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의 질문, 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토록 아픈 웃음이 있을까. 혜나(허율)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저 멀리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며 자신도 같이 가자고 외친다. 아이가 걱정되는 한 어부가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 너처럼 작은 아이는 바람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며 방파제에 위태롭게 서 있는 혜나를 걱정할 때, 아이는 웃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날아가면 이 아픈 현실 속에서 벗어나 저리 날아가는 철새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유를 꿈꾸는 아이의 이 웃음은 얼마나 슬픈가.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혜나의 비정한 엄마 자영(고성희)은 동거남 설악(손석구)이 아이를 학대하는 걸 방관했다. 비닐봉지에 아이를 넣어 싸매놓고 영화를 보러가는 엄마는 스스로 모성애를 쓰레기통에 버린 셈이다. 대신 혜나의 그 상처들을 남달리 깊게 들여다본 수진(이보영)은 그 학대로부터 아이를 구해내려 한다. 물론 그건 법적인 틀에서 바라보면 유괴라는 범죄가 되는 것이지만.

수진이 이토록 혜나의 상처를 외면하지 못하게 된 건, 자신 또한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정애원의 문짝에 자전거 자물쇠로 꼭꼭 묶여진 어린 수진을 발견한 글라라 선생님(예수정)은 자물쇠를 풀어줘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수진 옆에서 묵묵히 아이를 기다려주었다. 아마 그 자물쇠는 수진에게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와 이어진 유일한 탯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수진은 엄마를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 않는 기다림이라는 걸 알고는 포기해버린다. 

이런 경험을 한 수진이었기 때문에 혜나의 아픔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터다. 정애원을 찾은 수진은 하지만 자신이 과연 혜나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성모 마리아 앞에서 묻는다. 자신은 엄마를 경험하지 못했고 또 엄마가 되기도 싫었고 또 엄마였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진의 엄마나 다름없던 글라라 선생님은 그가 엄마로서 다시 돌아온 것을 반기고 있었다. 

“저에겐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수진이 성모 마리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던지는 이 질문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마라고 다 엄마가 아니며, 엄마가 아니라도 기꺼이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낼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글라라 선생님이 사실상 엄마로부터 버림받거나 엄마를 떠나보내 이 정애원으로 왔던 아이들의 진정한 엄마였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마더>에서 성모마리아 앞에서 수진이 기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또 하나의 상징을 담아낸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가슴에 품듯, 수진이 혜나라는 아이를 가슴에 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혜나는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현시하기 위해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 존재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에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슬픈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마더>가 가진 연출의 영상미는 이처럼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뉘앙스까지를 담아내며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아동학대와 유괴 같은 범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범죄물의 틀을 훌쩍 넘어 인간 본연의 본성이나 죄에 대한 함의까지를 담아낼 수 있는 건 이러한 남다른 이야기전개와 그를 시적으로 담아내는 연출력 덕분이다. 

도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보다 확장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이어야 하는가. 혜나의 슬픈 웃음을 보며 먹먹함을 느꼈다면, 또 수진의 눈물어린 간절한 기도에서 뭉클함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마더>가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공감했다는 이야기일 게다.(사진:tvN)

‘마더’, 불편하지만 들여다봐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

새로 시작한 tvN 수목드라마 <마더>는 차라리 공포영화에 가깝다. 학대당하는 대상이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아이 혜나(허율)이기 때문이다. 혜나를 둘러싼 환경은 비정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학교에서 더럽다는 이유로 집단 괴롭힘을 당한 혜나는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온몸에 난 상처와 고막 파열,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의 모친 자영(고성희)의 동거남 설악(손석구)은 혜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그가 가장 아끼는 햄스터를 잔인하게 죽였으며 심지어 그에게 성추행을 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모친은 혜나를 보호하기 보다는 설악의 폭력을 방치하고 있었다. 동거남과 영화를 보러 나가며 혜나를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어 집 앞에 내놓기까지 했다. 

