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당장의 웃음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진짜 뭐하는 건지...' <1박2일>이 인제로 떠난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코끼리코를 열 번 돌고 바늘에 실을 꿰는 예능올림픽(?)을 이수근이 할 때 깔리는 자막. '예능인 단합대회'라는 기치를 내건 것처럼, <1박2일>은 아예 대놓고 몸 개그로 웃음을 만들어보겠다 작정했다. '이게 뭐하는 건지' 하는 자막에는 웃음을 주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는 '노력'의 의미와,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다는 '자조'의 의미가 섞여 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실제로 이런 대놓고 하는 몸 개그가 웃기긴 하다. 뭐 그다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무너지는 출연자들을 보며 웃기만 하면 되니까. 어지럼증에 몸을 비틀대면서도 열심히 바늘을 꿰려는 이수근의 모습이나, 아예 바늘을 찾지 못하는 김종민의 모습은 우습다. 뒤로 삼단 뛰기, 손에 신발을 꿰고 손으로 제기를 차면서 발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예능 제기차기도 모두 재밌다. 하지만 어딘지 부족하다. 한참 웃긴 웃었는데 별로 남지가 않는다.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 웃음이 맥락이 되어 그 날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이 없다는 얘기고, 또 그런 스토리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캐릭터가 없다는 얘기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 게임은 반복되면 질릴 수밖에 없다. 당장의 웃음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웃음 텃밭을 만드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게임의 덫에 걸려버린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바로 당장의 웃음의 허기를 채우려다 결국 무너져 내렸다. '패밀리가 떴다'는 그 형식의 특징 상 게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시즌1이 꽤 괜찮은 흐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유재석이라는 발군의 캐릭터 발굴 MC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즌2에 와서 그 중심이 사라져버리자 캐릭터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스토리 없는 게임만 반복됐다. 결국 종영되고 말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괜찮은 소재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였다. 초반 캐릭터가 잡혀나가는 단계는 그 어느 예능 프로그램보다 그 뛰어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야구경기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스토리가 점점 사라졌다. 결국 예상보다 일찍 종영되었다. '청춘불패'는 시즌1에서 꽤 괜찮은 호응을 얻어냈다. 한 시골마을에 정착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져가는 스토리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2에 와서 점점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시골 이야기는 없고 시골 게임 버라이어티가 되어가는 중이다. 위험한 상황이다. '청춘불패' 시즌2는 재미뿐만 아니라 명분도 잃었다.

 

그렇다면 <1박2일> 시즌1의 게임은 뭐가 달랐을까. 먼저 시즌1은 게임을 하는 이유부터가 자연스러운 스토리 위에 놓여 지기 마련이었다. 그저 자 이제부터 게임합시다, 하고 모여 게임을 하는 인위적인 상황이 아니고, 먼저 게임을 하게 되는 동기를 만들어낸다. 강호동이 나영석 PD와 팽팽한 대결구도를 갖는 것은 이 스토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함이다. 제작진의 압제(?)에 한번 이겨보자는 연기자들의 의기투합이 이어지고 나면 게임은 그 맥락 위에서 보이게 된다.

 

경기 자체나 결과가 뭐가 중요할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의 흐름에 따라 생겨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들이다. 족구 경기를 하나 해도(심지어 그게 저질이라도) 시즌1에서 더 주목도가 높았던 건 단지 복불복이란 설정 때문이 아니다. 그 게임을 하면서 계속 제작진과 연기자들 사이에 쌓여진 스토리가 전제되기 때문에 게임은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은 시즌2의 '예능인 단합대회'가 보여준 게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인위적인 느낌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려면 누군가 이를 촉발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이른바 '악역'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1박2일> 시즌1에서는 강호동이 그 역할을 했고, 또 때로는 나영석 PD가 그 역할을 했다. 강호동이 짜증을 내고, 나영석 PD가 얄미울 정도로 "땡!"을 외칠 때, 게임은 그저 게임이 아니라 그 안에 스토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1박2일> 시즌2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악역을 자처할 캐릭터다. 그것이 연기자들이든 아니면 제작진이든 누군가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미션 구조로 되어 있는 이 버라이어티쇼의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이게 없으면 그저 해야 하는 게임을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또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 자체의 결과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끊임없이 캐릭터를 뽑아내는 자세가 요구된다.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연기자와 제작진이 한 족구대회가 밋밋했던 것은 이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족구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경기를 한 연기자나 제작진보다 오히려 본래 심판 캐릭터(?)를 갖고 있던 조명감독이었다.

