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연애', 오싹 상큼 로맨틱 코미디

'오싹한 연애'(사진출처:상상필름)

공포영화 여주인공은 왜 사랑을 안 할까. 주인공이 사랑을 하면 무섭지 않기 때문이란다. 곁에 누가 있는데 무서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로맨틱 코미디에 공포물에나 나올 법한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자칫 잘못하면 로맨틱 코미디의 그 달달한 분위기를 살벌한 귀신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와 공포는 이렇게 이질적인 장르다. 그렇다면 이 두 장르의 결합은 불가능한 것일까.

'오싹한 연애'는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영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멜로와 공포는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어쩌면 틀에 박힌 식상한 장르적 문법들을 뒤집는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다. 오싹하지만 상큼하고, 살벌하지만 웃음이 쿡쿡 나오는 이 기발한 영화는 그래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멜로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공포가 주는 긴장감이 로맨틱 코미디가 풀어내는 이완으로 이어질 때, 그 양극단의 경험은 더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여리(손예진)가 바로 그 공포영화 속의 여주인공이다. 절대로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귀신과 함께 살아간다. 너무나 공포스러워 가족이 떠날 정도니, 애인은 언감생심이다. 귀신을 보는 체험을 견뎌낼 수 있는 남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이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듯이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그런 공포영화 같은 삶 속에 살아가는 여리의 공간으로 뛰어든 조구(이민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인공 같은 캐릭터다.

어딘지 소심하지만 세심한 면이 있고, 사랑을 위해서는 기꺼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그런 남주인공. 흥미로운 건 이 남주인공 조구의 직업이 마술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여리를 통해 영감을 얻어 만든 호러판타지 마술로 인기를 얻은 마술사. 마술이라는 것이 공포가 주는 긴장감과 그것이 마술로 풀어졌을 때의 이완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호러 판타지적 정조를 그대로 대변한다.

마술이 아무리 공포를 소재로 갖고 오더라도 바로 '마술'이라는 안전한 바탕 위에 섬으로써 적절한 이완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오싹한 연애'도 공포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를 바탕으로 한다. 즉 '오싹한' 보다는 '연애'에 더 방점이 찍히는 영화라는 얘기다. 남주인공인 마술사 조구는 그래서 공포 위에서도 그것을 이완시켜주는 마술을 손에 쥐고 있는 캐릭터다. 공포가 멜로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이 캐릭터 속에 들어있다.

조구는 여리의 공포스런 환경 속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멜로를 한다. 그녀의 귀신 나오는 집에서 조구가 여리와 춤을 추고, 키스를 하는 장면, 그리고 점점 여리가 마음을 열고 조구와의 사랑을 이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하나의 마술처럼 여겨진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마술.

어쩌면 이것은 우리네 사랑에 대한 하나의 우화인지도 모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우리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낯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갖고 있다. 바로 이 두 두려움을 넘어서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두려우며, 그 감정을 통해 타인도 똑같이 외롭고 두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감'의 힘이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꾼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오싹한 연애'는 바로 그 흥미로운 지점을 마술처럼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다.

'몽땅 내 사랑', 진짜 막장 시트콤이 되지 않으려면

MBC 시트콤 '몽땅 내 사랑'의 시청률은 평균 10%(agb 닐슨) 정도.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성적도 아니다. 그럭저럭 시청을 할 만하지만 보고나면 그다지 여운이 남질 않는다. 확실한 웃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청률보다 더 안 좋은 건 화제성이다. 그다지 확실한 반응이 별로 없다. 관성적인 시청이 많다는 얘기다.

'몽땅 내 사랑'의 출연진만을 놓고 보면 이런 상황은 사실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연기 지존으로 불리는 김갑수가 있고, 예능돌로 가장 잘 나가고 있는 조권과 가인이 있다. 박미선 같은 이미 시트콤 경험이 있는 베테랑 코미디언도 있는데다가, 비스트의 윤두준 같은 시트콤을 활기 있게 만드는 신선한 얼굴도 있다. 그런데 왜 별 화제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왜 확실한 팬층을 확보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몽땅 내 사랑'은 재미 포인트로서 '막장 시트콤'을 주창했다. 한 마디로 스토리가 팔자 고치기 위해 김원장(김갑수)을 속이고 결혼하는 박미선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황옥엽(조권)이 하도 사고를 치는 통에(김원장하고도 얽힌다) 박미선은 가짜 아들을 김원장에게 보여주고 결혼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사기 결혼인 셈이다. 그래서 옥엽은 미선과 함께 살지 못하고 승아(윤승아)네 집에 얹혀산다.