<마더>의 혜나가 겪는 이 일련의 폭력들을 들여다보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이제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던져지는 폭력들의 양태도 그렇지만, 부모가 그런 일들을 방치한다는 사실이 더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청자들은 불편한 감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혜나가 당할 일들이 마치 공포영화의 엄습하는 두려움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마더>가 첫 방송에 혜나의 이 끔찍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신문지상이나 뉴스의 한 꼭지로 가끔 보도되곤 하는 아동학대의 이야기를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실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들여다 본 적은 별로 없다.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불편해 오히려 회피하고픈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 이 마을에 잠시 교사로 들어와 혜나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 수진(이보영)이다. 그는 혜나의 상황들이 모두 아동학대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하다가 결국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혜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수진 자신도 겪은 일인 것처럼 보인다. 또래 아이들에게 더럽다는 이유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혜나에게 수진은 말한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돌보라”고.

그런 조언은 선생님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체로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선생님은 아이의 부모를 찾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서 수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자신이 겪은 어떤 일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엄마가 날 쓰레기봉투에 버렸어”라고 말하는 혜나에게 수진이 “이번에는 네가 엄마를 버리는 거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그의 개인적인 과거 경험이 덧씌워진 결과일 것이다. 

<마더>는 아동학대의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하거나, 내 문제는 아니라고 치부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그것이 버젓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비정한 모정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이후에 이 드라마가 펼쳐나갈 극화된 사건들은 비정한 모정이 버린 상처받은 영혼들이 그 세계로부터 탈주하며 서로 새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더>는 분명 보기에 불편한 드라마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피할 수는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상처받은 두 사람(어찌 보면 비정한 모정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 새로운 유사모녀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그들만의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시청자들은 바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쩌면 가정폭력으로 인해 길거리로 나오게 된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지도 모르니.(사진:tvN)

선생도 학생도 막장인 <여왕의 교실>, 실제일까

 

이게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일까. 아니면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대로 우리화하지 못한 드라마의 문제일까. <여왕의 교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은 더 심하다는 쪽이 그 하나이고, 정반대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며 마여진(고현정) 선생 같은 인물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느냐는 쪽이 다른 하나다.

 

'여왕의 교실(사진출처:MBC)'

이 드라마가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아이들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잔인한 행동들 때문이다. 친구를 지켜주려 한 심하나(김향기)는 매번 그 아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은보미(서신애)를 위해 마여진 선생이 제안한 축제 행사를 보이콧 하자고 주장하지만 은보미는 당일 거꾸로 마여진 선생에게 포섭되어 심하나를 배신하고 감시하는 조장이 된다.

 

또 지갑을 훔친 친구 고나리(이영유)와의 약속을 지켜주기 위해 그 비밀을 숨겨주다 본인이 도둑으로 몰린 심하나(김향기)지만, 고나리는 오히려 그런 심하나에게 이게 다 들킨 너의 잘못이라며 왕따를 시킨다. 심지어 고나리는 심하나가 지갑 주인인 수진(변승미)과 친해지게 되자 불안함을 느껴 둘을 이간질시키기도 한다. 로커에 가둬버리고 심하나가 도와 달라 애원하는 걸 장난스레 따라하는 아이들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이게 아이들이 맞나?

 

하지만 이것은 이기적이고 되바라진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마여진 선생 같은 괴물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이다. 가정형편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동구(천보근)의 불행한 가족사를 아이들 앞에 공공연히 폭로하고 “너는 친구가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를 끝까지 믿는 하나에게 그녀는 “우정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몰라주는 진실? 멍청하기는. 사람들이 몰라주는 진실 따윈 아무 의미 없어. 친구니 우정이니 그럴 듯한 말들이긴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은 틀렸어. 진짜 진실은 말야. 다른 아이들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야. 선생님한테 반항하면서 잘난 척 했지만 뒤에서는 친구 지갑이나 훔치는 질 나쁜 애.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넌 이제 그런 아이야 알겠니?”

