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몽'의 연장 논란에 대하여

50%대 최고의 시청률을 바라보고 있는 MBC 창사특집드라마, ‘주몽’이 방송연장을 놓고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MBC측은 일찌감치 연장발표를 해놓고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을 설득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발언이 불거져 나왔고 정형수 작가 단독체제로의 결론이 도출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몽 역을 맡은 송일국이 거부의사를 들고 나왔다. 뉴스에 의하면 MBC 부사장이 송일국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번 상황은 MBC측의 성급한 결정과 발표에 먼저 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잘 되는 드라마의 연장방영에 쉽게 동조를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MBC측은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한 셈이다.

연장방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시청자
일방적인 연장방영이 가져오는 폐해는 제작진과 출연진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 그 파장이 크다.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은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의 특성상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계속 강행군을 해야하는 부담이 있다. 실제로 송일국은 쉴 틈 없는 촬영으로 인해 이미 심신이 피폐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이유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 제작진과 출연진들은 이미 세워진 차기 프로젝트의 진행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시청자들에게 보다 밀도 높은 드라마의 완결성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총 제작비 300억 원대에 60회나 되는 이 드라마는 기획하면서 분명 나름대로의 60회 분량의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85회로 늘려진다고 해서 늘어나는 횟수만큼의 새로운 스토리가 추가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51회를 맞고 있는 ‘주몽’이 걸어온 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주몽은 전체적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스토리 진행을 하고있다. 굳이 그 사례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고 최근의 것만 끄집어내도 그 증거는 쉽게 드러난다. 드라마 ‘주몽’은 갑자기 소서노가 보낸 비밀지도로 인해 한 회가 온전히 궁에 들어가 예소야를 만나는 에피소드로 흘러갔다. 소서노가 가진 비밀지도에 대한 아무런 복선이 없었다는 점과 굳이 어머니와 아내를 구하러 들어간 주몽이 그냥 혼자 돌아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앞으로도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정확히 말해준다.

60회에 못한 완성도, 85회라고 가능할까
이러한 질질 끄는 스토리 진행을 볼 때, ‘주몽’의 연장방영은 아무런 명분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명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주몽’의 고구려 건국 상황이, 지금 방영된 51회 같은 내용이 아닌, 본래 60회 분량에서의 51회 내용처럼(물론 그런 것들이 사전에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긴박하고 숨가쁘게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본래의 목적대로의 60회 이야기를 다 끝내고도 더 할 이야기가 남았다는 것으로 연장은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MBC 부사장이 말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한 연장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60회 분량에 완성도를 채워 넣지 못한(혹은 그걸 방조한) 자신들의 잘못을 시청자들에게 전가하는 측면이 강하다.

문제는 이러한 연장방영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그 이외의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현재 51회까지 방영한 상황의 ‘주몽’이 60회에 끝나게 되면 남은 9회 안에 고구려 건국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까지 봐와서 알겠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드라마의 전개상 급격한 결론은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몽’이 처한 딜레마이다. 연장으로 가자니 무리가 따르고 종전대로 끝내자니 전개가 어려워진 것이다.

주몽의 딜레마가 말해주는 것
이 딜레마가 말해주는 건 여러 가지다. 먼저 그간 ‘주몽’이 시청률에 기대어 방만한 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시청률이 30%를 넘어서면서 벌써부터 ‘주몽’은 연장을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을까. 또한 미봉책이나마 연장을 생각해야 드라마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전체적 흐름을 타고 가는 완성도 위주의 드라마가 아닌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를 애초부터 생각했다면 왜 시즌제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시즌제 드라마라는 것이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은 지금에나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에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그나마 매력 있는 캐릭터에 훌륭한 소재, 게다가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능한 이 드라마를 시즌 드라마로 할 수는 없는 걸까. 많은 문제점들을 보강한 ‘주몽 시즌2’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 ‘주몽’이란 좋은 소재가 이런 식으로 묻혀지고 끝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여성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황진이

과거에 흔히 카리스마를 말하면 우리는 남성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KBS 드라마 ‘황진이’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그 어떤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칼만 든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황진이’는 전개상 세 단계의 변신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것은 첫째, 첫사랑과 그 실패를 겪는 황진이, 둘째 그로 인해 세상에 독을 품는 황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독이 세월에 녹아 한 커다란 인간으로 거듭나는 황진이가 그것이다. 지금 두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는 황진이에게서 그 카리스마가 물씬 풍겨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변화의 원인으로 볼 때,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의 원천은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한(限)에 근거한다. 그 한은 자신의 운명과 그런 운명을 만든 세상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다. 은호(장근석 분)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세상과 싸워 백전백패라는 뼈아픈 결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 속에 칼날 하나를 품는다.

