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무한도전’ VS 배고픈 ‘1박2일’

바야흐로 리얼 버라이어티쇼 전성시대. 소위 말해 캐릭터가 잡히면 프로그램은 뜬다. 이것은 진행형 스토리를 갖춘 리얼리티쇼에서 이제는 드라마나 시트콤만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캐릭터가 중요해졌다는 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 중 ‘캐릭터가 잡힌’ 프로그램은 그 캐릭터라이즈드 쇼(Characterized Show)의 선구자인 ‘무한도전’이 될 것이며, 후발주자로서 급속히 ‘캐릭터가 잡혀가고 있는’ 프로그램은 ‘1박2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캐릭터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을까.

마이너리티 캐릭터들의 집합, ‘무한도전’
‘무한도전’을 이끄는 수장인 유반장(유재석)은 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대는 캐릭터들을 배려하고 조절하는 캐릭터다. 올 들어 새로 한 반장선거에서 거성 박명수가 반장에 당선됐어도 여전히 유반장의 실질적인 반장 역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이 팀에서 유반장이 가진 이 캐릭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유반장이 ‘무한도전’ 외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이른바 리얼리티쇼 시대에 그 균형과 수위를 조절하는 유반장 캐릭터는 어디서든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유재석만의 장점은 반장 역할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팀원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놀아준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자칫 방관자 혹은 외부자 역할이 될 수 있는 그를 프로그램 속으로 안착시키는 힘이 된다.

그런 유반장이 이끌어가는 팀원들은 전체적으로 마이너리티 캐릭터들이다. 정형돈은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 캐릭터이며, 뚱뚱보 정준하는 식신에서 점점 ‘노브레인 서바이벌’의 바보 캐릭터로 변신해가고 있다. 꼬마 하하는 키가 작은 신체적 결함을 극대화한 캐릭터이며, 퀵 마우스 노홍철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소심한 수다쟁이에 저질댄스로 일관하는 캐릭터이다. 거성 박명수 역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지만 사실상 힘은 없는 아버지 캐릭터이다. 무언가 사회적으로 보면 이들 캐릭터들은 나사 하나씩이 풀려 있거나 비하되는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거성 박명수 캐릭터다. 박명수는 자칫 이 ‘하향평준화된’ 쇼의 팀원들 속에서 자칫 당연한 것으로 매몰될 수 있는 바보스러움이나 마이너리티한 부분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야 그것밖에 못해!”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상대방의 마이너리티를 부각시키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캐릭터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박명수 캐릭터의 효용성은 리얼리티쇼 시대에 유재석이 그러한 것처럼 타 프로그램 속에서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캐릭터가 버럭 댈 때 그 자칫 싸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유화시키는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유재석과 박명수 캐릭터가 특유의 콤비를 이루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해피투게더’의 인기에는 이 명콤비의 역할이 그만큼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렇게 ‘무한도전’ 팀의 캐릭터가 구축된 것은 그 프로그램의 성격이 크게 좌우한 것이 사실이다. 때론 과장된 느낌의 도전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웃음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자란 캐릭터이다. 따라서 부족한 이들이 무언가에 도전을 하면서 실패하고 때론 이루기도 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재미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캐릭터의 성장드라마를 만든다. 초반부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에서 말도 안 되는 도전을 하던 캐릭터들은 이제 스포츠댄스나 드라마 단역 같은 제대로 도전이 될 만한 일에 도전을 한다. 초반부 반 막노동 같은 몸 개그에서 시작한 쇼는 이제 점차 몸치에서 유발되는 몸 개그로 바뀌고 있으며, 이제는 구축된 캐릭터의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으로 나가고 있다.

배고픈 캐릭터들의 야생, ‘1박2일’
유재석이 쇼의 구성원이면서도 조절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1박2일’의 강호동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그 역할 수행에 있어서의 성격은 다르다. 유재석은 한껏 몸을 낮춰 구성원과 거의 같은 위치에서 진행을 하는 반면, 강호동은 맏형 같은 캐릭터로 철저하게 쇼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강호동 특유의 뚝심과 순발력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1박2일’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여행이라는 야생의 도전 상황 속에서 수평적인 눈높이보다 때로는 보호해주고 때로는 재미있게 상황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캐릭터에 대한 요구가 더 크기 때문이다. 복불복 게임 등을 통해 야생버라이어티의 재미를 부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조절하는 것은 리얼리티쇼를 그르친다. 그렇기에 필요한 캐릭터가 아무리 강압적으로 밀어붙여도 안 되는 캐릭터다. 바로 초딩 은지원이다. 그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딩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있는 한 그의 어떠한 야생 속에서의 행동도 초딩이란 아이의 정서적 본능으로 인정된다. 여기에 합세한 캐릭터가 야생몽키 MC몽이다. 은지원이 아이의 본능을 앞세워 강호동을 무력화시킨다면 MC몽은 말 그대로 야생의 본능에 충실한 그 자체로 강호동을 무력화시킨다.

