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로더’, 밑바닥 청춘들이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

로얄로더

“굳이 따지자면 친구보단 파트너가 맞겠다. 나 평생 마이너리그에서 살다 늙어 죽을 생각 없어. 그래서 널 좀 이용하려고. 메이저리그로 오르는 동아줄로.”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로얄로더>의 한태오(이재욱)는 강인하(이준영)에게 대놓고 속을 드러낸다. 친구 하자고 했지만 사실은 그를 이용하겠다고. 

 

그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그 살인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고. 물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살인죄로 감옥에 간 아버지는 그 안에서도 여전히 한태오와 그의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위협이자 꼬리표다. 다른 깡패들을 시켜 복수하겠다 으름장을 놓는 그런 인물.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는 한태오가 이 진창으로부터 어떤 방법을 써서든 벗어나고픈 욕망에 간절한 이유다. 

 

그런데 강인하 역시 진창에 빠져 있다. 그건 재벌가 혼외자라는 위치 때문이다. 혼외자라는 이유로 그 집안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강오그룹 강중모 회장(최진호)까지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강중모 회장의 첫째 아들이자 한량인 강인주(한상진)가 매일밤 파티를 벌일 때, 강인하는 홀로 방에서 터지는 폭죽을 텅빈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족이든 재벌가든 그건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니.

 

그걸 알고 있는 한태오가 강인하에게 손을 내민다. 파트너가 되자고 한다. 자신의 동아줄이 되어주면 강인하가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고 한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한태오의 그런 말을 강인하는 비웃지만, 한태오는 말한다.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걸 자신이 갖고 있다고. 그건 바로 ‘간절함’이다. 

 

<로얄로더>는 흙수저,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밑바닥에 떨어진 청춘이 재벌가 금수저를 동아줄 삼아 신분상승하려는 욕망을 그린 드라마다. 이런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절실한 청춘들의 서사는 <이태원 클라쓰> 같은 작품에서도 등장한 바 있지만, <로얄로더>는 좀더 게임적인 느낌이 더해진 드라마라는 특징이 있다. 자기 인생을 건 이 신분상승 게임에 한태오는 모든 걸 걸고 강인하를 그 재벌가 일원이 되게 만들려 하고 결국 그 왕좌에 앉히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짜고 또 행동하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강오에게 전하는 미래 전략’이라는 리포트를 일부러 채동욱 교수(고창석)의 눈에 띠게 만든 것도 다 한태오의 계획이다. 그가 강오그룹 막내이자 실세로 떠오르는 강성주(이지훈)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그 리포트가 강성주의 손에 들어가게 하려한 것. 그 리포트는 향후 강오의 미래가 될 ‘상생협력센터’의 밑그림으로 강성주가 그걸 만들어놓으면 훗날 강오그룹에 입성한 강인하가 그걸 집어삼키게 하겠다는 게 한태오의 큰 그림이다.

 

이처럼 한태오와 강인하가 뛰어든 이 진창을 벗어나 신분을 바꿔보려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인생 전체를 두고 그려나가는 그림이자 계획이라는 점에서 마치 ‘인생리셋’의 욕망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끊어진 성장의 사다리 밑에서 ‘이생망’을 외치는 청춘들이라면 이들의 계획에 판타지로라도 동승하고픈 욕망이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파트너(인생 비즈니스쯤이 될 게다)로 시작한 관계라도 그것이 중첩되면서 마음이 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트너처럼 계획한대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두 사람이지만 둘 사이에는 어느새 친구 사이의 우정 같은 감정들이 더해진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변수로서 나혜원(홍수주)이 이들 사이에 들어온다. 

 

나혜원은 빚쟁이의 딸로, 도박장 돈을 갖고 도망간 엄마 때문에 조폭들에게 시달린다. 그녀 역시 이 지긋지긋한 진창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건너편 옥탑방에 살고 있는 한태오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강인하가 자신에게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는 갈등하게 된다. 한태오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 강인하라는 동아줄을 잡고 싶은 욕망 또한 간절하다. 

