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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사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할아버지. 뾰족한 연필이 슬퍼요?" 열일곱 살 소녀 은교(김고은)가 칠순이 다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에게 묻는다. 이적요는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필통에서 달각거리던 연필 이야기를 통해 연필이라도 각자의 기억에 따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은교가 "그게 시인가요?"하고 되묻는 것처럼 시란 그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저마다의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사진출처: 영화 <은교>

<은교>에 대한 홍보 마케팅 포인트가 이 영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갖는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치 19금 영화로 치부되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린 여고생을 탐하는 변태적이고 성적인 영화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선이 관객들을 영화로 끌어들이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성기나 음모 노출 같은 노출 수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똑같은 벗은 몸이라도 그것을 성적인 노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나이 들어가는 육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멸해가는 몸에 대한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다룬 <은교>에서 노출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적요의 벗은 몸은 그 쓸쓸함을 담아내고, 은교의 벗은 몸은 청춘의 생기를 담아내며, 서지우(김무열)의 벗은 몸은 외로움과 욕망을 담아낸다.

 

산장처럼 깊숙한 숲속에 놓여진 이적요의 집은 이적요 자신처럼 고적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속에 쌓여진 책들 속에 앉아있는 이적요의 모습은 마치 책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책이란 유적처럼 남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적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은교가 들어온다. 은교는 그 낡은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서재 곳곳에 놓여진 찻잔들을 치우고, 먼지가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는다.

 

사실 은교의 노출이나 섹스보다 더 가슴을 살랑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이적요의 공간에 풋풋한 은교가 들어온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이적요는 차츰 낡아져가는 자신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청춘'의 설렘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적요의 옆에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가 있다는 것은 이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대비시켜준다. 젊은 서지우와 은교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은 '외로워서'이다. 젊은 그들은 육체의 욕망에 눈 멀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나이든 노구의 시인은 사랑을 느끼나 이미 늙어버렸다. 훗날 은교가 벽을 향해 등 돌리고 누워 있는 이적요에게 쏟아내는 그 눈물이 그토록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 등 돌림 하나가 거대한 시간의 장벽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교>는 벗은 몸의 에로티시즘보다 그 생기발랄한 몸이 주는 생명력과 사멸해가는 몸의 비통함이 더 느껴지는 영화다. 극 중에 서지우가 이적요에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추문"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적요가 분노하는 건 마치 이 영화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는 말처럼 들린다.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분명한 <은교>는 그래서 야하다기보다는 슬프다.

Posted by 더키앙
TAG , , 은교, 청춘


'해품달', 절묘한 제목에 담긴 의미들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물론 음양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해는 양, 즉 왕을 뜻하고 달은 음, 즉 여인을 뜻한다. 이 사극에서 해는 훤(김수현)이고 달은 월이라고도 불리는 연우(한가인)다. 이처럼 '해를 품은 달'은 그 제목만으로도 이 사극이 멜로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극명하게 드러낸다. '해를 품은 달'이란 훤과 연우의 가까운 듯 먼 그 안타까운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는 사극이다.

달이란 본래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콘텐츠들 속에서 달이 종종 그리움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해가 뜨면 달은 사라진다. 즉 눈 앞의 현실은 그리움이나 추억 같은 과거의 기억을 마치 없는 것처럼 저편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하루의 현실이 지나가고 이제 오롯이 자신으로 돌아오는 밤이 되면 그 없었던 듯 떠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달, 그리움이다.

그래서 '해를 품은 달'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고 월(月)이 된 연우는 자신을 비춰주었던 해(훤)의 곁에서 액받이 무녀로 살아가며 조금씩 기억을 찾아낸다. 이것은 마치 그믐이었던 달이 초승달과 반달을 거쳐 보름달로 바뀌는 그 과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연우는 훤과의 관계를 통해 차츰 기억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남의 기억(신기로 들여다보는)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바로 '일식'이다. 사실상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이 일식을 뜻하는 것이다. '해를 덮어버리는 달'은 잠시 현실을 지워버리고 과거의 기억만을 오롯이 띄우는 시간이다. 이 반전의 시간에 연우가 어린 시절 세자빈으로 있을 때 거처했던 은월각의 혼령받이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절묘하다. 그것은 현재의 월이 과거의 연우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래서 월이 자신이 연우임을 알고 비로소 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와 달이 겹쳐지는 현상, 일식으로 상징화된다.

