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에서 하던 '런닝맨', 랜드마크를 만들다

'런닝맨'(사진출처:SBS)

'런닝맨'의 초기 버전은 랜드마크가 중심이었다. 대형쇼핑몰, 월드컵경기장, 과학관, 세종문화회관, 서울타워... '런닝맨'은 게임버라이어티답게 이 랜드마크 속으로 들어가 그 공간에 어울릴만한 게임들을 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물론 흥미로웠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어딘지 다람쥐 챗바퀴 돌듯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그것도 그 공간과 어울리는 게임을 억지 춘향식으로 맞추다 보니 '틀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런닝맨'은 이 틀을 과감하게 버렸다. 즉 랜드마크에 집착하지 않고 좀 더 게임에 집중했던 것. 이렇게 되자 게임은 좀 더 흥미진진해졌다. 런닝맨들은 이제 그 날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또 거기서 어떤 미션으로 게임을 할 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런닝맨'의 시작과 함께 부여된 미션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식이다.

'런닝맨'이 랜드마크를 버리면서 게임 공간이 확장되자, 랜드마크에 집착했다면 할 수 없었던 '횡단 레이스' 같은 게임이 가능해졌고, 밀폐된 공간을 벗어나자 홍대거리처럼 열린 공간에서의 게임이 시도될 수 있었다. 그만큼 게임이 다양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랜드마크와 억지로 꿰어 맞춘 게임이 가진 예측 가능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본래 게임이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더 흥미로운 법, '런닝맨'의 게임은 멤버들이 그 날의 게임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것은 제작진과 런닝맨들 사이에 묘한 심리전을 만드는데, 런닝맨들이 무언가를 의심하고 또 확신하게 되는 상황이 생길 때, 제작진은 그것을 거꾸로 역이용해 게임을 만드는 기민함을 보인다. 스파이는 '런닝맨'의 이런 심리전을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장치다. '트루개리쇼'는 스파이가 되고 싶어하는 개리를 먼저 세워두고 다른 런닝맨들이 개리를 속이는 몰래카메라를 게임으로 내세웠지만, 마지막에 가서 사실은 개리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또 한 번의 반전을 만들었다. '런닝맨'이 보여준 일련의 진화과정을 되짚어보면 이런 심리전이 가능하게 된 것도 결국은 그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을 버린 데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반전이 생긴다. 즉 '런닝맨'이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이제 거꾸로 그들이 가서 한바탕 게임을 벌이는 공간이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런닝맨 힙합 특집'에서 그들이 갔던 홍대 놀이터나 대학로는 이제 본래 그 공간이 가진 이미지에 '런닝맨'의 힙합맨들이 게임을 했던 장소의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제주도에서 신세경과 함께 벌인 로드 레이스는 그들이 지나간 시장, 해수욕장, 식당 등에 '런닝맨'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심지어 그들이 간 파타야나 북경은 그 게임과 장소가 그대로 하나의 여행상품화 되기도 했다.

'런닝맨'이 애초에 하려던 게임은 기존 랜드마크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지만, 이제 '런닝맨'은 어떤 공간이든 그 공간에서 한 판 신나는 게임을 함으로써 그 공간을 랜드마크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이제 관광지나 여행지 같은 공간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과거에는 그 곳의 유적이나 특별한 자연경관이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이 그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의 랜드마크에 대한 태도 변화는 실로 시의적절 했다고 여겨진다. 랜드마크를 찾아다니던 '런닝맨', 이제 그들이 가는 곳이 랜드마크가 되었다.

 


 

'UV신드롬비긴즈'(사진출처:Mnet)

한국전 당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지펜투텐탁(훗날 '집행유애'라는 곡으로 불린)'을 부른 장본인, 또 1985년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마이클 잭슨을 위시한  50명의 가수들이 'We are the world'를 부를 때 코러스를 했던 인물, 또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파이널을 장식했던 세계 모든 가수들의 우상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와 합동공연을 했던 신화적인 존재. 바로 UV라는 인물에 붙는 스토리들이다.

