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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 푸른 해’, 아동학대자들에 대한 응징 그 양가감정

누가 봐도 아동학대를 해온 부모라는 게 뻔해 보이지만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그 광경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닐까.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서 아동학대를 당해온 하나를 친딸이라며 개장수 고성환(백현진)이 굳이 데려가는 그 모습을 보는 차우경(김선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사 강지헌(이이경)은 위험할 때 누르면 자신이 찾아가겠다며 아이의 손목에 스마트워치를 채워주며, 고성환에게 자신들이 항상 주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장면은 <붉은 달 푸른 해>라는 문제작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동학대는 그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는 가해사실을 부인하기도 하고, 그걸 은폐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다시 그 부모에게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과연 이런 부모들을 부모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를 차에 태우고 가는 길에 고성환은 “그걸 말했냐”고 물었고, 아이는 얘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했냐고 되묻는 고성환에게 아이는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린다”는 끔찍한 말을 했다. 아이가 당한 학대와 그걸 숨기려던 이유가 이 대화 속에는 들어 있었다. 

하나가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놀이터에서 놀다 아이들이 발견한 죽은 새를 하나가 묻어주는 장면은 그 학대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예감하게 해준다. 하나는 죽은 무언가를 묻어주었거나 묻는 장면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죽은 새를 그렇게 묻어줬던 게 아닐까. 

결국 개장수 아빠와 집으로 가게 된 하나는 그 날 밤 끔찍한 소리를 듣고는 차우경에게 전화를 건다. 차우경은 아이가 또 학대를 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 밤에 차를 몰아 하나의 집까지 달려오지만, 아이가 들은 소리는 개장수 아빠가 끔찍한 응징을 당하는 소리였다. 그걸 보게 된 차우경 또한 그 응징자에 의해 납치됐다. 강지헌은 과연 차우경과 하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와 그 부모를 응징하는 누군가를 보는 감정은 그래서 복합적이다. 그런 부모도 부모냐며 공분을 일으키지만 그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는 장면에서는 시원하다기보다는 끔찍함을 느끼게 된다. 이건 어쩌면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아동학대 사건을 들여다볼 때 느끼게 되는 양가감정이다. 심지어 죽이고픈 살의까지 느껴지는 분노가 피어오르지만, 그런 살의가 갖는 불편함 또한 느껴지기 마련이다.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보면 <붉은 달 푸른 해>라는 제목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붉어서 해인 줄 알았는데 달이었다는 것이고, 푸르러서 달인 줄 알았는데 해였다는 의미. 부모인 줄 알았는데 끔찍한 아동학대범이었고, 반대로 잔혹한 연쇄살인범인 줄 알았는데 끔찍한 아동학대범들을 처단하고 아이를 구해내려는 이였다는 것. 차우경은 과연 어느 쪽일까. 또 미스터리한 인물인 이은호(차학연)는?(사진:MBC)

Posted by 더키앙

‘애나벨’, 불길한 상상이 만드는 공포가 더 무섭다

영화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개봉되기 전부터 무섭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무서워 팝콘이 날아다니니 굳이 팝콘을 사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유명한 <컨저링> 시리즈 사상 가장 무서운 작품이라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사진출처: 영화<애나벨:인형의 주인>

악령 들린 인형 하나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무서울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관객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는가 하는 비판을 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며 “안 돼”, “가지마”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몰입하는 관객도 있다. 어째서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애나벨>은 사실 다 보고 나오면 내가 왜 그토록 긴장했던가가 놀랍게 느껴지는 공포영화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이 실제적인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충격을 가하지만, <애나벨>은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침묵과 가려짐의 시간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 영화다. 바로 그 장면과 장면 사이의 참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이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마련인 불길한 상상. 그것이 <애나벨>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 속으로 깃드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실의에 빠진 애나벨 인형을 만드는 장인 사무엘(안소리 라파글리아)과 그의 아내 에스더(미란다 오토). 그리고 12년 후 그들이 내준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섬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 애나벨 인형에 깃든 악령이 깨어나 소녀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 과정이 주는 공포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어떤 끔찍한 공포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다름 아닌 상처받아 약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약한 정신 속에서 깃드는 불온한 상상은 악이 자라나게 되는 씨앗이 되고 그것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간다는 것. 딸의 죽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무엘과 에스더가 그렇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 보육원 친구, 언니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는 재니스(탈리사 베이트먼)가 그렇다. 