 

<1박2일>은 시즌2에 들어와 안타깝게도 많은 외적인 악재를 겪었다. 그러면서 시청률도 뚝 떨어졌다. 최재형 PD는 인터뷰를 통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피력했다. 그간은 뭐든 시도하는데 주저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 하지만 뭐든 하는 것이 게임 같은 보다 편한 웃음 만들기가 돼서는 안 된다. <1박2일>만이 가진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가져올 수 있는 스토리를 발굴해야 되고, 게임에서도 게임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몰두해야 한다. 당장의 웃음보다 장기적인 관점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야 <1박2일>은 본래의 궤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영희 PD가 생방송을 고집하는 이유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새로 돌아온다. 김영희 PD는 굳이 '나가수' 시즌2가 아니라 '나가수2'라고 지칭했다. 그만큼 기존 '나가수'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매 달 두 명(이 달의 가수와 가장 아쉬운 무대를 보인 가수)씩 하차하고 연말에 '이 달의 가수'들이 모여 '올해의 가수'를 뽑는 식으로 경연방식이 달라졌고, 중간점검 방영분이 사라지고 대신 경연 가수들을 늘림으로써 계속해서 가수들의 무대를 볼 수 있게 했으며, 매니저도 개그맨이 아닌 실제 매니저가 투입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생방송'으로 진행된다는 점일 것이다. 과연 생방송은 '나가수2'의 묘수가 될까.

 

 

김영희 PD(사진출처:MBC)

생방송은 여러 모로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점 때문에 그렇다. 하나는 음향이고 다른 하나는 스토리다. '나가수2'를 '신들의 제전'이 아니라 '신들의 축제'로 김영희 PD가 부른 이유는 '경연 보다는 음악'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음향이다. 무대의 감동이 고스란히 TV로도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실제 무대와 TV는 그 자체로 편차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정 '작업'이 있어야 오히려 더 생생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 생방송은 무대에서 직접 보는 것이라면 그 이상 좋을 게 없겠지만, TV로 본다면 자칫 감흥이 떨어질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스토리다. '나가수'는 무대 자체의 힘도 중요하지만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스토리도 그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녹화 방송을 통해 무대 아래의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무대 위의 감동을 더 강렬하게 만들 수 있는 진짜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방송으로 하게 되면 이런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기가 곤란해진다. 물론 그만큼 기민하게 움직이고 포착함으로써 순발력을 매번 발휘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생방송은 어설프게 했다가는 '나가수'의 무대가 가진 흡인력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다시 연출을 맡은 김영희 PD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것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희 PD는 이런 난점들을 알면서도 왜 굳이 생방송을 하려 하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그런 생방송의 난점들을 뛰어넘는 것이 '나가수2'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가수'는 그간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패턴이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생방송은 그런 점에서 '나가수2'가 하나의 도전 목표로 세워둔 신의 한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방송을 하게 되면 일단 '나가수1'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그 하나는 스포일러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청중평가단의 평가에 대한 이른바 '막귀 논란'이다. 실시간에 이뤄지는 방송은 그 자체가 스포츠 중계처럼 생생하게 전해짐으로써 보다 더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재택평가단이 실시간으로 평가에 참여하기 때문에 실제 무대와 방송 사이에 놓여진 평가의 간극도 상당부분 메워질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생방송의 음향과 스토리의 난제를 뛰어넘었을 때,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즉 생방송인데도 더 생생한 무대를 제공한다면 "역시 나가수2"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생방송의 리얼 스토리를 제대로 운용한다면 오히려 녹화방송의 패턴화된 틀을 뛰어넘을 수도 있을 거라는 얘기다. 결국 생방송이라는 난제는 김영희 PD가 던지는 도전이자 묘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가수2'에 대한 기대감은 어쩌면 김영희 PD가 스스로 설정한 이 도전에서 비롯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수' 논란, 문제는 스토리 부재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의 무대에 오른 적우에 대한 논란은 사실 그 이유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 논란은 무명가수가 '나가수'라는 무대에 올랐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가수다'의 문호는 '실력 있는 가수'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정엽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실력 있는 가수'가 아니어서 일까. 이것도 이유로서 합당하지는 않다. 적우는 나름 자신의 색깔을 갖고 있는 가수다. 다만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실력은 다 발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첫 무대였던 '열애'가 괜찮게 실력을 발휘했다면, 두 번째 무대였던 '나 홀로 뜰 앞에서'는 총체적인 부실을 드러낸 무대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 가수의 실력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몇 번 더 그녀의 '나가수' 무대를 봐야 그 판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적우에 대한 논란은 강도가 너무나 강하다. 대중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적우가 가창력의 문제를 드러내자 갖가지 의혹을 쏟아냈다. 그 비난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가는 마치 그녀를 적극 추천한 것처럼 언론에 부풀려진 것으로 비판에 직면한 장기호 교수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단 두 번의 무대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논란은 지나칠 정도로 커져있다. 이것은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다만 적우라는 가수를 통해 터져버린 어떤 것.

