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팅스타

“좀더 내가 반응이 빨랐다면 맞고 굴절되는 것보다 맞고 나가지 않았을까...”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예능 ‘슈팅스타’에서 펼쳐진 평창유나이티드FC와의 경기에서 첫 골을 먹은 상황에 대해 슈팅스타의 수비수 김근환은 그렇게 말했다. 상대팀에서 한 슛을 막으려고 발을 뻗었는데 아쉽게도 완전히 막지 못하고 살짝 빗맞는 바람에 공이 굴절되어 오히려 골을 먹은 상황이었다. 김근환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근환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이 상황은 계속 슈팅스타의 악재를 만들었다. 결국 김근환의 빌드업 실책에서 비롯되어 두 번째 골까지 곧바로 먹게 되면서 슈팅스타의 선수들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서로가 서로를 질책하고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결국 전반전은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 1:2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다시 “서로 서로 좋은 말”을 하고 남탓을 하기보다는 “내가 좀더 뛰자”며 마음을 다잡은 슈팅스타는 후반전에서 괜찮은 팀워크를 보여주며 2: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슈팅스타’ 3회에서 슈팅스타가 평창유나이티드FC와 보여준 경기는 이 스포츠 예능이 기존 스포츠 중계와는 얼마나 다른가를 드러내준다. 사실 축구 중계를 보다보면 시작할 때 잘 뛰던 선수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리저리 휘둘리다 골을 먹는 상황들을 종종 접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중계가 왜 그런 상황들이 발생했는가를 정확하게 다 보여주진 못한다. ‘슈팅스타’는 그 이유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알게 해준다. 이게 가능해진 건 선수들이 경기복에 착용하고 있는 소형 카메라와 마이크 덕분이다. 이 카메라와 마이크로 인해 ‘슈팅스타’의 경기 중계는 훨씬 박진감이 넘치고 나아가 이들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그래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고 경기를 봤다면 수비에서 실수를 계속 한 김근환을 그저 비판하는 정도로 끝났을 게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보니 왜 그가 그런 실수와 위축된 모습을 보여줬는지가 이해된다. 그리고 그에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다독이며 다시 뛰게 만든 김영광 골키퍼의 리더십 또한 돋보인다.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보게 되는 것. 결국 축구라는 경기 자체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슈팅스타’를 연출한 조효진 PD는 이러한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경기복에 착용하는 소형 카메라를 자체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더 작고 가볍게 만들어 부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효진 PD는 레이싱 드론을 경기 촬영에 투입시켰다. 공이 날아가는 모습을 드론이 따라가며 찍는 마치 영화 같은 장면들이 가능해졌다. 이건 물론 예능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들이지만, 이런 방식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동원된 중계방송을 보다보면 왜 스포츠중계가 이런 시도들을 하지 않는지가 의아해진다. 

 

사실 모든 이들이 축구경기를 직관할 수는 없다. 결국은 카메라에 의해 매개된 경기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어떻게 찍어내느냐에 따라 경기의 박진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저 평면적으로 공이 왔다 갔다 하는 축구중계가 밋밋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의 시도는 아니어도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같은 축구 중계가 우리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역시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이 달라서다. 우리도 이런 스포츠중계에서의 도전적인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 ‘무한도전’이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을 때, 김태호 PD를 만나 이 혁신적인 레전드 예능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김 PD는 예상 외로 카메라와 마이크의 숫자를 출연자에 맞춰 늘린 것이 그 혁신의 시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많은 영상과 음성이 정보로 확보되자 더 다양한 스토리와 캐릭터가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슈팅스타’는 은퇴한 레전드 선수들이 모인 팀으로 K리그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세미 프로리그인 K3, K4의 팀들과 경기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이어서 시도하고 있는 스포츠 중계의 색다른 방식이 눈에 띤다. K리그의 중흥을 위해 스포츠 중계 역시 이런 방식들을 고려해보면 어떨까. 축알못(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K리그에 빠뜨릴 수 있지 않을까. ‘슈팅스타’처럼. (글:일간스포츠, 사진:쿠팡플레이)

