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공항>, <쇼핑왕>이 재발견한 배우들

 

드라마 캐릭터와 연기자의 관계는 한 마디로 말해 인연이다. 좋은 캐릭터는 연기자로부터 그가 가진 매력을 드러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종영하는 수목극의 조정석, 서인국, 김하늘은 각각의 작품에서 캐릭터와의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다. 그들의 연기자로서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질투의 화신(사진출처:SBS)'

SBS <질투의 화신>에서 조정석 없는 이화신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게다. 자존심 강하고 자신의 일에 있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지만, 사랑이나 우정 같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이 같은 인물. 그래서 자신의 유방암 사실을 커밍아웃하며 소수자들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였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성인의 사고를 갖고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질투하고 삐치고 괜스레 화를 내는 아이 같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인물.

 

조정석은 이 이화신이란 인물을 연기하면서 바로 그 아이의 얼굴을 대중들 앞에 선보였다. 투덜대지만 어딘지 귀여운 그 캐릭터는 그래서 본인이 느끼기에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면서도 보는 이들을 빵빵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짠내 나는 슬픈 정조를 갖고 이만큼 웃길 수 있는 배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코미디 연기라고 하지만 조정석은 이걸 타고난 것 같다.

 

조정석이 페이소스가 깔린 코미디에 확고한 자기만의 영역을 보여줬다면, 김하늘은 KBS <공항 가는 길>을 통해 섬세한 멜로 연기가 자신의 영역이라는 걸 확인시켜줬다. 물론 <온에어>, <신사의 품격> 같은 작품들을 통해 그녀는 다양한 멜로 연기를 선보인 바 있지만 <공항 가는 길>은 그것보다 훨씬 더 섬세한 연기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이 작품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거리두기때문이다.

 

기혼남녀가 인연에 의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담는 <공항 가는 길>이 불륜이라는 소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심지어 힐링 드라마로 갈 수 있었던 건 인물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표현해내는 방식 덕분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대방이 있던 어떤 공간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이걸 가능하게 한 건 김하늘이 보여준 섬세한 감정 연기 때문이다.

 

한편 MBC <쇼핑왕 루이>의 애초 별 기대감이 없던 드라마의 반전을 만들어낸 주역은 역시 서인국이다. 서인국은 이 드라마를 통해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의 루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입체적으로 연기해냈다. 조금은 바보 같고 의심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타인을 믿어버리는 그런 캐릭터지만 바로 그런 순수함을 보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기꺼이 이 인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왕의 얼굴>에서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 바 있고, <너를 기억해><38사기동대>에서 스마트하고 세련된 면면을 드러낸 바 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발견된 순수한 얼굴은 아마도 서인국이 가진 진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조금은 멍해 보이지만 우직하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는 어떤 보호본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런 매력이다.

 

<질투의 화신>, <공항 가는 길> 그리고 <쇼핑왕 루이>. 이 세 작품이 저마다의 색깔을 내며 시청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작품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조정석, 김하늘 그리고 서인국이라는 배우들의 숨겨졌던 잠재적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계기는 향후 이들 배우들의 작품 행보에 오랜 잔상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질투> 조정석, 가슴으로 웃기더니 가슴으로 울리네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SBS <질투의 화신>에서 이화신 역할을 연기하는 조정석 얘기다. 유방암에 걸린 남자주인공이라니. 드라마에서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가슴을 내주는(?) 통에 민망했을 법한 그 연기를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조정석은 역시 코미디 연기에 있어서 놀라운 섬세함을 보여줬다. 여성 전문과를 기웃대는 이화신이라는 캐릭터의 그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면서도 동시에 처절하기도 하며 때로는 아이처럼 떼를 쓰는 그 면면들을 조정석은 마치 제 옷을 입은 양 자연스럽게 연기해냈다.

 

'질투의 화신(사진출처:SBS)'

그래서 <질투의 화신>이 초반부 그려내던 그 포복절도의 코미디는 다름 아닌 이 조정석의 디테일한 연기에 상당한 지분을 빚지게 되었다. 여성 전문과에서 이화신과 나란히 수술을 받고 같은 병동에 누운 표나리(공효진)가 남녀의 차이를 뛰어넘어 같은 암 동지로서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갖게 되는 장면들은 이 드라마 특유의 웃음을 주면서 또 조금씩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초반의 유방암 설정이 웃음에서 자연스럽게 멜로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만의 비밀로 싹트게 된 친밀감.