그 칼끝은 바로 저 조선 사내들의 위선을 향해 있다. 그녀는 부드럽고 아찔한 웃음을 지으며 이른바 세도가라는 자들의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고는, 거침을 뽑아들고 그네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것이 단지 사내가 아닌 ‘조선 사내’의 이중성을 꼬집는다는 데서 그녀의 칼은 조선 자체를 향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당대로 보면 일개 기녀이다. 천출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조선 전체를 향해 마음 속의 비수를 뽑아드는 그 지점이 그녀의 카리스마가 불을 뿜는 순간이다.

무예만 출중하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저 백무와 매향에서부터 비롯되어 황진이와 부용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황진이와 세상(여기에는 사대부집 양반네들을 비롯해 명나라의 사신까지를 포함한다)의 대결로 연결된다. 그녀는 세상과 겨루기 전 교방에서 그 무기를 키워왔다. 그것은 바로 시와 음악, 춤과 같은 재주(예술)이다. 이 재주를 얻기 위해 그녀는 저 무예를 수련하는 사극 속의 남성 캐릭터만큼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다.

향악을 폐하려는 명나라 사신 앞에 거문고를 들쳐 메고 나타나는 황진이의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는 그 어떤 캐릭터보다 더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거문고 연주가 아니다. 그녀는 ‘마음의 거문고 연주’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그녀는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재주는 헛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상대방을 제압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로운 의상과 신들린 듯한 연주, 날아갈 것 같은 춤사위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무술 동작 몇 개만으로 얻어지는 카리스마란 실상 너무나 관습적이며 장면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게 마련이다. 허나 마음에서 비롯된 이 강렬한 카리스마는 외상을 넘어서 내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갑옷만 입는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여기에 하나 더 황진이의 카리스마의 원천을 덧붙인다면 그 유려한 미장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의 복장들은 과거보다 더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패션쇼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볼거리가 그저 화면을 왔다 갔다 밋밋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황진이’의 화면들은, 그 어떤 화려한 CG 전투장면이나 색색의 갑옷보다도 더 아름답고 다이나믹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우리네 한복이 제대로 빛을 발하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볼거리들을 진정 볼거리로 만들어주는 영상 미학에 있다. 타 사극에서 보여주는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 같은 관습화된 장면들은 극의 긴장감을 그만큼 흐트러뜨리기 일쑤다.

황진이는 사극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끌어들이면서 캐릭터와 극의 긴장감을 되살렸다. 카메라는 밑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래로, 때론 극단적인 클로즈업에서부터 롱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로 변화하며 인물들의 감정선을 잡아낸다. 그 아름다운 장면들 속에 마치 칼처럼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사극이라고 다 같은 사극이 아니다
사극전성시대라고 한다. 흥미를 끌만한 소재와 캐릭터를 갖고 잔재주를 통해 시청률만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사극은 아니다. 진정한 메시지와 함께 동시에 흥미로운 전개, 절제되면서도 강력한 대사들, 영상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한 화면 구성, 연기자들의 혼이 느껴지는 연기, 이 모든 것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훌륭한 사극이 탄생한다. 저 ‘대장금’의 힘은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이다.

극에서 우리가 느끼는 카리스마란 사실 극의 긴장감과 집중도와 다른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대결구도를 갖는다고 해서, 칼을 들고 휘두른다고 해서, 굉장한 무예를 갖고 있다고 해서, 화려한 갑옷을 걸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본연의 힘인 드라마성(갈등구조와 진정성 그리고 실험정신)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주몽’이 ‘황진이’에게 배워야할 점이다.

