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기생수:더 그레이’, 원작과 달리 가족, 조직에 집중한 건

기생수:더 그레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도 기생을 합니다. 인간은 조직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기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이라는 무형의 존재에 기생을 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자신의 생존과는 아무 상관 없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며 그것을 위해 그 조직을 위해 충성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우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유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기생수:더 그레이’에서 기생생물의 우두머리이자 세진교회의 목사인 권혁주(이현균)는 자신들의 종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간이 다른 점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여러모로 이 작품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초창기 애니메이션인 ‘사이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목사가 꺼내놓는 연설은 이 작품이 원작과는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연상호 감독은 ‘기생수:더 그레이’를 통해 원작이 가진 설정만을 가져와 그 ‘기생’의 의미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즉 갖가지 ‘조직’의 의미로 해석해낸다. 

 

그 조직은 가족일 수도 있고, 범죄 조직일 수도 있으며, 경찰 조직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묶여지는 한 마을 전체일 수도 있다. 기생생물이 인간의 몸에 들어와 완전히 뇌를 장악하려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의 몸을 살려내지 않으면 자신도 죽을 수 있어 공존의 길을 선택하며 생겨난 변종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원작처럼, ‘기생수:더 그레이’도 정수인(전소니)의 몸에 깃든 기생생물은 칼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그를 살려내려다 그와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존의 의미는 ‘기생수:더 그레이’에서는 인물들간의 관계로 확장된다. 

 

즉 정수인은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해 아빠를 신고한 인물이다. 그 때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정수인을 구해낸 형사 김철민(권해효)은 그 후로도 정수인과 유사 부녀지간 같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마치 ‘기생수’에서 기생생물과 그것이 깃든 인간 사이의 설정을 인간관계로 치환해낸 것처럼 보인다. 정수인이 폭력적인 아빠의 세계 속에 어쩔 수 없이 ‘기생’하며 그 폭력에 잠식당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스스로 신고하고 벗어났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물론 자신의 아빠를 신고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괴물’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는 배척받아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 되지만, 그럼에도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를 구해내주고 그를 이해하는 김철민과의 유사 부녀 같은 ‘공생’ 관계 때문이다. 이 설정은 정수인이라는 인물이 기생생물이 들어왔어도 다른 길을 가는 존재가 될 거라는 걸 암시하면서, 그런 존재가 됨으로써 조직(사회)에 배척당하면서도 그만의 공존의 길을 찾아갈 거라는 걸 말해준다.  

 

이건 조직에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망나니파 조직원 설강우(구교환)에게도 똑같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 역시 고립된 인물이고 그래서 도망쳐 가족을 찾지만 이미 가족들도 모두 기생생물에 희생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역시 혼자 살아남지만, 정수인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인격을 오가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돕는다. 그는 정수인에게서 기생생물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동생을 본다. 그래서 그 관계는 유사 남매 관계처럼 보인다. 

 

남편이 기생생물에 잠식당한 후, 그레이팀 팀장이 되어 기생생물들에 유난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최준경(이정현)은 죽은 남편을 이용해 기생생물 위치를 파악하고 소탕하는 일을 하는데, 이 관계 또한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는 심지어 기생생물이 잠식한 남편을 고문하면서까지 적들을 찾아내려 하는데, 그 유난한 적개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 대한 애정 또한 그만큼 컸다는 걸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전을 할 때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명랑함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내면의 상처를 애써 숨기거나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 최준경과 남편의 독특한 관계는 기생수의 관점으로 보면 새삼 인간만이 가진 이상한 관계로 다가온다. 

