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한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나무가 주는 여러 감정들이 있다.

얼마나 외로울까,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 아래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명들을 겪으며 나무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영화 <침묵의 친구>는 바로 나무의 시선이라는 그런 관점을 담은 신비로운 영화다.

침묵의 친구

영화는 1832년 한 독일 대학의 식물원에 뿌리내린 한 그루의 은행나무의 시점으로

서로 다른 시대의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병치한다. 

첫번째 인물은 1908년 이 대학 최초의 여학생으로 식물학과에 입학한 그루타(루나 웨들러)다.

그녀는 입학 면접에서부터 모욕적인 성희롱을 당할 정도로 

남성중심적 사회(학교도 가정도 직장조차도)에 고립되어 있다. 

새벽에 숲에 들어가 나무와 교감한 것 때문에 방탕하다며 하숙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숙식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조수를 구하는 사진관에서 일하려 한다.

여성이 조수로 일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대에

사진관 사장은 처음엔 반대하지만 결국 그녀를 받아들여 사진기술을 알려준다.

그루타는 사진기술로 식물들을 찍기 시작하며

사진이 그림보다 식물의 구조를 기록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된다.

남성중심적 세상에 고립되어 잔뜩 위축되어 살아가던 그녀는

사진으로 식물을 연구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가고

그 기술로 해외 식물연구를 하는 프로젝트에 유일한 여성으로 지원하게 된다.

배타적이고 남성 권력 중심적인 세상이지만 그녀를 세상과 연결시겨준 것들이 있다.

사진관 사장이 그렇고, 사진기술이 그러하며, 그녀가 늘 관심 있었던 식물에 대한 애정이 그렇다. 

침묵의 친구

그리고 그녀 같은 여성들의 이런 노력은 두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1972년 하네스(엔조 브룸)가 짝사랑한 군둘라(마를레네 부로우) 같은 여성의 자유로운 시대로 연결된다.  

1970년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히피 운동이 펼쳐지던 시절에

군둘라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루타가 겪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는

제라늄을 키우며 거기 연결된 전극으로 식물이 인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한다. 

어찌보면 그루타의 사진기술이 포착해낸 식물에 대한 연구가

군둘라의 연구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물의 주인공은 군둘라가 아니라 하네스다. 

그녀를 짝사랑하지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그녀의 정원을 맴도는 청년이다.

본래 농촌에서 자라나 식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지만

공학도인 그는 여행을 떠난 군둘라를 대신해 제라늄을 돌보면서

이 생명체와 교감하기 시작한다. 

하네스의 제라늄에 대한 애정은 군둘라에 대한 짝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는데

하네스는 결국 제라늄의 전자기적 반응을 기계적으로 연결해(문을 열고 닫는 것 같은) 

자신의 행동과 말에 식물이 반응하고 소통하는 장치를 개발한다. 

짝사랑하는 이성이 떠난 외로운 정원에서 홀로 있지만

하네스는 그렇게 식물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고 싶어한다. 

침묵의 친구

세번째 인물은 2020년 코로나 19로 그 대학에 시설 관리인과 단둘이 고립되어 버린 토니(양조위)다. 

신경과학자로 이 대학에 부임해 인지과학을 가르치다 팬데믹으로 고립된 그는

식물원의 거대한 은행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본래 아기의 뇌활동을 디지털 이미지로 포착해 연구하는 토니는

세계적인 식물학자 엘리스(레아 세두)에게 화상통화로 도움을 받아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낸다. 

어찌보면 이 기술은 저 하네스가 외로운 정원에서 짝사랑의 마음으로 만들었던

기계장치로부터 진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연구를 하는 토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해하던 시설 관리인은

어느 날 나무에 설치된 장치들을 모두 끊어버린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행동도 이해하지 못하는 토니와 관리인은 그렇게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시설 관리인이 점점 토니를 이해하게 되고

끊어버린 장치를 다시 연결해주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다시 이어진다. 

스마트폰 통역기로 대화를 이어가며 두 사람은 어느덧

나무 앞에 함께 앉아 나무가 전하는 소리들을 기다리는 연결된 존재가 된다. 

침묵의 친구

1908년을 담은 흑백필름으로 찍힌 그루타의 이야기와,

1972년을 담은 16미리 컬러 필름을 촬영된 하네스의 이야기는 그렇게

2020년 펜데믹 속 토니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다루고 있어 각각이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립과 단절을 넘어서려 했던 행위들(누군가를 만나고 식물을 연구하는 등)이

그 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영화는 나무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침묵의 친구

'침묵의 친구'는 그래서 고립과 단절 속에 외로운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연결된 존재들인가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큰 위로를 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침묵의 친구'란 명시적으로는 나무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좀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그건 아직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가 서로 소통할 가능성을 지닌 '침묵의 친구'라는 의미도 있을 게다. 