이렇게 보면 음양 사상과 무속적인 판타지가 뒤섞인 이 사극 콘텐츠에 왜 무녀라는 낯선 인물들이 들어왔는가가 설명된다. 일식은 특히 사극에서 무녀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선덕여왕'에서 일식이라는 현상은 미실이 민초들을 현혹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무녀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과거 정통사극 시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때도 무녀들은 일식이라는 설정과 함께 왕의 실정을 드러내는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

'해를 품은 달'이 가진 판타지적인 요소들은 이처럼 해와 달, 그리고 일식이라는 자연현상을 인물들로 상징화한 스토리와 엮어냄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멀리 떨어져 마주보고 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아련함은 이 압도적인 자연현상에 그리움 같은 애절함을 부여한다. 이것은 '해를 품은 달'이 가진 기존 사극과는 상반되는 정조를 만들어낸다. 기존 사극들이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와 숨 쉴 틈 없이 흘러가는 소설적인 흐름을 갖고 있었다면, 이 사극은 조금은 멈춰 서서 그 순간의 감정을 깊이 느껴보는 시적인 정조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치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은 그래서 대중들이 이 사극에 빠져들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Posted by 더키앙

디지털 시대를 울린 소박한 아날로그 감성

'놀러와'의 골방 브라더스, 이하늘과 길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진지한 모습이었다. 깨방정에 게스트들을 몰아세우기까지 하던 이들은 다소곳이 출연한 세시봉 전설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들려주는 추억어린 이야기와 아름다운 포크 선율에 빠져들었다. 이야기 중간 중간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이들의 음악은 '놀러와'를 과거 라디오 공개방송 같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적셔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 감성 속에 빠져있던 악동 김하늘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혹자는 김하늘의 눈물이 지나친 감수성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음악의 끝단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이 세시봉 전설들이 환기해낸 정서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제는 디지털에 화려한 무대와 댄스 속에 잊혀진 것처럼 여겨지던, 소박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아날로그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타 한 대와 이미 스스로 하나의 악기가 되어버린 그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서로의 눈빛만으로 척척 하모니를 이루는 장면은 작금의 음악세태로 보면 기적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40년 가까운 교감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음악이라는 본연의 세계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단지 음의 고저와 말장난에 가까운 가사들 그리고 자극적인 박자의 조합이 노래로 여겨지는 지금, 그들의 소박한 음악 속에는 아름다운 음과 시가 되어버린 가사가 어우러져 우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조영남이나 송창식이 가수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인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입지전적인 삶과 거기서 만들어낸 음악들이 작금의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음악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웨딩케이크'나 '두 개의 작은 별'에 얽힌 포복절도의 에피소드를 전해준 윤형주는 놀라운 예능감으로 시청자들을 웃게 했지만, 그 아름다운 가사들은 그의 시적 감성을 잘 드러내주었다. 즉석에서 만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라라라' 같은 곡이 단 40분 만에 그런 가사를 담아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들의 자리를 감동적으로 만든 것은 이 나이든 아저씨들이 여전히 개구쟁이들처럼 옥신각신하면서도 보여주는 선후배를 넘어서는 진한 형제애다. 조영남이 즉석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하모니를 넣는 모습은 백 마디 말보다 그 깊은 마음의 교감을 전해주었다. 누군가는 그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삶 전체를 살맛나게 할 그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

악동 김하늘의 눈물은 아마도 이들을 바라보다가 시청자들이 문득 느끼게 된 가슴 먹먹함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전자음과 디지털과 자극과 현란함에 어지러운 우리의 눈과 귀를 정화시키는 진짜 음악의 세계가 주는 날 것의 감동이다. 세월이 묻어난 그 음악은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Posted by 더키앙

‘하녀’의 냉소, ‘시’의 관조, ‘하하하’의 유머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까. 칸느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 영화 세 작품,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창동 감독의 ‘시’,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이 절망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하녀’가 5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시’는 그 도저한 시간의 흐름 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로 승화해냈고, ‘하하하’는 본래는 무의미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의미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우리의 실존을 과거와 현재를 병치함으로써 홍상수 특유의 유머로 그려냈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를 만들던 1960년도에서 50년이 지난 2010년,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녀’라는 텍스트가 50년을 넘어서도 그대로 다시 리메이크되는 현실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공장여직공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초상류층으로,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의 좁은 저택에서 실제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판타지화된 대저택으로, 욕망의 화신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으로 바뀌어졌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이 ‘하녀’라는 계급이다. 자본의 시스템이 견고해진 현재에 ‘하녀’는 그 속에서 상류층에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하녀로 부속화한다. 자본의 하녀다. 그래서일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는 다른 처절한 절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세상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그 변하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이 삶의 본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본질을 계속 쳐다보려는 노력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서는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세상은, 제 아무리 누군가의 죽음에 죽을 듯이 절망감을 느껴도 그저 아래로 흘러가기만 하는 강물을 닮았다. 즉 철저히 타인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은 그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그 아프고도 고통스러운 시를 쓰는 행위는 그 절망적인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점점 시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 그 어떤 통렬한 비판보다 ‘시’가 우리를 울리는 것은 그 미사여구 없이 그대로 바라본 듯한 현실의 관조 덕분이다.