‘1박2일’의 캐릭터 조합이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캐릭터들이 쇼의 부품처럼 잘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MC몽의 야생이 무적일 것 같지만 그에게 대항하는 자는 도시의 샌님 역할을 하는 허당 이승기다. 그는 야생 속에서도 늘 외모를 관리하고 좀 더 편안한 것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MC몽과 이승기의 탁구대회와 배드민턴 대회는 대결구도를 통해 두 캐릭터를 순식간에 강화시켰다.

여기에 나머지 두 캐릭터인 김C와 이수근의 역할도 구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다. 김C는 야생을 야생처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는 진짜로 늘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고행을 하는 사람처럼. 여기에 이수근은 정반대다. 그 역시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너무나 야생에 적응을 잘한다. 시골생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 일꾼의 캐릭터가 되는 것은 이 여행이라는 컨셉트의 베이스를 형성한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비슷하다. 둘다 야생에서 잘 버틴다는 점이다. 김C는 마치 삶은 고행이라는 것 같은 달관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수근은 실제 생존능력을 갖춘 것으로.

이렇게 구성된 ‘1박2일’ 팀원들의 전체 캐릭터는 배고프고 고달픈 자의 본능으로 대변된다. ‘만성피로 프로젝트’라 강호동이 스스로 일컫는 것은 이런 본능적 캐릭터들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야생 속에서의 투쟁(?)이 아귀다툼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맏형 강호동이나 인생 다 산 것 같은 김C, 무언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 해결해줄 것 같은 이수근 같은 캐릭터들이 아이들처럼 노는 다른 캐릭터들 간의 끈끈한 정을 늘 유지해준다는 데 있다.

캐릭터가 중요해진 리얼 버라이어티쇼 시대에 이제 쇼는 하나의 시트콤이나 드라마처럼 되고 있다. 따라서 캐릭터는 그냥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구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기능으로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시트콤이나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웃음과 유사하다.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점점 캐릭터들의 살아있는 드라마가 되어가고 있고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캐릭터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태왕에 의한, 태왕을 위한, 태왕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에서 고우충(박정학)은 태왕 담덕(배용준)에게 전황을 브리핑한다. “나머지 3만은 두 개의 길로 남하하여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퇴치하는 중입니다.” 담덕이 “미적미적 싸우고 있으면 곤란해요. 빗자루로 쓸어내듯이 그렇게 내려가야 한다구.” 이렇게 말하자 고우충은 웃으며 이렇게 답변한다. “염려 마십시오. 흑개장군입니다.” 이 짤막한 대화를 통해 ‘태왕사신기’의 전쟁 신은 굳이 보여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고우충이 전황을 묘사하면서 ‘흑개장군(장항선)’이라는 인물을 거론한 점이다. 시청자는 흑개장군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용맹성과 앞뒤보지 않고 뛰어드는 과감성 같은 것을 통해 전쟁의 그림을 유추하게 된다. 구구절절이 전쟁상황을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캐릭터 하나를 통해서 그것이 설명되는 것. 이것이 ‘태왕사신기’가 가진 독특한 드라마의 색깔이자 힘이다.

수 없는 전쟁과 전투를 통해 영토 확장을 한 광개토대왕의 면면을 스펙터클로 보여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또한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영웅을 다루면서 그 핵심이 되는 전장의 사건들을 빼놓는다는 것 역시 납득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딜레마를 넘어서기 위해 ‘태왕사신기’가 선택한 것은 캐릭터다. 잘 구축한 캐릭터 한 명은 몇 백 명의 군사들보다 유용하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수만 명의 백제군이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처로(이필립)라는 일당백의 카리스마를 지닌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는 이 전쟁은 고구려를 대변하는 담덕과 백제를 대변하는 처로가 맞붙는 장면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담덕이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연호개(윤태영)의 군대와 맞서는데 있어서 전면전을 피하고 몇몇 별동대와 인물들만으로 충분한 것도 같은 이유다. 스스로도 일당백이라 자처하는 주무치(박성웅)는 실로 수백 명의 엑스트라를 대체하는 효과를 주는 캐릭터다.

