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그대>, 전지현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요즘 전지현에게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CF를 포함해 전지현은 늘 비슷한 이미지를 고수한다.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낄 시점이 왔다. 차기작에서도 생머리를 휘날리며 남자 주인공만 바꾸면 어렵지 않을까 싶다.” 지난 JTBC <썰전>에서 김구라가 한 이 말은 아마도 3,4년 전만 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은 얘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별에서 온 그대>에서만큼은 합당한 평가가 아니다.

 

‘별에서 온 그대(사진출처:SBS)’

흔히들 연기는 연기자의 고유영역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연기란 대본과 캐릭터와 연출이 함께 만들어내는 복합물이다. 즉 제 아무리 좋은 연기자도 그저 그런 대본과 캐릭터, 연출을 만나면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가 없다. 때로는 좋은 연기력이 나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여배우들에 대한 연기력 논란이 자주 나오는 데는, 작품이 가진 허술함을 비겁하게도 여배우 한 명의 연기력에 뒤집어씌우는 경향에서도 비롯된다. 물론 연기의 기본기가 없는 건 논외의 문제지만.

 

그런 점에서 이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한때 CF퀸으로만 각인되어 있던 전지현의 배우 근성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한 면이 있다. “나 천송이야-”라고 허세를 부리면서도 속으로는 점점 도민준(김수현)이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에 놀라는 인물. 도민준에게 실연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한없이 처연해지다가 술을 마시고는 금세 총 맞은 것처럼-”을 코믹하게 불러대는 인물. 깨어난 아침 전날의 구질구질한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해내며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인물.

 

흔히들 망가진다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배역에 대한 몰입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망가질수록 아름답다는 얘기는 몰입할수록 더 배우로서 빛이 난다는 얘기다. 전지현이 천송이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천송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지현이라는 배우를 일깨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지현이 연기하는 건 다름 아닌 천송이라는 연기자다. 연기자를 연기한다는 점은 기묘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전지현이 연기하는 천송이는 드라마나 영화 속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바깥으로 나온 일상의 모습이기 때문에 더 리얼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막연히 여배우라면 술 마시고 주정을 하거나, 싼 티 나게 춤을 추고, 채인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저주의 메시지를 날리는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송이는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진짜 여배우의 일상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캐릭터다. 한때 최고로 잘 나가던 여배우가 마시는 술이 와인이나 위스키가 아니고 소주이며, 마트에 장보러 나와서도 원 플러스 원을 사야 한다고 말하는 그 보통의 서민과 다를 바 없는 그 모습에서 이 캐릭터의 친근함과 리얼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즉 역할이 여배우지만 우리가 알던 여배우의 모습이 아닌 실제 일상을 끄집어내는 천송이라는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전지현 그 자신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한참을 보다보면 그것이 천송이인지 아니면 전지현인지 아리송해지는 지점이 생긴다. 결국 몰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연기자와 배역이 하나로 어우러져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은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천송이라는 배역을 통해 지금껏 갖가지 CF가 자신에게 덧씌운 이미지들을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듯 하나하나 깨부수는 듯한.

 

이 드라마에서 전지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별에서 온 그대>라는 제목은 그래서 중의적으로도 읽힌다. 그것은 물론 외계인 도민준을 지칭하는 제목이 분명하지만, 늘 별처럼 저 멀리서 신비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다가(그래서 그것이 배우로서의 변신을 저해하기도 했던) 이제는 그런 스타가 아닌 배우라는 직업적인 땅으로 내려앉은 전지현을 떠올리게도 만든다는 것. <별에서 온 그대>가 깨운 전지현의 배우 근성은 그래서 앞으로 그녀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미스코리아>의 무엇이 이연희의 연기를 깨웠나

 

와이키키-” 하며 억지로 미소 짓는 연습을 하던 엘리베이터걸 오지영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그녀를 연기하는 이연희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을까.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엘리베이터 한 구석에서 CCTV를 피해 삶은 계란을 통째로 입안에 우겨넣는 오지영의 억지로 짜낸 듯한 미소는 그래서 노동자의 슬픈 데드마스크를 떠올리게 했다.