고구려 사극의 영웅 뒤에 등장하는 그 부모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뒤에는 영웅을 키워낸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희생이 있다. 최근 고구려 사극 트로이카 시대를 열고 있는 고구려 사극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는 ‘부모, 가족 코드’가 시청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고 있다.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이들 부모들은 모두 똑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의 존재감은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이들 사극들은 영웅의 부모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가족들은 모두 해체되어 있다. 주몽과 해모수, 그리고 유화부인이 그랬고, 연개소문과 연태조가 그랬으며, 대조영과 대중상, 그리고 달기가 그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한다. 주몽은 해모수를 만나기까지는 그저 철없는 왕자에 불과했고, 연개소문은 연태조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조영은 달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개동이가 아닌 대조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가족이 이렇게 해체되고 영웅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게 된 것은 출생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 주몽과 함께 등장하는 삼족오와, 연개소문과 대조영의 심상치 않은 탄생에는 모두 국가를 위협하는 대역(大逆)의 기운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 가족이 온전할 리가 없다. 영웅의 탄생에 대역(大逆)이라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시련을 따르게 하고 그 시련을 넘어서는 순간, 대역이 예고한 것처럼 거대한 국가, 혹은 영웅의 탄생을 예감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웅을 다루는 신화나 전설에는 가족의 해체가 그 기본 전제가 되곤 한다.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들 가족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자신의 신분을 영웅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는 순간에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주몽 앞에서 해모수는 자신을 아버지로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죽어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돌궐에서 자식인 연개소문을 만나게 된 연태조는 고구려에 대한 유업만을 남겼을 뿐, 홀연히 떠나버린다. 죽음 앞에서 달기는 자식인 대조영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어미임을 부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는 다시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이다. 드라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해준다. 부모의 자식을 위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이 탄로 나며 헤어지는 과정은, 갈망하던 가족의 인연이 막 생겨나는 그 즈음 다시 끊어버리는 효과를 준다. 그러자 영웅은 자신의 유업을 알게되고 그 의지를 한층 불태울 수 있게 된다.

자식을 위한 죽음 앞에 당당하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영웅의 부모들은 기꺼이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유화부인은 대소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절대로 자신을 구하러 오지 말라고 주몽에게 서찰을 보내며, 달기는 대조영의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은 양상이 조금 다른데 그것은 연태조가 가진 자식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그는 연개소문을 자신의 자식이 아닌 고구려의 자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행보 또한 결국 그 자식을 위한 포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에게 유언처럼 남기는 말은 바로 대업이다. 사사로움보다는 대의를, 혈연보다는 백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식은 드디어 자신의 범주를 넓히게 된다. 한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은 연후에나 영웅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고구려 사극들은 그 영웅의 탄생에 있어서 부모들의 희생이라는 기본 모티브를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의 힘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어떤 부모의 드라마가 가장 강할까
‘주몽’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드라마 초반부 주몽이 갖지 못한 카리스마의 보완 기능이 컸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가 주몽으로 전이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주몽은 강한 카리스마로 부하를 이끄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의견을 묻고 지시하는 쪽에 가깝다. 죽은 해모수를 다시 살리고, 아직까지도 해모수의 잔영이 계속 드라마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것은 주몽의 부모가 주몽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반면 ‘연개소문’의 연태조는 부모라고는 하지만 선인 같은 인상을 갖고 있다. 이것 때문인지 부자 간의 드라마가 그다지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작가의 잘못된 해석이거나, 놓치고 지나간 드라마 요소처럼 보인다. 그 수많은 세월을 이역을 떠돌다 만나게 된 자식에게 그다지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태조가 속세를 벗어난 인물이라는 말은 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가장 적합하게 부모의 코드를 활용하고 있는 건 ‘대조영’인 듯 싶다. 대조영과 달기의 만남과, 눈앞에서 웃으며 죽어 가는 달기와 그걸 보며  흘리는 대조영은 일단 드라마적으로 가장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 사극이 아버지와의 조우를 그린 데 비해 ‘대조영’이 어머니를 택한 데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강력한 힘 앞에 두 영웅들이 무력했던 반면, 어머니의 모정 앞에서 대조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받게된다.

재미있는 것은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을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도 아들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때가 되기까지(이것은 또한 자신 스스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만들 때까지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숨길 것이다. 주몽과 연개소문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있을 때, 대조영은 거꾸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들임을 숨기는 것으로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는 힘을 얻고 있다.

드라마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다르지만 고구려 사극들이 최근 그 힘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혈연, 가족이라는 카드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최근 우리네 드라마들의 화두이기도 하다.

