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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의 독특한 정조는 문학적 코드에서 나온다

김은숙은 문학적 코드들을 작품 속에 담는 걸 즐기는 작가다.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하지원)에게 사랑을 느끼는 김주원(현빈)이 읽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대표적이다. 김주원은 독백을 통해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며 자꾸만 끌리는 길라임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 문학적 코드를 활용해 드라마에 담아낸 바 있다. 

또 그 작품에서는 길라임을 향한 김주원의 마음이 그의 서재를 채운 시집의 제목을 통해 다뤄지기도 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김성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황인숙),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황동규), 가슴 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홍영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진동규)’의 문구가 그것이다. 문학작품이 가진 그 특유의 진지함이 드라마의 상황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정조를 그려냈다.

이러한 문학적 코드의 인용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시집을 읽는 김신(공유)이 문득 “아저씨”를 외치며 달려오는 지은탁(김고은)을 보며 읊조리는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 그것이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업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꿈꾸는 문학적 상징들은 이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분위기 있는 개화기 ‘하오체’와 엮어지면서 독특한 정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에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다 그리 살던데”라며 유진 초이(이병헌)가 애신(김태리)이 선택한 의병으로서의 삶을 안타까워하자 애신이 하는 답변이 그렇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요.”

또 유진 초이가 애신에게 자신이 노비임을 밝히는 장면 역시 문학적 코드들이 대사와 연출을 통해 들어가면서 아련한 느낌을 만들었다. 도요지를 찾아가던 길에서 처음 같은 배에 동승했던 그들이 한 겨울 꽁꽁 언 그 얼음 위를 함께 걸어가는 장면 자체가 그렇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신분의 벽이 가져올 관계의 위태로움을 살얼음판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유진 초이가 던지는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라는 대사는 그 상징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절절함이 더해졌다. 

이 드라마에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는 행위는 그들의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같은 대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유진 초이가 편지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하는 마음은 그래서 그 시적인 ‘동행’의 의미가 더해져 독특한 시대적 정조를 그려낸다.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 나에겐 다시 없을 순간이라 지금이.”라는 애신의 말에 유진 초이는 편지에 ‘하마터면 잡을 뻔 했습니다. 걷자고, 저기 멀리까지만, 나란히. 조선에서 전 저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저기로, 저기 어디 멀리로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라고 적는다.

애신이 스스로 ‘불꽃’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을 때도 유진 초이는 편지에 적는다.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함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새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어색할 수 있을 이런 다소 문학적인 대사들이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마주하며 그 시대가 겪은 처연한 정조까지를 담아낸다. 김은숙 작가의 세계가 훨씬 깊은 감정적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어쩌다 어른>과 황정수씨의 일갈

 

“<어쩌다 어른> 채널 서핑하다 가끔 봤는데 전반적으로 어쩐지 애들수준이더군요...전문가들이 침묵하면 그냥 재방송과 다시보기로 계속 돈 많이 벌겠지요.” 황정수씨가 쓴 ‘tvN 미술 강의로 본 인문학 열풍의 그늘이란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글에는 또한 이런 날카로운 댓글이 달려 있다. 황정수씨는 인문학이라는 포장 하에 제대로 된 전문적 식견을 갖지도 못한 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미술 장사를 꼬집었고, 그 글에 달린 댓글은 그런 장사를 무분별하게 방송으로 내보낸 프로그램을 꼬집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른 걸까.

 

'어쩌다 어른(사진출처:tvN)'

황정수씨가 지적한 사안들을 보면 이번 tvN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최진기 스타강사의 어른들의 인문학, 조선미술을 만나다라는 강의는 재난 수준이다. 장승업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조선시대의 화가를 이야기하면서 엉뚱한 사람이 그린 그림을 버젓이 세워두었다는 것. 또 장승업의 그림을 칭송하기 위해 정조나 심사정의 그림을 제법 그린 작품이라는 식으로 폄하 수준의 발언을 했다는 것. 그리고 동양화가 아니라 조선화라고 불러야 한다는 식으로 학문의 갈래를 난도질했다는 것 등등. 미술을 연구한 이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방송이었을 법 하다.