 

따라서 원작을 이미 접한 시청자들이라도 ‘기생수:더 그레이’는 기생과 공생의 관점으로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들여다보는 재미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정수인과 김철민의 유사부녀 관계나 정수인과 설강우의 유사남매 관계는 물론이고, 최준경과 죽은 남편, 김철민과 동료형사인 강원석(김인권), 설강우와 그의 친구인 기석(유용), 설강우와 같은 망나니파의 규민(이요섭) 등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관계를 ‘기생’과 ‘공생’의 관점으로 새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역시 한국적인 해석으로서 사회 시스템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러한 조직 시스템에 대한 서사는 아무래도 시즌2에서 더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동안 지나친 다작으로 연상호 감독의 많은 작품들이 애초 갖고 있던 매력을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랜만에 돌아온 연상호 감독의 색깔을 다시 보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도 워낙 원작의 마니아라서 스스로도 이번 작업을 ‘성덕’이라고 표현했던 데서 느껴지듯이, 오래도록 꿈꿔왔던 일을 드디어 꺼내놓은 데서 생겨난 반가운 귀환이 아닐까 싶다. (사진:넷플릭스)

‘검은 태양’이 보여주는 조직의 비리 청산 그 어려움

검은태양

“그날 네 동료들을 죽인 건... 한지혁 바로 너야!”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에서 영상 속 한지혁(남궁민)은 그렇게 말한다. 국정원 임원들이 긴급 소집되어 있었고, 한지혁과 국정원 국내 파트 1차장 이인환(이경영)이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그 영상 속 한지혁의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1년 전 중국 선양에서 동료들을 죽인 자와 이를 사주했을 국정원 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한지혁은 더더욱 충격에 빠졌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미리 찍어뒀던 영상을 순차적으로 보내 그 진실을 알린다. 바로 이런 장면은 <검은 태양>이라는 서사가 가진 특이한 지점이다. 국정원이 등장하고 중국에서 벌어진 공작들이 초반에 펼쳐져 애초에는 <아이리스> 같은 전형적인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또 항간에는 기억을 찾아가는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밀항선에서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괴물의 형상으로 1년 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한지혁이 등장하는 강렬한 장면은 그래서 다소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기시감조차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과거의 한지혁이 미리 찍어 자신에게 보낸 영상으로부터 차별화된 서사의 변곡점을 찍는다. 한지혁은 국정원 내부의 적폐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들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는 것. 드라마는 스파이 스토리가 아닌 추리극 형태로 바뀌었고, 한지혁이 그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갖가지 비리들이 등장한다. 민간인 사찰, 대선 개입, 갖가지 간첩 조작사건 등등, 이미 우리에게 충격을 줬던 실제 국정원 비리들이 드라마 속 서사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국정원 적폐세력의 몸통으로서 실체를 드러낸 인물은 바로 이인환이다. 그는 국정원 국정원이 선거 개입 등을 위해 민간인을 사찰했던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인물이다. 그는 이 여론을 뒤집고 선거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북풍’을 활용하려 한다. 북한 고위간부인 리동철의 망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이 계획이 틀어지자 사건을 덮기 위해 모두를 제거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이인환은 상무회를 통해 아르고스라는 비밀조직을 움직이고(과거 기업 플래닛이 해왔던 개인 정보 수집 선거 개입 등의 활동을 하는 것) 그것으로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힘(권력)을 가지려 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우린 죽어서도 음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라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이 조직에 있으면서 몇 명의 원장을 모셨는지 아나? 21명이야. 정권이 8번 바뀌는 동안 자그마치 21명의 원장이 손님처럼 여길 다녀갔어. 그리고 그들은 매번 우리 원이 자신들에게 충성하기를 바랐지.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사찰하라고 지시했어. 그리고 사라져버렸지. 그 오명들을 모두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채! 근데 설명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었어. 그저 침묵해야만 했어.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실체를 알게 된 한지혁을 마주하게 된 이인환은 자신이 왜 이런 일들을 벌이게 됐는가에 대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국정원이 그간 정권에 의해 갖가지 비리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용되고, 사건이 터졌을 때도 결국 그 오명은 시킨 자들이 아닌 국정원이 뒤집어썼다는 것. 그렇지만 그걸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도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인환은 결국 이 모든 문제가 ‘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휘둘릴 게 아니라 더 큰 힘을 갖는 독자적인 조직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거기 편승했던 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한지혁의 말처럼 이인환이 하려는 짓은 저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독자적인 조직으로서의 힘을 갖기 위해 그는 여러 동료들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이인환 같은 악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이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검은 세력들(그건 아르고스 같은 사조직이 될 수도 있고 국정원의 힘을 이용해온 정권일 수도 있다)이 어떤 짓들을 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사건들을 수사하고 그 진실을 파헤치며 비리와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야말로 국정원이 본래 해야 될 일들이다. 하지만 명령 체계로 운용되는 조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직의 안위를 위해 같은 동료들에게도 총구를 겨누게 만든다. 한지혁 또한 그런 희생양이 됐던 인물이고, 유제이(김지은)의 아버지라 여겨지는 백모사(유오성)도 스스로 말했듯 한지혁과 비슷한 일들을 겪은 인물이다. 