즉 ‘태왕사신기’의 개개 인물들은 여러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장악을 태왕이 사신을 얻는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태왕은 쥬신의 왕이란 상징을 갖고, 사신은 네 부족을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니 태왕이 사신을 얻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토를 장악한다는 의미로서 전달된다. 여기에 사신이 가진 신물이라는 환타지적인 요소를 덧붙이면서 이 상징은 더 공고하게 구축된다. 네 부족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물(현고-현무), 쇠(주무치-백호), 나무(처로-청룡), 불(수지니, 기하-주작)로 설명된다. 즉 네 부족-사신-신물-네 상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절대적인 악을 상징하는 화천회 대장로(최민수)는 화천회라는 조직을 실제 목도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해주는 캐릭터다. 담덕이 전쟁터에 나가는 동안 고구려의 모든 행정이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연가려(박상원)라는 한 명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처럼 ‘태왕사신기’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캐릭터들을 세움으로써 최소의 장면만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담덕, 배용준의 힘이다.

사실 이 믿기 어려울 수 있는 상징적 진술은 배용준이라는 아시아적 스타배우와 담덕이라는 역사적 영웅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담덕이란 캐릭터가 세워지는 그 힘을 통해서 주변의 캐릭터들도 구축된다. 담덕을 보위하는 사신들이 납득되는 것은 담덕이 쥬신의 왕이라는 설정 때문이며, 그 설정은 드라마 밖에서의 배용준이라는 배우의 힘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된다. 이 사극은 따라서 담덕이 사신을, 아시아적인 영토를 얻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배용준이 아시아권을 장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담덕의 적수로 세워졌던 연호개나 사신이 아닌 인간들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사극 자체가 담덕과 배용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극은 태왕에 의한, 태왕을 위한, 태왕의 드라마이며 그 태왕이라는 단어에 배용준으로 대치해도 무방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태왕사신기’가 우리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이 된 것은 첫 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짜임새 있는 송지나 작가의 대본과, 그 대본을 시각화하는 김종학 PD의 잘 짜진 연출 위에 그 모든 것을 한 몸으로 지탱해나가는 배용준이라는 아시아적 스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덕과 사신의 캐릭터만으로 아시아를 정복해가는 이야기가 구축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배용준이라는 배우 한 명의 힘은 그 어느 것 하나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우리 드라마의 현실을 보기 좋게 뛰어넘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 속에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쥬신의 아들들이 그토록 희구하던 쥬신의 왕을 만나는 경험에 비견되는 것이 아닐까. 캐릭터의 힘은 위대하다.

유사가족, 팀(team)이 보여주는 ‘히트’

“대외홍보용인가요?” 히트(H.I.T. : 강력특별수사팀)의 팀장이 된 차수경 경위(고현정)의 질문에 경찰청장(조경환)의 답변은 정치적이다. “자네가 성과를 낸다면 그건 우리 경찰의 승리고 자네가 실패를 한다면 그건 여성의 실패가 될 테지.” 그리고 이어지는 차경위의 요청. “팀원들 바꿔주세요.” 하지만 완고한 경찰청장의 발언.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 이 짤막한 대사들 속에는 이 드라마가 앞으로 보여줄 이야기의 전조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그것은 경찰사회라는 완고한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그것도 마이너리티로 치부되는 인물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여성 강력반 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퍼즐 같은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기대감이 커지는 것은 바로 캐릭터다. 마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진한 사연 한 가지씩 가졌을만한 인물들. 그래서 경찰 외부에 따로 지어진 히트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이 특권이라기보다는 소외로 느껴지는 인물들. 게다가 총칼이 난무하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심지어는 유사가족의 형태를 띄게 될 팀의 캐릭터들이니 기대감이 커질 밖에.

차수경, 그녀 속에 남자 있다
무엇이 가녀린 그녀를 연쇄살인범에 집착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애인이었던 한상민(정호빈)이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죽은 한상민은 한 여자이기만 했던 차수경 속으로 들어와 자리한다. 한상민과 접신한 그녀는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한상민과 차수경이 만나는 지점, 즉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에서야 이 분열된 자아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여성으로서의 형사는 이 드라마에서처럼 ‘대외홍보용’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남성을 내세운 여타의 형사물들과 차별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현장에서 강인하고 털털해 보이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서야 제대로 차별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의 차수경이 보이는 것. 그러나 그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픈 기억뿐이다. 한 남자의 여자로서 사랑 받으며 살고 싶었던 기억. 하지만 부서진 기억.