이 스토리를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UV 신드롬 비긴즈'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위에 나열된 모든 사건들의 연대가 UV라는 두 인물에 의해 행해졌을 가능성은 없다. 즉 이 다큐는 페이크다. 그래서 'UV 신드롬 비긴즈'는 첫 회에 스스로 한국전에 참전해 UV를 목격했다는 제임스 베이커라는 인물을 인터뷰를 담으면서 '이 프로그램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오'라는 자막을 '아주 짧게' 삽입해 넣는다. 진지한 내레이션이 잠깐 끊기고 다시 이어질 때 제임스 베이커가 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딘지 이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가짜임을 스스로 밝히면서도 이 프로그램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댄다. 여기에 UV 당사자들인 유세윤과 뮤지의 기상천외하고 뻔뻔한 행각(?)들이 계속 공개된다. 빅뱅을 앞에 놓고 "그걸 노래라고 하느냐"고 버럭 대고, 박진영이 사실은 외국인이며 UV 밑에서 청소를 하다가 발탁됐다고 하는 식이다. UV 당사자들은 모든 행동과 진술이 진지하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일종의 가상의 놀이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가 가상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즉 UV는 이 페이크 다큐를 하면서 만든 노래, '집행유애'나 '쿨하지 못해 미안해', 또 이번에 들고 나온 '이태원 프리덤'을 모두 음원차트에 올렸다. 유세윤은 정식가수도 아니고 또 트레이닝을 받지도 않았지만 이 페이크 다큐에서 전설적인 가수라고 주장된다. 즉 누구나 거짓말을 알고 있지만 진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뭘까.

이것이 재미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 놀이 속에서는 어떤 스토리도 허용된다. 그리고 그 놀이가 정말 재미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가짜라도 대중들은 주머니를 연다. 'UV 신드롬 비긴즈'는 스토리 시대에 접어든 작금의 상황을 너무나 잘 간파한 프로그램이다. 스토리가 재미있으면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물론 누군가에게 해를 준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심지어 그것은 돈을 벌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시대가 가진 이러한 스토리 경향이 실제 상황에서 벌어진다면 어떨까. 우리는 일찍이 타블로 사태에서 그 결과를 목도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던 타블로는 나중에는 그 가상의 스토리가 엄청나게 커져 도무지 대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팩트)들을 뒤늦게 내놓았지만 이 스토리는 이 사실들마저 소재로 삼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괴물이 되었다.

그 타블로 사태에서 목도한 것들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서태지-이지아 얘기다. '서태지와 이지아 사이에 두 딸이 있다'는 얘기에서 '심은경이 서태지의 딸'이라는 스토리로 이어졌고, '서태지의 여자관계 때문에 이지아와 헤어졌다'는 스토리가 나오자 '그 여자가 구혜선'이라는 스토리가 나왔다. 그러자 또 '구혜선이 아니라 한예슬이다'로 이어졌다. 항간에는 '이지아가 서태지와의 관계를 소설로 써서 연재해 왔다'는 스토리까지 나왔다. 이 정도 되면 'UV 신드롬 비긴즈'를 뺨치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스토리는 'UV 신드롬 비긴즈' 같은 놀이가 아니다. 그걸 만들고 유포하는 이들에게는 놀이처럼 여겨지겠지만 당사자들(괜스레 이름이 올려진 이들에겐 더더욱)에게는 곤혹스러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타블로 사태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렇게 끊임없이 스토리가 커져서 나중에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괴물이 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를 별거 아니라고 방치하는 순간부터다. 상황은 터졌지만, 당사자인 서태지는 묵묵부답이다. 물론 이처럼 사생활을 밝히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선택일 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해 공인의 잣대를 섣불리 들이대는 것은 난센스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밝히길 원치 않는 사생활을 드러내야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도의적인 책임은 남을 수 있다. 자신의 문제가 일파만파 커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UV 신드롬 비긴즈'와 서태지 루머를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한없이 감추어지던 신비주의 시대에서, 끊임없이 신비가 파헤쳐지고 그것이 스토리로 양산되는 시대로의 변화가 있다. UV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신비적인 존재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바로 그럼으로써 그들이 보통의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UV 신드롬 비긴즈'는 키치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오히려 진위와 상관없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우리는 이 페이크 다큐의 재미를 즐길 수 있다. 즉 'UV 신드롬 비긴즈'는 지금 이 스토리의 시대를 한껏 즐기고 있는 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태지-이지아 스캔들과 함께 당사자들이 침묵함으로써 오히려 양산되는 거짓 스토리들을 우리는 즐길 수 없다.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스토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과잉 정보 시대에 맥락이 잡히지 않아 부재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질서를 잡아주는 힘으로 스토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때론 아예 부재한 것을 진짜처럼 왜곡시키는 것도 스토리의 파괴력이다. 즉 모든 것이(심지어는 없는 것까지) 스토리로 덧씌워지는 것은 어쩌면 서태지나 이지아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정면돌파 하거나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물론 UV처럼 누군가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피해는커녕 유쾌함을 주지 않는가)으로 말이다.

가수들의 예능출연을 바라보는 두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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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우리 시대, 가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가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해묵은 것처럼 보인다. 즉 90년대 비주얼을 내세운 기획형 아이돌 그룹들이 등장했을 때도 이 질문은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또 많은 것들이 변했다. 디지털 환경을 맞아 음반시대가 저물고 음원시대가 열렸다. 가수들은 더 이상 노래만 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고 재빨리 대형기획사들은 방송사에 드라마에서부터 예능까지 아이돌들을 포진시켰다. TV 어디를 틀어도 아이돌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갈수록 '노래만 하는 가수들'이 설 무대는 점점 사라졌다.

