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 해학과 웃음이 더해졌다면 훨씬 좋았을

영화 <흥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담고 있는 영화다. 당연히 허구지만 그 탄생에 대한 재해석 속에는 현재적인 관점이 녹아 들어있다. 은혜를 갚은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가 커다란 박이 되어 그걸 타자 엄청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19세기 조선시대의 힘겨웠던 민초들의 꿈과 힘겨웠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재해석된 영화 <흥부>가 지금 2018년 서민들의 꿈과 현실을 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흥부>는 여러모로 2016년 촛불정국을 그 재해석의 모티브로 그려내고 있다. 광화문 현판이 보이는 곳으로 횃불을 들고 모여드는 민초들의 광경은 2016년 너도 나도 들고 거리로 나오게 했던 촛불집회의 그것과 다를 바 없고, 조항리(정진영)와 김응집(김원해)으로 대변되는 세도정치 당파싸움에 힘없는 왕 헌종(정해인)의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비선실세’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핍박받는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홍경래의 난이 벌어지고 좌절된 꿈들이 더 이상 희망을 얘기하지 못하게 될 때, 흥부전의 이야기는 아마도 당대의 민초들이 잠시간 현실을 잊고 웃음 속에 꿈을 담을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을 게다. <흥부>는 촛불정국의 이야기를 저 헌종 시대로 끌고 가 흥부전을 쓴 흥부(정우)의 이야기로 다시금 그려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려운 정국에 작가가 민초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담아낸 영화이기도 하다. 

어지러운 정국 속에 정감록이 등장하고, 그 정감록을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작업을 흥부는 하게 되지만, 그는 당시만 해도 작가로서의 소명 같은 걸 갖지 못한다. 하지만 조혁(김주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는 그 글쓰기가 민초들이 그래도 계속 꿈꾸게 할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힘겨운 민초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조혁과 그의 형이지만 조선을 가지려는 야심가 조항리는 그래서 흥부가 쓰는 흥부전의 모티브가 된다. 사실상 조혁이 흥부이고 조항리가 놀부이지만 그 실명을 쓰지 못하자 작가인 흥부가 자신과 자신의 형 놀부의 이름을 붙인 것. 

이렇게 재해석을 하게 되니, 당대에 날아가던 제비 한 마리, 지붕 위에 얹어진 박들이 달리 보인다. 저잣거리에서 연희되는 흥부전에 민초들이 찡그리고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모습이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가진 것 없이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민초들이 보이는 그 웃음은 그 가슴들 속에 여전히 피어나는 작은 희망의 촛불들이 남아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고전의 재해석은 이미 많은 작품들이 시도된 바 있다. <춘향전>은 고전극으로도 또 현대극으로 재해석된 작품이고, 특히 <방자전> 같은 참신한 시도까지 이뤄진 작품이다. <홍길동전>이나 <심청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직까지 <흥부전>에 대한 시도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워낙 권선징악의 선명한 구도가 너무 뻔해 보이고 박이 가진 판타지는 너무 황당한 결말처럼 보여 재해석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부>는 그런 점에서 보면 2016년 촛불정국의 상황들을 흥부전의 기원을 따라가는 것으로 담아냈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남는 아쉬움은 많다. ‘흥부전’이 갖고 있는 해학과 웃음이 촛불정국의 민심을 드러낸다는 그 무게감 때문에 상당 부분 지워져버린 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작품의 얼개 또한 지나치게 현 시점이 주는 의미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럽기보다는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면도 아쉽다. 또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주혁의 사망이라는 비보가 준 무게감이 너무 커져 작품 또한 ‘故 김주혁을 위한 헌사’에 집중한 것도 <흥부>가 본래 하려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고 김주혁이 조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는 ‘백성’의 이야기가 그가 배우로서 ‘대중’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읽혀지는 면이 있고, <흥부>라는 작품 자체가 주는 ‘선한 민초들’의 승리라는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도 여전히 주는 울림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런 면들은 많은 허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부>가 인상 깊은 작품으로 남은 이유다. (사진:영화'흥부')


