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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바다와 대비되는 인간의 바다

 

왜 하필 바다일까. 또 기억, 약속 같은 것들이 떠올리는 것은. 시국이 시국이어서인지 어떤 장면이나 대사들마저 그저 드라마의 한 대목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물론 드라마 제작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의도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공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을 보다보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다와 기억 그리고 약속 같은 단어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푸른 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를 가져온 것처럼 담령과 인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담령과 인어지만 사람은 뭍에서 살아야 하고 인어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그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바다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다.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담령에게는 죽음이지만, 그런 담령에게 다가와 그를 구해준 인어에게는 생명이다. 인어를 사랑하게 된 담령이 억지로 치른 혼사 첫날 밤 말을 달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건 그래서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인어가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인어는 그를 구해주었다.

 

우리에게 바다란 그 의미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어떤 곳이고, 생명과 풍요의 의미였던 바다가 아닌가. 하지만 참사 이후 바다는 잿빛의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구해줄 것이라 믿었던 그 신뢰들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통곡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된 건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순수한 언어들이 그걸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인어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우야담 같은 전설로나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그걸 잊지 않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까닭은 인어이야기가 주는 그 순수나 사랑, 믿음 같은 좋은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함이었을 게다. 그저 포획되는 물질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바다가 그저 착취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을 살려주는 대지모 같은 곳으로 믿으려는 그 마음.

 

<푸른 바다의 전설>은 여기에 기억을 지우는 장치 하나를 더했다. 인어가 사람에게 키스를 하면 그 사람의 기억에서 인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이야기를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픈 기억들은 지워내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들이 죽음의 선을 넘어서 아픈 기억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 망각의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인어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다. 그리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먼 바다를 헤엄쳐온다. 사람은 점점 아픈 기억이 지워져 가지만 바다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왜 최첨단의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인어 같은 동화적 존재를 얘기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어라는 순수의 존재를 세워둠으로써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돈을 뜯어내는 여고생들을 보며 그걸 똑같이 따라하는 인어가 오히려 어린 꼬마 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인어란 존재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인어의 바다와 인간의 바다가 다르다. 인어의 바다는 풍요롭고 모든 걸 품어주는 곳이지만 인간의 바다는 탐욕으로 피폐해진 곳이다. 인어의 바다는 기억하지만 인간의 바다는 망각한다. 인어의 바다는 약속을 지키지만 인간의 바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이런 대비효과는 아마도 <푸른 바다의 전설>이 인어란 존재를 굳이 도시 한 복판에 세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준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분명 과잉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네 대중들의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바다만 쳐다봐도 떠오르는 잔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바다와 기억과 약속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런 남다른 의미들로 다가온다

Posted by 더키앙

<비정상회담>, 에네스 간 자리 다니엘이 메우나

 