 

하지만 이미 절친인 고정원(고경표)과 가깝게 된 표나리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하는 이화신은 짠 내나는 캐릭터가 된다. 유방암으로 아픈 가슴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가슴앓이가 더 아픈 캐릭터.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친구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이화신을 연기하는 조정석은 그러나 그저 눈물 짜는 캐릭터로 이화신을 만들지 않는다. 마치 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찌질하게 구는 그 캐릭터는 본인은 슬프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묘한 인물이 된다. 조정석의 연기가 코미디와 짠 내가 결합된 지점에서 가장 돋보인다는 걸 이화신이라는 캐릭터는 제대로 증명해낸다.

 

하지만 가슴으로 웃기고 가슴으로 설레게 만들던 조정석의 연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 표나리가 자신 때문에 유방암이라는 사실이 방송국에 알려지고 그것이 그녀의 정규직 전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라는 걸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방송을 통해 커밍아웃한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도 유방암 환자입니다.”

 

그는 남성 유방암 환자들이 점점 늘고 있고 그러나 그들이 겪는 편견들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털어놓는다. “암 투병만으로도 힘든데 남성성에 대한 편견으로 이중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반드시 대책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소수도 행복한 나라가 우리나라였으면 좋겠습니다.” 어찌 보면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여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또 나아가 자신 같은 소수의 남성 유방암 환자들을 위해 그 불편할 수 있는 커밍아웃을 하는 것. 그의 유방암 이야기는 이제 사회적 의제가 된다.

 

물론 캐릭터가 좋아서 조정석이라는 연기자가 <질투의 화신>을 통해 훨훨 날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이 드라마의 이화신이라는 코미디부터 멜로 나아가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때론 짠하고 때론 참을 수 없이 웃긴 이 캐릭터를 200% 연기할 연기자도 조정석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쯤 되면 그는 가슴 연기의 대가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가슴으로 웃기고 가슴을 설레게 하고 나아가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연기라니.

어딘가 부족한 <럭키>, 유해진의 엄청난 저력

 

영화 <럭키>의 진짜 행운은 유해진이 아니었을까. <럭키>는 개봉 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아수라>가 개봉한 지 20일이 다 되어가지만 고작 250만 관객에 머물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결과다.

 

사진출처: 영화 <럭키>

영화에 들어간 공력을 보면 <아수라>가 압도적이다. 제작비도 <아수라>가 홍보비를 포함해 110억 정도가 들어간 반면 <럭키>40억이 투입됐다. 무엇보다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만으로도 화제가 됐던 <아수라>의 캐스팅은, 지금껏 조연으로만 주로 서 왔던 유해진이라는 배우에 기대하고 있는 <럭키>와 너무나 비교된다.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말해 <럭키>라는 작품이 굉장한 완성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형적인 코미디 장르로서 기억상실이 된 킬러가 무명배우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청년의 삶을 대신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다. 조금은 과장된 코미디 설정들이 웃음을 주며 후반부에 이르면 어떤 따뜻함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영화.

 

물론 소소한 재미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단할 것 없다 여겨지는 <럭키>라는 작품이 이만큼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유해진이라는 배우다. 이 배우가 단독 주연으로 선 영화라는 점은 <럭키>에 대한 막연한 지지 같은 걸 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그다지 크게 웃기다고 생각할 수 없는 장면에서조차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영화 속 캐릭터 때문이라기보다는 유해진이라는 이미 우리에게는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이 주는 친근함 때문이 아닐까. 유해진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인상을 쓰는 첫 장면의 비장함이 관객들에게는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배우가 가진 시골스러운 면면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일 것이다.