즉 사무엘과 에스더 그리고 재니스에게 그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상처로 인해 그들 안에서 만들어진 ‘불길하고 불온한 상상’이 그 악령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재니스가 그 악령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힘을 통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리는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허수아비나, 그저 아이들 장난감일 수 있는 인형 그리고 장난감 총이나 그저 방치된 우물 같은 것들은 그래서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공포의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반복된다. 관객 스스로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공포가 배가된다는 것. 

그래서 <애나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유난히 많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그토록 무서울 수가 없는 영화지만, 공포영화가 너무 익숙해 그저 액면 그대로의 장면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심심한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소름끼치는 공포가 상상력만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더키앙

‘품위녀’ 김선아, 통쾌한데 불편한 이유는 뭘까

저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강남의 부호들로서 뭐든 사고 싶은 건 사고 하고 싶은 건 하는 그들이다. 그들이 사는 집 자체가 서민들에게는 현실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되는 대저택에, 도대체 방이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집안. 게다가 그 집에서 주인들을 위해 일하는 아주머니들. JTBC 금토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가 보여주는 강남의 부호들이 사는 모양은 보통의 서민들에게는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품위있는 그녀(사진출처:JTBC)'

게다가 이 걱정 하나 없이 살아갈 것 같은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가관이다. 불륜은 마치 공기처럼 퍼져 있고, 심지어 공공연히 아내에게 내놓고 내연녀 이야기를 하는 남편도 있다. 아는 언니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자신의 레지던스에서 상습적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딸의 미술선생과도 바람이 난다. 마치 일반적인 삶은 이제 지겹다는 듯 탈선은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니 이 세계 속으로 들어간 박복자(김선아) 같은 흙수저의 서민이 가진 알 수 없는 분노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욕망을 채우려는 그 모습들에 시청자들은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편으로는 저 위화감을 주는 세계를 파괴해가는 박복자의 행각에 통쾌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그 범죄가 주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건 그나마 이 세계에서 어떤 자신만의 룰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아진(김희선)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모두가 불륜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욕망을 분출하며 살아갈 때 그녀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모두가 집안일을 해주는 아주머니들을 하녀처럼 부릴 때 그녀는 그 분들의 자녀의 생일선물을 챙겨준다. 물론 그것 역시 그녀가 가진 허영일 수 있다. 자신은 충분히 가졌지만 또한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박복자에 의해 우아진의 세계가 깨져버리는 이 구도는 아마도 <품위 있는 그녀>가 의도하고 있는 자본화된 사회의 부박함을 잘 드러낸다. 이름처럼 박복한 여자의 도발로 인해 그 우아한 세계가 깨져갈 수 있는 건 이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안태동 회장(김용건)이기 때문이다. 우아진은 박복자에게 멈추라고 했고, 급기야 “나가야 한다”고 명했지만 어느새 안태동의 마음을 사로잡은 박복자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는 존재가 된다.

돈줄이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되고 그 중심을 쥐는 것으로 이 시스템의 권력을 쥐게 되는 박복자는 그래서 이제 우아진을 비롯한 그 집안을 장악하는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건이지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이 공고한 시스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드라마는 말해준다. 박복자에게 느끼는 동정과 분노는 이 시스템의 을로서 갖게 되는 이중적인 감정이다.

이로서 드디어 만들어진 우아진과 박복자의 대결구도는 그래서 흥미진진해진다. 시청자들은 때론 박복자의 도발 앞에 우아진이 그녀의 욕망을 멈추게 해주길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우아진의 그 위화감을 주는 세계가 박복자에 의해 깨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드라마 초반에 등장한 바 있다. 박복자의 죽음. 그것은 욕망의 끝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파괴된 우아진의 세계를 말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비극이지만 또한 우리 사회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이 대결구도가 가진 흥미진진함과 그 안에서 인물들이 일으키는 동정과 분노의 양가감정의 힘에 의해 팽팽하게 흘러간다. 그러면서 그 대결구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소판이라는 걸 보여줌으로써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품위 있는 그녀>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가져가는 독특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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