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을 통해 보는 연기력 논란의 실체

요즘 영화계의 화제는 단연 '건축학개론'이다. 첫사랑에 대한 멜로를 시공간을 활용해 '건축적'으로 잘 축성한 이 영화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배우는 이제훈이다. 첫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절망을 그는 앙다문 입과 순수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잘 표현해냈다. 그런데 이 연기 잘하는 신예답지 않은 신예(물론 그는 영화 '파수꾼'이나 '고지전'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배우다)가 처음 '패션왕'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는 심지어 연기력 논란마저 겪어야 했다.

 

사진출처: 건축학개론

'패션왕'에서의 재혁이라는 캐릭터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이다. 승민이 순수함과 따뜻함 그 자체라면 재혁은 노련함과 차가움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초반 그 차가움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을 잘 보이지 않았던 데서 연기력 논란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본인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려 한 것일 게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는 어딘지 영화와는 달리 '연기하는 톤'이 드러나는 걸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장 연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몰입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특정 공간에서 완전 몰입해 감상하는 반면(그래서 집중도가 더 높다), 드라마는 생활의 공간 속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슬쩍슬쩍 보기도 하는 장르다. 그러니 뭔가 연기가 보이지 않으면 안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건 이제훈이 차츰 드라마에 적응하며 악역으로서의 재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건 이 단단한 신예는 분명 앞으로 배우로서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거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연기력 논란에 휘말렸던 한가인은 확실히 '건축학개론'에서는 제 옷을 입은 편안한 느낌이다. 이것은 드라마와 영화의 장르적 차이라기보다는(그녀는 이미 둘 다 충분히 경험했다) 사극과 현대극의 차이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첫 사극 연기로서 한가인은 많은 단점을 드러냈던 것이 사실이다. 대사의 톤을 맞추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역할에 동화되지 못하고 흉내 내는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달랐다. 완성도가 지상과제인 영화와 순발력이 더 요구되는 드라마적인 차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기자들의 몰입도에 따라 그 연기력이 달라보였을 것이지만, 이처럼 장르적인 차이와 그로 인한 작업방식의 차이에 의해 연기자들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다. 물론 이제훈과 한가인의 연기력을 이런 식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확실히 이제훈이 보여주는 연기는 더 오래 연예계에 발을 담아왔던 한가인보다 훨씬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영화와 드라마가 가진 장르적 차이가 우리가 흔히 통칭해서 부르는 '연기력 논란'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드라마의 연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즉 지극히 드라마적인 드라마들(예를 들면 가족드라마나 일일드라마 같은 관습적인 연출을 하는) 속에서 캐릭터들은 조금씩은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기도 조금은 연극 톤으로 과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영화 같은 드라마들은 사뭇 다르다. 이들 드라마들은 과장된 연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연출 속에 녹여내려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친구로 나온 납뜩이 역할의 조정석이 '더킹 투하츠'에서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멜로라는 틀 속에서 오히려 이 가난한 동네에 살아가는 청춘들의 우정으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은 그것을 껄렁한 농담으로 보여준 조정석의 단단한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볍게 여겨지던 납뜩이가 '더킹 투하츠'에서는 은시경이라는 시종일관 진지함을 드러내는 원칙주의자로 변신한다. 여기에 아무런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조정석의 연기력이 밑바탕 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한 영화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더킹 투하츠'라는 드라마의 연출이 기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 재발견된 수지는 연기력이라는 것이 단지 연기자의 능력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말해준다. '드림하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드라마 속에서 수지가 보여준 그 어떤 배우로서의 매력보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한편 엄태웅은 '건축학개론'에서 조금은 세파에 찌든 나이든 승민을 연기한 것보다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의 광기어린 연기가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아마도 연기력보다는 캐스팅과 캐릭터에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이처럼 연기력 논란은 단순히 연기자의 문제로만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르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고, 드라마든 영화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내고 있느냐는 연출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은 제작자의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같은 연기자들이 연기를 했지만 연기력 논란은커녕 배우를 재발견시키고 있는 '건축학개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까.


