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의 서유경, 그녀가 사랑받는 이유

'파스타'의 서유경(공효진)이라는 캐릭터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윤은혜) 같은 순정만화 속 신데렐라가 아니다. 물론 쉐프 최현욱(이선균)의 사랑을 받지만,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유경이 엣지 있는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 같은 캐리어 우먼을 대변하는 공격적인 캐릭터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막 3년 간의 주방보조에서 벗어나 프라이팬을 쥔 막내 요리사일 뿐이다.

서유경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신데렐라와 캐리어 우먼 사이에 서 있는 존재다. 이것은 그녀가 주로 보여주는 얼굴 표정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조금 억울한 듯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아주 작은 일, 예를 들면 자신의 라커에 김산(알렉스) 사장이 몰래 붙여놓는 선인장 사진을 발견하거나, 버럭 쉐프의 작은 인정에도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녀는 자기감정에 그만큼 솔직하다. 최현욱에 대한 호감을 그녀는 숨기지 않는다. 쉐프가 기지를 발휘해 전 사장인 설준석(이성민)의 모함으로부터 그녀를 벗어나게 해주었을 때,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최현욱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내가 미쳤나봐"하고 부끄러워한다. 자기감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솔직하고 밝은 면모는 보는 이를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일과 사랑을 다루는 청춘 멜로드라마인 '파스타'가 풋풋한 느낌을 주는 것은 서유경이라는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일에 있어서는 당당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솔직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다고 이 캐릭터가 일에 있어서 프로페셔널이거나, 사랑에 있어서 능수능란한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일과 사랑 둘 다 출발선상에 서 있다. 이처럼 어리숙한 그녀가 도대체 남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서유경이라는 청춘이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다. 그녀는 주방에 들어서면 쉐프의 말에 고개 숙이는 저자세를 보이지만, 그것을 오히려 약으로 받아들인다. 배움과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라 생각하는 것. 그녀는 자신에게 도래할 미래의 성장을 굳게 믿고 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모습은 최현욱이 이태리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거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상대방(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모습은 서유경이 얼마나 큰 자존감을 갖고 있는 여성인가를 말해준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파스타'의 라스페라는 어쩌면 현실 사회의 축소판인지도 모른다. 이제 막 사회로 진입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의 모습을, 주방보조 3년을 지내고 나서야(이것은 꼭 인턴 같은 비정규직을 말하는 것만 같다) 비로소 프라이팬을 쥐는 서유경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그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당당하고 밝고 솔직한 그녀를 보면서 어떤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신데렐라 같은 판타지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세상과 싸우는 여전사의 험난하기만 한 길에서도 벗어난 서유경에게서 행복하고픈 젊은 청춘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청춘과 아날로그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어쩜 저리도 풋풋할까. 나이 들어가면서 정반대로 생겨나는 청춘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기 마련인 욕망일까. 올 한 해 걸 그룹 열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이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세대의 열광은 물론이고, 중장년층의 시선까지 잡아 끈, 걸 그룹들의 약진에는 불황에 지치고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의 복고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청춘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 '청춘불패'는 바로 그 아날로그적 감성이 주는 매력을 걸 그룹의 시골 마을 정착기라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걸 그룹 아이돌들이 유치리라는 시골 마을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담은 '청춘불패'의 엔딩은 인상적이다. 맥 플라이의 'All about you'를 배경음악을 깔고 하루 동안 아이돌들이 해왔던 일들을 포착한 스틸 컷이 정지화면으로 하나하나 보여지며 그 위로 인상적인 자막이 깔린다. 이 짧은 엔딩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아련한 향수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시간을 멈춰 세워둔 그 스틸 컷들은 마치 추억처럼 우리의 기억 언저리에 들어와 그 날 있었던 아이돌들과 유치리 주민들과의 따뜻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다시 끄집어낸다.

이 엔딩이 하루의 추억을 반추하듯이, 이 프로그램은 한 세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젊은 날들을 되짚어가는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아이돌들은 도시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현대인들을 대변하면서도 아련한 젊음의 청춘을 간직한 존재로서 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욕망하는 도시인들을 매료시킨다. 그들과 함께 떠나는 유치리 마을에서의 하루란, 따끈따끈한 온돌 위에 앉아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시절이고, 마당 한 가운데서 연중행사처럼 벌어졌던 김장 담그기에 대한 기억이며, 메주를 정성스레 만들어 장을 준비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걸 그룹 아이돌들은 그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의 안내자들이다. 그들이 유치리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재롱을 피우고, 혼자 살아가는 할머니의 집을 방문해 따뜻한 정을 나누고, 함께 따뜻한 한 끼를 준비하는 그 장면들은, 엄청난 속도감으로 앞으로만 달려온 자들을 뒤돌아보게 만들고 마치 부채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정이 묻어난다. 청춘이라는 아날로그적 시간을 가진 아이돌과, 유치리라는 아날로그의 시간에 멈춰있는 공간의 만남은 이토록 절묘하다.

특별히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보는 이들이 기꺼이 이 풋풋한 아이돌들의 좌충우돌 시골 정착기에 웃어주게 되는 것은 이 깊은 아날로그적 감성에 대한 공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존재였던 아이돌들이 유치리 주민들과 마치 친척처럼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은 이 독특한 예능 프로그램만이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아이돌들의 시골 적응이라는 키워드 속에는 웃음이 묻어나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당위처럼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아이돌과 시골주민들 간의 정이다.