‘역적’ 윤균상, 사적 복수에서 공적 소명으로

“성님, 어리니를 봤소. 어리니가 임금님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소. 성님, 나 그동안 못된 짓 많이 하고 살았소. 충원군한테 복수도 하고 금주령 때 술 팔믄서 건달들 제끼느라 손에 피도 많이 묻혔소. 억울한 사람들 도와준답시고 미운 놈들 다리도 숱하게 분질러 줬소. 야, 나는 화 많이 내고 살았소. 그런디 성, 워째 지금은 화가 안 나고 맴이 슬프요. 집 뺐기고 가족 잃은 사람들 눈물이, 우리 어리니 눈물 같고, 가령이 눈물 같고, 소부리 아재 눈물 같소. 나는 툭하면 화가 나는 존재인데, 지금은 어째 화는 안 나고 눈물만 난답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드디어 길동(윤균상)이 세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가족과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에 대한 사적인 복수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억울한 백성들 괴롭히는 이들을 응징해왔다면, 연산(김지석)의 폭주로 망가져가는 세상 앞에 그는 조금씩 공적인 소명의식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핍박받는 이들이 세상과 싸우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것에 오히려 화를 내고 보기 싫다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랬던 그가 이제 쓰러져 가는 백성들의 피를 보며 그 아픔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의 아픔인 것으로 느끼게 됐다. 그의 그릇은 세상을 품을 만큼 커졌다. 처음에 그 그릇의 크기는 가족을 담는 정도였지만 그 후 익화리 사람들을 담는 정도로 커졌고 이제는 세상을 담을 정도로 커졌다. 

<역적>은 우리에게 고전의 인물로 남아있는 ‘홍길동’을 재해석한 작품.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데 어째 그 옛 시절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권력자의 불통과 폭주로 그려지면서 그것이 어떻게 백성들의 고혈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길동이라는 애기장수라는 메시아의 등장이 마치 백성들 하나하나의 소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폐비되어 사약을 받은 어머니를 가진 불행한 과거사는 연산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연산의 주변에는 그래서 비선실세들이 넘쳐난다. 그의 아픔을 건드리고 그 고통을 촉발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이들. 연산의 폭주를 막기 위해 대간에서 나서 왕의 잘못을 고하지만, 그들을 모두 처벌하는 풍경은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권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위를 범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의 혀를 자르고 발목을 잘라내는 그 행태들을 낱낱이 기록한 행록과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송도환(안내상)을 위시해, 충원군(김정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 같은 이들이 바로 비선실세다. 그들은 왕을 위한답시고 충언을 말하지만, 사실은 권력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양반의 백성 수탈을 정당화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인물이다. 불통하고 폭주하는 왕,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비선실세들. 이러니 <역적>의 홍길동 이야기가 옛 이야기로 보일 리가 없다. 

길동을 잡아 힘줄을 끊고 뼈를 부숴 애기장수의 힘을 없애버린 연산은 그를 갖고 사람사냥 놀이를 한다. 연산은 스스로를 사냥꾼으로 그리고 길동을 그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으로 다룬다. 연산은 왕이고 길동은 한갓 도적이다. 그런데 <역적>은 그 실상이 정반대라는 걸 보여준다. 과연 누가 진짜 왕이고 누가 도적이며,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짐승인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가 도적이고,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눈 자가 짐승이 아닌가.

“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이다. 폭력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정치인이다. 난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을 써야 다스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쳤을 뿐이다.” 연산이 길동에게 하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인간을 믿지 않는 존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정치의 유일한 길을 폭력이라 여기는 이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다스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역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역적’, 왜 하필 이 시점에 홍길동인가

“나는 그저 내 아버지 아들이오. 씨종 아모개(김상중).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 MBC 새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광활한 평원에서 말을 타고 대치하고 있는 임금(김지석)과 길동(윤균상)의 장면을 전제로 깔아놓는다. 절박한 얼굴의 임금과 여유로운 표정의 씨종의 아들 길동. 이 장면은 <역적>이 그리려는 전체 이야기를 압축한다. 결국 임금과 역적이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 서게 되고 도대체 누가 시대의 역적인가를 되묻는 것. 

'역적(사진출처:MBC)'

사실 우리가 <역적>이 그리려는 세계를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거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문장으로 기억되는 홍길동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적>은 이 뻔할 수 있는 홍길동 이야기에 몇 가지 새로운 설정들을 집어넣는다. 그 하나는 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니라 씨종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순수 노비 혈통(?)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길동이 아깃적부터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라는 설정이다. 