김재윤,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 기억 속으로 들어오는 남자, 김재윤(하정우)이다. 우연히 가게된 그녀의 집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곰 인형과 하이힐로 대변되는 그녀의 본모습(여성성)이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고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하는 김재윤에게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으로 다가간다. 안전한 삶을 희구하던 김재윤에게 부서질 것 같은 차수경의 모습은 자꾸만 변화를 요구한다. 그녀 밖의 남자였던 김재윤은 차수경 속에 있는 남자(한상민)를 밀어내고픈 욕구를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남 일 상관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스트 김재윤이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그가 그럭저럭 버티다 나중에는 편안하게 변호사나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에서 김재윤과 차수경의 갈등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예감하게 한다. 차츰 차수경의 안간힘에 눈이 밟히는 김재윤은 지금까지 ‘남 일’이었던 사건들이 차츰 ‘내 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용하-김일주, 전형적 형사물의 구도
형사물을 보면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형사. 베테랑에 경험도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폐인에 가까운 형사가 장용하(최일화)다. 승진보다는 범인 잡는 데 삶을 바친 이 같은 전형적 형사 캐릭터의 존재이유는 형사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잠복수사같은 현장중심의 수사방식에서 과학수사로 넘어오면서 차츰 공룡이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디 수사가 과학만으로 되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전 경험이다.

그런 그에게 도전하는 인물. 과학수사를 내세우는 원칙주의자 김일주(정동진)다. 장용하가 임의동행을 하려는 것을 피의자가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막는 김일주는 과거식의 수사방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대표격인 장용하와 부딪칠 수밖에. 실력으로만 인정받고픈 그에게 무능함의 대명사로 보이는 장용하는 그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은 역시 경험과 열정. 그러니 이 둘의 만남은 묘한 균형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 부족한 장용하와 경험이 부족한 김일주가 파트너가 된 이유다.

남성식-심종금, 투캅스의 부활
영화 ‘투캅스’의 재미는 서로 다른 캐릭터의 부조화에 있다. 닳고닳은 타락한 고참형사와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만 부르짖는 신참형사의 만남. 그러나 차츰 닮아가고 나중에는 심지어 청출어람(?)을 보이는 신참의 모습에 오히려 고참이 훈계(?)하는 형국으로의 전환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드라마 ‘히트’의 남성식(마동석)과 심종금(김정태)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생각은 좀 모자란 듯 하지만 완력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식은 이름에서도 느껴지지만 여성 강력팀장인 차수경의 빈 구석을 꽉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완벽한 수족이 될 그는 그러나 여성적인 내면(?)까지도 갖추고 있다. 머리가 나쁘다는 콤플렉스와 외모가 조폭인 그의 섬세한 면모들은 한편으로 그럴듯한 외모에 머리만 굴리며 살아가는 세태를 꼬집는 묘미가 있다. 그와의 대척점에서 심종금의 면모가 교활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타락한 형사가 된 것은 사실 사회의 부조리함을 뒤집어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심종금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밝혀질 즈음, 보여질 그의 진면목에서 우리는 동정심과 애정을 예감하게 된다.

전문직, 멜로,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다
이 밖에도 이 드라마에는 전직형사이자 선술집 주인인 김영두(김정민), 수사본부의 부지휘자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그 넉넉한 허리가 되어주는 조규원(손현주), 과학수사의 진면목을 보여줄 정인희(윤지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꿈틀거린다. 이들 캐릭터들은 처음에는 외인부대처럼 버려지거나 외면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보여주려는 것은 그들이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며 팀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여러모로 미국 드라마 ‘CSI’를 연상케 하는 전문직 드라마지만 ‘히트’의 전개양상은 이러한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저네들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스타일은 따왔으되 하려는 이야기는 저네들의 쿨한 관계보다는 좀더 끈끈한 팀 간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정두홍이라는 걸출한 무술감독으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는 우리 식의 액션이 선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히트’가 서는 지점은 형사물로 대변되는 전문직드라마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그리고 팀으로 대변되는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이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그 적절한 배합과 균형에 있을 것이다.

