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라는 남자', 톰 행크스를 살게 한 작지만 큰 이유들

오토라는 남자

미국 영화 맞아? 톰 행크스 주연의 <오토라는 남자>는 마치 한국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자그마한 타운하우스에 중간 도로를 마당처럼 나눠 쓰는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응답하라1988>의 골목과 이웃들이 보여줬던 그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소소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 감정의 진폭이 커져 끝내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영화. 

 

오토(톰 행크스)는 사랑하는 아내 소냐를 잃고 곧 그 뒤를 따라가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웃들과 선을 긋고 자신만의 삶에 머물며 전기도 끊는 등 끝을 준비한다. 그러니 이웃들에게 살가울 이유가 없다. 계속 함께 살아갈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대하고 이웃들도 그를 대놓고 ‘꼰대’ 취급 한다. 하지만 오토가 갖가지 방법으로 죽으려 할 때마다 그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 바로 그 귀찮기만 한 이웃들 때문이다. 

 

새롭게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은 어딘가 집안일에는 젬병인 남편 대신 오토를 찾는다. 공구와 사다리를 빌려달라고 하고 사다리에 올라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다 떨어져 다친 남편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자 차로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운전연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봐 달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이 ‘꼰대 할아버지’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리솔만이 아니다. 길가에 꽁꽁 얼어붙은 길고양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아내의 제자에게 잠잘 곳을 마련해준다. 본인이 죽으려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이를 구하기도 하고, 평생 지기였지만 차에 대한 취향이 달라 갈라졌던 이웃 친구가 마주한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주기도 한다. 

 

죽고 싶은 오토를 살게 하는 건 그를 귀찮게 만드는 이웃들이다. 그리고 오토가 그들을 귀찮아하면서도 외면하지 않고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는 마음을 쓴 것처럼, 이웃 마리솔은 죽으려만 하며 오토가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그 길로 들어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울어준다. 그건 어둠 속에 자신만의 집과 루틴 안에만 머물던 오토를 다시 살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죽음으로만 가던 길을 소소한 일상으로 되돌리는 것. “이게 사는 거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일상에 있었다는 걸 마리솔은 깨닫게 해준다. 

 

베스트셀러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미국 영화지만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건 미국 영화에 대한 일종의 편견 때문일 게다. 사는 곳은 달라도 ‘인간의 온기’를 원하는 건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라는 걸 이 작품의 흥행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원작도 세계적이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영화도 미국내 박스오피스 톱5에 오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통해 코미디 안에 잔잔한 감동과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담아내곤 했던 톰 행크스의 명불허전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마리솔 연기를 한 마리아나 트레비노다. 그가 톰 행크스와 호흡을 맞춰 보여준 연기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가슴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의 여운을 준다. 

 

<오토라는 남자>는 다른 한 편으로 우리의 이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던 <응답하라1988> 같은 작품 속 훈훈했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현실에서 사라져버린 이웃들에 대한 결핍이 불러온 복고이자 추억이 아니었던가. <이웃사람> 같은 영화처럼 언젠가부터 우리네 영화에서 이웃이 따뜻하기보다는 심지어 공포를 주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토라는 남자>가 주는 훈훈한 판타지의 여운이 우리네 관객들에게도 결코 작지 않은 것은. (사진:영화'오토라는 남자')

본격 구걸 리얼리티, <한끼줍쇼>의 따뜻한 웃음

 

본래 좋은 기획은 한 줄로 끝난다고 했던가. JTBC에서 새롭게 신설된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는 제목 하나가 콘셉트의 전부다. 숟가락 하나씩 들고 지정된 동네에 가서 저녁 한 끼를 구걸(?)’하는 것. 너무 단순한 콘셉트라 뭐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단순함 속에는 의외로 이 프로그램의 꽤 파괴력 있는 재미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끼줍쇼(사진출처:JTBC)'

재미는 이 간단해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미션을 하는 주인공이 이경규, 강호동이라는 점이다. 방송 스스로 자인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 때 예능의 신이라 불렸고, ‘국민 MC’라 불렸던 그들이 아닌가. 그래서 방송 시작에만 해도 이경규는 너무 쉬운 일이라며 이경규라는 이름만 얘기해도 한 끼는 뚝딱 해결할 수 있다며 한 끼가 아니라 세 끼를 챙기겠다는 허언(?)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망원동 낯선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일 자체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고 심지어 개그맨 이경규입니다라고 반복해서 얘기해도, “그런데요?”라는 어딘지 무덤덤한 리액션들만 돌아온다. 이름만 대면 뭐든 다 될 것 같았던 형 이경규가 한 끼는커녕 문 앞에서 누군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옆에서 동생 강호동은 그걸 보고 포복절도한다.

