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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 사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할아버지. 뾰족한 연필이 슬퍼요?" 열일곱 살 소녀 은교(김고은)가 칠순이 다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에게 묻는다. 이적요는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필통에서 달각거리던 연필 이야기를 통해 연필이라도 각자의 기억에 따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은교가 "그게 시인가요?"하고 되묻는 것처럼 시란 그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저마다의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에 대한 홍보 마케팅 포인트가 이 영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갖는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치 19금 영화로 치부되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린 여고생을 탐하는 변태적이고 성적인 영화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선이 관객들을 ..
스펙사회에서 생존하려는 청춘들의 몸부림 ‘패션왕’의 강영걸(유아인)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주인공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주인공이라고 하면 주로 선의 입장에 서 있게 마련이고,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어도 여성을 보호해주는 인물이며, 심지어 복수를 할 때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으로서의 정당성(적과는 다른)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영걸은 자신에게 모든 걸 의탁하고 지지하는 가영(신세경)을 사장이라는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재혁(이제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 가영을 그의 회사에 파견근무 보내고 거기서 안나(유리) 대신 디자인을 하게 시키지만, 결국 가영이 한 디자인을 자신..
'패션왕', 가슴 먹먹한 청춘들의 자화상 '패션왕'은 우리네 출구 없는 청춘들의 자화상 같은 드라마다. 비는 마치 그들의 처지처럼 추적추적 내리고 가영(신세경)과 영걸(유아인)은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내쳐진다. 얼굴에 훈장처럼 상처를 달고 그들은 지금 맨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중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조마담(장미희)의 부띠끄에 의탁한 가영을 찾아온 영걸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버스 안. 주머니에 있는 단돈 몇 천원.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 그 막막함.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이라면 이들이 흘리는 그 눈물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을 것이다. '패션왕'의 가영과 영걸이 태생으로부터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 있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드라마를 단순히 계급적 차이에 의한 빈부의 대립이나, ..
청춘과 가장에게 던지는 격려, '페이스메이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달리는 존재. '페이스메이커'는 그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울컥하게 만든다. 30킬로까지 주역(?)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달리고는 정작 남은 12.195킬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늘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영화 '페이스메이커'가 단순한 마라톤 영화가 아닌 점은 그 소재를 다름 아닌 페이스메이커로 잡았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왜 하필 페이스메이커일까. 이 페이소스 짙은 설정은 어린 시절 만호(김명민)가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동생과 둘이 살아가는 만호는 운동회에서 배고파하는 동생을 위해 달린다. 1등이 아닌 2등을 해야 라면 한 박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
'청춘불패', 그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작년 겨울, 조용하던 유치리에 청춘의 빛이 깃들었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아이돌 걸 그룹 소녀들의 강림(?). 하지만 그녀들의 희디흰 손에는 거친 호미와 삽이 들려졌다. 그들은 기꺼이 몸빼바지로 갈아입고 모든 게 도전일 수밖에 없는 시골생활에 뛰어들었다. 그저 시골마을에서 벌이는 한바탕 예능 만들기가 아니라, 그 시골에 실제로 정착해가는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 '청춘불패'의 진짜 가치였다. 조금 덜 웃겨도 그녀들의 진지한 자세와 열심히 놀리던 손과 발은 시청자들에게 진심의 예능으로 다가왔다. 유치리 어르신들에게 그녀들은 손녀딸처럼 진심을 다했고, 그 땅에서 진심어린 땀을 흘렸으며, 주민으로서 마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게 ..
'닥터 챔프', 공정한 기회의 세상을 꿈꾸다 그들이 원한 건 최소한 공정한 기회였다. 성공? 그건 일단 기회가 있는 사람이어야 꿈꿀 수 있는 거니까. 똑같이 6주 휴식을 요하는 부상을 입고도 어떤 이는 선수촌에서 쫓겨나고 어떤 이는 버젓이 훈련을 하는 상황. 의료과실을 보고 눈감아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다른 어떤 병원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된 상황. '닥터 챔프'가 그리는 세상은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돌아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선수촌이든 병원이든, 그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려 하지만 세상은 늘 이들을 쫓아내려고 한다. '닥터 챔프'라는 드라마 속의 갈등은 바로 이 기회조차 공정하지 않은 만만찮은 사회와 그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청춘들 사이의 대결에서 비롯된다. 스..
복잡한 현실 속 명쾌한 건강함을 선사하는 '닥터 챔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것이 의사나 운동선수처럼 그나마 나아보이는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과실을 덮기 위해 그것을 목격한 의사를 오히려 파면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내부고발자라는 멍에를 씌워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못하게 하는 상황. 가까스로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뽑혔지만 잦은 부상에 고인이 된 형의 가족까지 부양해야 되는 상황. 한때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사고로 하지마비 판정을 받아 다리를 절게 되고 의사가 되어 돌아와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주위를 서성대는 상황. 혹자는 절망할 수 있는 이 상황을 버티게 해주는 공간은 다름 아닌 태릉선수촌이다. 연우(김소연)와 지헌(정겨운), 그리고 도욱(엄태웅)은 이 곳에서 만난다. 물론 태릉선수촌 역시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