물론 그 친구는 사람만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는 이야기다. (사진:영화 '침묵의 친구')

202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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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곰곰 생각하면 빵빵 터지는 박찬욱표 블랙코미디

어쩔 수가 없다

“다 죽여버려.” 재취업 면접에 나가는 남편 만수(이병헌)에게 미리(손예진)는 그렇게 말한다. 면접 경쟁 상대들을 이기라는 말이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 말을 실제 사건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블랙코미디로 그려낸다. “다 이루었다” 생각했던 중년의 가장이 졸지에 정리해고되어 재취업 전쟁에 뛰어들게 되고, 도저히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생각 하자 엉뚱하게도 경쟁 상대를 제거하는 일에 뛰어들게 되는 것.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라는 블랙코미디가 가진 웃음의 코드를 드러낸다. 그건 세상에 대한 풍자다. ‘다 죽여버려’ 같은 말이 이제 별 섬뜩함도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경쟁 사회에서 그걸 실제로 감행하는 인물을 통해 그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쿡쿡 웃게 만드는 것이다. 제목이 ‘어쩔 수가 없다’인 이유도 그것이다. 흔히들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저지르는 일들이(사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가. 

 

역시 블랙코미디는 멀쩡하게 보였던(실제로는 아닌) 누군가가 망가져 가는 과정에서 빛이 난다. 만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정도로 성공했고 행복하다 자부하는 가장이다. 교외의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반려견이 바비큐 파티를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정경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25년 간 제지 전문가로 일해왔던 회사가 외국계 회사의 투자로 경영권이 바뀌면서 돌연 해고 통보를 받았다. 만수 가족의 행복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모가지를 자른다’고 표현하는 해고가 실제 누군가의 목을 날려버리는(죽이는) 사건으로 벌어지고,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같은 대사가 실제로 경쟁자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광경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취업 전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살벌한 싸움이 펼쳐지고, 여기서 누락된 자들의 처절한 죽음이 그려지는데, 이것이 모두 세태를 꼬집는 풍자적 은유를 담고 있어 잔혹한 장면에도 웃음이 난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야심은 단지 재취업 전쟁에서 싸우는 가장들의 경쟁에만 머물지 않는다. 종이를 생산하는 제지업이라는 산업이 기계화, 자동화 되면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심지어 한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짓과 똑같이 병치된다. 나무를 송두리째 잘라 내어 인간의 문명을 담고 쌓아온 것이 바로 종이를 만든 인간의 자연 파괴적 폭력이 아니던가. 

 

분재를 취미로 가진 만수가 억지로 나뭇가지의 방향을 뒤틀려다 부러뜨리는 것처럼, 그가 취업 전쟁 속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짓은 나무에게 행하는 폭력을 그대로 닮아있다. 차마 사체를 잘라내지 못하는(모가지를 못 자르는) 그는 사체를 분재하듯 뒤틀어 틀을 만들어 놓고 나무를 심듯 땅에 묻는다. 그리고 그 위에 마치 내일 세상이 망해도 자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위선으로 사과나무를 심는다. 

 

나무나 식물을 자르고, 뽑고, 심는 이미지는 그래서 고스란히 인간의 행위들과 유사한 이미지로 겹쳐진다. 그가 어떻게든 들어가려는 회사의 이름이 ‘문 제지(창업자의 성이 문이다)’인 것은 그래서 이러한 제지 공정을 거쳐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로 나오는 종이가 사실은 살벌한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문제’라는 걸 드러낸다. 

 

돈이 필요해 사고를 치는 아들이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를 피우고, 첼로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딸이 나무로 만든 악기와 종이로 만든 악보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건, 이러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기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풍자적으로 담아낸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처해진 폭력은 저 <포카혼타스>라는 작품에서 아메라카 원주민 포카혼타스와 백인 개척자 존 스미스의 미화된 판타지로 그려진 바 있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 위선을 가장무도회에 참여하는 만수의 미리의 이야기로 꼬집기도 한다. 

 

심지어 누군가를 죽여가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하듯 말하는 만수의 모습은 그래서 재취업 경쟁에 뛰어든 가장의 서사를 넘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해온 인간의 보편적인 서사로 확장된다. 영화의 엔딩은 이를 영상 이미지로 담아낸다. 갖가지 우악스런 기계에 의해 마구 잘려지는 나무들, 그 나무들로 공장에서 말끔하게 만들어지는 종이들, 그리고 그 종이 위에 그려진 음표들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음악들. 문명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며 해온 인간의 폭력이라는 걸 이만큼 영상적으로 압축해 담아낼 수가 있을까.  