‘시’가 무심한 세상에 대한 의미화에서 시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를 발견해냈다면, ‘하하하’의 시는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농담 같은 의미화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해주는 소재다.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같은 시간대에 통영에서 겪었던 며칠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이 두 사람의 막걸리 자리의 안주거리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의 겪은 일들은 사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각각의 이야기로 전한다. 즉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삶을 한바탕 술자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제목처럼 하하하 웃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허허로운 뒤끝을 남긴다. 홍상수 감독은 이제 삶의 절망감마저 유머로 승화시키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칸느에서 주목받은 이 세 작품은 모두 우리네 삶의 절망감을 다루고 있다. 그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망감을 향해 누군가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외면하지 않고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의 마음을 발견하며, 누군가는 그 절망감마저 하하하 막걸리 한 사발의 유머라고 달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 영화들이 우리는 물론이고 칸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마치 절망이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허위들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글)
'하녀', 그녀는 여전히 밑에 있었다
'시'는 정말 어려워요, 아니 고통스럽다
'하하하'가 우스운가, 슬프다

Posted by 더키앙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데 그다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는 정말 어려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시쓰기 강좌의 선생님 김용택 시인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말처럼 '시'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본질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무심하게 흐르기만 하는 강물에서 시작해 바로 그 강물에서 끝납니다. 저 멀리서 강물 위로 무언가 떠내려오는 그 무엇은 차츰 화면 가까이 다가오면서 실체를 드러냅니다. 한 여중생의 시신입니다. 그 시신 옆으로 이창동 감독이 직접 육필로 썼다는 제목, '시'가 나란히 보여집니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저 멀리 있어서 그저 그런 풍경으로만 생각해오던, 그래서 김용택 시인이 "여러분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 풍경의 본질을, 마치 강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의 영상을 통해 바라봐야 합니다. 미자의 마음을 그토록 괴롭혔던 한 꽃같은 소녀의 속절없는 죽음과,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사람들과 시간들의 잔인하지만 그것이 본질인 삶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시(중의적 의미로)'가 어렵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용택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쓰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그 마음을 갖기가 어려워서입니다. 즉 속절없는 삶을 아무런 편견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죠.

저 멀리 그저 소문 속에 있던 여중생은, 미자가 시를 배우기 시작하는 그 즈음, 그래서 김용택 시인이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그 시쓰기의 첫걸음을 얘기하는 그 시점에서 차츰 미자에게 다가옵니다. 그 죽음에 손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미자가 여중생을 좀더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추모미사에도 가보고 여중생의 어머니도 만나보면서 미자의 마음 속에 여중생이라는 불특정했던 본질없는 삶은 아녜스라는 이름으로 본질을 드러냅니다. 미자에게 그러니까 여중생이 아녜스라는 이름을 가진 피어나지 못한 꽃이 되는 과정은 그녀가 시를 쓰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미자는 추모 미사에서 훔쳐온 아녜스의 사진을 마치 자기 가족이나 되는양 집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녜스 주변의 삶들은 그러나 그저 강물의 흐름처럼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아녜스의 엄마는 밭에서 깻잎을 따고 그 해의 풍작과 흉작에 대해 걱정합니다. 절대로 딸의 죽음을 합의금으로 묻어둘 것 같지 않던 그 엄마는 결국 별 저항없이 합의를 해줍니다. 아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미자의 손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투정을 하고 TV를 보며 웃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오락실에게 게임을 합니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말로는 아녜스의 죽음이 안타깝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걱정은 자기 자식들의 앞날 뿐입니다.

그런 현실을 목도하는 이제 '시 쓰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미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처음 가해자의 부모들이 어느 음식점에서 만나 자기 자식들을 위해 합의금 얘기를 꺼낼 때, 미자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화단의 붉은 꽃(미자는 이 꽃을 슬픔이라고 하죠)을 바라봅니다. 아녜스의 엄마가 합의를 해주는 그 자리에서도 같이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무엇보다 무심한 손자를 바라보는 미자의 마음은 더더욱 무겁습니다.

미자는 결국 아녜스의 목소리로 시를 씁니다. 아녜스가 얼마나 세상의 피어나는 꽃들을 사랑했는지를, 그 누구도 아녜스의 죽음 앞에 얘기해주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대신 시로 씁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시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거짓없이 바라본다는 것,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고통스럽지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치 내 일처럼 바라본다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자가 불러주는 '아녜스의 노래'를 통해 알게되죠.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그 누군가의 진심을, 우리 자신의 본질을, 세상의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들을 고통스럽지만 바라보는 그 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어렵습니다. 아니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미자가 시를 대하면서 경험한 것처럼. 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시가 그러하듯이.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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