가수들의 '예능-드라마 러쉬'가 이어졌다. 예능과 드라마를 모두 석권하고(?)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을 이룬 이승기의 등장은 모두들 그를 경이롭게 바라보게 했지만, 이제 아이유가 '영웅호걸'에 출연하고 '드림하이'에서 연기를 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떠는 이들은 없다. 그만큼 가수들의 예능 드라마 출연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이돌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노래만 하는 가수들'이 설 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던 '세시봉 친구들'은 '놀러와'에 놀러온 후 세간에 주목을 받았다.

'세시봉 친구들'에서 확인한 것은 예능이 '노래하는 가수들'을 끌어안았을 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토크쇼에 나온 가수들은 노래에 스토리를 엮었다. 김태원은 '네버 엔딩 스토리'의 탄생배경을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전해주었고, '세시봉 친구들'의 노래는 그들의 전설 같은 세시봉 시절 스토리와 결합되어 환상의 하모니가 되었다. 노래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래에 스토리가 곁들여지면서 노래에 대한 집중도가 그만큼 높아졌던 것이다.

이 변화하는 가수들의 환경과 대중들의 기호를 재빠르게 포착해 예능으로 끌어들인 건 쌀집아저씨 김영희 PD였다. 그는 '나는 가수다'를 통해 '노래하는 가수들'의 노래 자체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한편, 그 노래를 위한 최고의 무대도 만들었다. '세시봉'이 우연한 발견이었다면 '나는 가수다'는 적극적인 기획의 산물이었다.

'나는 가수다'는 제목처럼 가수의 정체성을 묻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논란을 야기했다. 즉 가수들이 '서바이벌' 같은 혹독한 예능의 장치 속에 들어가면서까지 노래를 해야 하는가 하는 전통적인 가수상에 힘이 실린 비판적 관점과, 가수들도 달라진 대중문화의 환경 속에 들어와 노래해야 한다는 우호적 관점이 갈렸다. 실제로 '나는 가수다'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들의 곡은 순식간에 음원차트를 쓸어버렸다. 신보를 내고 활동을 하는 아이돌들이 순위권 바깥으로 밀려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가수의 예능 출연에 대한 엇갈린 두 시선. 이것은 대중음악의 예능 종속인가, 아니면 예능과의 동거인가.

이러한 대중음악과 예능이 한 틀 속에서 공존하게 된 것은 예능의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리얼 예능이 등장하면서 무언가 예능적인 기술들, 예를 들면 연기력이나 개인기 같은 것들이 그다지 필수요건이 되지 않게 됨으로써 현재 예능은 장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김태원 같은 전설의 기타리스트가 국민할매로 불리고, 양준혁 같은 야구의 전설이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게 된 건 모두 이 리얼 예능이라는 형식 덕분이다. 리얼 예능은 거꾸로 리얼리티를 더 강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개그맨 같은 예능 기술자(?)들에서 멀어져 새로운 분야의 인물들로 넓혀져 가는 추세에 있다.

'나는 가수다'는 가수들이 예능의 콘테스트 형식 속으로 들어온다는 점에서 단지 예능 출연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수들의 정체성 논란이 더 증폭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음악 프로그램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능이 해줄 때, 음악은 또한 예능에게 해줘야할 몫이 있게 마련이다. '왜 가수는 그저 노래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은 일견 타당하지만, 이미 스토리텔링과 맞물리고 대중들과 더 밀착되어 호흡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런 지적은 심지어 보수적으로까지 읽힌다.

이제 달라진 환경 속에서 질문은 '왜 가수는 그저 노래만 해야 하는가'로 바뀌고 있다. 물론 애호가들이나 전문가들은 그저 노래만으로도 가수들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들 속에서 대중들에게 노래는 배경음악이 되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배경음악을 다시 집중해서 듣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예능의 툴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일도 아니다. 한때 뮤직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음악이 영상의 서사를 빌려왔던 것이나, 또 영화나 드라마 OST라는 장치를 빌어 스토리텔링을 하려 했던 것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망자', 초반 부진을 털어낼 것인가

'도망자'는 실험작인가, 실패작인가.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도망자'로서는 예상 밖일 것이다. 엄청난 제작비를 투여한 작품이 실험작이 될 수는 없는 일이고 또한 실패작이어서는 더더욱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어설픈 실험작이자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 실패작이 되어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을까.

제일 먼저 지목되어야 할 것은 속도다. 이 드라마는 속도 조절에서 실패했다. 빠른 속도감은 최근 드라마들의 한 경향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빨리 달려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특히 '도망자' 같은 액션 스릴러라면 더더욱 그렇다. 액션은 흔히 보여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읽혀지는 것이다. 즉 액션을 할 때 왜 저들이 저런 액션을 하는 지가 읽혀져야 비로소 그 동작들이 보여지게 된다.