 

황정수씨의 개탄은 이것이 우리네 인문학 열풍의 진면목이라는 인식에서 나오고 있다. 스타강사라는 미명 하에 본인의 주전공도 아닌 미술이라는 분야를 갖고 이야기하면서도 검증이나 고민 없이 아무렇게 난도질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심지어 환호하고 나아가 방송을 본 이들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며 강의에 감명 받기까지 한다는 사실. 황정수씨는 최근 불거진 조영남씨 대작논란 역시 이 같은 현실이 반영된 사태로 보고 있다. 미술이라는 인문학에 대해 너무 가볍게 접근하고 또한 무지한 데서 나온 소치라는 것이다.

 

그는 조영남씨가 방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놨던 백남준 선생의 말 원래 예술은 고등사기다라는 말의 진위 또한 곡해되었다고 지적한다. “전위 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백남준 선생의 말처럼 여기서 고등사기라는 표현의 방점은 고등에 찍히는 것이지 사기에 찍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황정수씨는 조영남씨의 이런 미술에 대한 가벼운 태도에 대해 한 평생 히트곡 없이 남의 노래에 기대어 살아온 가수의 길과 남의 손을 빌어 그림을 그린 화가의 길이 너무도 유사하여 측은한 마음마저 들게 한다.”고 일갈했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조영남씨의 대작논란과 이번 <어쩌다 어른>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거짓 방송은 그 연원이 다르지 않다. 결국은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장사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깊이는 사라지고 대신 단순화되고 자극적인 재미들로만 채워지면서 생겨난 사태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쩌다 어른> 같은 프로그램이 인문학이나 교양적인 소재들을 예능화 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건 아니다.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관심을 갖게 해주고 그 저변을 넓혀준다는 데서는 그 좋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본질을 벗어나 단지 교양적인 소재를 갖고 와 예능으로 장사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때다. 정보에 대한 고증이나 검수 없이 몇몇 스타 강사의 언변을 빌어 시청률을 가져가려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시킨다.

 

최근 방송이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소재들을 예능화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SBS <동상이몽>현대판 콩쥐소재가 방영된 뒤 커다란 논란이 되었던 건 그 사안이 웃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서 전문가의 심리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교양이나 특정 전문분야를 예능화하려 한다면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자리해야 하는 건 이제 필수적인 일로 다가오고 있다.

 

<어쩌다 어른>은 그 제목처럼 진정한 과정을 거쳐 제대로 성숙된 어른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우리들을 지칭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어른들을 대상으로 그 눈높이에 맞는 강좌를 한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부박한 내용을 채워진다면 한 대중의 말마따나 <어쩌다 어른>어쩐지 애들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Posted by 더키앙

연장방영에 변칙편성까지 시청률에 경도된 ‘이산’

‘이산’은 소재로 보나 특유의 시각으로 보나 훌륭한 기획의 사극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파당정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 게다가 이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이런 되는 소재를 가지고 ‘이산’은 왕과 개인으로서의 정조를 모두 다루는 독특한 사극의 한 장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의 창대함을 두고 볼 때, ‘이산’이 얻은 것은 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초기 너무 과도한 의도를 세워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작품은 뒤로한 채 시청률에 경도된 연장방영이나 변칙편성은 오히려 초반부 ‘이산’의 참신한 기획마저 색 바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산’은 보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창대한 기획에서 빗나간 초반부
‘이산’의 기획의도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 창대한 기획의 면면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기획의도에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가진 정조는 물론이고, 파당정치를 해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정조, 실물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정조, 다양한 실학파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와 과학에 꽃을 피웠던 정조,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했던 정조까지를 다루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산’은 그저 왕조의 정치사만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정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을 모두 한 편의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종영을 앞둔 ‘이산’이 다룬 것은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했다. 탕평책을 시행해나가는 정조의 에피소드도 구체적인 것이 거의 없었고,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에피소드도 금난전권 철폐라는 발표로 그친 격이 되었다.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있던 성송연(한지민)의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 에피소드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군제 정비나 병기 연구 과정 에피소드의 하나로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예책자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이산이 정조가 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이산이 비로소 정조가 된 것은 45회에서다. 애초 계획이었던 60회에서의 종영은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정조의 업적이나 애초 의도에 들어있던 정조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정순왕후(김여진)를 위시한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암살시도(이것은 거의 마지막까지 다시 반복된다)와 영조(이순재)의 시험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의 모습을 과도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연장방영,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반부 이산보다 더 주목된 것은 영조와 홍국영(한상진)이었다. 즉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로써 영조와 홍국영(때로는 성송연)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 힘이 위치이동을 한 것이다. 영조의 매병(치매) 설정이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 정조를 다루기에도 벅찬 ‘이산’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시청률이란 잣대로 보면 이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극의 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영조였기 때문이다.