JTBC <비정상회담>에서 사생활 문제로 중도 하차한 에네스 카야는 프로그램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그가 갖고 있는 토론에 불을 지피는 역할은 초창기 <비정상회담>의 확실한 동력이었다. 보수적인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뭐라 반박하기 어려운 그 존재가 빠져나가면서 <비정상회담>이 위기를 맞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하지만 그가 빠져나가자 그에게 가려져 있던 <비정상회담>의 다른 출연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샘 오취리야 본래부터 예능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되기 어려웠지만 한국말이 어색한 장위안이나 기욤이 점점 토크의 중심으로 들어왔고 여기에 알베르토와 다니엘 그리고 똘똘이 스머프 타일러가 가세하면서 토크의 격을 높였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인물은 단연 독일 대표로 뒤늦게 합류한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사실 이 프로그램에서 예능감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누군가를 웃긴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웃음을 빵빵 터트리는 인물에 가깝다. 본인이 웃어버리는 존재는 타인을 웃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는 뜻밖에도 대단하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는 독일인 특유의 이성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국의 세금제도를 얘기하면서 독일의 싱글세가 급여의 50%로 심각하다고 한 다니엘의 말은 즉각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싱글세 논란은 이미 국내에서도 벌어졌던 사안이다. 싱글세를 부여하진 않아도 결과적으로는 싱글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되어 있는 세제 시스템에 대해 국내의 많은 혼자 살아가는 이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결과적으로 이런 정책이 결혼과 출산률이 낮은 사회문제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일 수 있다는 걸 말해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다니엘의 존재감이 가장 빛났던 것은 히틀러에 대해 그가 얘기할 때였다.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거 같은데 가끔 히틀러가 멋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택시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독일 사람으로서 내리고 싶다. 독일에서 그런 말을 하면 잡혀간다. 히틀러는 정말 악마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솔직하게 “1차 대전은 독일이 잘못했다고 자국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거기 앉아있는 출연자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장위안은 방금 다니엘이 한 말 중 감동받은 게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잘못한 거라고 하는 걸 들었다. 나중에 우리 아시아도 유럽연합처럼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정상회담>을 하기 전엔 마음이 닫혀있었는데 방송을 통해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열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니엘은 토크 방식은 확실히 에네스와는 다르다. 에네스가 상당히 공격적이라면 다니엘은 모든 걸 포용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소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에네스만큼의 위트나 유머를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어찌 보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니엘에 대한 호감은 더욱 커지는 것 같다. 결국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의 힘은 각자 자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타국과 비교해보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 이성적인 토론을 해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비정상회담>이 예능이 흔히 하는 웃음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토크쇼로 흘러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비정상회담>의 핵심은 이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웃기지 않고 때로는 지나치게 진지해 보이는 다니엘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는 웃기지 않아서 또 예능감이 없어서 오히려 주목받는 인물이다.

 

Posted by 더키앙

이보영, <적도>를 거쳐, <서영이>를 넘어 <목소리>로

 

이보영. 사실 <적도의 남자> 이전 그녀가 무슨 작품을 했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03년도에 데뷔해 드라마만 무려 16편을 찍은 그녀였지만 존재감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심지어 차갑게까지 보이는 이지적인 이미지가 작용했다. 매력은 밖으로 발산되기보다는 안으로 꾹꾹 눌러졌다. 드레시한 옷을 입고 나오는 신데렐라는 그녀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적도의 남자>는 비로소 이보영의 매력을 찾아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여자. 중견기업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다 집안이 몰락하자 생활전선으로 뛰어나온 여자. 그래서 숨기려 해도 밖으로 드러나는 도도함과 이지적인 매력. 게다가 이 여자는 시각을 잃어버린 첫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여자다. 단단한 이성의 껍질로 고고하게 서 있는 여자가 어느 날 그 껍질이 깨지는 사랑 앞에 여성을 드러낼 때, 이보영의 매력도 활짝 피어났다.

 

<내 딸 서영이>는 <적도의 남자>의 이보영이 가진 매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혼자서도 세상과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서영이였다. “늘 아버지 행동이 자식들 위할 거라는 착각 이제 그만 좀 두세요.” 이 도발적인 대사는 아마도 이보영이 아닌 그 누군가가 했다면 더 큰 정서적인 논란이 생겨났을 지도 모른다. 서영이라는 인물의 정당성은 그래서 상당 부분 이보영의 이미지에 기댄 면이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이제 이보영의 매력, 활용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보영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빈 구석(?)을 한껏 드러냈다. 국선변호사로서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천연덕스레 연기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어린 박수하(이종석) 앞에서 매번 속을 들키고 망가지는 모습은 심지어 그럼에도 여전히 도도해 보이는 이보영의 매력을 더욱 강조시켰다. 이보영은 드디어 자신의 매력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와 두 차례나 연거푸 연기하게 된 변호사라는 직업은 이보영의 매력이 단지 섹시함이나 백치미 같은 여성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녀는 심지어 보이시할 정도로 지적인 워킹 우먼으로 서 있을 때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단색의 스커트에 소박해도 깨끗하게 빤 흰 블라우스만 입고 있어도 여성들의 워너비 의상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는 치열한 생활 전선 속에서도 자신의 기품을 잃지 않는 능력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그저 멜로의 대상이 되는 여성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지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적도의 남자>에서 정의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 시선을 던졌고, <내 딸 서영이>에서는 부모 세대와의 갈등을 겪고 홀로서기 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물론 달달한 연애에서 늘 진심이 들키는 여성이면서도 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국선변호사이기도 하다.