 

천하장사 강호동입니다라는 멘트가 있어 그래도 유리할 것 같았던 강호동 역시 굴욕을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친히 문밖으로 나와 준 망원동 주민 분에게 사정을 하지만 저녁 한 끼 같이 먹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스스로 정한 저녁 8시 마감까지 결국 그 한 끼를 해결하지 못한 이경규와 강호동은 제작진에게 받은 용돈에서 차비를 쓰고 남은 돈으로 편의점에서 그 동네에 사는 여고생들과 조촐한 한 끼를 갖는다.

 

역시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인지 이경규와 강호동의 조합은 이 단순한 콘셉트에서 첫 회부터 그 관계의 케미가 살아난다. 성격 급한 이경규가 자기 멘트만 날리고 앞서갈 때 강호동은 리액션에 진정성을 좀 담아달라고 투덜대기도 하고, 이경규가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자지러질 듯 웃음을 터트린다. 하루 종일 공복으로 돌아다닌 끝에 결국 실패하자 강호동은 이게 다 형님 때문이라며 이경규 탓으로 돌린다. 강호동은 쉴 새 없이 이경규에게 잔 펀치를 날리고 이경규는 이제는 잘 알아보지도 못해 영규로도 불리고 김경규로도 불리는 자신의 처지를 확인하며 정신이 멍해진다.

 

한 때 잘 나가던 두 사람의 쓸쓸한 처지가 웃음으로 환원되지만, 그 과정을 뒤집어 보면 어딘지 쓸쓸한 도시의 풍경들이 포착된다. 지나던 과객이 문을 두드려 한 끼를 먹고 갈 수 있었던 시대에서는 이미 한 참 멀어진 지금이다. 낯선 사람과 한 끼를 함께 한다는 건 과거에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 어떤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낯선 일이 되어 있다.

 

이경규와 강호동이 한 끼를 해결할 집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저녁 시간대의 망원동 골목길을 재발견한다. 하루의 일과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의 그 길이 주는 정서적인 느낌 같은 것들이 프로그램에 포착된다. 한 끼를 찾아 헤매는 콘셉트이기 때문에 공복에 예민해진 강호동이 집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저녁을 만드는 소리와 음식 냄새에 매료될 때, 우리는 그 시간대가 주는 정서적 허기를 똑같이 느낄 수 있게 된다. 피곤한 하루, 저녁시간, 식구와 함께 할 한 끼 밥을 찾아 돌아오는 이들의 마음 속에 있을 허기들.

 

<한끼줍쇼>는 낯선 집에서의 한 끼를 해결하는 과정이 만들어내는 의외의 재미들과 함께, 서민들의 저녁시간이 주는 정서적 풍경들과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네 삶 그리고 타인이 한 끼 밥을 통해 식구처럼 다가갈 수 있다는 그런 의미들을 마치 <인간극장> 같은 휴먼다큐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본격 구걸 리얼리티라고 해야 할까.

 

특히 주목되는 건 그간 우리가 봐왔던 이경규와 강호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을 이 프로그램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투덜대고 버럭대는 이경규는 온데간데없고 굴욕 당하는 이경규가 보이고, 진행병(?)이 있어 뭐든 진행하려는 강호동의 모습보다는 그저 형 따라다니는 동생 같은 강호동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방송 콘셉트가 만들어낸 주목할 만한 이 변화는 향후 이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놓기에 충분했다

<응팔>, 가진 자들이 나누는 서민들의 판타지

 

돈 천 만원을 갚지 않으면 집이 경매로 넘어갈 판에 몰린 김선영.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웃 라미란과 이일화는 그것이 마치 제 일이나 되는 듯이 안타까워한다. 라미란은 몇 백만 원은 자신이 꿍쳐놓은 게 있다며 빌려주겠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이 빌려줄 돈 천 만원이 없어 아쉬운 얼굴이다. 그런 그녀에게 김선영은 지금껏 신세져 온 것도 미안한데 그럴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이런 장면은 <응답하라1988>이 갖고 있는 특별한 판타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그토록 많이 그려왔던 판타지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백화점을 통째로 갖고 있는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사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응답하라1988>은 그런 선망과 동경의 판타지를 그려 넣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채워지는 판타지는 돈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진 인간적인 정이다. 이 쌍문동 골목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은 아마도 택이네 집일 게다. 천재 기사로서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는 택이(박보검)와 봉황당이라는 금은방을 운영하는 택이 아버지 최무성은 그러나 전혀 그런 부유한 티를 내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웃의 부러움을 사기는 하지만 선망의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마음 착하고 과묵한 이웃 정도다.

 

최무성이 김선영의 사연을 알게 되고 선뜻 천만 원이 든 통장을 내놓는 장면은 그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돈보다 중요한 게 사람이라는 걸 그 장면 속에서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다. 최무성은 자신이 내주는 천만 원보다 쓰러진 자신을 구해주고, 냉장고가 비면 냉장고를 채워주며 함께 모여 때로는 떠들썩하게 웃을 수 있는 이웃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준 박선영에게 더 고마워한다. 이런 장면에서 돈이란 저 뒤편으로 밀려난다.