 

물론 <럭키>라는 영화 자체가 전혀 흥행에 기여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특이하게도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편에 깔려 있다. 즉 무명배우의 삶을 대신 살게 된 유해진이 구박받던 엑스트라에서 점점 주연에 가까운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은 우스우면서도 통쾌함을 준다. 어떤 배역을 맡느냐에 따라 멸시받기도 하는 무명배우들의 삶이 마치 우리네 삶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럭키>를 통해 그 무명배우의 삶을 연기한다는 점은 여러모로 영화와 현실 사이를 잇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건 어쩌면 <주유소 습격사건>의 단역으로 등장해 지금의 톱스타가 된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진짜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놓은 듯한 착시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럭키>는 제목 그대로 유해진이라는 행운이 있어 성공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물론 굉장한 기대는 금물이다. 하지만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친근하고 따뜻하며 본인이 진지할 때조차 웃음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온전히 주인공으로 들여다보는 그 시간은 충분히 재미를 준다. 어딘지 부족한 영화지만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아우라는 그 부족한 부분을 제대로 채워주는 행운이 되어 주었다

비극을 대하는 <밀정>과 <고산자>의 다른 선택

 

600만 관객과 80만 관객. 추석을 보낸 영화 <밀정><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의 성적은 극명히 나뉜다. 이 두 영화 비교대상이 되는 건 같은 날 개봉한 우리네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역사를 다뤘고, 그 역사 속 주인공들의 삶이 비극적이었으며, 그 역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출처 : 영화 <고산자>

사실 요즘 같은 시기에 비극을 다룬다는 건 흥행에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밀정>은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열단의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주인공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인 이정출(송강호)이지만 그가 의열단의 인물들을 겪으며 갖게 되는 심적 변화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결국 해야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숭고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의열단원들의 면면들은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픈 이야기가 지금껏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문제까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밀정>은 호평 받았다.

 

영화적으로만 보면 <밀정>은 그 비극을 우아하고 장중한 느낌의 연출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깊은 슬픔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영화는 장르적인 긴장감을 충분히 유발하고 특히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끝까지 영화에 빨려들 수 있었다. 일제 앞에 산화한 분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아픈 기억으로 담아냄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이 되었다.

 

한편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삶을 다룬 <고산자>는 개봉 전부터 식민사관논란이 벌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원군에 대한 묘사와, 김정호와 딸의 옥살이 이야기가 193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의 옥사설을 따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 때문이다. 조선어독본에는 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와 딸이 옥사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원군을 매도함으로써 조선의 무능함을 드러내려 날조된 기록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식민사관의 내용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결국 <고산자>가 다루는 이야기는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지도 한 장이 민초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했던 시절, 온전히 걷고 또 걸어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민초들에게 배포하려 했던 한 위대한 평민의 이야기. 기록 자체가 A4 한 장 분량도 되지 않는 김정호의 역사적 기록을 영화는 허구를 덧대 지도에 담긴 그의 의지를 그려내려 했다. 아마도 영화 끝에 보여지는 대동여지도 목판 원본의 세세하게 새겨진 길들과 산과 강 그리고 산맥의 정교함에서 느껴지는 고산자의 마음이 역사적 기록보다 더 많은 걸 얘기해줬을 것이다.

 

식민사관논란을 겪었지만 <고산자>는 영화 속에 오히려 일본에 대한 불편한 심경들을 담아놓았다. 영화 속에서 김정호가 독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그래서다.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든 정확하게 지도에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배를 타고 사경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도를 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이야기의 비극성으로 보면 <밀정>만큼 <고산자>도 못지않다. 김정호의 삶 자체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지도 때문에 산길에서 횡사한 아버지와 평생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삶은 거의 포기했던 그가 아닌가. 그래서 <고산자>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코미디를 넣었다고 한다. 차승원과 김인권이 마치 만담하듯 벌이는 코미디들은 그래서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잠시 동안의 숨통을 틔워준다.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지금의 관객들은 비극을 좀체 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밀정><고산자>도 사실 쉬운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비극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밀정><고산자>는 사뭇 달랐다. <고산자>는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그 비극적 삶이 강조되지만 전반적으로 코미디 설정을 많이 활용했고, 반면 <밀정>은 온전히 비극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장르적인 재미와 미려한 연출을 통해 끝까지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되돌아보면 비극을 비켜가지 않고 정면 돌파한 <밀정>의 선택이 훨씬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