 

'미스코리아(사진출처:MBC)'

예뻐 보이려 노력하는 것은 그래서 예쁘다기보다는 슬프다. 예쁜 마네킹처럼 웃는 백화점 엘리베이터걸들은 상습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박부장(장원영) 같은 파렴치한 밑에서 퇴직을 강요당하고, 심지어 퇴직금까지 갈취 당한다. 97IMF 시절 사라져버린 엘리베이터걸이라는 직업은 그래서 마치 노동이 기계로 대치되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돈 없고 백 없고 학벌 없는 오지영이, 가진 자산이라고는 달랑 몸뚱어리 하나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래서 그 몸을 상품화하는 것뿐이다. 엘리베이터걸에서 미스코리아로 그 목표가 수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지영의 서글픈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다. 미스코리아를 대거 발굴해낸 퀸 미용실 원장 마애리(이미숙)를 오지영은 엄마 같은 존재로 따르지만(그녀에게는 엄마가 없다) 마애리는 또 다른 박부장이다. 관리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성의 상품화는 훨씬 세련되어진다.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힙을 업시키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다리부터 엉덩이까지 병으로 눌러대며,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당하는 몸은 그래서 여전히 슬프다. 누군가의 시선에 예속당한 채 훈육되어지는 몸. 그리고 심지어 성형이라는 이름으로 조각되고 만들어지는 몸.

 

오지영이 가슴 성형을 위해 수술대에 올랐을 때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주는 김형준(이선균)의 목소리는 그래서 하나의 구원이 된다. 마치 미스코리아 공장 같은 마애리의 퀸 미용실을 벗어나 소박하지만 꿈이 있는 김형준의 비비화장품을 찾아온 오지영은 비로소 처음으로 스스로의 선택을 한 셈이다. 미스코리아가 되겠다는 꿈은 똑같지만 김형준과 오지영의 그저 직업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 관계는 모든 걸 바꾸어 놓는다.

 

지지고 볶는 비비화장품의 사장과 직원들의 모습이 마애리 퀸 미용실의 풍경과 달리 하나의 공동체 같은 인상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거기서 직원들은 김형준을 사장이라 부르기보다는 형 혹은 오빠라고 부른다. 김형준이 오지영을 미스코리아가 되게 하려는 것은 물론 비비화장품을 살리기 위한 욕망 때문이지만, 거기에는 오지영이 그토록 쓰레기통에 구겨 버렸지만 그걸 다시 가슴에 주워 담는 김형준의 순수한 사심도 들어있다.

 

그래서 오지영이 김형준 앞에서 와이키키-”, “하와이-”를 하며 미소를 짓는 모습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그것은 오지영의 김형준에 대한 마음을 거꾸로 직업적인 연습을 통해 감추려는 것이니까. 여기서 비비화장품과 미스코리아라는 목표는 오지영과 김형준의 사심을 숨기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비로소 오지영은 누군가의 시선에 예속된 몸이 아니라 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당당해진 몸으로 서게 된다.

 

오지영이라는 성장 캐릭터가 이연희라는 연기자에게 주는 의미는 그래서 남다를 것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의 시선에 포획된 존재가 아닌 저 스스로의 선택으로 선다는 것은 연기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말이다. 연기자에게 예쁘다는 표현은 이중적이다. 그저 외모가 예쁘다는 건 연기자에게는 치명적인 비판일 수 있다. 그것은 배역으로서 주목되기보다는 연기자 자신으로서 주목되기 때문이다. 연기력 논란은 바로 이 지점, 배역과 연기자가 따로 노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미스코리아>에서 이연희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진 것은 그 배역인 오지영이라는 캐릭터가 그녀에게 맞춤의 역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저 예쁜 데드마스크의 얼굴이 차츰 진짜 예쁜 살아있는 인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우리는 <미스코리아>의 오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또 이연희라는 연기자를 통해서 보고 있다. 오지영이라는 캐릭터가 예쁜 것은 단지 외모 때문이 아니라 점점 당당해지는 그녀의 변신과 성장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연희에게도 그대로 전파된다. 그녀는 연기자가 진짜 예뻐 보일 때가 외모가 아닌 배역에 몰입할 때라는 걸 오지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배워가고 있다. 예뻐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쁜.

박민하, 예능보다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

 

단언컨대 영화 <감기>의 지분율이 있다면 그 절반 이상은 온전히 아역 박민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혁이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수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건 전적으로 박민하가 연기하는 미르라는 아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고통스러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 미르라는 아이의 배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감기>에서 아역 박민하는 이토록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

 

박민하(사진출처:영화<감기>)

아이여서일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대로 천재 아역이라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이 미르라는 역할을 박민하는 아무런 이물감 없이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만일 아역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약간의 틈입을 만드는 연기력 부족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영화 전체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박민하는 틈입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관객들이 더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어냈다.

 

초반부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해 차츰 긴장감을 높이는 박민하의 표정의 변화는 이 영화의 고조되는 극과 거의 동일선상에서 움직인다. 연기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의 감성을 백 프로 끌어내면서도 어떤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지 알고 있는 듯한 여유마저 엿보이는 이 아역에게서 분명 좋은 연기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심지어 연기 경력도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민하의 연기는 말 그대로 극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려는 이야기는 그녀가 <감기>에서 어떤 연기력을 보였는가 하는 그런 점이 아니다. 이토록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아이가 왜 그 동안 심지어 대중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심지어 ‘안티 카페’가 생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순수함을 잃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대중들의 반응 때문이다.