주몽이 처한 딜레마

요즘 시청률로 가장 성공한 TV 컨텐츠는 단연 MBC 월화 사극, ‘주몽’이다. ‘고구려사극 전성시대’라 할 만큼 연이어 경쟁작으로 등장한 ‘연개소문’, ‘대조영’에도 불구하고 시종 43%대에 이르는 독보적인 시청률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시청률은 드라마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잣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률이 높은 것과 드라마적인 성공은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해 ‘주몽’의 시청률이 높은 것으로 드라마 ‘주몽’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거대한 고구려, 영웅, 사랑은 어디 갔나
모든 드라마에는 저마다의 목표 혹은 기획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기획의도는 의도일뿐, 실제적인 목표는 시청률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각종 연예관련 기사들이 만들어낸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그것이 잘 전달되어 호응을 얻을 때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주몽’의 기획의도를 보면 그 키워드는 ‘거대함’이다. ‘거대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제목 아래, ‘오늘보다 거대한 고구려를 만난다’, ‘신화보다 거대한 영웅을 만난다’, ‘역사보다 거대한 사랑을 만난다’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다. 이 소제목들에서 방점은 ‘고구려’와 ‘영웅’그리고 ‘사랑’에 있다. 물론 기획의도라는 것이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방점 찍힌 키워드들은 드라마의 커다란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막 40회를 넘기고 60부까지 20회를 남긴 드라마 ‘주몽’ 그 목표점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고구려의 실종 - 역사를 버리자 고구려도 사라지다
먼저 ‘고구려’라는 역사적 방점은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부터 실종되기 시작했다. 사료가 없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퓨전사극’이라는 타이틀이 모든 걸 덮어주는 마법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기왕에 고구려를 내세웠다면 기본적인 사료는 따라야 마땅하다. 철기의 문제는 드라마의 재미로 치더라도, 당대 한사군이 있던 위치를 한반도 내로 지정하는 등의 문제는 심각한 식민사관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기본적인 사료를 버리고 확고한 사관 또한 없이 역사극을 만들려했다면 그것이 ‘퓨전사극’이라 하더라도 ‘고구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

역사적인 인식의 문제를 떼놓고 보더라도 지금의 ‘주몽’에는 고구려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민족이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을 그리면서 드라마의 3분의 2가 지나간 현 시점까지 주몽이 고작 하고 있는 것은 권력투쟁과 연애이다. 물론 연애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지만 고구려의 탄생을 같은 민족끼리의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보여지게 만든 것은 어딘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국가 탄생의 또 한 축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이라는 대의명분과 유민들을 규합해가는 이야기가 ‘주몽’에는 잘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주몽’은 굳이 ‘고구려’나 ‘주몽’이라는 타이틀을 떼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그러자 거대함은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잔재미들만 잔뜩 이어진다. 잇따른 납치와 탈출, 구출의 연속, 국가 간의 부딪침에 전쟁은 없고 소소한 전투들만 이어지는 것 등은 바로 그런 결과들이다. 심지어는 전쟁에 있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이 등장하는 스케일의 문제가 불거진다. 작가와 연출자는 매회 쫓기듯 찍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풍토로 변명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마치 대충 몇 명의 전투 제스처를 하고 나서는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상상해서 전쟁으로 채워 넣으라는 것만 같다. 현재 같이 진행되고 있는 타 사극들이 사전제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 역시 이 드라마가 애초부터 그 정도의 계획도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다.

영웅의 실종 - 캐릭터들의 구조조정 시작되다
‘주몽’의 힘은 캐릭터 주몽에서 나올까.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부분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점점 성장해간다. 그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차츰 감정이입이 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 자신이 아닌 주변 캐릭터에 의해 주인공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하늘이시여’에서 왕모와 자경이 관심을 받은 것은 자신들 캐릭터의 힘이라기보다는 악역들에 의한 부분이 많다. ‘소문난 칠공주’에서 불쌍한 칠공주들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대책 없는 캐릭터와 합쳐져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의 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몽에 있어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처음 주몽이 캐릭터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해모수’와 ‘유화부인’이라는 굵직한 캐릭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주몽의 성장에 있어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소서노와 연타발’, 그리고 ‘마리, 협보, 오이 삼인방’, 게다가 모팔모, 여미을, 심지어는 금와왕까지 주몽을 돕는다. 이유는? 그가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아들, 주몽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드라마상에서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몽은 그다지 소위 말하는 캐릭터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악역을 맡고 있는 대소, 영포, 도치 일당 등은 드라마의 진짜 재미를 주는 인물들이다. “드라마 제목을 주몽이 아닌 대소로 바꿔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주몽이 실종되었던 2회분 동안 대소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영포와 도치 일당은 ‘주몽’이란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가장 독특한 재미를 가진 캐릭터들이다. 이들 ‘귀여운 악당들’은 사실상 지금까지 드라마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몽의 성장은 바로 이들의 패배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그만큼 어리숙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응까지 받고 있다. 악당들 이외에도 소서노와 연타발이란 캐릭터는 주몽 이상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사실상 드라마 상에서 주몽은 초창기에는 유화부인 품속에서 중반부에는 소서노의 품속에서 노는 아이 정도로 비춰진다).