중반 이상을 지나오면서 정조가 아닌 영조에 집중된 ‘이산’에 있어서 MBC의 16부 연장방영 결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연장 결정의 이유로서 MBC가 내세운 것도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서”와 “이산과 송연과의 멜로 라인 등 그 밖의 다루지 못한 부분으로 이산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연장방영 속에서도 여전히 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각된 것은 홍국영이다. 홍국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추락에 대한 에피소드가 지속되었고, 본래 기획의도에서는 도화서에서 나와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에도 들어가는 등 능동적인 캐릭터였던 성송연은 궁중 시집살이(?) 에피소드가 거듭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홍국영의 죽음과 성송연의 장결병이란 불치병 에피소드로 채워지는 동안,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 인물들과 정약용(송창의)의 간간한 ‘보고’로 처리되었다.

시청률이 ‘이산’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산’은 성군으로서의 정조를(특히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산’이 선택한 것은 완성도보다는 시청률이었다.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초반부 그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장방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에 걸맞게 완성도를 보충해나갔어야 한다. 300회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나저제나 정조로서의 면모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필자 같은 시청자들로서는 이 대책 없는 후반부의 허무함을 성송연의 죽음, 정조의 죽음 같은 감성적 충격 혹은 화성 원행 같은 스펙타클로 채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최근 ‘이산’의 종영을 두고 벌어진 ‘오락가락 편성’은 그 마지막 끝나는 길까지 이 드라마가 시청률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유야 어쨌건 두 차례의 스페셜 프로그램과 한 주에 한 번씩 띄엄띄엄 편성된 ‘이산’의 종영은 확실히 정상적인 끝맺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끝맺음을 함으로써 시청률로 보면 ‘이산’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송사에 최대의 이익을 남겨준 드라마가 되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이산’은 바로 그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종영하는 마당에 ‘이산’의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 자칫 성공하는 드라마의 한 전형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들은 초반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편성 전쟁의 진짜 얼굴은 이것이다) 초반 시선잡기에 대부분의 힘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지속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힘주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부터의 긴장감 저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다반사다. 용의 머리만큼 중요한 것이 용의 몸통이자 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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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키앙

왕을 사적인 존재로 다루는 이점과 한계

‘이산’은 정조라는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한 인간에 더 주목한 사극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이산이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 어색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성송연이 “산아”하고 답하는 장면은 이 사극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러한 왕이라는 공적 존재에서 이산이라는 사적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은 조선시대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수평적 관계 같은 현대적 맥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왕이 되기 전까지 사적인 존재로서의 이산의 행적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장점이 된다. 실제로 끊임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이서진)의 몸부림과 그런 이산을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이 사극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도화서의 다모로 일하는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이산을 돕는 설정 같은 것들은 이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사극에 힘을 준 인물은 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와 홍국영(한상진)이다. 영조는 이산을 시험에도 빠뜨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노론 세력들의 위협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역할만으로는 이산을 보호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급부상하는 인물이 홍국영이다. 이 착하기만 한 이산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 속에 뒹굴 수 있는 홍국영은 현실적인 인물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영조가 죽고 이산이 정조라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불거진다. 아무리 사극이 조명하는 것이 이산이라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왕은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존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 정치를 해야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정치란 사적인 행적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만일 정조의 정치 자체를 이렇게 사적인 얘기로 풀어낸다면 자칫 조선시대 한 성군의 치적을 정치적 개혁과 타협의 성과가 아닌 끝없는 음모론과 밀실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즉 사적인 약점들을 캐내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산’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고 할 때부터 ‘이산’은 정치드라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미묘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나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은 저 ‘대왕 세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산’이 정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다루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예를 들면 금난전권 폐지 같은)에 더 중점을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에 대한 시청자들의 혐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는 박제가, 이덕무 같은 실학파 인물들이 사극의 중심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이산’이라는 사극에서 이산이 정조가 되었기에 반드시 해야할 정치적 책무들을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인물들의 면면으로 쉽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 등장한 정약용(송창의)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가나 과학자의 면모로서 더 부각된다.

