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두 얼굴, 벌써 팽팽한 ‘라이프’의 긴장감 

사람을 살리는 곳 혹은 엄연한 사업체. 병원의 두 얼굴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건 단지 천명에 달린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은 돈에 좌우되기도 한다. 물론 당장 생명 앞에서 의사는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할지라도, 병원이라는 자본의 무생물은 시스템으로 삶과 죽음을 가른다. 이수연 작가가 <비밀의 숲> 이후 돌아온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메스로 갈라보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옥상에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 응급실 앞으로 도착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보훈 원장(천호진)에서부터 시작한다. 구급차에서 이 원장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던 듯 보이는 부원장 김태상(문성근). 카메라는 그 구급차에서 죽은 원장을 확인하고는 넋이 나가버린 예진우(이동욱)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상국대학병원 건물을 훑으며 올라간다. 그리고 병원 저편으로 보이는 어둑한 도시를 비춘다. 

그건 마치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이야기의 구조를 압축하는 듯 보인다. 처음에는 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 병원을 감싸고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불러온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예고하고 궁극적으로 이 병원의 시스템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드러낼 거라는 예감이다. 

술에 취해 부원장의 집을 찾아와 술 한 잔을 더하다 담배를 피운다며 옥상에 올라갔다가 추락사했다고 했지만, 예진우는 그 날 원장과 다퉜다는 부원장을 의심한다. 그 의심을 확증이라도 하듯 곧바로 지역병원으로 산부인과, 소아과, 응급과가 파견을 가라는 지침이 내려온다.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병원에 채산성이 없는 과들을 치우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원장의 죽음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고 의심하게 되는 건, 대학재단이 사기업으로 바뀌면서 병원에 내려진 성과급제 확대 시행 지침서에 원장이 극렬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환자가 돈줄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 의사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배우려는 학생한테 돈 뜯어내기만 궁리만 하는 선생을 선생이라고 할 수가 있나? 학생은 선생이 푼 문제의 답이 잘못된 걸 알지. 우리가 하는 수술 우리가 내리는 처방 일반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몰라. 그래서 의술이 무서운 거야. 그래서 우리가 더욱더 독하게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 근데 이딴 걸 지침이라고 내려보내? 아무리 사기업이 대학재단을 통째로 먹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되는 거야.”

원장의 이 말은 <라이프>가 담아내려는 병원의 두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병원도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래서만은 안 된다는 것. 자본의 현실을 말하는 병원의 새로운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원장과 뜻을 함께 해온 예진우는 그렇게 대립하게 된다. 

역시 <비밀의 숲>이 스릴러 장르를 가져오면서도 검찰의 내부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처럼, <라이프>도 의학드라마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시스템의 문제를 다룬다. 의술이 부족해서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구조를 지목하는 것. 역시 괴물 신인 작가로 불렸던 이수연 작가 특유의 진중한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라이프>는 그 흥미진진한 원장의 죽음을 둘러싼 추리와 스릴러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보이게 되는 자본화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전망이다. 만일 돈이 되지 않는다며 병원이 환자를 외면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자본이 밑받침이 되지 않아 병원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하지만 그렇다고 <라이프>는 단순한 선악구도로 이야기를 끌고 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기획의도에서 담아놓은 것처럼, 이 이야기를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범했을 때 벌어지는 ‘항원-항체 반응’의 구조로 풀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상국대학병원이 우리의 몸이라면 이제 구승효로 대변되는 항원이 침범한 그 몸에서 문득 깨어난 예진우라는 항체는 어떤 반응을 일으키며 이 병원이라는 몸의 상태를 변화시킬까. 첫 방이지만 벌써부터 기대되는 대목이다.(사진:JTBC)

출생의 비밀 시대는 갔어도, 관계의 비밀은 계속

도대체 저 관계는 본래 무엇이었을까. OCN 주말드라마 <터널>에서 스릴러만큼 관심을 집중시키는 건 박광호(최진혁)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 간의 관계다. 30년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 현재로 온 박광호는 제일 먼저 과거 화양경찰서의 막내였던 전성식(조희봉)을 만난다. 현재 팀장인 전성식이 새로 온 막내 박광호가 과거 자신이 존경해왔던 선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 이야기였다. 