'도망자'는 달려 나갈 줄은 알았지만 정작 왜 달려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제작자들은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일본, 중국, 동남아와 서울을 무선 통신의 속도로 끊어내며 휙휙 달려 나가는 이 속도감에 대중들이 열광할 것이라고. 하지만 맥락 없는 행동이 이해할 수 없듯이 '도망자'의 시간과 공간을 휙휙 뛰어넘는 화면 연출과 마치 유명 관광지를 배경으로 찍기로 약속이나 된 듯이 스토리와 그다지 상관없는 공간에서 '달리기'를 하는 주인공들은 그저 정신없는 드라마로 '도망자'를 인식시켰다.

게다가 '도망자'는 꽤 많은 인물들을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작가나 연출자라면 물론 한쪽 벽에 떡하니 붙여놓은 인물 관계도처럼 그들의 행동들이 일목요연하고 합이 딱딱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인물 관계도는 커녕 인물 하나도 이해하기 힘든 시청자들에게 그것은 그저 인물의 인해전술처럼 보였다. 영화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관객들이 그 퍼즐들을 맞추려 노력했겠지만 이건 안타깝게도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맥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누워 보기 마련인 드라마다. 왜 시청자가 고통스럽게 그 적은 단서로만 제시되는 인물군들을 하나하나 꿰어 맞추는 수고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버튼 하나 눌러 채널을 돌리면 되는 것을.

물론 '아이리스' 같은 불친절한 드라마도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도망자'와 '아이리스'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물에 대한 몰입도다. '아이리스'는 꽤 복잡하고 빠른 전개에 연출 스타일도 친절한 것이 아니었지만, 캐릭터가 분명했다. 우리는 이병헌이나 김태희의 감정이 배어있는 멋진 액션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전체 퍼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망자'는 다르다. 지우(비)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는 너무 가볍게만 느껴졌고, 진이(이나영)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녀는 성격이 너무 복잡했다.

게다가 겉으로 한없이 쿨한 것을 지상과제로 내세우는 듯한 이 캐릭터들은 좀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속내를 제대로 모르니 울어도 감정전달이 잘 되지 않게 된다. 왜 갑자기 지우와 진이가 서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 건지 우리는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감정전달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들은 마치 작가가 놓는 장기판의 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마치 인형처럼 조종되는 듯한 인물들이 결국 시청자와 함께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드라마는 '도망자'를 그리면서 근본적으로 쫓기는 자나 쫓는 자 모두 심리적으로 너무 태평하다. 아무리 붙잡혀 있어도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 이것은 스릴러와 코미디가 균형 없이 엮였을 때 생겨나는 결과다. 긴장감을 주어야 하는 스릴러는 내면의 절실함을 담아내야 하고 코미디는 간간히 그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코미디가 전편에 깔리다 보니 아예 스릴러의 긴박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추노'에서는 이 긴박감과 코미디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작품의 코미디가 해학으로서 사회 비판적인 날카로움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천지호(성동일) 같은 칼날 같으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캐릭터는 그래서 창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망자'의 코미디는 말장난에 가깝다. 물론 진지한 대사도 넘쳐나지만, 이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게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는 진지하게 어떤 장면에서는 그저 웃기기 위한 말장난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긴장감도 떨어지고 웃음 또한 그 효과가 나오기 어렵다.

한두 명의 이야기에 집중시켜 끌고 가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시에 끌고 가는 것은 천성일 작가의 스타일이다. '추노'는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추노'와 '도망자'의 많은 인물군들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서가 존재한다. 즉 '추노'의 많은 인물들은 다양한 당대의 민초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그들에 대한 공평한 조명에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도망자'의 많은 인물들은 민초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정의의 편에 선 인물이라 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그저 돈을 쫓는 인물처럼 보여진다. 그러니 정서적인 공감이 일어날 리가 만무다.

다행스러운 것은 초반 정신없이 외국을 넘나들며 달리고 달리던 드라마가 9회를 넘기면서 국내로 돌아와 조금씩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9회부터 인물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각자 처한 입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러자 액션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해외촬영이 차지했던 8회분의 분량이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아예 차라리 9회서부터 시작했다면 차근차근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국경을 뛰어넘는 배경과 언어는 실험적이라 할 만하지만, '도망자' 같은 거대 프로젝트가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고 실험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근래 보기 드문 드라마계의 기대주들인 곽정환 감독과 천성일 작가는 왜 과거 연전연패했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의 전철을 밟았던 것일까. 마치 시즌2를 보는 것 같은 9회분 이후의 분량에서나마 이들이 '추노'에서 보여주었던 재기발랄함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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