홍길동의 이야기가 서자 출신으로서 출사가 금지된 시대의 ‘적서차별’을 그 밑바닥 정서로 깔고 있다면, <역적>은 아예 양반의 핏줄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태어날 때부터 종살이가 결정된 삶, 즉 ‘씨종’의 아들이 부여하는 ‘흙수저’의 정서를 깔고 있다. 하지만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 길동은 이 ‘흙수저’가 갖게 되는 평탄치 않은 삶을 예고한다. 만일 금수저로 태어난 애기 장수라면 나라를 구할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흙수저 애기 장수란 나라를 뒤흔들 ‘역적’의 씨앗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홍길동 이야기가 탄생하던 시기에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질 자에게 부여되어야 비로소 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절대로 부여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 그래서 가진 자가 절대 갖지 말아야할 자들을 마음껏 부리는데 사용되는 것. 그것이 힘이고 권력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렇게 부여된 힘과 권력이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들끼리 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생겨난 민초의식. 그 발현이 홍길동 같은 체제 전복의 서사를 탄생시켰다는 것.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하필 2016년 현재 다시 재해석되고 있다는 건 그 시국에 대한 공감이 홍길동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공감 때문이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이지만 국민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사익을 위해 치부되었다는 걸 확인한 촛불들이 횃불이 되어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시국이 아닌가. 진정한 힘이 무엇이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그 촛불의 질문처럼 <역적> 역시 묻고 있다. 진짜 역적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민초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어려운 시기마다 소환해와 위로받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영웅서사의 또 다른 시작일 게다. 그래서 <역적>은 그 소재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여기에 “그런데 말입니다” 하며 무언가 잘못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만 같은 김상중이 첫 회부터 깔아놓은 씨종 태생이 갖게 되는 그 아픈 민초들의 정서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현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껏 자신의 힘을 누르며 잘못된 현실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아모개나 그의 아들 길동이 어느 순간 각성하고 그 힘을 민초들을 위해 쓰게 될 순간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된다. 고구마 현실에 길동이라는 애기 장수이자 ‘백성을 훔친 역적’은 그래서 현재의 시청자들의 마음 또한 벌써부터 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억눌려진 힘이 사이다처럼 터져 나올 그 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인어의 바다와 대비되는 인간의 바다

 

왜 하필 바다일까. 또 기억, 약속 같은 것들이 떠올리는 것은. 시국이 시국이어서인지 어떤 장면이나 대사들마저 그저 드라마의 한 대목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물론 드라마 제작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의도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공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을 보다보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다와 기억 그리고 약속 같은 단어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푸른 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를 가져온 것처럼 담령과 인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담령과 인어지만 사람은 뭍에서 살아야 하고 인어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그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바다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다.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담령에게는 죽음이지만, 그런 담령에게 다가와 그를 구해준 인어에게는 생명이다. 인어를 사랑하게 된 담령이 억지로 치른 혼사 첫날 밤 말을 달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건 그래서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인어가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인어는 그를 구해주었다.

 

우리에게 바다란 그 의미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어떤 곳이고, 생명과 풍요의 의미였던 바다가 아닌가. 하지만 참사 이후 바다는 잿빛의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구해줄 것이라 믿었던 그 신뢰들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통곡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된 건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순수한 언어들이 그걸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인어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우야담 같은 전설로나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그걸 잊지 않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까닭은 인어이야기가 주는 그 순수나 사랑, 믿음 같은 좋은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함이었을 게다. 그저 포획되는 물질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바다가 그저 착취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을 살려주는 대지모 같은 곳으로 믿으려는 그 마음.

 

<푸른 바다의 전설>은 여기에 기억을 지우는 장치 하나를 더했다. 인어가 사람에게 키스를 하면 그 사람의 기억에서 인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이야기를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픈 기억들은 지워내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들이 죽음의 선을 넘어서 아픈 기억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 망각의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인어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다. 그리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먼 바다를 헤엄쳐온다. 사람은 점점 아픈 기억이 지워져 가지만 바다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왜 최첨단의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인어 같은 동화적 존재를 얘기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어라는 순수의 존재를 세워둠으로써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돈을 뜯어내는 여고생들을 보며 그걸 똑같이 따라하는 인어가 오히려 어린 꼬마 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인어란 존재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인어의 바다와 인간의 바다가 다르다. 인어의 바다는 풍요롭고 모든 걸 품어주는 곳이지만 인간의 바다는 탐욕으로 피폐해진 곳이다. 인어의 바다는 기억하지만 인간의 바다는 망각한다. 인어의 바다는 약속을 지키지만 인간의 바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이런 대비효과는 아마도 <푸른 바다의 전설>이 인어란 존재를 굳이 도시 한 복판에 세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준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분명 과잉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네 대중들의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바다만 쳐다봐도 떠오르는 잔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바다와 기억과 약속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런 남다른 의미들로 다가온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