'터널(사진출처:OCN)'

하지만 관계의 비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박광호와 파트너가 된 김선재(윤현민)가 과거 자신이 뒤쫓던 연쇄살인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여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또 범죄심리학자인 신재이(이유영)가 바로 박광호의 아내가 남긴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연쇄살인범 정호영(허성태)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신재이가 분 호각으로 박광호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아마 부녀지간이라는 설정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극적인 상황으로 연출되긴 어려웠을 게다. 

과거 이른바 막장드라마의 공식으로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던 건 핏줄이라는 관계로 얽혀져 다시 만나는 당사자들의 상황이 그만큼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타임리프나 전생, 판타지가 접목된 장르물들은 이 ‘출생의 비밀’ 코드는 세련되게 변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비밀’이다. 

종영한 드라마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현재의 도깨비 김신(공유)과 저승사자(이동욱)의 브로맨스 관계가 과거에는 연원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극적 갈등을 만들었다. 저승사자가 현재 사랑에 빠진 써니(유인나)가 과거 그가 죽게 한 왕비였고 바로 김신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갈등이 전개됐던 것. 전생과 후생 사이에 놓여진 차단막을 활용함으로써 이 드라마는 그 관계의 비밀을 통한 극적 전개를 추구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tvN <시카고 타자기> 역시 이 관계의 비밀 코드를 활용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와 그에게 나타난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뮤즈 전설(임수정)의 관계는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관계들이 병치되면서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만든다. 어떤 이유에 의해 유진오가 환생하지 못하고 타자기의 유령으로 빙의되어 살아가게 된 사실은 일제강점기 이들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것. 

타임리프, 전생, 판타지를 동원한 이들 작품들은 모두 시간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의 비밀’ 코드가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 물론 그 기저에 있는 건 우리가 현재 만나는 모든 관계들이 그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전생이든 과거이든 어떤 인연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설’이다. 

이 ‘관계의 비밀’ 코드는 저 ‘출생의 비밀’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다. 또한 ‘출생의 비밀’ 코드처럼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장르물의 이야기 전개에 일종의 양념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관계의 비밀’은 한때 가족주의 시대에 가족에 집착하며 만들어진 ‘출생의 비밀’ 코드를 가족 바깥으로까지 확장해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특히 어떤 이유에 의해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는 강렬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산’의 경험을 뿌리 깊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가족주의에 특히 집착하며 살아왔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출생의 비밀’ 시대는 지나갔지만 ‘관계의 비밀’이라는 새로운 코드로 그 힘은 여전히 장르물 속으로까지 파고들고 있다.

상업성과 작품성, 그 어려운 두 마리 토끼 잡은 ‘도깨비’

드라마는 끝났지만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내지 않았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종영 후에도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서고 있다. 사드 배치 문제로 한류의 물길이 막혀 버린 중국에서조차 열풍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타전되어 오고, 김은숙 작가의 회당 원고료가 최고 수준이라는 기사도 흘러나온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이 드라마의 출연자들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다. 그 중심에 선 공유는 이미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이동욱은 이 작품 속 저승사자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내면서 인생 캐릭터를 얻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은교>로 다소 파격적으로 데뷔한 김고은은 그 이미지를 이 작품을 통해 온전히 지워버렸고, 사드 배치의 여파로 중국 드라마에서 배제되는 아픔을 겪었던 유인나는 이 드라마로 만들어낸 확고한 존재감으로 한판 통쾌한 복수극을 보여줬다. 

놀라운 건 <도깨비>에 대한 열광이 사실상 모든 걸 허용하는 듯한 분위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은숙 작가의 회당 원고료가 7,8천만 원에 달한다는 확실한 진위를 알 수 없는 기사 내용에도 그 반응이 “받을 만 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드라마가 막바지에 이르러 완성도 높은 엔딩을 위해 한 회를 쉰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도깨비>라면 한 회 쉬어도 된다”는 반응이 나왔던 그 정서와 유사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원고료 이야기나 한 회를 못 보는 상황에 대해 시청자들의 반응이 곱지만은 않았을 터다. 