그것은 어쩌면 현재의 '나가수'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처음과 거의 달라지지 않은 똑같은 형식의 반복, 순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기보다는 생존의 무대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식상함, 무엇보다 새로운 스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적우라는 가수를 통해 폭발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형식이 굳어져버리면 도드라지는 건 변수로 등장하는 출연자일 수밖에 없다. '나가수'가 어느 순간부터 캐스팅이 만사가 되어버리고 캐스팅 논란이 끊이질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가수는 '나가수'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적우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고, 증폭된 불만의 포화를 맞을만한 많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캐스팅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업소출연이 만들어낸 잘못된 이미지, 무명가수로서 베일에 가려진 과거사, 익숙하지 않은 방송, '나가수'라는 무대가 주는 중압감과 그 무대에 대한 부적응으로 생기는 실수 등등.

작은 빈틈은 관심의 집중이 된(그것도 '나가수'의 변하지 않은 형식에 불만이 있는 대중들의) 출연자를 두고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이미 많은 논란을 통해 경험했듯이, 대중들의 관심이 증폭된 콘텐츠는 그 자체로 스토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면 거꾸로 대중들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고 있다. 루머의 탄생이다. '나가수'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대중들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수'에게 필요한 것은(적어도 캐스팅 논란이 계속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의 스토리다. 긴장하면서 방송사에 도착하는 가수들을 보여주고 중간 중간 긴장하는 모습을 인터뷰하고 경연 순서를 뽑고, 경연을 하고 무대를 내려가는 그 단순한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왜 거꾸로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처음부터 과정을 되짚는 스토리의 파격은 안되는가. 각각의 가수들이 일주일간 노래를 준비하며 겪는 이야기들은 왜 다채로워지지 못할까. 왜 가수와 매니저인 개그맨들 사이의 무대 바깥의 진솔한 대화가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못할까. 왜 공간은 꼭 스튜디오 안이어야만 할까. 청중평가단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왜 청중의 이야기는 없을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무대를 통해 보여주겠다면 왜 그 장르에 걸 맞는 새로운 스토리는 구성하지 못할까. 질러대는 창법이 유리하다면, 왜 발라드 특집(모두가 발라드를 부르는) 같은 건 하지 못하는가. 특정일에 어울리는 이벤트는 왜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라면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장르의 음악과 따뜻한 스토리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가수'가 오래도록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그 스토리를 무한정 끌어올 수 있는 열린 여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가수다'라는 제목처럼, 가수의 존재증명에 관한 스토리라면 그것이 병원에서 벌어지는 경연이든, 산사에서 벌어지는 경연이든, 혹은 각각의 가수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이든, 또는 청중에게 친절하게 노래 장르의 A to Z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든 뭐든 가능한 것이 아닌가. 물론 경연이 주는 힘은 이 프로그램의 핵심적인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필요는 없다. 이제 '나가수'는 그 좁고 굳어져가는 형식의 틀에서 과감히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필요하고 소비적인 논란의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그 자리에 좀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채워야 한다.