'보스를 지켜라'가 보여준 로맨틱 코미디의 연기력, 그 중요성

'보스를 지켜라'(사진출처:SBS)

'로맨틱 코미디 우습게 보지마라. 너희는 과연 누군가를 진정으로 웃긴 적 있는가.'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빗대 로맨틱 코미디를 말한다면 이런 표현이 되지 않을까.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면 어딘지 정극과 비교해 낮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특히 연기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흔히들 "정극이 되네?"하는 반문 속에는 코미디 연기보다 정극이 훨씬 어렵다는 뉘앙스가 들어있다. 하지만 과연 진짜 그럴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시선은 잘못됐다. 로맨틱 코미디만큼 그 연기가 중요한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이 장르가 가진 이중적인 특성 때문이다. 이 장르는 코미디가 가진 과장이 전면에 드러나면서도, 그 바탕에 드라마라는 진지함 역시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로맨틱 코미디는 그저 코미디가 아니며, 또한 보통의 정극도 아닌 셈이다. 이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로맨틱 코미디는 현실성을 잃고 허공에 붕 떠버리거나, 혹은 아무런 웃음도 주지 못하게 된다. 로맨틱 코미디만큼 연기력을 요하는 장르도 없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알려주는 작품이 '보스를 지켜라'다. 이 한없이 웃다 보면 그 속에 담겨진 진한 삶의 페이소스까지 느끼게 해주는 작품은 마치 코미디 연기의 각축장을 보는 것만 같다. 지성은 확실히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구축해온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놓았다. 어딘지 진지한 정극에만 어울릴 듯 싶었던 지성의 이미지는 차지헌이라는 캐릭터를 만나면서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시종일관 과장된 모습을 연기하지만 그러면서도 완전히 캐릭터에 몰입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웃음 뒤에는 얼핏 이 캐릭터가 숨기고 있는 아픔 같은 것도 느껴질 정도다.

지성과 거의 비슷한 톤으로 명품 코믹 연기를 보여주는 차지헌의 아버지 차회장 역의 박영규는 극중 부자지간처럼 차지헌을 닮았다. 캐릭터가 닮은 것만이 아니라 그 연기방식도 닮아있다. 박영규가 연기하는 차회장이나 지성이 연기하는 차지헌은 모두 우리가 흔히 드라마를 통해 봐왔던 재벌의 그 고압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그들은 한없이 그 권위를 탈피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며 웃음을 준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겨진 인간적인 면모들을 끄집어낸다. 차회장의 어딘지 상스럽게까지 보이는 어투와 행동은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귀결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 이것은 차지헌이 자신이 살아가는 스펙 사회 속에서 부적응자처럼 보이면서 노은설(최강희) 같은 스펙 제로의 인물을 좋아하게 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최강희는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엉뚱 캐릭터 연기를 보여준다. 한없이 망가지면서도 그 모습이 귀엽게까지 여겨지고, 때론 스펙 없이 취업전선에 뛰어든 이들의 아픔을 대변하면서 깊은 공감을 끌어내기도 한다. 박영규와 지성, 그 사이에 최강희가 서 있으니 그 환상의 조합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로맨틱 코미디란 그저 웃기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탄탄한 연기력이 밑바탕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최근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로맨틱 코미디들의 성패를 보면 얼마나 이 장르에서 연기력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여인의 향기'는 김선아표 로맨틱 코미디 연기를 통해 웃음과 눈물을 통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으로 성공적인 길을 달리고 있다. 반면 한예슬 사태로까지 번진 '스파이명월'이나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넌 내게 반했어' 같은 작품은 대본의 캐릭터도 문제지만 연기자들의 연기력 또한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연기 경험이 상대적으로 일천한 에릭이나 한예슬, 그리고 정용화 같은 이들로서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어쩌면 더 어려운 장르를 만난 셈이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로맨틱 코미디. 웃기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우스운 장르는 아니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중견들이 보여주는 존재감