‘파친코2’로 돌아온 김민하, 더 단단해졌다

파친코2

“너는 정말 강한 사람인 것 같아.”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에서 젊은 선자 역할을 연기하는 김민하는 무려 4개월 동안 8차례에 걸쳐 이뤄진 오디션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내성적인 성격이고 어려서는 누가 말을 걸어도 땀이 날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고 한다. 이건 무얼 말해주는 걸까. 자신이 가진 진가는 어느 순간 누군가 혹은 어떤 계기에 의해 드디어 꺼내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김민하는 그런 점에서 보면 ‘파친코’의 선자라는 인물을 통해 그 숨겨져 왔던 매력이 드디어 꺼내진 배우가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영도 어시장에서 어린 선자(유나)는 일본 경찰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는 당찬 아이다. 그 아이는 성장해 사업가인 한수(이민호)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까지 갖게 되지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그에게는 이미 일본에 아내가 있다는 것. 결국 홀로 아이를 낳은 선자(김민하)는 마침 다 죽어가는 몸으로 선자네 하숙집을 찾아왔다가 겨우 살아난 이삭(노상현)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와 부부가 된다. 갖은 일본인들의 핍박과 차별 속에서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는 오사카에서의 삶. 노동자들을 돕다가 이삭은 감옥에 끌려가고 결국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선자는 길거리로 나가 김치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선자는 끝없이 무너지고 내팽개쳐지는 삶의 바닥에서도 끝내 다시 일어나 그 삶을 버텨내는 인물이다. 

 

아마도 ‘파친코’의 원작 소설을 쓴 이민진 작가는 바로 이런 끈질긴 생명력이 한인들의 정체성이라고 본 것 같다. ‘역사는 우리를 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인상적인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선자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녹아있다. 낯선 타지에서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무너질 것 같은 그 삶 속에서도 끝까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선자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래서 ‘선자’라는 이름은 당대의 조선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김민하는 오디션에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마치 제 안에 숨겨져 있던 선자를 찾아낸 양 강렬한 눈빛과 앙다문 입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 위대한 인물을 표현해낸다. ‘파친코2’에서도 밤이면 굶주린 아이들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를 듣는 엄마들이 못할 게 뭐가 있냐며 위험한 밀거래에도 나서는 강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되어 함께 부부의 연을 맺고 한수의 아이까지 자신의 아들로 보듬는 이삭에 대한 무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의리를 잊지 않는다. 늘 선자와 아들에 대한 동태를 살피고 있던 한수가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 놓인 선자를 꺼내주고, 이제 곧 대규모 공습이 있을 거라며 떠나라고 하자 선자가 단호히 선을 긋는 모습에서는 서릿발이 느껴진다. “옥살이 중인 남편 두고 내 어디 못갑니더. 그 사람 두고 내 어디 안갑니더. 못가예.” 여기서 선자는 똑바로 한수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그것이 마치 돌맹이 같은 단단한 의지를 느끼게 만든다. 이 장면은 김민하라는 배우가 얼마나 깊이 선자라는 인물 속에 들어가 그 자체가 되어 있는가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끝까지 남편 없이는 떠나지 않는다는 선자의 단호함에 결국 한수는 힘을 써 오래도록 감옥살이를 해온 이삭을 빼내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이삭이 그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선자와 마주하는 장면은 ‘파친코’의 두고두고 남을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점점 힘이 빠져가지만 살고 싶어하고 또 그 와중에도 아이들 걱정을 하는 남편을 선자는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 늘 헌신적으로 아내와 아이 그리고 남들을 위해 살았던 남편이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자 또 그 선자 특유의 단호한 표정과 말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뭘 용서합니까. 안 계신 몇 년 동안 내한테 와가 당신이 자기들한테 잘해줬다고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예.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더. 14년 전에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예. 시상은 변했어도 당신은 안변한 거라예.” 그러면서 이삭에 대한 사랑 또한 드러낸다. “내는 내 남편한테 사랑받고 존중받았으예. 전부 다 받은 거라예.”