 

앞서도 말했듯 <검은 태양>이 여타의 스파이액션과 차별화되고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과거의 자신이 무슨 이유에선지 기억까지 지워버린 후 자신을 국정원 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순차적으로 과거에 미리 찍어둔 영상을 현재의 자신에게 보내면서, 마지막 영상을 보기 전 반드시 국정원 내 배신자를 찾아내라고 강변한다. 결국 그 배신자는 이인환으로 드러나지만, 놀랍게도 동료를 죽인 진범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마지막 영상 속 진술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한지혁은 왜 이렇게까지(기억까지 지운 채) 하면서 국정원 내 배후세력을 찾아내려 했던 걸까. 그것은 거꾸로 기억을 모두 가진 채 국정원 내부의 적폐와 대결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조직원으로서 조직의 적폐를 척결하는 일이 ‘기억까지 지울 정도’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스파이물처럼 보였던 <검은 태양>은 그래서 뒤로 갈수록 현실감을 드러낸다. 실제 2016년 국정원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갖가지 사건들이 이 드라마가 탄생한 이유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 매 대선 정국 때마다 북풍에서부터 시작해 댓글 조작 같은 방식으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조직이 있었고 거기에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정권 또한 존재했다는 걸 <검은 태양>은 저격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스스로 적폐 청산을 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탄생하겠다 선언한 그 변곡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검은 태양>처럼 국정원은 그 조직이 쇄신되고 있을까. 다가오는 대선은 어쩌면 이를 가름하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검은 태양>을 본 시청자들이라면 다가오는 대선에서 혹여나 벌어질 지도 모를 어떤 사건들조차 이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사진:MBC)

<미션 임파서블>, 잘 빠진 액션 그 이상의 정서적 공감

 

역시 톰 아저씨다. 이미 쉰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빛나는 외모에 잘 관리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액션. 게다가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는 유머감각까지 보유한 매력남이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에는 일사라는 의문의 여인 역할을 맡은 레베카 퍼거슨의 매력까지 더해졌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미스테리한 매력은 여러 회 반복 제작되면서 어찌 보면 단순해보일 수 있는 액션과 이야기에 새로운 재미를 더해주었다.

 


사진출처 : 영화 '미션 임파서블'

즉 한 마디로 말해 스파이물에 <미션 임파서블> 특유의 역할 액션이 더해진 이번 작품은 오락물로서 충분한 재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이외에도 이 작품에는 정서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저 007 시리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미션 임파서블>만의 고유한 힘인 동료의식에 대한 것이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편은 예고편에서 살짝 드러난 것처럼 에단 헌트(톰 크루즈)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버려지고 심지어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쫓기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불가능한 미션들을 수행해온 IMF는 해산되어 CIA에 복속된다. 그런데 에단 헌트와 함께 일을 해왔던 옛 동료들은 CIA에 들어와서도 그를 암암리에 돕는다.

 