 

이보영의 멜로나 가족드라마가 사회적 소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이지적이고 능동적인 워킹 우먼의 이미지 덕분이다. 복수극의 틀 속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꼬집어낸 <적도의 남자>가 그렇고, 지극히 가족드라마의 공식 안에 있으면서도 그 무수한 세대 간의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던 <내 딸 서영이>가 그렇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예 이 소통의 문제를 멜로와 사회극의 두 차원에서 다룬다.

 

긴 긴 무명생활의 <적도>를 거쳐 모든 세대를 아우르게 했던 딸 <서영이>를 넘어선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때로는 뜨거울 정도로 감성적이며, 때로는 귀여울 정도로 허술하면서, 때로는 꾹꾹 눌려 숨겨둔 슬픔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그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그녀가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워너비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현실과 싸우려면 이 정도의 당당함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으려면 그만큼의 지극히 여성적인 귀여움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바야흐로 무수한 이보영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꿈꾸게 되는 시대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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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원작 만화가인 윤태호 작가를 만났습니다. 처음 보는 자리인데도 이미 몇 번 만난 듯한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죠. 먼저 서로 들고 있는 아이폰으로 범핑을 하면서 어떤 동지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윤 작가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런 익숙함을 만들어주었죠. 우리는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하며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지내왔다는 그 바탕에서 쉽게 '이끼'라는 작품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끼'에 70년대 아버지 세대의 아픔이 묻어난다는 저의 말에 윤태호 작가는 당시 그토록 커보였지만 어느새 세월에 깎여 점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들이 겪은 그 힘겨움이 새록새록 느껴진다고. '이끼'에서 유목형(영화에서는 허준호)이라는 주인공 유해국(박해일)의 아버지는 그런 당대의 시대적 고통을 잘 말해주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유목형이 월남전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벗어나고자 구원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주죠. 저는 이 '이끼'라는 작품이 결국 이 아버지 시대의 아픔이 마치 지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대로이고, 그 부조리함과 숨겨진 폭력성을 그 아들인 젊은 세대 유해국이 파헤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터에서 유해국이 손에 손전등을 들고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비추는 그 장면은 따라서 지극히 상징적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라는 개념은 마치 중세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르네상스의 빛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이것은 그대로 그 상황이 반복되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을 잘 표상해냅니다. 짐승의 시간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오는 그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 어둠의 마을 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이장(정재영)의 집이 마치 파놉티콘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집단적인 통제의 시대에 개인이 말살되던 그 과정을 '이끼'라는 작품은 세세한 스토리와 탁월한 인물의 심리묘사로 잘 그려냈습니다. 여전히 그 집단적인 통제의 기제가 남아있는 마을에 들어간 한 개인 유해국이 이 마을의 분위기를 이상하고 낯설게 여기는 것은 이 마을 공간의 시간이 그 과거에 그대로 멈춰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태호 작가에게 집단과 개인이 어떤 의미인지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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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업에 어느 정도 참여했기에 혹 영화에 앞으로도 발을 담글 생각은 없느냐고 넌지시 묻자 윤태호 작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차라리 그 에너지로 만화를 그릴 것입니다." 창작에 있어서 영화와 웹툰의 차이는 그 주체가 집단이냐 개인이냐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 작업의 차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윤태호 작가는 웹툰 같은 작업은 자신의 창의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영화 같은 집단 작업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점에서 좀더 대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죠.

물론 영화가 가진 집단 작업은 나름의 창의적 방식이 구현되지만, 윤태호 작가가 생각하기에 웹툰 같은 1인 작업이 창의적인 작업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그만큼 리스크가 적다는 장점도 있죠. 따라서 영화 같은 집단 작업이 웹툰이나 소설 같은 개인작업과 상보적인 관계를 가져야한다는 얘길 했습니다.

사실 이건 '이끼'라는 영화가 말하는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집단에 매몰되서도 또 개인에 매몰되서도 곤란한 개인적인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인 존재죠. 짧은 시간이지만 윤태호 작가와의 대화는 제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이끼'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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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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