"에라 이거나 먹어라!" 장난스럽게 대웅(이승기)의 행동을 따라하는 구미호(신민아)의 발길질에 금이 가버린 담벼락 저편으로 척 봐도 존재감 100%의 사내가 걸어온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바바리차림에 입에 문 성냥개비 그리고 한 밤중에 뜬금없는 선글라스를 낀 반두홍, 성동일이다. 잔뜩 폼을 잡고 걸어오는 것과는 상반되게 그는 지금 노상방뇨할 곳을 찾는 중. 금이 간 담벼락에 대고 방뇨를 하는데, 갑자기 무너지는 담벼락과 거기에 깜짝 놀라는 치킨집 아줌마, 그래도 멈추지 않는 오줌발을 멈추지 못하며 천연덕스럽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성동일에서 빵 터진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성동일은 반두홍이라는 액션스쿨을 운영하는 무술감독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반두홍이라는 이름은 국내 최고의 무술감독이자 연기자인 정두홍 감독에서 따온 것이다. 즉 '반만 정두홍'이라는 이 이름에 걸맞게 성동일은 '영웅본색' 주윤발에 빠져 있지만 어딘지 빈 구석이 많은 무술감독의 역할을 연기한다. 성이 반씨라서 뭐든 지칭에 있어서 '반만'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지는 반 감독 반두홍. 전형적인 드라마의 감초 역할이지만 '추노'에서 천지호라는 캐릭터를 최고의 '미친 존재감'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반두홍의 존재감 역시 만만찮은 힘을 보이고 있다.

반두홍의 역할이 중년의 로맨스라는 점에서 그 상대역인 차민숙을 연기하는 윤유선과의 궁합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차민숙이 방귀를 뀐 것을 대신 뒤집어 써주는 반두홍의 이야기가 전개된 엘리베이터에서의 첫 만남과, 얼음을 통째로 꿀꺽 삼켜 숨을 쉴 수 없는 차민숙을 반두홍이 거꾸로 들쳐 업고 얼음을 뱉게 한두 번째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만남이 예고한대로 이 커플의 로맨스는 웬만한 코미디를 능가하는 웃음을 전해준다. 영화가 나오면 소개를 해주겠다며 "시와 음과 사랑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윤유선에게 성동일이 "쉬와 응가의 사랑이라.."하고 말하는 식이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의 어머니 역할로 능숙한 중견 연기자로서의 정극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윤유선이 이처럼 한껏 망가지고 과장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에서는 성동일에 못지않은 윤유선의 미친 존재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이 두 사람의 연기 호흡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이들 중견 연기자들이 보여주는 미친 존재감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라는 신세대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 속에서 또 다른 한 축으로서의 중년의 로맨스라는 자리를 만들어낸다. 때론 포복절도의 웃음을 주고 때론 어딘지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그들의 사랑은 젊은 세대들마저 '미친 존재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중년의 사랑에 대한 상투를 지워버린다. 중견 연기자들이 드라마의 진지함을 맡지 않고 가벼움을 돋궈준다는 역발상도 참신하다. 무엇보다 자칫 젊은 층에게만 소구될 수 있는 드라마의 흐름에 중년층이 흡수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준 것은 간과하지 못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조연으로서 이런 커다란 존재감이 가능한 것은 모두 이 놀라운 중견 연기자들이 보여주는 연기공력 때문이다. 한없이 가볍게 망가지면서도 어떤 무게감을 잃지 않는 성동일과 윤유선의 연기는 그래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구미호와 대웅이 만들어가는 젊은 세대의 사랑과 방황만큼, 이 시대 중년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병풍이 아닌 존재감을 여전히 과시하는 성동일과 윤유선에게서 어쩌면 중년들은 어떤 작은 위안을 느낄 지도 모를 일이다.