주몽이 처한 딜레마

요즘 시청률로 가장 성공한 TV 컨텐츠는 단연 MBC 월화 사극, ‘주몽’이다. ‘고구려사극 전성시대’라 할 만큼 연이어 경쟁작으로 등장한 ‘연개소문’, ‘대조영’에도 불구하고 시종 43%대에 이르는 독보적인 시청률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시청률은 드라마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잣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률이 높은 것과 드라마적인 성공은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해 ‘주몽’의 시청률이 높은 것으로 드라마 ‘주몽’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거대한 고구려, 영웅, 사랑은 어디 갔나
모든 드라마에는 저마다의 목표 혹은 기획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기획의도는 의도일뿐, 실제적인 목표는 시청률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각종 연예관련 기사들이 만들어낸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그것이 잘 전달되어 호응을 얻을 때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주몽’의 기획의도를 보면 그 키워드는 ‘거대함’이다. ‘거대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제목 아래, ‘오늘보다 거대한 고구려를 만난다’, ‘신화보다 거대한 영웅을 만난다’, ‘역사보다 거대한 사랑을 만난다’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다. 이 소제목들에서 방점은 ‘고구려’와 ‘영웅’그리고 ‘사랑’에 있다. 물론 기획의도라는 것이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방점 찍힌 키워드들은 드라마의 커다란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막 40회를 넘기고 60부까지 20회를 남긴 드라마 ‘주몽’ 그 목표점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고구려의 실종 - 역사를 버리자 고구려도 사라지다
먼저 ‘고구려’라는 역사적 방점은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부터 실종되기 시작했다. 사료가 없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퓨전사극’이라는 타이틀이 모든 걸 덮어주는 마법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기왕에 고구려를 내세웠다면 기본적인 사료는 따라야 마땅하다. 철기의 문제는 드라마의 재미로 치더라도, 당대 한사군이 있던 위치를 한반도 내로 지정하는 등의 문제는 심각한 식민사관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기본적인 사료를 버리고 확고한 사관 또한 없이 역사극을 만들려했다면 그것이 ‘퓨전사극’이라 하더라도 ‘고구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

역사적인 인식의 문제를 떼놓고 보더라도 지금의 ‘주몽’에는 고구려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민족이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을 그리면서 드라마의 3분의 2가 지나간 현 시점까지 주몽이 고작 하고 있는 것은 권력투쟁과 연애이다. 물론 연애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지만 고구려의 탄생을 같은 민족끼리의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보여지게 만든 것은 어딘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국가 탄생의 또 한 축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이라는 대의명분과 유민들을 규합해가는 이야기가 ‘주몽’에는 잘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주몽’은 굳이 ‘고구려’나 ‘주몽’이라는 타이틀을 떼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그러자 거대함은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잔재미들만 잔뜩 이어진다. 잇따른 납치와 탈출, 구출의 연속, 국가 간의 부딪침에 전쟁은 없고 소소한 전투들만 이어지는 것 등은 바로 그런 결과들이다. 심지어는 전쟁에 있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이 등장하는 스케일의 문제가 불거진다. 작가와 연출자는 매회 쫓기듯 찍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풍토로 변명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마치 대충 몇 명의 전투 제스처를 하고 나서는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상상해서 전쟁으로 채워 넣으라는 것만 같다. 현재 같이 진행되고 있는 타 사극들이 사전제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 역시 이 드라마가 애초부터 그 정도의 계획도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다.

영웅의 실종 - 캐릭터들의 구조조정 시작되다
‘주몽’의 힘은 캐릭터 주몽에서 나올까.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부분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점점 성장해간다. 그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차츰 감정이입이 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 자신이 아닌 주변 캐릭터에 의해 주인공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하늘이시여’에서 왕모와 자경이 관심을 받은 것은 자신들 캐릭터의 힘이라기보다는 악역들에 의한 부분이 많다. ‘소문난 칠공주’에서 불쌍한 칠공주들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대책 없는 캐릭터와 합쳐져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의 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몽에 있어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처음 주몽이 캐릭터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해모수’와 ‘유화부인’이라는 굵직한 캐릭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주몽의 성장에 있어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소서노와 연타발’, 그리고 ‘마리, 협보, 오이 삼인방’, 게다가 모팔모, 여미을, 심지어는 금와왕까지 주몽을 돕는다. 이유는? 그가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아들, 주몽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드라마상에서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몽은 그다지 소위 말하는 캐릭터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악역을 맡고 있는 대소, 영포, 도치 일당 등은 드라마의 진짜 재미를 주는 인물들이다. “드라마 제목을 주몽이 아닌 대소로 바꿔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주몽이 실종되었던 2회분 동안 대소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영포와 도치 일당은 ‘주몽’이란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가장 독특한 재미를 가진 캐릭터들이다. 이들 ‘귀여운 악당들’은 사실상 지금까지 드라마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몽의 성장은 바로 이들의 패배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그만큼 어리숙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응까지 받고 있다. 악당들 이외에도 소서노와 연타발이란 캐릭터는 주몽 이상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사실상 드라마 상에서 주몽은 초창기에는 유화부인 품속에서 중반부에는 소서노의 품속에서 노는 아이 정도로 비춰진다).