 

사실 선자 역할에서 드러나는 김민하의 이런 강렬한 인상은 ‘파친코’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물론 영화 ‘킬러스웰:아워 스페이스’의 유진이나 ‘봄이 가도’의 현정 같은 인물 모두 이처럼 단단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들이지만, ‘파친코’의 선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김민하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났다고나 할까. 이건 배우들이 어떤 캐릭터를 만나느냐에 따라 본인도 잘 몰랐던 가능성의 영역이 열린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친코2’에서는 이제 이삭을 떠나보낸 선자와 그의 앞에 나타난 한수가 보여주는 애증의 관계가 이어질 전망이다. 즉 선자와 한수는 두 사람의 아들인 노아(김강훈)가 그 중간 매개가 되는 셈이다. 무기 사업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인 한수는 노아에게는 일종의 ‘출생의 비밀(?)’이 되는 것이지만, 선자는 여기에도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선자는 일제로 대변되는 차별과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또 한수로 대변되는 자본의 힘 앞에서도 굳건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 지점은 ‘파친코’라는 작품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즉 권력과 자본의 힘이 마치 시대의 가치인 양 이야기되는 현재에, 이를 거부하는 선자라는 인물의 강렬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가치라는 걸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하가 배우로서 보여준 가치 역시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내면에 깃든 단단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었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이 배우는 선자라는 기회를 통해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매력을 꺼내놨다.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뿐인 내면의 단단함은 그 어떤 외적 잣대로도 깨질 수 없는 거라는 걸 김민하는 그 연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글:국방일보, 사진:애플TV+)

‘연인’, 존버 시대 안은진이라는 독보적 캐릭터의 탄생

연인

“내가 살고 싶다는데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야? 종종아 일전에 강화도 때 다 뛰어내리는데도 우린 살았어. 난 살아서 좋았어.”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기다 벼랑 끝에 몰린 조선인 여성들은 그 곳에서 치마로 얼굴을 감싼 채 뛰어내린다.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죄를 짓는 거라며. 그러자 길채(안은진)는 그렇게 말한다. 살고 싶은데 부모님은 상관없다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사극이다. 병자호란이라는 극단적인 전쟁 상황을 가져와 그 곳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민초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담았다. 파트1이 병자호란 상황 속에서의 살아남기라면, 파트2는 전쟁은 끝났지만 그 배경을 중국 심양으로 옮겨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살아남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길채는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때론 철부지처럼 살아오던 이 인물은 위기 속에서 변화한다. 병자호란 속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종종이(박정연)와 방두네(권소현)를 이끌고 심지어 그 사지에서 아이까지 받아내며 끝내 버텨 살아남는다. 전쟁이 끝나고 사랑하는 연인 이장현(남궁민)과 엇갈려 구원무(지승현)와 혼례를 치르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도망노예라는 누명을 쓰고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다. 

 

돈에 팔리고 노리개처럼 핍박받는 노예의 처지가 된 조선인들은 도망치다 발뒤축을 잘리거나 상전의 질투로 손목이 잘리거나 심지어 뜨거운 물을 부어 화상을 입는 참혹한 처지가 된다. 하지만 특히 여성들이 더 절망하게 되는 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주홍글씨 같은 꼬리표다. 길채를 구하러 나선 남편 구원무 역시 그렇게 끌려갔다면 ‘볼 짱 다 본 몸’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린다. 

 

실제로 이렇게 노예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은 살아 돌아왔어도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된다. 역시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장현에게 구출된 양천(최무성)은 그 자신 또한 노예의 처지를 잘 알면서도 다른 조선인 여성이 아이의 젖을 주려 하자 ‘원수에게 물린 젖’을 물릴 수 없다며 밀쳐낸다.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은 다 같이 참혹한 상황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은 차별받고 핍박받는다. 

