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통쾌하고 먹먹하고... 이토록 완벽한 인과응보가 있을까

더 글로리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절망 끝에 어린 문동은(정지소)이 죽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저 편에 또 다른 사람이 죽으려 한다. 그걸 보고는 문동은 그 사람을 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맨발에 니트를 입고 물에 들어온 걸 걱정하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무 추우니 봄에 죽자고 한다. 지금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웃프다. 절망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 곳에서 희망을 전한다. 결국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은 못내 아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구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이 시퀀스는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웃게 만든다. 유머가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그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걸 공감함으로써 웃음으로 넘어서고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더 글로리> 파트2가 드디어 공개됐다. 파트1이 끝나고 너무나 기다리던 시청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나머지 내용들이 전개됐다. 과연 문동은은 이 지난한 복수극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끝은 제목처럼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할까. 시청자들은 기대감과 더불어 어떤 마무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파트2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목 놓아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된 파트2는 이러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통쾌한 인과응보에 먹먹한 생존자들의 온기가 더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을 통해 진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어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이렇게 말했던 박연진(임지연)이고, 그건 안타깝게도 가진 자들이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지만, 문동은은 그런 말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지옥 끝까지 몰아붙인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한 그 과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놀랍게도 문동은이 짠 계획은 공고하게만 보였던 저들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그들끼리 치고받는 파멸로 그들을 이끌어간다. 

 

그 복수의 과정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그 뜻 그대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저들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일삼다가 이제는 주인을 물려했던 손명오(김건우)가 결국 저들에 의해 자신이 했던 것 같은 폭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식이다. 약에 취한 이는 약으로 끝을 마주하고, 입을 잘못 놀린 이는 말을 못하는 형벌에 취하며, 부모 잘 만나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여겼던 이는 바로 그 부모로부터 배신당해 벌을 받는다. 

 

그 복수는 단순하지 않고 결코 쉽게 전개되지도 않는다. 문동은의 평생에 걸친 치밀한 계획이 있고 그를 돕는 주여정(이도현)과 강현남(염혜란) 같은 이들이 있는데다, 죄를 지은 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엇나간 욕망들이 결합되어 파멸의 불꽃이 타오른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이끄는가 하는 그 사필귀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게다가 복수만이 이러한 끔찍한 폭력 앞에 무너졌던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는 것 역시 드라마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로 저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걸 주여정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더 글로리>는 그래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그래서 “봄에 죽자”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가를 그 단단한 연대를 통해 그려낸다. 실로 김은숙 작가는 기꺼이 이 땅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해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기를 자처한 듯 대사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멜로에서 그토록 달달했던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이토록 살풍경한 저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들의 망나니를 자처했다면 배우들은 그 대본 위에서 기꺼이 김은숙 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극의 중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잡아낸 송혜교의 연기 변신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정지소, 신예은 등등 모든 연기자들이 마치 작두를 탄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임지연과 김히어라의 미친 악역 연기와 이 복수극에 따뜻함과 간절함을 더해준 염혜란 그리고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정성일, 박성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더 글로리>의 훌륭한 망나니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또한 구하는 일이 아닐까. <더 글로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어떻게 생존해내는가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렇게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문동은의 목소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왕자보다 망나니, 이토록 다크한 김은숙과 송혜교라니

더 글로리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문동은(송혜교)이 주여정(이도현)에게 선을 긋는 이 대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건 그간 판타지와 멜로를 오가는 작품을 줄곧 써왔던 김은숙 작가와 멜로 퀸으로 자리매김해온 송혜교가 이 작품을 통해 건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다. 달달한 멜로를 기대했다면 그건 섣부른 기대일 뿐이라고. 이 작품은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문드러져 그 상처의 고통이 화면 바깥으로 전이되어 올 정도의 살풍경한 폭력과 복수가 그려질 것이라고. 

 

박연진(신예은)과 그 패거리들로부터 심각할 정도의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그 누구도 고교시절의 문동은(정지소)을 그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방관했고, 심지어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왜 키우냐며 피해자인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엄마조차 돈 앞에서 딸이 당한 폭력을 방치했다. 온 몸이 박연진 패거리들 때문에 맞고 찢어지고 심지어 지져져 흉터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 누구도 금수저 부모를 둔 박연진과 그 패거리들이 문동은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막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문동은은 한겨울 차가운 강물 앞에도 서보고, 한 발만 나서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건물 옥상에도 서보지만 그 순간 ‘꿈’을 가져보려 한다. 그 꿈은 바로 ‘박연진’이다. 어차피 죽을 거면, 또 사는 게 지옥이라면 혼자 죽지 않고 혼자만 지옥에 사는 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죽어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겠다는 꿈. 문동은은 이제 복수의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가고 과외 선생을 하며 돈을 벌면서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계속 주시한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도록 철저한 복수를 계획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 