 

집이 넘어가게 생겼는데도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홀로 있는 최무성을 찾아와 살뜰히도 챙겨주는 김선영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장면 역시 돈 문제보다 더 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떡 진 머리까지 감겨주는 모습은 조금은 과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허용되는 건 그러한 정을 드러내는 판타지 역시 강력하다는 걸 말해준다.

 

중국의 바둑대회에 나간 택이를 따라간 덕선(혜리)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판타지가 깔려 있다. 국보급 존재인 택이가 대회에서 이기는 그 거창한 이야기보다 <응답하라1988>은 그 뒤에서 묵묵히 몇 시간을 기다려 초밥을 사다 방문에 걸어놓는 혜리의 이야기를 담아 넣는다. 택이가 그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잘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은 혜리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걸 알게 된 택이가 혜리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설레게 만든다.

 

혹자는 <응답하라1988>의 이야기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가 아니고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니다. 결국 드라마가 그리는 것들은 대부분 현실에 부재한 판타지가 아닌가. 그리고 그 판타지란 그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저런 삶이 어느덧 판타지가 되어버린 현실. 선망이 아닌 사람냄새를 담고 있는 판타지는 그래서 우리시대에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응팔>, 무엇이 80년대까지 우리를 되돌렸나

 

도대체 <응답하라1988>의 무엇이 우리를 그 시대로 눈 돌리게 했을까. 97년과 94년이라는 시점과 88년이란 시점은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1988년이라는 시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그럴만한 일이다. 97년과 94년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할 수 있는 시대다. 97년을 기점으로 디지털문화, 팬 문화가 시작됐고, 무엇보다 IMF 이후의 장기불황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도 그 기점이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하지만 1988년은 다르다. 80년대 문화를 이해하는 이른바 386세대들에게는 아련한 향수지만 젊은 세대들과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애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이 <응답하라1988> 2회만에 증명되었다. 첫 회에 평균시청률 6%를 간단히 넘긴 이 작품은 2회에는 7.4%(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기록했다. 고무적인 건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연령층에 고루 소구하는 시청률 분포를 보였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힘을 발휘하게 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주효했던 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것인가에 대한 이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응답하라1988>은 신원호 PD의 말대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엄마가 없는 바둑천재 택(박보검)이 바둑대회 우승을 하자 이웃인 라미란의 가족이 그걸 축하해주기 위해 비빔국수 같은 스파게티를 나눠먹는 풍경이 그 시대의 가족이다. 갑자기 귀가한 남편의 밥 한 공기를 빌릴라 치면 각자의 집에서 저녁에 만든 반찬이 이웃으로 배달(?)되어 결국은 비슷비슷한 저녁을 먹는 이웃이라니.

 

이웃집 딸이 88올림픽 피켓걸로 나온다고 하면 마치 자기 딸인 양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를 해주는 그런 풍경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 점심시간이면 서로가 싸온 반찬을 꺼내놓고 친구들끼리 함께 둘러앉아 먹던 그런 풍경. 맛없는 도시락이라도 애써 싸준 엄마가 미안해 귀갓길에 남은 반찬을 다 먹는 그 따뜻한 마음. 골목길 한 켠에 놓여진 평상에서 수위 높은 부부생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치 자매들처럼 환한 웃음을 채워놓는 이웃들.

 

876.10 이후 6.29 선언이 이어지고 그해 말에 치러진 대선이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했던 그 시점부터 198888올림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대책 없는 낙관론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이 보여줬던 것처럼 88년부터 97년 사이에 있었던 낙관론이 실로 대책 없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시는 재개발되었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은 아파트로 재정비되었다. 정치적 이슈들을 저 경제논리 속에 묻혀져 갔고 세계화를 부르짖던 기업들은 대마불사를 꿈꿨지만 결국은 무너져버렸다.

 

88년부터 97년 사이의 10년은 그래서 세계로 뻗어나간 경제 성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허물어진 10년이 되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아파트들이 세워진 그 10년 사이 많은 걸 잃어버렸고 결국은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IMF를 통해 확인했으며 그 여파를 지금껏 겪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대책 없는 낙관론으로 모든 것이 뻥튀기되기 직전 실로 진솔했던 우리네 삶에 대한 그리움. 부유하진 않았어도 많은 걸 갖고 있었던 그 시절이 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1988>은 지금의 자극적인 삶을 담아내는 살풍경한 드라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고 소소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거품 없는 세상의 진짜 사람 간의 정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88년을 경험한 세대든, 아니면 그걸 경험한 적 없는 그 이후의 젊은 세대든 이 드라마에 막연히 끌리는 이유는. 경제적 수치는 올라갔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각박해진 우리네 현재의 삶. 그것이 88년의 한 골목이웃들에게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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