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맘>의 무너진 학교가 더 가슴 아픈 건

 

MBC <앵그리맘>은 학교의 붕괴를 예고했던 드라마다. 썩어버린 재단과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이사장, 가진 자들은 대를 이어 잘못을 저지르고도 죗값을 받지 않는 행태,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벼운 아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학교 폭력에까지 손이 닿아 있는 조폭들, 심지어 학생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교사까지. 이것이 학교가 맞나 싶을 정도의 참담함을 그려내는 드라마다.

 

'앵그리맘(사진출처:MBC)'

그러니 이 학교의 붕괴가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하나도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명성재단의 비리가 연루되어 있다. 정부 지원을 받아 별관을 신축하면서 지원금을 빼돌린 것. 결국 부실공사가 이뤄지고 건물은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건물이 상기시키는 건 그러나 무너진 학교의 현실만이 아니다. 그 학교는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썩어버린 빗나간 교권은 고스란히 건물에 깔려버린 학생들을 희생자로 내몰았다. 이것이 작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건 당연하다. 그 세월호 참사의 침몰한 배를 보며 우리는 심지어 국가의 침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후 제대로 된 조사와 사후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과정을 보며 지금은 사회 정의의 침몰을 떠올리고 있다.

 

사실 우리네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재난들을 다뤄왔다. 그리고 그 재난의 이야기들은 여지없이 그 원인으로 국가의 무능을 지목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떠올려보라.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저 한강에서 출몰하는 그 괴물이 아니라 무능함만을 드러내며 통제력을 잃어버린 국가라는 괴물이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에서도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재난은 결국 정부였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통제와 싸우는 시위대가 등장하는 건 그래서다. 이 영화 속에서 종합운동장에 수천 구의 시체가 쌓여(심지어는 아직까지 죽지 않은 생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처분 되는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국민을 호명할 뿐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정부의 냉혹함 때문이었다.

 

<앵그리맘>의 이야기가 뼈아픈 것은 최소한 이런 재난의 이야기가 최소한 벌어지지 않아야 할 공간으로서 학교마저 이제는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세월호 참사를 통해 무수히 사라져간 꽃다운 학생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현실이 되어버렸지만.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배가 침몰하면서도 여전히 이 재난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때마다 제대로 된 조사와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그저 덮여지며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앵그리맘>이 보여주는 것처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기득권들과의 결탁이 존재한다. 언제까지 이 재난의 위험을 방치하며 살아갈 것인가.

 

<앵그리맘>이 붕괴된 학교를 통해 상기시킨 세월호 참사의 아픈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또 어느 순간에 <앵그리맘>이 보여줬던 그 드라마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음들이 떠올리는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운 아이들

 

아이들은 착하게도 끝까지 어른들의 통제에 따랐다. 하지만 그 어른들은 심장 따위는 없는 얼음들같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과 부채의식 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켜내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을 아프게도 떠올리게 만든다.

 

'악동뮤지션(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표적> 같은 영화를 봐도 먼저 비리로 얼룩진 무능한 공권력이 떠오르고, <엔젤아이즈> 같은 드라마를 보며 남녀 주인공의 멜로에 빠져들다가도 119소방대원들이 마주하는 긴급 재난과 응급 상황들에 덜컥 마음 한 구석이 내려앉는다.

 

<쓰리데이즈> 같은 스릴러 장르 드라마에서도 먼저 보이는 건 책임지는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심장이 뛴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보여준 모세의 기적에서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유독 안타까웠던 골든타임이 떠오른다. 지금 이 땅의 어른들의 마음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 일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세월호와 거기서 희생된 아이들에 멈춰 있다.

 

이런 와중에 맞는 어린이날이니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유독 간절할 수밖에 없다. 무심코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악동뮤지션의 얼음들이라는 노래가 마음 한 구석을 후벼 파는 건 그래서일 게다. 물론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표된 이 곡을 세월호 참사와 관계 지어 이야기한다는 건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우연히 벌어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여전히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았던 어른들의 예고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동뮤지션이 어른들을 얼음들에 빗대 왜 그렇게 차가울까라고 질문하는 그 속에는 이미 변하지 않던 어른들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셈이다.

 

아이들조차 따뜻한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차가운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에서도 저 혼자 살아남겠다고 탈출한 선장과 일등항해사 같은 얼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저 학교에서도 오로지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식의 입시지옥 속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얼음들이 만들어낸 경쟁체제의 시스템 속에서 늘 관리대상이었지 따뜻한 생명의 존재들이 아니었다.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뜻한 노래가 나올 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차가울까요.’ 악동뮤지션이 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얼음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심지어 준엄하게까지 다가온다. 배가 침몰하는 그 순간까지 천진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이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선생님을 걱정하던 그 목소리는 더 쟁쟁하게 귓전에 울린다. 아이들은 그 때조차도 끝까지 어른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날이다. 아이들을 위한 온전한 세상이어야 할 날. 그러나 얼음들의 중대한 과오를 눈앞에서 목도한 지금은 우연히 듣는 노래 한 자락마저 어른들을 비통하게 만든다. 어른들이 서둘러 도망치는 순간 한 아이는 두려워하는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준 그 인간적인 따뜻함이 제발 얼음들을 녹여주기를. 유독 슬픈 어린이날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