드라마라는 뿌리 중의 뿌리는 역시 스토리다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1시간이 너무 짧다. '뿌리 깊은 나무' 3회는 그 속도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화살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세종(송중기)의 마지막 장면의 긴박감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어느새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토록 빠른 속도감을 주는 드라마가 있었던가. '뿌리 깊은 나무'의 이 미친 속도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제 고작 4회가 진행됐지만 이 사극은 엄청나게 많은 연기자들이 투입되었다. 세종만 해도 어린 이도(강산), 젊은 이도(송중기)를 거쳐 이제 나이든 세종(한석규)까지 무려 세 명이다. 세종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채윤 역시 어린 채윤(채상우), 소년 채윤(여진구), 그리고 성장한 채윤(장혁)까지 세 명이다. 태종(백윤식)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젊은 이도와 대결구도를 만들었으나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잠깐 등장했던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전노민)도 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한 역할에도 많은 연기자가 투입되는 이유는 그만큼 속도감 있게 극을 전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초반 속도감을 만들어낸 가장 큰 공적은 아무래도 태종과 세종에게 주어야 할 것 같다. 왕권을 중심에 세워두려는 태종(백윤식)의 인정사정없는 피의 숙청은 이 속도의 전제가 되었다. "왕도와 패도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라고 주장하는 태종 앞에서 세종은 "칼이 아니라 말로써 설득하고 기다리는 조선을 세울 것"이라 말한다. 또 경연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태종 앞에, 세종은 사대부들의 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그 경연이야말로 고려와 다른 조선의 실체이자 성리학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 태종이 생각하는 조선과 세종이 생각하는 조선의 대립은, 이제 세워진 지 겨우 26년이 된 조선에서 왕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시각이다. 태종은 칼을 동원해서라도 강력한 왕권을 세워 빠르게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꾸려나가야 고려와는 다른 조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대화는 갑자기 '밀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밀본(密本)'. '숨겨진 뿌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태종과 함께 조선을 건국했으나 태종에 의해 제거된 정도전이 남긴 글귀 속에 등장한다. 정도전의 아우인 정도광의 집 지하에서 발견된 이 글귀는 왕과 재상의 관계를 꽃과 뿌리에 비유해, 왕이 그저 '화려한 꽃'일 뿐이라면 재상은 뿌리라고 말한다. 즉 이 화려한 꽃은 부실하면 꺾으면 그만이지만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가 죽는다는 것. 그만큼 나라를 살리는 것은 왕권이 아니라 재상들의 견제에 달렸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태종과 세종이 대립하는 그 사상의 차이와도 그대로 맞닿아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정도전의 정치세계를 표현한 글귀가 그저 글이 아니라 실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밀본'은 정도전이 만든 사대부들의 비밀결사라는 것. 이 밀본의 실체가 밝혀진 후 사극은 숨 가쁘게 이것을 현재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다. 즉 '밀본지서'가 등장하고 그것을 갖고 도망치려는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과, 그를 잡으려는 태종의 명을 받은 조말생과 부하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세종에 의해 움직이는 무휼. 그리고 이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반촌 사람들과 똘복이(채상우)까지.

드라마의 속도감은 물론 팽팽한 대립구도에서 비롯된다. 태종과 세종의 대립,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도전의 밀본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입장은 이 사극에 강한 내적 동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극이 정치적이고 심지어 이념적인 대립을, 눈에 보이는 행동의 대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태종과 세종의 대결을 행동으로 보여준 조말생과 무휼의 대결은 대표적이다. 이것은 앞으로 채윤으로 이어져 집현전에서의 한글 창제라는 역사 속 글귀가 어떻게 추리와 액션이 섞인 극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인가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다. 이렇게 한 바탕 숨 가쁜 달리기를 해온 '뿌리 깊은 나무'는 4회에 이르러 잠깐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숨고르기는 집현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며 다시 숨 가쁜 달리기를 예고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주는 놀라운 몰입과 속도감은 바로 이 복잡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대결을 하나의 움직이는 행동의 이야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저 사상의 대결이라면 얼마나 지루한 논쟁 장면들의 연속이겠는가.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이 사상의 대결을 실체로 보여준다. '밀본'은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세계의 표현이면서 비밀결사라는 실체로 존재하는 '밀본'.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의 핵심적인 메시지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를 끝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달리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결국 뿌리 중의 뿌리, 드라마를 팽팽하게 만드는 뿌리는 역시 잘 짜여진 대본인 셈이다. 밀본지서를 빗대 말한다면, 아무리 겉이 화려한 꽃(캐스팅에서부터 연출까지)이라도 그 뿌리(이야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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