 

결국 진창을 벗어나 신분상승을 하고픈 한태오나 나혜원은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이건 강인하에게도 대가를 요구한다. 그 역시 한태오와 나혜원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라도 한태오나 나예원을 모두 우정과 사랑으로 갖고 싶지만, 그건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로얄로더>가 흥미로운 건 그래서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진창에 빠진 청춘들의 신분상승을 향한 질주를 마치 ‘인생리셋’ 같은 느낌으로 하나하나 그려가는 걸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욕망들이 이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만큼 이들에게 요구하는 대가가 만만찮다는 걸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했지만 이 청춘들의 무한질주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흔히 꿈꾸는 ‘인생리셋’의 판타지의 짜릿함과 더불어 또한 그만큼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사진:디즈니+)

<밀회> 유아인, 순수함과 안타까움 사이

 

선생님께서는 내가 제일 힘들었을 때, 내 자신이 죽고 싶다고 했을 때 피아노를 다시 치라고 권하셨고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걸 읽어주셨어요.” <밀회>의 이선재(유아인)가 오혜원(김희애)에게 키스를 하게 됐던 이유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는 청춘의 순수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의 사랑은 단지 육체적인 이끌림도 아니고,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그 자체도 아니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 청춘의 아픔을 알아봐준 오혜원이란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 들어 있다.

 

'밀회(사진출처:JTBC)'

얼마나 힘겨웠으면 그랬을까. 갖고 있는 재능을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야 할 손이 퀵서비스 오토바이 핸들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런 그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 그리고 이 돈과 태생과 권력으로 구획되어 스펙 없는 이들은 절대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그 현실의 벽 앞에서 느껴질 막막한 절망감.

 

<밀회>가 그리는 이선재라는 청춘은 그래서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사회의 청춘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공고하게 굳어져버린 저들만의 세상에 툭 던져져 출구도 입구도 없는 그 세상의 언저리에서 근근히 삶을 버텨내는 청춘. 그래서일까. 이선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오혜원과 그의 남편 강준형(박혁권)은 그 청춘들을 현 기성세대들이 소비하는 두 가지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혜원에게 이선재는 자신의 지나가버린 청춘의 꿈을 되새겨주는 존재. 이것은 현재 중년들이 청춘들을 소비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흔히 청춘의 풋풋함을 가진 아이돌들 앞에서 열광하는 중년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삶을 청춘으로 되돌리고픈 욕망을 갖기 마련이다. 오혜원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의 꿈이다. 그러니 이선재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오혜원은 그 순간 청춘과 소통하는 아찔한 경험을 하는 셈이다. 최근 복고라는 이름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문화현상들의 중심에는 바로 이 청춘에 대한 회귀와 갈망이 들어있다.

 

한편 강준형은 청춘을 하나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현 기성세대들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이선재는 그의 신분상승을 공고하게 해줄 존재다. 그래서 그는 이선재를 자신의 집에 가둬두고 자신만을 위해 키워내려 한다. 학교 재단의 입시 비리를 숨기기 위해 이선재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것처럼 강준형 같은 이들은 진심으로 이선재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뿐이다.

 

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청춘들의 삶이란 비참하게까지 느껴진다. 자신을 알아봐주는(사실은 이것 또한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오혜원에 대한 이선재의 집착은 그 소통의 출구가 막혀버린 청춘을 점점 강하게 그려낸다. 청춘들은 어떻게든 이 기성사회의 한 귀퉁이를 붙잡아 살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이선재가 그렇고, 그의 여자친구인 박다미(경수진)가 그러하며 그의 절친인 손장호(최태원)가 그렇다.

 

박다미는 오혜원을 비롯한 상류층 자제들이 오는 샵에서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이선재라는 남자친구 하나지만 그가 점점 오혜원의 집을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불안해진다. 자신의 세계에서 점점 그가 멀어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혜원의 집에서 지내는 이선재에 대한 박다미의 과도한 반응 속에는 그녀의 전부가 사라져가는 듯한 극도의 불안감이 묻어난다.

 

손장호는 서한그룹 회장의 딸이자 서한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 대표, 그리고 오혜원의 직장상사이자 친구인 서영우가 들락거리는 호스트바에서 일한다. 공허한 삶을 위로받고자 돈을 주고 청춘을 사는 서영우 같은 부류에게 돈을 받고 팔려지는 가진 건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청춘. 돈의 논리로 철저히 구축된 시스템 속에서 청춘의 몸은 가진 자의 쾌락과 위안을 위해 소비된다.

 

<밀회>의 이선재라는 청춘은 그래서 아프고 안타깝다. 이 시대의 청춘들이 기성사회에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선재를 연기하는 유아인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그간 엇나간 청춘의 욕망을 주로 연기해오던 그가 <밀회>에서는 대책 없는 사랑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패션왕>에서 가진 자들과 전쟁하듯 살아가던 강영걸이라는 청춘을 연기한 유아인은, 이제 <밀회>의 이선재를 통해 청춘의 순수함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은 그 어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순수해서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의 선율처럼.

<비밀>, 왜 이토록 폭발력 있나 봤더니...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가. KBS2 수목드라마 <비밀>의 여주인공 강유정(황정음)이 그렇다. 사랑하는 남자가 성공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검사가 된 그를 위해 뺑소니 사고를 온전히 뒤집어쓰고 감옥에 대신 가는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물론 트렌디한 인물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희생적인 인물이 얼마나 되겠는가.