 

이제 겨우 만 6세의 아이가 <붕어빵>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목받고 <해피투게더>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어른 뺨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대중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아이의 모습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 즉 연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키면 몇 초만에 뚝딱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고 또 금세 걸 그룹의 섹시 댄스를 흉내 내는 모습을 아이답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최근 리얼 예능이 추구하는 ‘진정성’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 6세의 아이에게 예능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과 연기가 요구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연기적인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게다가 그녀는 타고난 연기자의 자질을 갖고 있다)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제 갓 만 6세의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어른들의 배려와 관리다. 박민하라는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면 이 아이가 섣불리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과연 득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기는 본업이고 예능은 그저 하는 것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예능에서 만들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연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연기자는 결국 자신의 이미지에 연기가 영향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감기>같은 작품을 통해 박민하라는 장차 촉망되는 연기자를 발견한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 아이가 가진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차근차근 걸어 나가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박민하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잦은 예능 출연이 아니라 더 좋은 작품을 만나 연기자로서 경험해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이다.

<장옥정>의 끝없는 추락, 그 이유는 뭘까

 

역시 김태희의 사극 캐스팅은 무리수였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의 시청률이 7%대까지 추락하면서 그 원인으로 김태희의 연기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어색한 표정 연기와 어려운 사극 톤에 어울리지 않는 발성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일까. <장옥정>의 부진은 과연 온전히 김태희의 연기력 부족 때문일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물론 김태희의 연기력은 <아이리스>에서 보여준 가능성을 되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극 특유의 맛을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사극의 대사 톤은 현대극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일상적인 발성으로는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사극 특유의 연기 톤을 자기 특유의 색깔과 맞춰 자기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김태희의 목소리는 복색만 한복을 입었을 뿐, 현대극의 그것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태희의 연기력보다 더 큰 문제는 연기자들 사이에 조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옥정>의 유아인과 김태희 캐스팅은 극중 캐릭터와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멜로 드라마의 경우 드라마를 보는 관점은 캐스팅된 배우들의 조합 그 자체가 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나이 많은 김태희와 한참 어려보이는 유아인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멜로의 결을 만들어내는데 장애요소가 되는 게 사실이다.

 

이런 남녀 연기자들 사이의 조합 문제는 동시간대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직장의 신>의 김혜수와 오지호 조합이나, <구가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의 조합을 생각해보라. 그 캐스팅 자체가 기대감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대한 대로 김혜수는 카리스마와 코믹과 슬픔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오지호는 <환상의 커플>과 <내조의 여왕>에서 보여줬던 코믹하고 과장된 캐릭터를 잘도 소화해내고 있다. 또 <구사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는 그 확실한 비주얼만큼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도 작품 속 캐릭터의 힘이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 본래 연기력 논란은 캐스팅 논란이나 캐릭터 논란과 겹쳐져 나타나곤 한다. <장옥정>은 사극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현대극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제목을 장옥정으로 달고 있기는 하지만, 만일 다른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옥정은 심지어 그 시대에 패션쇼를 여는 패션 디자이너다.

 

만일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들이대지 않았다면 조선시대의 패션 디자이너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을 수 있다. 실제로 군복 디자인을 하기 위해 이순(유아인)의 친위대 비밀야영지로 들어온 장옥정이 군복을 직접 입어보고 군영을 체험하는 장면은 사극으로서는 이색적이다. ‘옷을 만드는 여인’이 그저 미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그 패션 디자이너를 세우자 충돌이 생겨난다. 장희빈으로 기억되는 그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악녀로 낙인찍히기는 했어도 그 절절함과 절실함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장옥정>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는 기존 장희빈이 갖고 있던 그 절실함이 빠져 있다. 오로지 사랑에 목매는 여인이라도 역사적 인물로서 장희빈을 내세웠다면 적어도 그 절절함만큼은 가져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장옥정>은 기존 장희빈을 기억하는 사극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가벼운 사랑타령이 되어버렸고, 또 새로운 사극을 희망하는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옷(무려 장희빈이라는!)을 입은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마치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를 그리는 퓨전사극에 어색하게도 장희빈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억지로 꿰어 덧댄 느낌이다. 작품이 이렇게 어정쩡한 선에 서 있으니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들이 입은 캐릭터라는 옷이 잘 맞을 리 없다. <장옥정>의 추락은 물론 김태희 연기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바로 현대극인지 사극인지 알 수 없는 위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작품의 문제가 더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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