'몽땅 내 사랑'이 아무리 작금의 세태를 비판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한 근거 제시는 필요한 법이다. 세태 비판은 사회적 환경을 비판하는 것이어야지 인물 비판에 머물러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국 이런 세태의 문제가 그 사람만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저 아무에게나 빌붙는 박미선네 가족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주인공들의 행동에 근거나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은 그저 인물의 매력을 떨어뜨리게만 만든다.

매력 없는 캐릭터가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다. 캐릭터가 구축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무리 김원장이 길바닥에서 똥을 싸고, 금지(가인)가 작은 눈 때문에 성형을 고민하며, 옥엽이 승아만 보면 자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오버를 한다고 해도 거기에 합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캐릭터는 세워질 수 없다. 캐릭터가 없으면 웃음은 그 때 그 때 임기웅변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결국 시트콤 같은 연속적으로 방영되는 장르에서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지속적인 시청은 어렵게 된다.

현재 '몽땅 내 사랑'의 설정들이 대부분 멜로관계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김원장과 박미선 사이의 멜로는 이 시트콤의 설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옥엽과 승아, 승아와 전태수 같은 멜로 설정은 시기상조다. 멜로는 결국은 가장 쉽고도 뻔한 장치로 흐를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아이디어들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캐릭터가 좀더 분명하게 세워져야 할 시간에 멜로 라인을 만드는 건 시트콤을 더 고리타분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시트콤은 말 그대로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즉 상황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그 상황은 희극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희극은 비극만큼이나 공감대를 필요로 한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황과 웃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쩌면 희극이 아니고 비극인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몽땅 내 사랑'은 시트콤이라고는 하지만 어쩔 때는 그저 조금 과장된 드라마로 보일 때가 많다. 시트콤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라는 얘기다.

'막장 시트콤'이라고 주창하고 나왔을 때 솔깃했던 것은 막장 드라마가 갖는 비현실성을 패러디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돌아보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김갑수 같은 명배우가 자리한다는 것은 그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저 말 그대로의 엉성하다는 의미로서의 막장 시트콤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몽땅 내 사랑'이 잃어버린 존재감을 다시 찾으려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아이디어로 캐릭터 하나하나를 다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미 각자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출연진들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면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공감대가 앞으로라도 형성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10% 정도의 시청률을 꾸준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회는 있는 셈이다.

코미디에서 눈물과 웃음은 어떻게 같을까

순간 박영규의 얼굴이 바뀌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아버지로 돌아간 박영규는 보고 싶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먼저 하늘로 떠난 아들에게 영상편지를 보냈다. '승승장구' 내내 밝고 자신감이 넘치고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순간 바뀐 박영규의 눈물어린 모습과 겹쳐졌다. 그것은 그가 한 말이 그저 멋진 표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코미디는 생존의 진실이 담겨지지 않으면 코미디가 아니에요." "눈물과 웃음은 똑같은 거예요. 내 웃음은 눈물이 없는 사람은 느낄 수 없습니다. 내 웃음은 눈물 속에서 갓 구어낸 빵 같은 겁니다."

"장인어른.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 한 마디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던 배우, 박영규. 5년 전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보내고 이 땅을 떠났던 한 아이의 아버지, 박영규. 5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박영규에는 이 두 명의 박영규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느끼한 표정으로 스텝을 밟으며 여심을 공략하는 낭만주의자이자, 웃음을 줄 수 있다면 내면의 수치스러움까지 아낌없이 끄집어낼 수 있는 천상 배우이면서 동시에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여전히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그가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연기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고, 거기서 어떤 진심까지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상반된 두 박영규를 하나로 끌어안을 수 있는 그만의 커다란 그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연기하는 것"이며, 늦게 도착했다고 타박을 하는 영업부장에게 투덜거리다가도 무대에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둥 밝게 노래를 부르는, "여기에서 요 바뀌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 변신의 귀재는 바로 그 상반된 깜짝 반전으로 웃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니 그가 한참 폼을 잡을 때는 진짜 멋을 내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려 웃음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릴 때, 우리가 포복절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웃음에는 눈물이 섞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코미디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승승장구'에서 박영규는 유난히 '인생의 법칙'을 많이 얘기했다. "20대는 맞게 사는 게 이상하고 틀리 게 사는 게 맞는 것"이라고도 말했고, 미달이 김성은이 나와 아픈 과거를 얘기할 때는 "고통은 곧 하늘이 준 보약"이라고도 했으며 "어렸을 때 빛을 봤기 때문에 또 겪어야 될 어려움(그림자)"이라고도 말했다. 아마도 그가 말한 그토록 많은 '인생의 법칙'들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하는 다짐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는 김성은을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다. 그러니 김성은을 보면서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가 보여준 김성은에 대한 위로 속에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다짐이 모두 담겨 있었으니까.