 

<더 글로리>는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사이다 판타지만을 보여주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문동은 이라는 인물과 그의 복수의 시선을 통해 하나하나 촘촘히 그려나간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던 가해자들이고, 또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저들은 부자라는 이유로 명품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호화로운 삶 속에서 살아간다. 꿈은 없는 자들이 꾸는 거라며 자신의 꿈은 그저 ‘현모양처’라고 말했던 박연진은 잘 나가는 건설사 대표 하도영(정성일)과 가정을 꾸려 어린 딸과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동은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저들의 삶의 추악한 실체들이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가해자를 처단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이 서로를 파탄으로 만들고 또 그 과정에서 실체가 공개됨으로써 ‘사회적 죽음’을 만들어내려는 문동은의 복수극은 어딘가 다르다. 그건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갑과 을로 나뉘어 돌아가는 두 세계의 폭력을 드러내는 일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때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위에 군림해 갖은 폭력을 일삼지만, 못 가진 자가 복수를 계획할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문동은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박연진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문동은은 살려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죽고 싶은 것이다. “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더 글로리>라는 복수극은 처절하고 자극적이지만 김은숙 작가의 은유적 설정들이나 대사들은 그 복수극에 울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꿈이었던 문동은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이를 바둑에 비유하는 장면이 그렇다. 바둑은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한다”고 주여정이 설명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복수방식이라는 듯 “마음에 든다”고 문동은이 말하는 것. 

 

게다가 압권은 그 대사를 거의 웃지 않는 얼굴로 무심하면서도 섬뜩하고 그러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낮고 처연한 목소리로 연기해내는 송혜교의 연기다. 그 연기가 더해져 자극적인 복수극에 어떤 품격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잊지 않기 위해서 웃지 않는다는 이 인물이 그래서 가끔 그를 돕는 강현남(염혜란) 앞에서 웃는 모습을 슬쩍 드러낼 때 그 웃음은 그간 송혜교가 출연했던 그 어떤 멜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은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자리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글로리>는 물론 문동은이 하나하나 저 가해자들을 향해 압박해가는 복수극의 묘미가 담겨 있지만, 그 밑바닥 깊숙이 이 인물로 대변되는 피해자와 약자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김은숙 작가도 송혜교 배우도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움을 담고 있지만, 그 새로움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경이로운 소문', 악귀·슈퍼히어로에 학원물이 더해지니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에 빙의된 악귀들과 싸우는 슈퍼히어로. OCN <경이로운 소문>의 언니네 국수집에서 국수를 파는 추매옥(염혜란), 가모탁(유준상) 그리고 도하나(김세정)는 평범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악귀가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리면 가게 문을 닫고 출동하는 악귀 잡는 카운터팀(악귀를 센다는 의미)이다. 어느 날 나타난 3단계 악귀에게 철중(성지루)이 사망하자 그 몸에 있던 저승 파트너 위겐이 빠져나와 소문(조병규)의 몸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소문은 언니네 국수집의 숨은 슈퍼히어로들인 카운터팀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나 <퇴마록> 같은 악귀 잡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이들을 담는 장르적 틀은 훨씬 일상 속의 고수가 등장하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가깝다.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의 육체적 능력을 가진 이들은 저마다 가진 탁월한 재능들이 조금씩 다르다. 추매옥은 치유의 능력을 가졌고, 가모탁은 괴력을 가졌으며, 도하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 과거까지 읽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이들이 악귀를 잡는 액션은 무협영화의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스타일로 표현된다.

 

아직까지 어떤 그만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경이로운'이라는 표현이 붙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탁월함을 드러내는 소문은 위겐이 들어오기 전, 부모를 사고로 잃고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데다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학생이다. 바로 이 지점은 이 드라마가 '학원물'의 색깔을 더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부분이다.

 

상습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 웅민(김은수)과 절친인 주연(이지원)의 친구로 역시 학교 일진들의 괴롭힘을 당하게 된 소문이 능력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이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장면은 이 악귀 잡는 슈퍼히어로 판타지가 현실감을 끌어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학교 폭력을 일삼는 일진인 혁우(정원창)는 중진시 시장 아들이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 중 한 명 역시 국회의원 아들이다. 이들은 그런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약자들을 괴롭히지만, 학교나 경찰도 이들을 제지하지 못한다.