작가와 배우들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 이제는 이 작품의 완성도 높은 영상을 만들어낸 이응복 PD에 대한 찬사도 쏟아지고 있다. 사실 <태양의 후예>를 통해 그 남다른 연출력이 주목을 받은 바 있지만, 이번 <도깨비>는 아름다운 미장센들이 영상미를 높여주었고,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구현해낸 액션 신들도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나영석 PD, 김원석 PD에 이은 새로운 신세대 연출자로서 이응복 PD가 새롭게 대중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도깨비>가 사실상 모든 게 허용되는, 그래서 다른 작품이라면 논란이 될 수도 있는 부분마저 용인됐던 건 드라마 내적인 부분들도 적지 않다. 늘 제기된 PPL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이번 작품 역시 김은숙 작가는 곳곳에 PPL을 노출시켰다. 너무 과도한 면들까지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가 도드라지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이러한 상업성들까지 덮을 만큼 출중했다는 뜻이다. 

드라마의 엔딩 역시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에 따라 논란이 제기 되곤 하는 문제 중 하나다. <도깨비>는 해피엔딩이지만 그 안에 죽음과 환생이라는 코드를 넣음으로써 새드엔딩의 요소도 함께 집어넣었다. 그래서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어딘지 쓸쓸함이 담긴 끝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래서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두고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그 역시 큰 논란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찬란한’ 해피엔딩과 ‘쓸쓸한’ 새드엔딩이 교차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통찰이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고, 그것이 엔딩에도 잘 녹아들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도깨비>는 말 그대로 도깨비 같은 드라마가 되었다. 그 어렵다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껴안은 작품이 되었고, 그래서 자칫 논란이 될 수 있는 많은 소지들조차 오히려 시청자들이 ‘허용’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드라마에 나온 이 대사의 표현대로, <도깨비>와 함께 모든 시간들이 다 좋았다고 시청자들은 말하고 있다.

<도깨비>,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동시에 껴안고 걸어가는

 

tvN 드라마 <도깨비>는 그 앞에 쓸쓸하고 찬란하신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점에 서서 다시 처음을 돌아보니 도깨비라는 캐릭터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쓸쓸하지만 또한 찬란하게 스러진다.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이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면서 가슴 한 켠에 꽂고 살아가는 쓸쓸함과 찬란함을 표징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그 검이 뽑히는 날 누구나 쓸쓸하고 찬란하신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여타의 드라마였다면 죽음은 그 이야기의 끝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깨비>는 죽음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여러 차례 죽었었다. 김신(공유)과 김선(유인나)은 이미 왕여(이동욱)의 지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바 있고, 그들은 다시 태어나 새로운 관계로 얽혀진다. 전생의 삶은 그렇게 이생의 삶으로 인연을 이어간다. 이 이야기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도 하다. 김신의 죽음은 도깨비로의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다시 도깨비신부를 만나 무()로 돌아가는 또 다른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버린 도깨비는 그것으로 끝일까. 마치 마지막 회처럼 몰아친 한 회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한다. 도깨비가 캐나다의 한 레스토랑에서 봤던 지은탁(김고은)이 누군가를 부르는 그 장면은 그래서 그 시작을 알리는 복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다른 남자인 듯 질투를 보이는 도깨비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어쩌면 그녀가 부르는 그 남자는 다시 시작된 삶을 살게 된 도깨비 자신이 아닐까.

 

<도깨비>가 흥미로운 건 쓸쓸하고 찬란하신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수식어를 달은 것처럼 희극과 비극이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고 도깨비 신부를 만나는 그 과정은 삶의 행복이 묻어나는 희극이지만, 그 행복의 끝은 결국 도깨비의 가슴에 꽂힌 칼을 신부가 뽑아내는 비극이다. 여기에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삶이 찬란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그 끝인 쓸쓸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죽음이 드라마 속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드라마의 극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도깨비>의 시청률이 15.5%(닐슨 코리아)까지 상승할 수 있었던 건 이 드라마의 이런 독특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밝고 경쾌한 이야기에 매료되면서도 거기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에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도깨비의 죽음이라는 극적 상황을 보여주지만 또한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상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여지를 남겨 놓는다.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드라마 시청자들은 그 끝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민감하다. 그래서 엔딩을 암시하는 무언가가 등장할 때마다 기대감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도깨비>는 이 둘을 동시에 껴안고 끝을 향해 걸어간다. 도깨비의 죽음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그건 다시 벌어질 해피엔딩의 시작은 아닐까.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 걸어가는 <도깨비>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다시 살아 돌아오길 더더욱 간절히 기원하며. 이러니 다음을 기다리는 한 주가 900년 같다는 말이 나올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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