박영규는 웃음 뒤에 눈물이 있고, 고통이 보약이 되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인생의 법칙'처럼 눈물 섞인 코미디를 연기해 보여주는 배우다. '승승장구'에서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바로 이 코미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드라마, 영화에 부는 눈물과 웃음의 이중주

시골에서 상경해 가정부로 얹혀사는 자매. 동생의 학용품을 구하기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고, 은인인 외국인 아저씨에게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버린 커튼으로 손가락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옷을 만드는 언니. 먹고 싶은 것 앞에서 유혹을 참지 못하는 동생을 구박하는 집주인 딸.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시트콤이지만 그 안에 전형적인 신파 코드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가슴 한 구석이 짠한 자매의 삶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이라는 장르 속으로 들어와 어떤 과장된 스토리를 입게 되자 주책없게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동생 신애의 학용품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뭐든 하려는 언니 세경의 마음은 안쓰럽지만, 그런 그녀가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간다는 과장된 설정은 웃지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눈물과 웃음의 공존. 이른바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신파 시트콤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런 경향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주말 드라마의 최강자로 자리한 '솔약국집 아들들'은 곳곳에 신파적인 설정들이 들어가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훈훈한 웃음이 공존한다. 가족드라마의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인 혼사장애를 남성 버전으로 재해석한 이 드라마는 사형제를 내세움으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 형제가 눈물을 짜게 만드는 신파적 상황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다른 한 형제는 코미디에 가까운 경쾌함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올 여름 극장가를 강타한 우리 영화 두 작품이 모두 신파와 웃음을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해운대'는 재난영화가 갖는 신파적 스토리에 코미디에 가까운 드라마를 덧붙였다. 그러자 그 결과는 두 배로 증폭된 눈물과 웃음으로 돌아왔다. 이미 재난영화임을 알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등장인물에 대해 긴장감을 갖게 마련이었다. 영화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까지 이 긴장을 뒤트는 인물들의 코믹함으로 웃음을 두 배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 배의 웃음으로 친근해진 인물들이 만드는 후반부의 눈물 역시 두 배가 되었다.

'국가대표'는 지질하다 못해 신파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균 이하의 인물들이 스키 점프라는 극한의 위치에서 오히려 뛰어 내림으로써 그 벼랑 끝의 절망을 희망의 비상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으로 눈물과 웃음을 엮어냈다. 지나치게 전형적일 정도로 보이는 인물들의 삶은 심지어 보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지만, 그런 인물들이 새처럼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그 답답한 만큼의 응축된 힘을 갖게 만들었다. 웃음과 눈물이 섞이면 이처럼 양자가 모두 증폭되는 이유는 무얼까.

신파와 코미디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두 고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파야 그렇다 치고 코미디가 어떻게 고통을 기반으로 하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인물의 고통을 과장시키거나 희화화할 때 발생한다. 슬랙스틱 코미디처럼 본인은 넘어지고 망가지는 지점에서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코미디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즉 고통을 의도적으로 고통으로 그려내면 신파가 되지만, 그 고통을 고통 없이 희화화시키면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웃음의 이중주를 그려내는 이들 작품들은 바로 이 경계선을 오감으로써 신파와 코미디를 동시에 그려낸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고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땅의 현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수천 만 명씩 그 극장 문턱을 넘어서며 웃고 울었을 관객들과 TV 앞에서 깔깔 웃다가 눈물 한 방울씩 찍어내는 시청자분들. 이 시대 우리는 어쩌면 무언가를 붙들고 한없이 울고 싶거나, 잠시라도 모든 걸 잊고 맘껏 웃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이 뒤범벅된 감정을 이리저리 무한정 건드리는 이들 콘텐츠들에 쉽게 매혹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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