 

그래서 조선인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벌어지는 그 지옥 같은 현실 속이지만, 길채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살아남자’고 손을 내민다. 절개니 부모님이 하는 그런 유교적 사고관 따위는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밀쳐낸다. 죽으려 하는 종종이에게 내미는 손이, 자신이 끝까지 지켜주겠다 하는 그 말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연인>은 이른바 ‘존버’ 시대의 가치관이 투영된 사극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대단한 꿈이나 이상보다 일단 ‘살아남기’가 더 중요해졌다. 쉽지 않은 취업현실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은 결코 수동적인 선택이 아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져온 <연인>은 그 시대 그 어떤 손가락질에도 끝내 살아남았던 길채 같은 인물을 통해 지금의 ‘존버’하는 청춘들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중이다. 

 

이것은 길채를 잊지 못하고 심양에서도 줄곧 그리움의 나날을 보내는 이장현이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 곳에 끌려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치욕이라고 말하는 소현세자(김무준)에게 이장현은 이렇게 말한다. “소인은 포로시장의 조선 포로들인 치욕을 참고 있다 생각지 않습니다. 저들은 살기를 선택한 자들이옵니다. 배고픔과 매질, 추위를 이겨내며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삶을 소망하고 있나이다. 하루를 더 살아낸다면 그 하루만큼 싸우면서 승리한 당당한 전사들이 되는 것이옵니다.”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인가. 이장현의 말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보여주는 길채라는 인물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노예 시장에 끌려 나와 몸값 흥정을 당하는 처지 속에서도 끝내 생존하겠다는 의지만은 꺾지 않는 이 인물 앞에 이장현이 드디어 나타나 “도대체 왜?”라고 분노와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피투성이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 건네는 공감과 위로처럼 느껴진다. 길채라는 사극 속 인물이 존버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처럼 느껴져서다. (사진:MBC)

‘작은 아씨들’, 역대급 캐릭터 만난 엄지원, 자본이 캐릭터화한 듯

작은 아씨들

역대급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엄지원이 연기하는 원상아라는 인물 이야기다. 물론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캐릭터들이 파격적이고, 선명하며, 그 자체로 은유적인 깊이를 갖고 있다. 등장과 함께 사망한 진화영(추자현)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무언가를 갖기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또 다른 부캐로 살아가다 결국 불나방처럼 타버리는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 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첫 회에 사망했지만 그의 잔상과 아우라는 그 후 몇 회 동안 계속 드라마 속 공기에 떠다니는 여운으로 남았다. 

 

역시 등장한 후 한 회도 지나지 않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신현민 이사(오정세)라는 캐릭터도 그렇다. 신발에 남다른 페티시즘을 갖고 있는 이 인물은 죽은 진화영의 발에 신겨진 빨간 하이힐의 잔상으로 남아있다. 오인주(김고은)의 동생이자 사회부 기자인 오인경(남지현)을 자신이 이끄는 부동산 회사의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세 자매의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이란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었지만 정난회의 일원이었다는 그의 비밀은 앞으로도 여전히 이 인물을 드라마가 소환해낼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이처럼 모든 인물들이 허투루 그려지거나 소비되지 않는 <작은 아씨들>에서 특히 역대급 아우라로 그려진 인물이 바로 원상아다. 아름답지만 위험해보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섬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위장처럼 보이는 인물. 하지만 모든 게 우아하고 화려해 보여 유혹적인 향기를 내뿜고 그래서 그 향기에 취한 이들이 결국은 수족처럼 그의 말을 따르게 하는 힘을 가진 인물. 그게 원상아다. 

 

그런데 원상아의 이런 이미지는 이 드라마 속에 미스테리로 세워져 있는 ‘푸른 난초’를 닮았다. 사망한 진화영의 발목에 새겨진 문신 속에는 이 푸른 난초와 더불어 어머니가 사망한 기일이 새겨져 있었고,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신현민 이사의 차 안에도 푸른 난초가 있었다. 또 원상아가 건네준 푸른 난초에 취해 정신을 잃은 오인주는 어떻게 된 일인지 사망한 오혜석을 마주하게 된다. 푸른 난초가 모든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면 푸른 난초는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푸른 유령이라는 난초예요. 자기 전에 뚜껑을 열고 침대 옆에 놔둬요. 오늘 밤에는 꽃이 필거예요. 이 난초에는 힘이 있어요. 밤새 향기를 들이마시면 진짜 자기가 원하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환각, 환영을 일으키는 난초. 그런데 그 난초를 통해 원상아는 자기가 원하는 걸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싱가폴에서 열리는 국제난초협회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한다. 그 일은 마치 예술품으로 정재계 로비를 위해 하는 것처럼 희귀 난초를 통해 비자금을 만드는 일이다. 그 돈의 10%+알파를 원상아는 인주에게 주겠다고 한다. 

