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zeze’ 불편하지만, 출판사의 과잉도 불편하다

 

아이유의 노래 ‘zeze’의 가사에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 ‘교활’이라는 표현도 있고 ‘더러워’라는 다소 거친 해석도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었던 독자로서 이 가사가 등장인물인 아이 제제에 대한 아이유의 직접적인 ‘평가’이자 ‘해석’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불거진 이 논란에서 많은 대중들이 그토록 날선 비판을 하는 것일 게다.

 


'아이유 앨범(사진출처:로엔트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측인 ‘동녘’이 직접 나서서 페이스북을 통해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라며 올린 글이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다. 동녘측이 제기한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는 논리에는 비약이 들어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든 인터뷰 내용에 대한 과잉 해석이 그렇다.

 

“zeze는 소설 속 라임오렌지나무인 밍기뉴의 관점에서 만들었고 제제는 순수하면서 어떤 부분에선 잔인하다. 캐릭터만 봤을 때 모순점을 많이 가진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있고 섹시하다고 느꼈다.” 아이유의 이 인터뷰에서 ‘동녘’측이 주목하는 건 ‘섹시하다’라는 단어 하나인 듯하다. 그런데 ‘섹시하다’라는 표현이 반드시 성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섹시하다는 표현은 ‘멋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이유는 인터뷰 내용에도 들어있지만 제제라는 아이 자체가 섹시하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모순점을 많이 가졌다는 점, 그런 특성이 섹시하다고 말한 것. 이 모순점에 대한 매료는 이번 아이유의 음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스물셋’이란 곡에서도 아이유는 다분히 상반된 이미지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뭐냐고 대중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자신이 한 이미지로 해석되기보다는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로서 모순점 자체도 그대로 내보이는 것. 아이유는 지금 스물 셋의 나이에 이런 점에 매료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동녘’의 아이유의 곡 ‘zeze’에 대한 해석은 그래서 일단 이 인터뷰 내용을 ‘섹시하다’라는 하나의 글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린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동녘’은 가사를 문제 삼는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 잎을 가져가.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앞부분에 ‘섹시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리자 가사들도 그런 뉘앙스로 읽히게 된다. 상징적인 표현들은 다양한 해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그것이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녘이 오히려 한 가지 관점으로만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에 아이유의 곡 ‘zeze’는 다른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곡이 되어버렸다.

 

아이유의 곡에 나오는 ‘제제’라는 인물은 물론 그 모티브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나온 것이지만 반드시 그 인물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모티브란 말 그대로 모티브일 뿐 거기에 대한 해석은 확장되기 마련이고 다분히 가사를 쓰는 이의 개입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유의 ‘zeze’에 들어있는 제제는 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 그대로라기보다는 그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유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순진하지만 교활하고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럽다는 건 제제를 지칭하기보다는 그 제제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즉 아이유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동녘은 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 출판사는 아이유의 곡 ‘zeze’를 ‘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은 곡으로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동녘의 이런 지나치게 친절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타인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단정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 다시 말하지만 아이유의 곡 ‘zeze’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노래다. 거기에는 당연히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은 대중들이 느끼는 불편함에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녘의 이런 단정들과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간 작품이 반드시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혀야 한다는 식의 관점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정교과서에 대해 그토록 거센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는 건 그것이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팩트를 말하지만 팩트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승자들에게 팩트일 수 있는 것이 패자들에게는 팩트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팩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점이다. 소수라도 그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물론 취향에는 맞지 않을 수 있어도 아이유의 곡 ‘zeze’는 나름의 자신의 관점을 투영시킨 자신만의 해석을 담고 있다. 그녀 역시 노래를 내놓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대중들의 것이 된다. 그러니 대중들이 그 노래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자유다. 이것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마찬가지다. 출판사가 나서서 타인의 작품을 맘대로 해석하고 단정하고 자신들의 작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여겨지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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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의 혁오와 <마리텔>의 김영만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에서 정형돈은 함께 파트너가 된 밴드 혁오를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밴드 혁오를 만나러 간 정형돈은 왜 방송에서 말을 잘 하지 못했냐며 편안하게 하라고 그들의 등을 두드린다. 하지만 정형돈은 밴드 혁오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소통하기 힘들다는 걸 발견한다. “도대체 너희들 정체가 뭐냐”고 묻자 “혁오요”라는 당연하고 단순하지만 엉뚱한 답변이 돌아온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가요제 특집의 첫 방송에서 유재석은 혁오의 보컬 오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10여 년 인터뷰 중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고, 박명수는 왜 말을 안 하냐며 게스트에게 버럭 호통을 치기도 했다. 밴드 혁오는 그러나 진심으로 어색해했다. 예능 아니 TV와는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바로 그런 어색하고 어눌한 혁오의 답변은 그들에 답답해하고 힘겨워하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리액션과 함께 오히려 주목받았다.