이렇게 주몽의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물들이 불쑥불쑥 제 자신의 힘을 드러내자 문제가 생긴다. 드라마의 애초 목표, ‘고구려와 주몽의 탄생’이라는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자꾸 그들 캐릭터 사이에서 맴을 돌게 되는 것이다. 마치 초기에 부영의 캐릭터가 전혀 드라마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자 사라져버린 것처럼, 최근 ‘주몽’에는 캐릭터들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금와는 침상에 눕게 되고, 유화부인 역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이상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한 후, 매력을 잃게 되고, 연타발은 비류군장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예상밖에 호응을 얻고 있는 영포와 도치일당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으나 ‘영포의 난’을 실패로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다. 반면 예소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주몽의 힘은 바로 이런 주변인물들에 의해 나온 것이었는데, 그들을 놔두자니 드라마의 진행이 문제가 되고, 그렇다고 없애자니 드라마의 재미가 사라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실종 - 소서노, 울기 시작하다
‘주몽’의 가장 큰 인기의 힘은 바로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오가는 멜로가 한 축을 차지한다. 이것은 타 사극에 비해 ‘주몽’만이 가진 힘이다. 남성적인 전쟁과 전투, 권력다툼의 문제 속에 ‘주몽’은 여성적인 멜로 라인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일등공신은 당연 소서노라는 캐릭터다. 그녀가 힘을 발휘한 이유는 단 하나, ‘강인하고 당찬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저 한 사람에 목이 매어 기다리기만 하는 캐릭터였다면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주몽을 구해내기 위해 산적들에게 스스로 들어가 거래를 할 정도의 강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실종된 주몽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소의 협박에 휘둘리면서 우태와 혼사를 치러버린다. 왜 작가는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것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소서노가 차지하는 비중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가, 뒤늦게 역사적 사료에 충실하고자(사료에서는 소서노가 유부녀로 주몽이 유부남으로 만난다) 했던가, 앞으로 진행될 예소야와의 멜로 경쟁(경쟁이 되려면 힘이 균형이 되야 하는데 소서노가 너무 강하므로)을 만들려던 데서 비롯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되자 소서노는 그 유리같이 냉랭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잃어버리고 울기 시작한다. 소서노의 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반면 예소야는 참신하지 못한 등장으로 처음부터 힘을 얻지 못했다. ‘주몽’에서의 멜로라인은 대개 ‘영웅의 위기 - 위기에서 구해준 여인 - 위기에 처한 여인 - 여인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구조로 등장하는데, 예소야 역시 드라마 초기의 해모수의 등장과 거의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는 소서노와 같은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종사 하듯 주몽을 바라보며 어찌 보면 짐만 되는 캐릭터에서 매력적인 구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서노의 힘도 약화되고 예소야도 힘을 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몽이 살 수 있는 길
최근 ‘주몽’의 흐름은 앞에서 지적한 기획의도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시청률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아무리 주몽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주인공을 2회분이나 드라마에서 뺀 것이라든지, 몇몇 예고편으로 주목을 끌어놓고 실제 보면 별 것 아닌 스토리로 일관한다든지, 심지어는 방영시간을 마음대로 늘린다거나, 상식을 무시한 채 무리한 편성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시청률 편향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만일 ‘주몽’의 목표가 애초부터 시청률에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한 시기에 그것도 국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주몽이라는 소재를 갖고 시청률에만 올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러한 ‘주몽’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시청률에 경도되지 않고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주몽’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몽’은 이제 작가 스스로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몇몇 실패사례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가 되었다. 드라마 비판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드라마 초기에 방점을 찍은 키워드들이 실종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를 비롯하여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여전히 애정과 관심을 보이며 비판을 해주고 있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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