연기력 논란보다는 캐릭터 논란

도무지 드라마 속 캐릭터에 몰입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연기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캐릭터 자체의 문제인가. 이것은 언뜻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들린다. 그만큼 판정하기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캐릭터라도 연기자가 소화해내지 못하면 그 캐릭터는 살지 못한다. 거꾸로 아무리 좋은 연기자라도 캐릭터가 좋지 못하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그 캐릭터를 살려낼 수 없다는 말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이다해는 꽤 괜찮은 연기력을 보였다. 이다해의 전작들이 조금은 코믹한 가벼운 캐릭터들이었던 반면, 이 작품 속의 민혜린은 꽤 진지한 정극의 연기를 필요로 한다. 이다해가 갑자기 더 이상 작업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하기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연기력을 가지고 문제를 삼은 이는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다해 자신이 더 이상 극중 캐릭터인 민혜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했다.

이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면밀히 살펴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걸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극 초반에 한세일보 회장 딸이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로 아버지에게 돌팔매질을 하듯 반항하던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그 한세일보의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민혜린의 언니인 혜령의 남자 백성현(박성웅)이 왜 그녀를 짝사랑하고, 그로 인해 언니는 정신병원까지 가게 됐느냐는 점이다. 이 설정은 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백성현이나 혜령 같은 캐릭터는 극중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또 민혜린은 함께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이동욱(연정훈)과 연인관계가 되는 듯 보였으나 어느 순간 친구관계로 돌아섰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형인 이동철(송승헌)을 짝사랑을 하게 된다. 우연이 겹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처럼 사랑을 남발하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그 사랑에서 어떠한 결실도 얻지 못한 존재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떠나 보내주며 또 혼자 짝사랑하는 식이다.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 자체가 극의 진행과 어떤 연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 마저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다해의 그 같은 행동이 잘한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행동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죽은 캐릭터를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다가는 자칫 그 연기를 하는 연기자까지도 (이미지가) 죽을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연기력 논란은 실제로 연기자가 연기를 못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인 실체는 캐릭터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연기력 논란의 근본 원인은 캐릭터 논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연기력이 부족해도 작가는 좋은 캐릭터로 그 부분을 메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때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으나 좋은 캐릭터를 만나 그 자체를 불식시킨 사례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윤은혜는 출연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있었지만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을 만나면서 그 논란을 훌훌 벗어버렸다. 이연희는 늘 그 발음 문제 때문에 연기력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지만,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캐릭터 몰입을 보여주었다. 연출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최지우는 ‘에어시티’에서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를 만나 고전했지만 ‘스타의 연인’을 만나서는 꽤 괜찮은 멜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노희경 작가의 일련의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 거듭난 연기자들, 예를 들면 유호정, 한고은, 김민희 등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 즉 좋은 캐릭터는 연기력 논란 자체를 불식시킬뿐더러 오히려 스타에게 연기자로서의 길까지 열어준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도 생긴다. 김정은은 ‘파리의 연인’에서는 코믹한 멜로 연기를, 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는 좀더 진지한 연기를 펼쳐 보였지만, ‘종합병원’의 정하윤이란 공감을 얻기 힘든 캐릭터를 만나면서 연기력 논란까지 감수하게 됐다. 이다해가 연기라고 있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 역시 어쩌면 이 길로 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연기력 논란과 캐릭터 논란은 완전히 그 문제의 주체가 다르다. 연기력 논란은 연기자의 문제이고 캐릭터 논란은 작가의 문제다. 이다해의 발언은 자칫 연기자의 문제로 튈 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을 작가의 문제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즉 연기력 문제가 아닌 캐릭터 문제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다해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제 연기력 논란을 얘기할 때, 단순히 연기자만의 문제에서 국한될 것이 아니라, 그 연기자가 입고 있는 캐릭터라는 옷까지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를 보면서(이런 캐릭터는 베테랑도 연기몰입이 안될 것이다) 그 어설픈 연기력을 욕하지만, 그런 캐릭터를 창조해낸 작가는 시청률이라는 방패막 뒤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문제를 만들어낸(심지어 시청률을 위해 의도적으로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작가는 웃을지 몰라도 그 작가의 손에 이끌려 인형처럼 조종되는 연기를 해야하는 연기자는 자칫 연기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너는 내 운명’의 발호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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