이렇게 주몽의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물들이 불쑥불쑥 제 자신의 힘을 드러내자 문제가 생긴다. 드라마의 애초 목표, ‘고구려와 주몽의 탄생’이라는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자꾸 그들 캐릭터 사이에서 맴을 돌게 되는 것이다. 마치 초기에 부영의 캐릭터가 전혀 드라마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자 사라져버린 것처럼, 최근 ‘주몽’에는 캐릭터들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금와는 침상에 눕게 되고, 유화부인 역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이상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한 후, 매력을 잃게 되고, 연타발은 비류군장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예상밖에 호응을 얻고 있는 영포와 도치일당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으나 ‘영포의 난’을 실패로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다. 반면 예소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주몽의 힘은 바로 이런 주변인물들에 의해 나온 것이었는데, 그들을 놔두자니 드라마의 진행이 문제가 되고, 그렇다고 없애자니 드라마의 재미가 사라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실종 - 소서노, 울기 시작하다
‘주몽’의 가장 큰 인기의 힘은 바로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오가는 멜로가 한 축을 차지한다. 이것은 타 사극에 비해 ‘주몽’만이 가진 힘이다. 남성적인 전쟁과 전투, 권력다툼의 문제 속에 ‘주몽’은 여성적인 멜로 라인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일등공신은 당연 소서노라는 캐릭터다. 그녀가 힘을 발휘한 이유는 단 하나, ‘강인하고 당찬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저 한 사람에 목이 매어 기다리기만 하는 캐릭터였다면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주몽을 구해내기 위해 산적들에게 스스로 들어가 거래를 할 정도의 강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실종된 주몽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소의 협박에 휘둘리면서 우태와 혼사를 치러버린다. 왜 작가는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것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소서노가 차지하는 비중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가, 뒤늦게 역사적 사료에 충실하고자(사료에서는 소서노가 유부녀로 주몽이 유부남으로 만난다) 했던가, 앞으로 진행될 예소야와의 멜로 경쟁(경쟁이 되려면 힘이 균형이 되야 하는데 소서노가 너무 강하므로)을 만들려던 데서 비롯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되자 소서노는 그 유리같이 냉랭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잃어버리고 울기 시작한다. 소서노의 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반면 예소야는 참신하지 못한 등장으로 처음부터 힘을 얻지 못했다. ‘주몽’에서의 멜로라인은 대개 ‘영웅의 위기 - 위기에서 구해준 여인 - 위기에 처한 여인 - 여인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구조로 등장하는데, 예소야 역시 드라마 초기의 해모수의 등장과 거의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는 소서노와 같은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종사 하듯 주몽을 바라보며 어찌 보면 짐만 되는 캐릭터에서 매력적인 구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서노의 힘도 약화되고 예소야도 힘을 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몽이 살 수 있는 길
최근 ‘주몽’의 흐름은 앞에서 지적한 기획의도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시청률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아무리 주몽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주인공을 2회분이나 드라마에서 뺀 것이라든지, 몇몇 예고편으로 주목을 끌어놓고 실제 보면 별 것 아닌 스토리로 일관한다든지, 심지어는 방영시간을 마음대로 늘린다거나, 상식을 무시한 채 무리한 편성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시청률 편향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만일 ‘주몽’의 목표가 애초부터 시청률에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한 시기에 그것도 국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주몽이라는 소재를 갖고 시청률에만 올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러한 ‘주몽’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시청률에 경도되지 않고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주몽’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몽’은 이제 작가 스스로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몇몇 실패사례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가 되었다. 드라마 비판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드라마 초기에 방점을 찍은 키워드들이 실종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를 비롯하여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여전히 애정과 관심을 보이며 비판을 해주고 있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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