 

제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한 것이 정신적인 폭력이니까.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상처받은 아이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대고 거짓말쟁이에 이중인격자라 몰아 부치는 건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이 마여진 선생의 대사는 그 부분만 떼어내서 들어보면 도저히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라고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간미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렇게 막장인 아이들과 선생 사이에서 오로지 아이다운 아이는 심하나 하나뿐이라고 여긴다. 아니 여기고 싶어진다. 친구가 없다는 선생님의 단언에 “오동구는 제가 좋아하는 친구예요”라고 말하는 아이, 진실이나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말에 “우정은 소중한 거고 언젠간 진실이 꼭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 심하나만이 현실적인 아이처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는 심하나를 빼고는 현실성이 없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혹 원작이 만들어진 일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른 데서 생기는 편차가 아닐까. 그런 면이 있다. 마여진 선생 같은 인물은 실제 현실에서 그다지 보편적인 캐릭터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들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제 아무리 성적 지상주의라고는 하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볼 우리네 학부모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치부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입시제도라는 것에 일본식 교육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입시교육의 시작점이 초등학교로까지 침범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약육강식의 현실을 던져놓은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아이들다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여왕의 교실>은 드라마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마여진 선생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싶지만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또 그 선생의 논리가 틀렸으면 싶지만 잘못된 현실 속에서는 그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현실이 아닌가. 그 속에서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게다.

 

<여왕의 교실>의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보기 싫은 것들을 자꾸만 우리 눈앞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위로받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여왕의 교실>은 문제작이라 할만하다. 우정이 배신되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는 이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래서 드라마들 사이에서 왕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가진 심하나 같은.

<메이퀸>, 아역 분량 왜 이렇게 길까

 

“아동학대로 확 신고해버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그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아이 해주(김유정)를 끝내 내쫒는 계모. 다음날 벼랑 위에 쓰러진 해주를 업고 온 산(박지빈)이와 창희(박건태)에게 “뭐 하러 그 애를 데리고 왔냐”고 계모가 화를 내자, 산은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것은 <메이퀸>이란 드라마를 스스로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아무리 불행했던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라지만 어른이 아이를 이토록 학대하는 모습은 너무 과하다는 인상이 짙다.

 

'메이퀸'(사진출처:MBC)

어린 해주의 삶은 어린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기 때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 버려지고 계모의 구박덩이로 자라난 해주의 모습은 어른과 아이의 역할이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계모는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해주에게 모든 집안일을 맡기고, 식구를 챙기게 한다. 병을 모아 판 돈으로 어렵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계모는 거꾸로 반찬투정이다. 게다가 어린 아이를 같은 방에 잘 수 없다며 차디찬 마룻바닥에 재운다.

 

물론 이것은 과거 신파극의 전매특허와 같은 소재들이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살아낸 해주라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다루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가려는 방향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부분을 이토록 자극적인 장면으로 수회에 걸쳐 보여주는 건 신파적인 극성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물론 신파극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지만, 그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가하는(심지어 스스로도 학대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TV라는 매체에 과연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특히 폭력배 앞에 아이가 내몰리는 장면은 가뜩이나 아동 폭행 사건들로 흉흉한 요즘, 너무 버젓이 방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려 한 목적이라고 해도 아이들끼리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침몰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이런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면서 이 어린 해주는 어린이 같은 느낌이 없어졌다. 심지어 해주가 계모의 아기까지 받아내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니.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학대받는 아이는 해주만이 아니다. 장도현(이덕화)의 집에서 하인처럼 기거하는 박기출(김규철)의 아들 창희(박건태) 역시 학대받는 아이의 모습이다. 장도현의 아들 일문(서영주)은 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나쁜 어른의 모습 그대로다) 창희와 그 아버지 기출을 괴롭힌다. 물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일문 역시 장도현이라는 어른에게 학대받는 아이처럼 보인다. 왜 이토록 이 드라마는 어른들에 의해 고통 받는 아이들을 이렇게 긴 분량(아역분량이 유독 길다)으로 다루고 있는 걸까.

 

물론 드라마로서 성장을 위한 고난을 극대화하려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고 반복적인 것은 의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자칫 아이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자극적으로 다루다보면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칠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역을 이토록 길게 다루는 이유는 물론 김유정이나 박지빈, 박건태 같은 어른 못잖은 명품 아역연기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역을 세웠을 때 그 자극의 강도가 더 크다는 계산도 있다고 여겨진다. 무한 시청률 경쟁 속에 자극을 위해 전면에 세워지고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참담해진다. 이건 현실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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