 

'비밀(사진출처:KBS)'

즉 <비밀>은 겉모습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렌디한 멜로나 치정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강유정이라는 무고한 인물이 처하게 되는 고통을 통해 그 불행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드라마다. <비밀>의 전반부는 그래서 강유정이 하게 되는 일련의 선택들이 그녀를 얼마나 불행 속으로 밀어 넣는가를 바닥 끝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뺑소니 사고의 진짜 범인인 남자친구 안도훈(배수빈)에게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5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간다. 힘겨운 감옥 생활 속에서 안도훈의 아이까지 낳아 기르지만 결국 아이를 학대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아이까지 빼앗기며 그 과정에서 그녀는 화상을 입고 몸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게 된다.

 

세월이 지나 출소하지만 비극은 계속된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고 빚 때문에 건물에서 쫓겨나게 된 데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는 결국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하게 된다.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녀의 손에 달랑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죽은 아이를 뿌린 강변의 모래 한 줌이 전부다. 도대체 그녀가 그렇게 절망의 진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왜일까.

 

여기에는 두 인물이 관여되어 있다. 그녀의 애인인 안도훈과 그의 뺑소니 사고에 연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재벌2세 조민혁(지성)이 그들이다. 흥미로운 건 가해자와 피해자인 이 두 인물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점점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점이다. 조민혁은 그녀를 철저히 망가뜨리기 위해 안도훈과 강유정의 사랑마저 시험에 들게 만든다. 안도훈은 생존 혹은 야망 때문에 조민혁의 ‘유혹’에 흔들리게 된다.

 

<비밀>의 스토리가 괜찮다는 것은, 안도훈 같은 과거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할만한 악역 캐릭터가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변심을 이 드라마는 (남자는 다 그래 하는 식으로) 단순하고 막연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검사가 되려던 그 초심을 지키려 해도(이것은 강유정과의 순정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쥐고 있는 시스템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검사가 되어도 제대로 수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수사를 하다가도 윗선의 지시로 중도에 멈출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며, 그 일을 빌미로 검찰 내부에서 감찰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쥐고 흔든 후에 권력은 협박에 가까운 손을 내민다. 같이 일해보자고. 안도훈이 제 아무리 강유정과의 순정(초심)을 지켜나가려 해도 생존해야 하는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심은 안도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로 보인다.

 

안도훈처럼 야망을 가진 인물이 그저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재벌2세인 조민혁 역시 단순한 악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애인을 잃게 된 조민혁은 마치 피해자처럼 그려지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재력을 통해 강유정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복수를 한다. 복수를 위해 부자인 그가 못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복수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고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죽었다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강유정이 끝없이 처한 불행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다. 조민혁이라는 캐릭터는 모든 걸 가진 자의 사랑 역시 얼마나 불행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혼을 M&A 정도로 치부하는 재벌가에서 사랑이란 동정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대신 죄책감을 갖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안도훈처럼 신분상승을 꿈꾸는 인물이나, 조민혁처럼 이미 경제적인 부를 세습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모습을 보고나면, 강유정처럼 시스템 바깥에 내던져진 인물이 처하게 되는 불행의 근원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강유정의 비극은 안도훈과 조민혁이 의도치 않게 공조함으로써 빚어낸 사건들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시스템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혁은 부자로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고, 안도훈은 부자들의 잘못된 시스템과 싸우다가 그 거대한 벽을 느끼고는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에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시스템의 피해자를 대변하는 강유정이라는 인물의 변화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이 교육시킨 대로 타인의 잘못조차 자신의 잘못으로 내면화하며 살아온 인물. 이것은 어찌 보면 선량하고 착한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다.

 

강유정은 입만 열면 “미안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안도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왜 미안해. 내가 잘못한 건데.”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빚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녀는 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미안하다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비밀>의 폭발력은 강유정의 불행을 작금의 서민들이 처한 불행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강유정이 그랬듯이 우리가 언제 가난해지고 싶었던가. 또 불행한 삶을 살고 싶었던가. 대학을 가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 같은 공포에 대학을 가지만 막상 나오고 나면 취직은커녕 등록금 빚더미에 않게 되는 그런 삶. 회사에 들어갔다고 해도 언제 잘릴 지 알 수 없는 삶. 뼈 빠지게 일해 낸 세금이 말도 안 되는 사업에 흥청망청 쓰여지고 부자들의 배만 불리게 해주는 그런 삶. 누가 이런 삶을 원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잘못한 것처럼 문제를 개인화하려는 우리들의 모습. 강유정이라는 캐릭터에서는 바로 그 서민들의 선량하지만 안타까운 얼굴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 강유정의 끝단에 놓인 비극을 바라본 연후에는 그녀가 진짜 비극의 이유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항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어찌 그저 단순한 멜로나 치정복수극으로 읽을 수 있겠는가.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그 진짜 고통을 준 자들은 따로 있다는 ‘비밀’과 대면하게 하는 드라마. 이것이 <비밀>의 실로 비밀스런 폭발력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서영이>, 핏줄사회가 만든 개인의 고통