 

문명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작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음악이 압도적인 작품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으로 장중하게 시작한 작품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김창완의 ‘그래 걷자’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아름다운 첼로 연주로 소동극의 코미디 끝에 깊은 여운을 담는 처연한 엔딩을 만든다. 영상만큼 뛰어난 음악의 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극장에 가야할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최근 들어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는 훨씬 더 일상 세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에서부터 이번 작품 <어쩔 수가 없다>를 통해 박찬욱 감독 특유의 영상미학이 우리의 일상을 보다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짜릿함을 주고 있다. 한 번 봤지만 또 보고 싶은 영상미학과 그 안에 담겨진 풍자적 코미디들이 가득한 작품이다. 결코 그 야심찬 기획을 안 보고는 넘어갈 수가 없는. (사진:영화'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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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반’이 그리는 골목과 식물 그리고 짝사랑

 

이숙연 작가는 공간이 주는 감성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작가다. 전작이었던 <공항가는 길>의 공간이 공항이었다면, tvN 월화드라마 <반의반>의 공간은 골목이다. 일상을 벗어나는 두려움과 설렘의 관계를 <공항가는 길>의 공항이라는 공간이 은유했다면, 각자의 위치에서 마치 숨바꼭질하듯 엇나가는 짝사랑의 관계를 <반의반>의 골목은 은유한다.

 

이들은 그래서 그 골목길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머무르고 회고하며 아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원(정해인)과 한서우(채수빈)가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골목에서였다. 우연히 골목을 걷다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고개를 돌린 하원은 녹음실 창을 통해 서우를 봤고, 그렇게 멈춰서 음악을 듣는 하원을 위해 서우는 볼륨을 높여주었다. 하원은 그 소리에 이끌려 녹음실을 찾아왔고 그게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하원이 오랜만에 연락이 와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김지수(박주현)를 만난 곳은 골목을 걷다 우연히 보게 된 어느 한적한 주택 앞이었다. 거기에서 하원은 지수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수가 남편 강인욱(김성규)에게 하원의 어머니 사망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홀로 노르웨이로 떠났다 사고를 당하자 하원은 절망하며 그 집에서 숨어 지낸다. 그리고 그 집을 찾아온 서우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지수와 만나기로 했지만 나타나지 않은 그를 하염없이 하원이 기다리는 곳은 바로 그 골목길에 있는 카페다. 그 카페에서 하원은 서우와 만나 지수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함께 지수가 마지막으로 갔던 길들을 찾아 나선다. 저 멀리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 앉기도 하고, 육교 위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반의반>에서 골목길과 그 곳에 있는 녹음실, 카페, 주택 등의 공간이 중요한 건,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그 곳에 늘 서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존재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위로 사람들은 끝없이 나타났다 만났다 헤어졌다 엇나간다. 골목길의 그 공간들은 그래서 마치 문순호(이하나)가 정성을 들여 살려내고 키워내려는 화분 속 식물을 닮았다. 움직이지 못하고 늘 거기 서서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하지만 그를 찾는(바라보는) 이들에게 어떤 편안함과 안전함과 따뜻함을 주는 그런 존재.

 

하원과 한서우는 바로 그 식물 같은 짝사랑을 한다. 하원은 이미 사라진 지수를 잊지 못하고 AI로 복원된 목소리를 통해서나마 그 아련한 사랑을 이어가려 한다. 한서우는 그런 하원의 모습이 보기 좋다. 무언가를 그토록 아끼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래서 그 짝사랑하는 하원을 짝사랑한다. 하지만 한서우는 그것이 안타깝다. 그건 0% 가능성을 가진 짝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은 1%의 가능성이 있는 짝사랑이라고 말한다.

 

서우는 뒤늦게 지수는 떠나기 전 준 화분이 녹음실 한편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걸 발견한다. 가드너인 문순호는 사라진 지수 때문에 사막처럼 말라버려 퍼석퍼석해진 강인욱이 음악을 다시 하게 만들 수 있다며, 뿌리만 살아있으면 식물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원이 지수를 그리워하며 지내던 그 텅 빈 주택에 서우는 적당한 가구를 채워 넣어 온기를 만들려한다. 문순호는 이제 말라 죽어가는 강인욱에 물을 줘 다시 살아나게 해줄 수 있을까. 서우의 1% 가능성의 짝사랑은 하원의 0% 짝사랑을 채워주고 지워줄 수 있을까.

 

<반의반>이 그리는 짝사랑은 그렇게 저 마다의 위치에서 홀로 하는 사랑으로 그 사랑을 받는 대상을 다시 피워내려 하고 있다. 늘 그 곳에 있는 골목을 걷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되는 카페를 찾아갔을 때 그 당사자는 없어도 우리가 받는 어떤 따뜻함과 촉촉함. 그것은 아마도 저 편에서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채워줬던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 드라마는 속삭이는 듯하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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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 반’, 정해인의 AI와 채수빈의 화분이 의미하는 것

 

tvN 월화드라마 <반의 반>은 그 서사의 단점이 적지 않은 드라마다. 그것은 의도적인 불친절이라기보다는 하려는 이야기의 야심이 좀 더 치밀한 개연성 아래 채워지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보인다. 감정적 서사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꽤 복잡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진 않다.