 

악귀라는 비현실적 존재를 세워두면서, 그들이 현실 세계의 '악한 숙주'를 찾아들어간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의 비현실성에 현실적인 상황을 이어놓는다. "이미 살생 경험이 있거나 살인 충동과 욕망이 강한 자"가 바로 그 악한 숙주라는 것. 즉 드라마는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상습적인 가정 폭력을 일삼는 그런 이들에게 악귀가 달라붙는다는 설정을 더하고, 이를 막는 존재로서의 카운터들의 활약을 그려낸다. 그래서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들은 우리네 현실에 담겨진 범죄들을 자연스럽게 끌어오게 만든다.

 

<경이로운 소문>이 그저 어디선가 봐왔던 슈퍼히어로물의 퓨전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는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저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약자들을 괴롭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거나, 아이나 장애를 가진 약자들이 폭력에 더더욱 내몰리는 현실이 여기에는 투영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융의 책임자이자 소문의 저승 파트너인 위겐은, 소문에게 그 곳의 삶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다만 선한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차이 정도."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소문은 말한다. 그것이 "엄청난 차이"라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 선한 사람이 보상받고 악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는 곳이 아니라는 이 단순하지만 명쾌한 현실인식이 들어있어 이 드라마의 실감이 달라지고 있다.(사진:OCN)

‘동백꽃’, 퉁명스러워도 우린 남이 아니라는 건

 

“야 노규태 나 여기 있을 거야. 내가 밖에 있으니까 수틀리면 바로 나와. 뒤는 니 변호사가 책임질 거니까.”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는 노규태(오정세)에게 홍자영(염혜란)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는 변호사로서 노규태와 함께 온 것이지만, 그 퉁명스러움 속에는 전 남편이었던 노규태에 대한 숨겨진 애정 같은 게 느껴진다.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며 당 떨어진다고 사탕을 꺼낼 정도로.

 

찌질한 노규태는 이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내 홍자영이 떠나간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막판 세 개의 질문을 자신이 정하게 해달라 요청하고 그걸 물어볼 때 변호사도 참관하게 해달라는 것. 최향미와 애인 사이였냐는 질문과, 최향미의 모텔방에 들어간 적 있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한 노규태는 “당신은 아내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후 속내를 털어놓는다. “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홍자영은 기막혀 하면서도 내심 안도한다. 먹으려 꺼냈던 사탕을 버릴 정도로.

 

이 짧은 시퀀스에는 <동백꽃 필 무렵>이 건네는 사랑과 정의 방식이 담겨진다. 어딘지 퉁명스럽지만 그래서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표현 방식. 애초에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응한다고 했을 때부터 노규태는 이런 고백이 목적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왜 이런 조사에 응하냐며 화를 내는 홍자영에게서도 노규태는 담담히 말했다. “자영아. 죄 지었으면 벌 받겠지. 그냥 나 한 번 믿어봐.” 하지만 홍자영은 노규태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믿지 못하고 걱정한다. 막상 조사에 들어가면 어리버리할 것이 분명하다며. 노규태는 말한다. “당신 그래서 나 좋아했잖아. 당신 나 모성애로 좋아했지? 지금도 사고 친 자식 모른 척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지? 미안해 당신 엄마 만들어서. 당신도 여자 하고 싶었을 텐데. 맨날 엄마 노릇하게 해서.”

 

퉁퉁대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은근한 마음의 표현은 <동백꽃 필 무렵>이 더 깊게 시청자들을 울리는 이유다. 이런 표현방식은 노규태와 홍자영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활용된다. 동백이 박찬숙(김선영)에게 필구(김강훈)를 잠시 봐달라는 말을 힘겹게 말할 때 퉁명스럽게 쏘아대며 그 남다른 정을 전하는 박찬숙의 대사에서도 이런 방식이 보여진다. “얘. 너 너무 이렇게 예의차려도 정이 안가. 필구랑 준기랑 죽고 못사는 거 이 동네가 다 아는데 어떻게 이제야 처음으로 나한테 애 맡아달라는 소릴 햐? 그 소리를 뭘 그렇게 애를 쓰고 하고 자빠졌어?”

 

향미의 죽음을 알게 된 옹산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동백의 신변을 보호하려 나서는 모습들도 그렇다. 이 ‘소리 없이 봉기한 옹산의 장부들’을 담는 과장된 연출은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만들고 동백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번영회 핑계로 까멜리아를 가득 채운 옹산의 여자들의 모습에서 동백은 결국 훌쩍대며 고마운 마음을 꺼내놓는다. “그래서 저 지금 지켜주시는 거예요? 저요 옹산에서 백 살까지 살래요.”

 

이런 화법들이 전하는 진심은 그래서 더 뜨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건 <동백꽃 필 무렵>이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은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우린 남이 아니고 그래서 살만하다고 이 드라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꺼내놓고 있다.(사진:KB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