 

“우리 결혼하고 3년 동안 넌 한 번도 나한테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거나 짜증조차 한번 낸 적이 없어. 항상 웃었지.” <내 딸 서영이>의 서영이(이보영)는 왜 그랬던 걸까. 그 이유는 이 너무나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 강우재(이상윤)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가끔 뭐랄까, 행복강박증 있는 사람처럼 그래보였거든. 꼭 내 사랑에 보답하려는 사람처럼, 웃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있는 사람처럼 애써서 웃는 느낌.”

 

'내 딸 서영이'(사진출처:KBS)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아버지를 부정하고 얻은 신분상승의 대가가 혹독했다는 것은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드러난다. 혼자 있으면 늘 무표정하고, 어딘지 그늘이 느껴지는 그 얼굴이 남편 앞에만 서면 늘 웃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진짜 ‘행복해서 웃은 것’일 테지만 어디 그것뿐일까. 거기에는 아버지를 부정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그 사실을 속이고 있는 남편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그렇게 대가를 치르고 얻은 행복에 대한 강박이 있었을 게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부모를 부정하는 패륜이지만, 그 이면에 놓여진 것은 핏줄과 가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시대의 주홍글씨다. 태생이 모든 걸 결정하는 사회에서 핏줄과 가족이란 늘 따뜻한 보금자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의 행복을 발목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패륜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태생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견고한 시스템이 한 개인에게 지운 절망적인 현실이 있다.

 

서영이는 엄밀히 말해 단순히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노력해 판사가 되었다. 이미 신분상승을 자력으로 해결했던 것. 하지만 결혼에 있어서 그녀 앞에 닥친 현실은 또다시 그 놈의 핏줄이었다. 결국 <내 딸 서영이>가 그려내고 있는 현실은 자력으로 제 아무리 신분상승을 꿈꾼다 해도 ‘저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결정되고 마는 그 막막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 태생을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서영이가 그 힘겨운 가족이라는 틀에서 어떻게 버텨왔는가 하는 점 역시 남편 강우재의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다. “3년 전에 이 자리에 데려왔을 때 결국 피곤을 못 이겨 잠들면서도 이서영은 내 어깨에 작은 머리통마저 못 기대는 거야. 이 여자는 자면서도 긴장을 못 푸는구나. 자면서도 혼자 버티는 구나 참 외롭겠다...” 그래서 그녀가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영이는 늘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을 누구에게 호소하거나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그런 그녀를 패륜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은 판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변호사를 선택하는 모습에도 드러난다. 패륜사건을 담당하면서 그렇게 패륜을 저지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는 서영이는 거기에 아마도 자신을 투영했을 게다. 그리고 누군가의 죄를 판정하는 판사라는 직업보다는 누군가의 죄를 변호해주는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줄 일말의 희망을 찾았을 것이다.

 

흔히들 막장드라마라는 클리쉐 때문에 사실 꽤 많은 진지한 질문들이 묻히기도 한다. 그 많은 출생의 비밀이나 기억 상실 혹은 불치병의 이야기들은 사실은 어찌 보면 인간 운명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을 자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서영이가 저지른 일들을 단순히 패륜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저 수많은 막장드라마들 때문에 또 하나의 우리가 처한 현실의 질문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내 딸 서영이>가 다루는 건 패륜이 아니라, 어떻게 해도 태생의 문제로 회귀되는 이 핏줄 사회가 한 개인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가의 이야기다.

 

서영이는 남편 강우재의 막내 동생인 강성재(이정신)의 연기 연습을 도와주다가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자 연기를 빗대 남편을 질투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렇게 연기 속에서 남편이 질투하는 모습에 웃던 서영이는 갑자기 눈물을 쏟아낸다. “너무 웃겨서... 너무 웃기니까.”라고 변명하지만, 그 눈물 속에는 꽤 많은 서영이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거기에는 마치 행복을 연기하듯 살아가게 된 자신의 모습과 그래서 너무 행복하면 오히려 눈물이 나는 자신의 상황이 섞여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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