 시청률 30%를 넘어 40%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태양을 삼켜라'는 수목드라마들이 모두 주춤하는 사이에 시청률 1위를 여전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대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1위는 오히려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스토리가 눈에 띄도록 매력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이 드라마는 초반부에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마저 잘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기초적인 것이다.

주인공 김정우(지성)의 탄생배경을 보여준 초반 1,2부의 스토리는, 말 그대로 현란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초반 스토리를 장악했던 정우의 아버지 일환(진구)의 모험담은, 다만 정우와 혈연적 관계를 말해줄 뿐, 스토리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주인공 정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나 목적, 욕망과는 상관없는 드라마의 볼거리만을 나열한 셈이다.

이것은 그나마 드라마 초반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방법적인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떨까. 정우는 일환과의 연결고리 없이 그저 가난하고 거친 삶을 살았다는 뉘앙스로 불쑥 등장하고, 갑작스레 장민호 회장(전광렬)의 휘하로 들어간다. 정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 같은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수현(성유리)이 갑자기 서커스 공연을 기획한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과 정우와 그 친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프리카에서 망명한 갑부의 경호팀으로 역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은 그 둘은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리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드라마의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해외로케의 정당성마저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그 곳에서 잭슨리(유오성)가 도박을 하고 동시에 교차편집되어 보여지는 그의 여자가 선정적인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도박과 섹스를 연결한 자극을 보여주지만, 스토리의 맥락과는 역시 떨어져 있다.

스토리가 잘 구축되지 않는 볼거리란 때론. 캐릭터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볼거리를 위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맥락 없이 돌아가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광들이나, 비키니 입은 여인들, 그리고 가끔씩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캐릭터의 심리와 깊게 와 닿지 않을 때, 그저 지나치는 파편적인 영상으로 전락한다. 계속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삽입되는 '태양의 서커스'는 물론 볼거리로서는 압도적일지 몰라도, 왜 그게 그렇게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캐릭터는 당연히 살아나기가 어렵다. 모든 행동이 맥락을 찾지 못하는 캐릭터에 어떻게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볼거리는 스토리보다 중요하지 않다. 치밀한 스토리가 있고 그 위에 볼거리는 덧씌워질 뿐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지향했던 '로비스트'가 스토리는 없이 볼거리만 나열하고 추락했던 것처럼, '태양을 삼켜라' 역시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볼거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볼거리에만 치중하고 스토리에 소홀하게 되면 상황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볼거리가 드라마를 잡아먹는 것이다.

스토리는 블록버스터의 적이 아니다


흔히들 "재미를 위해 스토리를 단순화시켰다"는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스토리는 블록버스터가 주는 재미의 적인가. 작년 '디워'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도 바로 이 스토리와 블록버스터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디워'는 블록버스터와 스토리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진 것처럼 논점을 이어갔다. 이른바 "복잡한 스토리는 시각적인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논리다.


1년이 지난 이번 여름, 스토리 논쟁이 다시 불거진 것은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에서다. 김치웨스턴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발굴해내고 스타일리쉬한 영상을 만들어낸 '놈놈놈'은 그러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김지운 감독은 "이야기를 최대한 최소화해 캐릭터와 액션 등 다른 영화적 요소들을 더 많이 부각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스토리에 집착하는 평단을 꼬집었다.


둘 다 블록버스터로서 스토리를 최소화했다고는 하지만 '디워'와 '놈놈놈'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영상의 완성도 자체가 틀리기 때문이다. '디워'는 스토리의 부재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CG 영상 또한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다. CG기술 중 가장 어렵다는 인물 애니메이션을 한 것도 아니고, 상상 속의 동물을 그려낸(사실 이것은 비교점이 없기에 대체로 그럴 듯해 보인다) CG일 뿐이며, 또한 실사와의 연결 또한 자연스럽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놈놈놈'이 가진 완성도는 남다르다. 만주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 속에 우리가 저 서구 세계의 액션 활극 장면으로만 생각해왔던 웨스턴 스타일을 김지운만의 색깔로 녹여냈다. 이 독특한 퓨전의 맛은 고스란히 세 캐릭터를 연기하는 송강호, 정우성, 이병헌을 통해 폭발적으로 구현되었고, 말 그대로 '보는 맛'을 선사했다. 그만큼 액션의 완성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각각의 액션들을 연결해주는 스토리가 빈약해지면서 눈의 즐거움 이상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작년부터 여름방학 시장을 겨냥한 영화들에 대한 스토리 논란이 불거져 나오는 것은 아마도 과거에는 할리우드에서만 할 수 있다 생각되었던 블록버스터들이 이제 우리 영화계에도 시도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우리가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똑같은 말로 비판했었다. "스토리도 의미도 없는 킬링 타임용"이라 비아냥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 불가능해 보이는(사실 이건 자본의 문제이지 기술력의 문제는 아니다) 블록버스터를 내놓자, 혼동이 생겼다. 그렇게 스토리 운운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그걸 '우리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그 자체에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디워'에서부터 비롯된 왜곡된 민족주의가 자리한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칸느영화제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사실 스토리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놈놈놈'은 스토리가 약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몇 백만의 관객수로 증명되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화가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한 감독들의 태도다. 감독들은 이 비판에 대해 마치 "블록버스터는 스토리가 부족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로 일반인들에게 섣부른 일반화를 강요한다.


이제 "블록버스터 같은 오락영화가 재미만 있으면 되지 무슨 스토리에 의미를 찾느냐"는 말은 가장 흔한 댓글이 되었다. 마치 블록버스터의 재미와 스토리의 재미는 서로 반비례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이제 우리가 과거에 비아냥대던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전범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치부해온 할리우드 영화는 과연 아직도 그저 킬링타임용으로 머물고 있을까.


많은 국내의 영화감독들이 할리우드 영화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전율은 느낀 이유는 무얼까. 무수히 많은 배트맨 시리즈들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깊이 있는 탐구가 있으면서도 블록버스터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 작품은 보는 내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보고난 후에는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다. '다크 나이트'가 가진 액션의 특징은 수없이 눈만을 현란하게 만들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여느 블록버스터와는 다르다.


수없이 주먹이 오고 가는 장면들만 모아놓은 것이 다른 롤러코스터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주먹을 주고받는 자들의 내면을 파고듦으로서 그 주먹이 던지는 강도를 더 높인다. 두 척의 배를 그저 폭파시키는 것은 스펙터클한 볼거리에 머물지만, 한 쪽에는 선량한 시민을 다른 쪽에는 범법자들을 태운 배에 서로 폭파스위치를 넘기고 먼저 누르지 않으면 상대방이 누를 것이라는 갈등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순간, 볼거리는 그 자체로 철학적인 질문이 된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는 볼거리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볼거리의 강도를 강화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된다.


흥행을 위해 스토리나 의미를 배제한다는 논리가 가진 위험성은 현재처럼 영화관이 점점 놀이공원화 되는 상황을 더욱 강화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영화의 즐거움이었던 두 축인 볼거리와 의미를 갈라놓으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영화관은 지금껏 원격현전으로서의 볼거리(스펙타클)의 즐거움과 그 영상들의 연결에 의한 의미구성이 주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프랜차이즈화되고 대형화되며 비주얼이펙트가 강조되는 사이, 볼거리의 즐거움만을 찾는 곳으로 영화관이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는 영화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볼거리의 즐거움을 더 강화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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