 

노르웨이에서 성장 과정을 함께 지내며 지수(박주현)와 영혼의 단짝이 되었던 하원(정해인)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문정남(김보연)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가게 되고 그렇게 떨어져 그리움만 키워가던 중 지수가 피아니스트 인욱(김성규)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엇나간 사이가 되지만 하원은 지수에 대한 외사랑을 홀로 이어가고, 지수는 어떤 사실(그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하원의 어머니의 죽음과 관계된 듯한)을 알게 된 후 인욱과 관계가 틀어지고 괴로워한다.

 

AI프로그래머로 의료용으로 활용될 대화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하원은 녹음실에서 일하는 서우(채수빈)를 통해 지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한다. 그 과정에서 서우는 하원과 자꾸만 얽히게 되고 그가 지수를 애타게 홀로 짝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홀로 노르웨이로 떠났다 지수가 조난당해 사망하고, 실의에 빠진 하원은 지수의 목소리와 정보를 담은 AI프로그램을 만들고, 서우는 대화를 통해 그 프로그램을 깨워낸다.

 

사실 이러한 AI 기반의 대화프로그램이 낯설기 때문에 <반의 반>이 왜 굳이 이런 설정을 넣었는가가 궁금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죽은 지수를 기억해내기 위해 그가 생전에 찍은 사진들을 찾아내고 그 사진이 찍힌 장소를 찾아가는 하원의 모습은 이 설정에 대한 단서를 준다. 그것은 어쩌면 현재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정보를 축적한 데이터에 목소리를 더하면 그 사람이 죽었어도 마치 진짜 그 사람이 살아있는 듯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설정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하게 된 색다른 사랑 방식에서 나온 상상력일 게다. 우리는 누군가 사망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고 해도 꽤 오래도록 그의 사진과 목소리와 영상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또 굳이 사별하지 않더라도 저 멀리 떨어진 세계 속에서도 전화 통화 하나로 연결되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건 편리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반쪽짜리 사랑’의 아련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원은 서우에게 마치 AI를 통해서라도 듣고 싶어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서우를 통해 지수를 만났다면 그가 어떤 말을 했을까를 물어본다. 서우는 ‘힘든 얘기 다 털어놓고 공항에 안 갔을 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지수가 만들어 하원에게 준 그릇 이야기를 꺼낸다. 괜스레 하원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서우의 그 답변은 그래서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AI에 담겨지는 목소리의 실체를 슬쩍 보여준다. 그건 지수 자신이 아니라, 지수를 생각하고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진 목소리다.

 

“이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지수씨한테만 말하는 건데요, 나 이 사람 보고 있는 게 참 좋아요. 지수씨가 있던 곳에 있고 지수씨가 듣던 것을 듣고 느꼈던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 사람을 이렇게 보고 있는 게 참 좋아요. 지수씨를 궁금해하는 모습에 빠졌어요. 이게 뭔지.” 별 생각 없이 AI를 지수라 생각하고 혼잣말을 하던 서우는 갑자기 “짝사랑이네”라는 AI의 답변에 놀란다. 그리고 AI는 이렇게 말한다. “반할 게 없어서 나를 그리워하는 것에 반하니?”

 

하원이 AI라도 붙들고 지수에 대한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서우도 AI를 통해 하원에 대한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반의 반>은 이처럼 완전하게 만나지 못하는 반쪽짜리 사랑을 하는 우리네 시대의 아련함을 담아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AI 같은 차가운 디바이스가 마치 물을 주면 자라나는 식물처럼 은유된다는 사실이다. 지수는 떠나기 전 서우에게 화분 하나를 건넸다. 깜박 잊고 있다 시들어가는 화분을 뒤늦게 발견해 서우는 물을 준다. 화분이 자라고 꽃을 피워내는 건 그래서 짝사랑을 닮았다. 그건 어쩌면 화분이 꽃을 피워 돌려주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부여한 사랑을 돌려받는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반의 반>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 서사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하원과 서우 같은 반쪽짜리 사랑을 하게 된 이들의 아련함이 아닐까 싶다. 이미 사라져버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를 애써 목소리로, 사진으로라도 계속 기억해내며 사랑하려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랑은 때론 그 반쪽을 채워주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의 사랑이 되기도 할 것이다. 지수의 목소리와 기억 위에 얹어지는 서우의 배려가 하원의 비어있는 반쪽을 조금씩 채워가듯이. 지수가 준 화분에 서우가 물을 주어 다시 꽃을 피워내듯이.(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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