 

그리고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방송으로 보면 가장 적응을 못하는 인물들처럼 보이는 밴드 혁오가 이번 <무한도전> 가요제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들은 단 한 번 출연으로 자신들의 노래를 차트에 역주행시켰다. 그들의 노래 ‘와리가리’와 ‘위잉위잉’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음악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음원차트 10위권에 랭크되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역시 <무한도전>의 힘이다. 혁오의 노래는 결코 쉽지 않다. 아니 그간 귀를 즉각적으로 사로잡는 후크가 있는 노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단 듣다보면 묘한 중독성이 있다. 음악적인 완성도가 느껴진다. 그들의 음악은 충분히 매력이 있지만 그러려면 일단 여러 번 들어봐야 한다. <무한도전>은 그 마중물 역할을 해줬을 뿐이다. 혁오의 노래는 본래 매력적이지만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그 매력을 느끼기 쉽지 않다. <무한도전>의 정형돈과 유재석 그리고 박명수를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그들의 매력이 드러났던 것처럼.

 

혁오의 음악 스타일은 지금의 2,30대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상당부분 닮아있다. 음악은 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련되어 있지만 그 노래의 감성은 밖으로 감정을 터트리거나 폭발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용히 읊조리면서 조곤조곤 자신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가사도 어딘가 우울하고 소외되었지만 거기에 담담함을 드러내는 그런 이야기들이 주로 실려 있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감정과 태도들을 그대로 담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좌절시키는 세상에 대한 능동적인 포기와 대신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쌓아놓은 일종의 안전 막 같은 그들만의 세계가 거기서는 느껴진다. 혁오는 지금의 청춘들, ‘그들이 사는 세상’을 표징하는 듯한 모습이다.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이 혁오를 보여주던 그 날 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이 출연했다. 김영만은 방송에 나오자마자 “그 때는 코딱지 만했던 아이들”이 “많이 컸다”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을 순식간에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MBC <뽀뽀뽀>와 KBS <TV유치원 하나 둘 셋>을 보고 자랐던 청춘들이라면 그가 말하는 그 때는 종이접기를 따라하는 게 어려웠어도 “이제는 커서 잘할 거예요”라는 말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김영만은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당대의 종이접기를 따라했던 코딱지 만했던 그들을 열광시켰다. 댓글 창은 온전히 그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김영만은 역시 단 한 번의 프로그램 출연으로 인간계 1위를 기록했고, 이미 지상파 본방이 되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엄청난 화제를 만들었다.

 

김영만의 말처럼 ‘이제는 커서 잘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어쩌면 현실은 냉혹했었는지도 모른다. 혁오가 그렇듯이 충분히 기량과 실력을 갖춘 그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나. 삼포니 사포니 오포니 하며 세상은 그들에게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그들에게 김영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위로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종이접기 세대와 부침을 함께 했던 김영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초등학교만 가도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시대에 종이접기는 지난 세대의 향수로 점점 기억되어간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와 흥분된 목소리로 과거 그와 함께 했던 세대들을 만나는 김영만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그의 눈물은 단지 인간계 1위를 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했던 세대들을 다시 만나 소통한다는 그 사실이 그를 먹먹하게 했을 것이다.

 

<무한도전>의 혁오 세대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김영만에 열광하는 세대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그들은 저마다 실력을 갖춘 어른이 되었지만 어딘가 현실에 좌절된 상처들과 아픔이 느껴진다. 그 현실에 치여 자신들만의 문화를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읊조리고, 때로는 저 아잇적 시절의 문화 속으로 푹 빠져든다.

 

무엇이 이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하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윗세대들이 잘못 만들어낸 현실 속에서 어떤 기회조차 쉬 주어지지 않았던 탓이 크다. 혁오와 김영만에 대한 열광은 그래서 마음 한 편으로는 흐뭇하고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먹먹한 아픔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무한도전>이나 <마이 리틀 텔레비전>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그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주었다는 점일 게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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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은 작가의 캐릭터 운용, 놀라운 까닭

 

김수현의 최대 장점은 무엇일까. 어린 나이지만 하는 행동은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외모와 목소리에서 나온다. 그는 아직 고등학생을 연기해도 될 만큼 동안이지만 목소리는 꽤 신뢰를 주는 굵직한 톤을 갖고 있다. 그러니 연상녀들에게는 이만한 매력이 없다. 어딘지 듬직한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극강 동안의 연하란 연상녀들에게는 다 갖춘 존재로서 다가온다.

 

'프로듀사(사진출처:KBS)'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은 그래서 김수현에게 맞춤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김수현이라는 연기자를 위해 도민준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늙지 않는 존재로 연하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연상들도 기댈 수 있을 만큼의 경험치와 지적 능력을 모두 갖춘 도민준은 김수현이라는 인물을 판타지적으로 재해석한 것만 같았다.