 

원상아가 인주에게 속삭이듯 전하는 이 말들은 자본이라는 괴물이 건네는 유혹적인 속삭임처럼 연출되어 있다. 남편이 서울 시장이 되면 그 이권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푸른 난초와 ‘아버지 나무’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한다. “인주씨가 싱가폴에서 잘 해주면 나는 이 나무를 아버지 나무에 걸 거예요. 이 난초는 아버지 나무를 떠나면 오래 살 수 없어요. 난초에 필요한 미생물, 곰팡이들을 아버지 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거든. 그건 인주씨 꿈의 난초를 우리가 보살핀다는 뜻이고. 인주씨도 우리와 함께 한다는 얘기예요.”

 

아마도 이런 속삭임은 인주가 처음은 아니었을 게다. 그는 죽은 진화영에게도 이런 유혹과 푸른 난초를 건넸을 것이고, 이미 인주의 동생 인혜(박지후)를 그 저택 지하에 숨겨진 아버지 나무로 데려가 푸른 난초 하나를 건네주며 “네 것”이라고 한 바 있다. 흥미로운 서사지만 원상아가 푸른 난초를 건넨 이들은 마치 아버지 나무와 그 난초의 관계처럼 엮어진다. 그 곳을 오래 떠나면 살 수 없는 그런 관계. 인혜는 원상아의 집으로 아예 들어가 살게 되고, 오인주 역시 원상아의 비밀스러운 난초협회 정난회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 깊숙이 들어간 이들은 쓸모가 다해졌다 여겨졌을 때 사망한다. 아버지 나무로부터 버려져 말라비틀어진 푸른 난초와 함께. 

 

아직 모든 사건의 전말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 나무와 푸른 난초의 관계는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생물, 곰팡이 같은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본의 힘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고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겉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독하디 독한 향을 품고 있는 그런 삶. 원상아는 베트남 참전 용사인 아버지 원기선 장군이 자신에게 남겨준 건 재산이 아니라 바로 그 난초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건 일종의 그 아버지 나무와 푸른 난초처럼 관계가 엮어진 네트워크, 시스템을 준 것이라고 해석된다. 아마도 박재상(엄기준) 역시 그 푸른 난초 중 하나라 짐작되는. 

 

원상아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자본이라는 괴물이 가진 유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면면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웃고 있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섬뜩하다.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이 인물의 미소는 ‘새파란’ 거짓말이어서 더 섬뜩하다. 어찌 보면 텅 비어 허망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그래서 모든 이들을 빨아들이는 힘을 가진 인물.

 

알맹이는 없지만 그 기능으로 존재하는 삶. 그가 과거 연기자였고 발연기를 그 길을 떠났지만 이제 실제 삶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심지어 실제로는 폭력적인 남편이지만 겉으로는 사회사업가처럼 연기하며 살아가는 박재상과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연기하는 삶’이 그의 실체인지라 그걸 떠나면 존재 자체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원상아는 푸른 난초를 닮았다. 아니 그 푸른 난초들을 묶어두고 조종하는 아버지 나무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든 이 인물이 그려내는 자본의 유혹과 폭력이라는 섬뜩한 현실이 있어 <작은 아씨들>의 세 자매의 목숨을 건 사투가 더 팽팽해지고 의미를 갖는다. 그러고 보면 세 자매가 나란히 위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에 반을 사선으로 가리고 있는 푸른 색이 다시금 보인다. 푸른 난초 같은 자본 시스템의 삶이 부여하는 위기 속으로 이 세 사람은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어찌 보면 그 위에 얹어져 있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푸른 난초를 닮은 원상아의 ‘새파란’ 유혹 앞에서 세 자매는 어떤 선택들을 할 것인가.(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