왕이 되었으나 사적인 얘기에 천착함으로써 ‘이산’이 사극 후반에 집중한 것은 홍국영과 성송연이다. 홍국영의 개인적인 야심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정조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 더 집중했으며, 성송연의 의빈으로의 성장과정과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또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사극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정조의 왕으로서의 정치적 업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막연히 규장각 인물들이 하고 있거나 열심히 일하는 정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처리되었다.

‘이산’이 후반부에 와서 초반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산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하려 했다면 정조로 즉위되는 그 순간까지만을 사극으로 다루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정조가 되는 그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좀 다른 패턴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새로운 실학파 인물들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업적이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극의 연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아쉬움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이러한 결과로 ‘이산’에서 더 주목된 인물들은 정조보다는 영조, 홍국영, 성송연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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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키앙

퓨전사극 속 카리스마 이양이 어려운 이유

‘이산’이 시작한 지 벌써 42회가 지났다. 사실상 연장이 확정된 상태라 앞으로 20여 회 이상이 더 남았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3분의 2를 이산이 양위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그리고 있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정조 즉위 당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데다, 이들이 한 업적 또한 상당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숱한 드라마적인 이야기들이 나올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이산’이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구조는 ‘암살위기-극적모면’이라는 단순구조로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가지고 ‘이병훈 PD식 사극’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할 것이다. ‘이병훈 PD식 사극’이란 ‘허준’과 ‘대장금’을 통해 반복되어 왔듯이, 무한반복되는 미션과 미션해결과정을 통한 성장드라마이다. 여기에 반드시 들어있는 것은 주인공의 선한 세계와 그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라는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을 통한 스테이지 해결방식의 구조는 적어도 50여 회를 끌고 가야 하는 대하사극에 있어 보다 압축된 스토리를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이 게임적인 미션구조는 말 그대로의 게임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이산은 얼마나 성장했나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중독성은 나무랄 것이 못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기꺼이 빠져드는 중독성에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그것은 스토리가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미션이 이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중독적이고 관성적인 시청을 끌기 위해 인위적으로 엮어진 느낌을 받을 때이다. 이 때가 되면 이야기는 성장하지 않고 패턴화되면서 똑같은 상황만을 반복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려 재미를 반감시키게 된다. 이것이 성장드라마를 추구하는 퓨전사극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주인공이 역경을 하나하나 헤쳐 나와 마치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40여 회가 흐르는 동안 이산(이서진)이 얼마만큼 성장했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산은 사실상 자신이 직접 해결한 문제가 별로 없다. 때론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때론 박대수(이종수)가 물불 안 가리는 충성심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산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는(사실상 만드는 이도) 바로 영조(이순재)다. 이제 노론벽파의 거병범궐로 죽게 생긴 이산을 살려주는 것은 사실상 허망하게도 쓰러진 영조가 일어나는 그 사건 하나다. 이산은 늘 그런 상황 속에서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역경을 겪어오면서도 이산은 여전히 이상과 순수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퇴행이다.