 

<프로듀사>로 다시 돌아온 김수현의 그런 매력을 박지은 작가가 몰랐을까. 캐릭터는 어리버리 신입 예능 PD지만 이 백승찬 PD에게서는 도민준이 주었던 그 판타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바보스럽게 보이지만 그건 순수한 것이고, 때론 고집스럽게 보이지만 그건 자기주관이 뚜렷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런 모습들은 의외로 여성들에게 신뢰감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직장에서 신입 PD가 선배 PD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건 자칫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자연스럽게 넘어간 데는 박지은 작가의 치밀한 사전 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은 작가가 백승찬의 대학선배인 혜주라는 인물을 굳이 세운 건 그래서다. 백승찬은 자신이 방송사 예능국에 들어온 이유로 첫사랑 혜주를 얘기하지만, 그녀는 초반에 휴직계를 내고 회사를 떠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혜주라는 인물을 굳이 넣은 것이 자연스럽게 또 다른 연상인 탁예진 PD(공효진)로 넘어가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백승찬 PD는 연달아 연상 취향임을 드러냈던 것. 김수현이 연상들의 마음을 녹이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만큼 적절한 포진이 있을까.

 

이러한 백승찬의 연상 취향은 고스란히 아이돌 신디(아이유)에 대한 무심함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백승찬은 신디에게 직접적인 일로서의 마음 그 이상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디는 바로 이러한 백승찬의 무심함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인물이다. 즉 백승찬이라는 캐릭터 하나를 제대로 세워놓음으로써 탁예진과 신디 사이의 러브 라인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청자들이 김수현에게 바라는 모습이기도 하다. 만일 백승찬이 탁예진이 아니라 신디쪽에 마음을 주는 모습을 보였다는 어땠을까. 지상파 드라마들의 주 시청층의 마음을 상당 부분 끌어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있는 지상파 시청층들이 빙의되는 캐릭터는 신디보다는 탁예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10.1%부터 시작해 지난 회 갑자기 13.5%로 껑충 시청률이 뛴 건 우연이 아니다. 치밀하게 포석되어 있는 김수현의 활용법이 드라마를 통해 조금씩 힘을 발휘하면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 이것은 역시 로맨틱 코미디에 있어서 박지은 작가가 발군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녀의 캐릭터 운용을 자세히 보다보면 그래서 놀라움을 느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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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짜장면 한 그릇에도 담기는 은유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른 뉘앙스로 읽힌다. ‘먹는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욕망의 다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SBS 월화 드라마의 <펀치>의 ‘먹는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 드라마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그 먹는 행위에 남다른 은유가 담긴다.

 

'펀치(사진출처:SBS)'

검찰총장이 된 이태준(조재현)과 그를 검찰총장 만들었으나 그에게 배신당한 박정환(김래원) 검사가 함께 먹는 짜장면은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상징한다. 처음에는 같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상징하던 짜장면이지만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서로 다른 중국집의 짜장면이 맛있다고 의견이 갈린다. 그렇게 영원히 틀어질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을 공동의 적으로 세우며 연합할 때는 또 같이 앉아 짜장면을 먹는다.

 

음식은 하나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걸 같이 먹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이태준 총장과 윤지숙 장관의 입맛이 다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다른 욕망으로 엇나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식당은 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홍어를 좋아하는 이태준 총장이 윤지숙 장관에게 홍어를 한 점 얹어 먹으라고 권하는 장면은 이태준 총장이 권력의 우위를 잡게 된 상황을 말해주고, 반대로 윤지숙 장관이 스파게티집으로 이태준 총장을 부르는 장면은 반대의 상황을 말해준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이처럼 <펀치>에서는 권력 관계의 은유로서 사용된다. 윤지숙 장관과 이태준 총장이 서로의 비리를 하나씩 잡고 공동운명체가 되는 순간, 이태준 총장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야되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떤다. 윤지숙 장관이 까만 커피에 프림을 넣는 장면을 은유해 깨끗한 검찰을 만들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박정환 검사가 커피에 검은 설탕과 하얀 설탕을 넣으며 (윤지숙 장관이나 이태준 총장이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또 이태준 총장의 형 이태섭(이기영)이 자살 직전에 동생과 칡뿌리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그 칡뿌리는 이태준 총장의 책상에 간직되어 두 사람의 형제애를 표징하는 도구가 된다.

 

왜 <펀치>의 박경수 작가는 이처럼 음식에 대한 은유를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단 자칫 이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드라마의 권력 관계들을 가장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연합하고 또 누구와 대립하는 정치적인 관계의 변화는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는 장면만으로도 그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효과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건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박경수 작가 특유의 사유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 끼 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꽤 많은 목적들이 담기기 마련이다. 욕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니 그 ‘밥 한 끼’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목적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펀치>의 인물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맛있다’기 보다는 ‘탐욕스럽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다.

 

최근 나영석 PD의 <삼시세끼>가 화제다. 도시를 떠나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그 행위에 대중들은 뜻밖의 열광을 보낸다. 차승원과 유해진이 만재도의 한 집에서 챙겨먹는 밥 한 끼에는 아무런 목적성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밥 한 끼에는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다. <펀치>의 삼시세끼와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 먹는다는 행위가 삶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고 어떤 욕망과 목적성을 내포할 때 그 밥 한 끼는 우리네 삶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할 것이다. <펀치>의 목적화된 음식들은 그래서 그 관계의 피폐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좋은 사람과 만나 진심이 담긴 밥 한 끼 챙겨먹는 일. 어쩌면 진정한 삶과 관계의 회복은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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