목숨을 걸고 일해 왔지만 조직으로부터 버려지고 이제는 제거대상이 되어버린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 도우려는 옛 동료들과의 끈끈한 관계.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액션 저 뒤편으로 물러나 있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미션 임파서블>이 갖고 있는 독특한 영화적 재미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과거 TV 시리즈로 방영되던 <미션 임파서블>이 국내의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요인도 바로 이것이었다. 007 시리즈는 거의 제임스 본드라는 1인 스파이 영웅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미션 임파서블>은 물론 에단 헌트라는 인물이 중심에 서긴 하지만, 그와 함께 전략 분석요원 브랜트(제레미 레너), IT 전문요원 벤지(사이먼 페그), 해킹 전문요원 루터(빙 라메스) 같은 인물들이 협업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목처럼 혼자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을 여럿이 함께 하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미션으로 만드는 것이 이 작품만의 독특한 재미요소가 된다. 이번 작품에서도 에단과 짝패처럼 활동하는 브랜트나 끝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벤지 그리고 우직한 우정을 보여주는 루터의 역할이 에단만큼 만만찮다. 여기에 이야기의 변수로서 등장하는 일사는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에단과 미션 그 이상의 썸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조직의 이야기와 그 조직에게 버려지지만 그 안의 동료들이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동료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이 스파이 액션 무비를 퇴출된 조직원의 복직을 위한 안간힘처럼 읽혀지게 만든다. 물론 <미션 임파서블>의 핵심은 그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는 액션에 맞춰져 있지만, 우리가 정서적으로 더 이 영화에 공감하는 까닭은 어쩌면 이 퇴출된 조직원의 현실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며 문득 정리해고의 문제를 떠올렸다면 그건 분명 과한 영화 감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조직과 동료들 간의 끈끈한 정서는 분명 이 영화가 다른 어떤 액션보다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임에 분명하다. 실로 퇴출된 직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미션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



<개과천선>의 김명민,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

 

역시 김명민이다. 그가 연기하는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변호사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첫 회부터 일제에 강제 징용당한 어르신들의 반대편에서 서서 일본기업을 변호하는 김석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로펌 변호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 재벌 2세의 강간치상을 변호하면서 피해자 여자 연예인의 치부를 드러내 자살시도까지 하게하고 결국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지독한 악마지만 그에게서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건.

 

'개과천선(사진출처:MBC)'

<개과천선>의 로펌 변호사는 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의 변호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것은 인권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고용 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다. <개과천선>에서 김석주가 다니는 차영우펌은 돈 되는 재벌 그룹들을 주 의뢰인으로 상대하는 로펌이다. 차영우펌의 직원이랄 수 있는 김석주는 따라서 이들 재벌 그룹들의 갖가지 귀찮고 더러운 일들을 처리해주며 살아가야 한다.

 

재벌들이 이러한 로펌에 변호사들을 자신들의 일에 대리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일은 때로는 무고한 샐러리맨들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벌2세들의 여자 문제 같은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치졸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일들은 양심에 불편함을 준다. 따라서 로펌 변호사들이 그 불편함을 대리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김석주라는 변호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결국은 차영우펌이라는 조직에 고용된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욕망이 존재하겠지만 그도 그런 일들을 겪으며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오면 죄책감이 없을 수 없다. 바로 그 죄책감이야말로 그가 돈을 버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의 연기가 주목되는 지점은 김석주라는 인물에서 악마 같은 직업인의 모습과 언뜻 언뜻 숨겨진 인간적인 고충이 적절히 드러난다는 점일 게다. 김석주는 악명 높은 변호사로 극화되어 있지만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네 샐러리맨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직의 생리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직업과 생계라는 이름으로 죄책감이 상쇄된다. 김석주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과거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이라는 끝없는 욕망을 가진 천재외과의사가 과오를 저지르고도 대중들이 그에게 연민을 보낸 까닭 역시 그 인물에게서 샐러리맨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오르기 위해 뭐든 저지르지만 결국은 제 몸 하나 망가뜨리는 결과에 처하는 안타까운 삶.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는 그래서 그 장준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흥미로운 건 이 김석주가 사고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말 그대로 개과천선을 한다는 설정이다. 이건 어쩌면 혹여나 조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가 아닐까. ‘모든 걸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건 그 불편한 삶의 끝단에 서면 누구나 떠올리는 소망일 게다. 이 변신과정에서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저력은 여지없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피도 눈물도 없는 데드마스크가 심지어 바보처럼 실실 웃는 얼굴로 바뀌는 그 과정이 주는 통쾌함이란.

 

<개과천선>은 그래서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의 판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젊은 날의 마음이 생계를 위한 밥벌이와 무한 경쟁 속에서 서서히 희석되어 어느 새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돌아갈래하고 외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 우리는 삶에 희석되어 없는 것처럼 치부하던 일상인들의 불안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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