다 잡은 노론벽파 세력을 영조의 매병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덮으려는 이산의 모습은 ‘이병훈 PD식 사극’이 가진 선악구도 이분법과 미션해결구조의 덫에 걸려 성장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보여줄 뿐이다. ‘이산’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홍국영(한상진) 캐릭터가 부각된 것은 착하기만 한 이산이 가진 캐릭터로서의 답답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왕으로서의 즉위가 임박한 이산에게 있어서 그 많은 과정을 통해 좀더 현실적인 성장을 그려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성장한 인물은 오히려 영조다
물론 이 부분은 현실이 아닌 환타지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퓨전사극들이 가진 어려움 중의 하나다. 선한 캐릭터들의 성장담을 끌어가기 위해 반드시 그들을 보호해주는 현실적인 강력한 카리스마가 동원되기 마련인데, 결국은 그 카리스마를 물려주는 시점에 와서는 주저하게 된다. 지나친 선악구도 이분법으로 인해, 캐릭터들이 현실에 몸을 담는 것이 마치 선이 악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몽’에서 주몽(송일국)의 후광으로서 해모수(허준호)를 쉽게 죽이지 못하는 이유이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주몽을 담금질하는 금와(전광렬)가 필요한 이유이다. ‘왕과 나’는 초반부 너무 강력한 조치겸(전광렬)의 카리스마로 인해, 정작 주인공인 김처선이 그 카리스마를 이어받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산’에서 성장한 인물은 이산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다. 드라마 전체의 힘을 만들어낸 것도 영조이며 실질적인 사건들도 영조를 통해서 비롯되고 갈무리되었다. 무엇보다도 초반부 자식을 뒤주에 가둘 정도의 강력한 군주에서부터 매병을 앓는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그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제목을 의심케 만들 정도이다.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영조가 사망하고 이산이 즉위한 후의 사건 전개이다. 일단 다 잡아 놓은 노론 벽파들을 다 풀어주고는 다시 비슷한 패턴 속으로 들어간다면 재미는 더더욱 반감될 것이다. 물론 이들의 도발과 그 문제해결이 빠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실적으로 대처해나가는 이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이산’을 진정한 ‘이산’으로 만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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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만이 가진 재미, 생존의 드라마

“저는 절대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갓 11살인 세손(박지빈)이 어미인 혜경궁 홍씨(견미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사극에서라면 모두들 들어가고 싶어하는 궁이며, 되고 싶어하는 왕이지만 세손은 왕이 되지 않겠단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혜경궁 홍씨의 답변은 더 충격적이다. “왕이 되어 권세를 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손께서는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산’은 궁이라는 세상의 감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하는 한 남자, 이산의 이야기다.

세손이 성송연(이한나)을 만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말하고, 성송연이 거기에 맞춰 어색하게 “산아!”라고 부르며, 장차 왕이 될 세손이 천한 성송연과 박대수(권오민)에게 동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사극은 정조라는 왕을 그리기보다는 이산이라는 한 사내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다. 따라서 이 사극을 부르는데 있어서 흔히 ‘이산 정조’라 칭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굳이 사극의 제목을 ‘이산’이라 한 뜻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세손이라는 상징적인 위치로서 겪는 일로 치부하기엔 11살짜리 아이가 겪는 온갖 시험들은 너무나 가혹해 보인다. 성송연, 박대수 같은 동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의젓함이 어엿한 왕의 씨임을 증명하지만, 혜경궁 홍씨 앞에서 “어마마마 궁이 무섭습니다. 할바마마도 무섭습니다.”라고 흐느끼는 세손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런 시련 속으로 빠뜨렸을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인 사도세자(이창훈)의 죽음 때문이다. 드라마는 영조(이순재)가 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저 영조가 꿈을 꾼 장면이 등장할 뿐이고 누군가의 모함(아마도 노론의)을 받은 것으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세자가 왜 죽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죽음으로 해서 남겨진 불씨, 즉 세손 이산마저도 제거될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게 하고 권세를 얻은 이들이 장악한 궁은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거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 죽음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이 된다. 이산은 그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는 위기상황에 몰린 한 주인공이 그 단계를 헤쳐나가는 롤 플레잉 게임을 닮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단지 이산 단독의 게임이 아닌, 성송연과 박대수 같은 지체 낮은 자들이 함께 하는 게임이란 점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궁 밖에서 저자거리로 도망쳤다가 왈자패들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나, 세손이 거처하는 궁 앞마당에서 조총이 발견되어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도 결정적인 힘을 주는 이는 성송연이다. 그것은 먼 거리에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상관없이 사건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니 이들 간에 피어하는 사랑은 애틋함 이상의 애절함을 담는다. 함께 서로를 생존하게 하면서 생겨난 애정이기 때문이다.

‘이산’은 궁에 갇혀 저자거리 보통사람들보다도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이산이란 이름의 정조를 다룬다. 무소불위의 왕이 중심에 되어 흘러가던 과거의 사극들과 비교한다면 ‘이산’이 그리는 왕은 이다지도 다르다. 왕이 싫고 궁이 싫은, 하지만 생존을 위해 왕이 되어야만 하는 한 사내가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사투의 시간들. 그리고 기서 피어나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 이것이 ‘이산’이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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