여행자와 정착자의 시선이 다른 것처럼, '청춘불패'는 '1박2일'과도 다르고 '패밀리가 떴다'와도 다르다. 노마드적 감성이 여행 버라이어티가 가진 떠도는 이들의 왁자한 해프닝들을 담아낸다면, 한 곳에 정착해 그간 잊고 지내왔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을 하나씩 연결해가는 '청춘불패'의 감성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리고 그 아날로그의 매력은 그 감성을 연결해주는 청춘들(아이돌들)을 통해 고정된 순간의 스틸 컷처럼 기억 속에 각인된다. 청춘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패하지 않는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청춘불패'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왜 지금 홍길동인가

경제개발을 통한 고도성장 시대 끝에 맞이했던 IMF까지, 숨가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들과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청춘들은 지금 이 다른 시대를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유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4차원 사고방식의 그네들은 혹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나’하는 서자 취급을 받거나, 혹은 적자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하지만 굳건한 현실의 시스템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그 울분의 끝에 자신들만의 활빈당을 만들어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왜 지금 ‘쾌도 홍길동’이냐는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그들의 처지
‘쾌도 홍길동’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아픔을 속으로 숨기면서 겉으론 과장된 명랑함을 보여준다. 주색잡기에 저자거리에서도 악명 높은 날건달인 홍길동(강지환)은 늘 잘난 척을 해대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이 이내 드러난다. 그 아픔은 적서차별에서 비롯된다.

반면 창휘(장근석)는 왕위에 오를 적자였지만 서자인 형 광휘(조희봉)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궁 밖에서 복수의 나날을 보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오를 자리에 광휘가 앉아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홍길동은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왕위에 오르려는 이유가 그저 적자이기 때문이냐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적자와 서자이지만 밀려나 있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한편 허이녹(성유리)은 본래 병조판서의 외동딸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허노인에게서 자라나 저자거리에서 약을 팔며 떠도는 신세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밝고 명랑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은혜(김리나)는 조선 최고의 권세가의 딸로서 모든 걸 가졌지만 자신은 정작 새장 속에 갇혀 지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갖지 못한 저자거리의 자유를 꿈꾼다. 두 사람은 모든 걸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지만 둘 다 자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하나
이들의 아픔은 따라서 그저 고전 ‘홍길동’이 보여주는 적서차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의해 구획되는 인생에 관한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면 서자로서 살아가야만 하고, 적자로 태어나면 그 이유로 왕이 되어야 하며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그 신분에 걸 맞는 부자유스러운 체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일탈을 꿈꾼다.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 청춘들이 겪는 적자의식 혹은 서자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 그 이유 때문에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서자의식은 물론이고, 그 반대의 경우 즉 좋은 간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사회 속에 안착한 청춘들 역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부조리한 삶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그 사람의 외부적 조건으로 가치판단 되는 사회 속에서는 무수한 홍길동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청춘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들의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다. 역사적 시공간이 불분명한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세계는 도둑들의 세계이다.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자들이다. 홍길동은 적서차별 아래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인물이고, 창휘는 형에 의해 왕위를 도둑맞은 인물이다. 그들은 도둑맞은 것을 되찾기 위해 사회와 맞선다. 이것이 홍길동이 도둑을 터는 도둑이 되는 이유이고, 창휘가 찬탈 당한 왕위를 되찾으려 모반을 계획하는 이유이다.

도둑을 도둑질하는 사회, 그들이 잃은 것
재미있는 것은 ‘쾌도 홍길동’이 그리고 있는 상반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홍길동의 아버지 이판(길용우)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길동의 물음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은혜의 아버지인 서윤섭은 스스로를 권력의 핵심이라 일컫는 부패한 관료로 대변된다. ‘쾌도 홍길동’에서의 아버지는 거부해야하고 맞서야 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반면 어머니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에 도둑맞은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변되는데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그 어머니를 잃고 거리로 내팽개쳐진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데, 홍길동의 의붓어머니인 김씨부인(이덕희)이 그렇고, 창휘를 어린 시절부터 도와온 노상궁(최란)이 그렇다. 그들은 그러나 모두 홍길동과 창휘를 모성으로 대하지 않는다. 김씨부인은 자신의 아들 인형(김재승)을 위해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 사지로 밀어 넣는 인물이며, 노상궁은 창휘를 위해 어떤 짓이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비뚤어진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결핍된 두 인물 사이에 서는 허이녹이란 존재는 바로 이들이 찾는 모성을 대변한다. 홍길동과 창휘가 그녀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한없는 순수의 세계다. 저자거리의 아픈 아이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모두 품어주는 모성의 존재다. 따라서 ‘쾌도 홍길동’이 그리는 세계는 바로 이 모성이 사라진 세상, 그리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권력 혹은 현실에 눈먼 도둑들의 세상에 남겨진 청춘들의 사모곡이다. 그것은 청춘들의 사랑으로 그려지지만 그 사랑이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사모곡에 가깝게 읽혀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부성과 긍정적인 모성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놓았던 수직적 권력 시스템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작금의 수평적 시스템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홍길동’은 ‘쾌도 홍길동’으로 재해석되면서 그 안에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진 이 시대 청춘들의 방황과 사랑을 포착해낸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몇 년째 취업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청춘들,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떠한 기회조차 박탈해 가는 사회 속에서 고개 숙인 청춘들,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조건이 저 부조리한 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까지 이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굳건한 시스템과 맞서야 하는 우리네 청춘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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