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드라마의 모든 클리셰를 뒤집고 있는 이 드라마, ‘남남’

남남

예사롭지 않게 봤는데 이 드라마는 그 흔한 출생의 비밀도 신박하게 풀어낸다. 지니TV <남남> 이야기다. 진희(수영)의 숨겨진 아빠인 진홍(안재욱)이 등장하는 회차는 제목부터가 어딘가 ‘불순(?)’하다. ‘엄마의 남자’라니. 지금껏 그 흔한 가족드라마들에서 엄마의 남자라면 ‘남편’이거나 ‘불륜 상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남남>에서 진홍은 진희의 엄마 은미(전혜진)의 남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륜 상대도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 사랑했지만 어쩌다 헤어진 남자이고, 하룻밤에 덜컥 낳게 된 딸 진희의 유전자적 아빠다. 

 

‘엄마의 남자’라는 불순해 보이는 제목은 그래서 어딘가 신박하게 다가온다. 출생의 비밀을 그토록 활용한 드라마들이 갑자기 나타난 부모가 “내가 네 애비다”라고 말하며 자식의 팔자를 고쳐주는 그런 방식이 대부분이었다면, <남남>은 도대체 이 남자(태어난 후 진희는 그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러니 완전 초생짜 남남이 아니고 뭔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부터 던져 놓는다. 심지어 경찰인 진희는 자기 집을 자꾸 살피고 엄마를 따라다니는 이 남자를 의심한다. 적어도 추행범이거나 심지어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 찾아온 진홍에 대한 은미의 마음이 복잡하다. 자신만 홀로 딸 키우느라 고생했던 그 세월동안 진홍이 버젓한 의사가 되어 나타난 게 어딘가 억울하다. 물론 진홍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은미를 찾아오기 위해 가출까지 했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국 포기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은미는 진홍이 “내 딸”이라고 하는 말 한 마디에도 발끈한다. “어디서 감히 내 딸이래?” 하고 또 “다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등신...”이라고 진홍을 욕한다. 말과 달리 진홍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보통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상대가 나타나면 그 오랜만의 해후에 눈물바다가 되는 게 그간 가족드라마의 공식 아닌 공식이었지만, <남남>은 일단 각자의 삶을 살아온 상대에게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한다. 은미의 절친이자 진희를 친딸처럼 키운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는 미정(김혜은)은 그렇게 나타난 진홍에게 먼저 화장실로 끌고 가 주먹다짐부터 한다. 은미가 고생했던 세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제 일처럼 흥분하는 미정이다. 

 

출생의 비밀이 결국 드러나는 장면도 틀에 박힌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미정에게 두드려 맞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지만 진홍은 계속 찾아와 은미에게 “친구라도 괜찮다”며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그런 진홍을 추행범으로 의심한 진희가 수갑을 채우려 하자, 은미가 결국 그 사실을 털어 놓는다. “얘 네 아빠야. 씨.”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남>이 갖고 있는 가족에 대한 색다른 관점이 담겨 있다. 

 

그 관점은 가족에 있어 ‘혈연’보다 중요한 건 현재의 관계가 갖고 있는 진심이다. 제아무리 피로 엮여 있어도 가족이라 말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고,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시선. 그래서 이 출생의 비밀은 혈연이기 때문에 당연히 “너는 내 딸”이거나 “당신은 내 아빠”가 아니라 바로 그 지점부터 만들어가는 관계가 비로소 그걸 증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행스러운 건 이 진홍이라는 남자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비록 어린 나이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은미와 헤어졌고 그래서 은미와 그의 딸 진희가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진홍의 의도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뒤늦게 찾아와 그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도 단지 책임을 지려는 것만이 아니라 은미에 대한 애정 또한 있어서라는 게 느껴진다. 

 

예고편에 슬쩍 등장한 것이지만, 이제 이 ‘출생의 비밀’은 흥미롭게도 딸인 진희는 반대하지만 점점 마음을 열게 된 은미와 진홍이 가까워져, 딸의 눈을 피해 비밀 데이트를 하는 기묘한 상황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저 혈연으로 이어지면 가족이라는 흔한 ‘출생의 비밀’ 공식을 벗어나 <남남>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족에 대한 관점이 투영되어 나온 결과들이다. 

 

그러고 보면 <남남>은 지금껏 가족드라마의 클리셰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왔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건 부제를 통해서도 느껴지는데, 1화인 ‘엄마vs딸’은 모녀 관계를 뒤집는 자매 같은 관계를 보여줬고, 3화 ‘가‘족’ 같은’과 4화 ‘내편’에서는 가족이지만 남남보다 못한 이들과 남남이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비교해 보여줬다. 5화 ‘엄마의 남자’도 마찬가지다. 출생의 비밀을 뒤집어 아빠로는 인정 못하더라도 엄마의 남자로 보려는 시각이 이 안에 담겨 있어서다. 

 

가족에 대응하는 ‘남남’이라는 제목을 의도적으로 꺼내놓고 거기서부터 다시 이 시대에 어울리는 가족상을 찾아가는 게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중요한 가치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라도 먼저 남처럼 바라보는 예의가 필요하고 거기서부터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가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나눈다는 이 관점은 그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와 울림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간 흔한 가족드라마의 클리셰들을 여지없이 뒤집어 놓는 통쾌함도 빼놓을 수 없지만.(사진:지니TV)

 

‘킹더랜드’, 감정노동사회, 사적 노동의 불편함

킹더랜드

“안녕하세요? 회장님. 저 킹호텔 천사랑입니다. 네 잘 지내세요? 얼굴 뵌 지 너무 오래된 거 같아서 안부 전화 드렸어요. 아, 아닙니다. 회장님이 오실 때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더 감사하죠. 네, 그러면 시간 되실 때 꼭 한 번 들러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JTBC 토일드라마 <킹더랜드>에서 천사랑(임윤아)은 VIP 고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응대를 해준다. 

 

그렇게 하라는 상사의 지시에 응하는 것이지만 그 대화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사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전화는 호텔 전화기가 아닌 천사랑의 휴대폰으로 거는 전화다. 본래 고객 서비스라는 것이 공적인 느낌보다, 사적인 느낌을 줄 때 더 만족감을 주기 마련이다. 이른바 친밀감과 진정성이 있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인데, 감정도 돈으로 사고 파는 감정노동사회가 만들어낸 이 풍경은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그 문제의식을 <킹더랜드>는 킹그룹의 2세이자 킹호텔 본부장인 구원(이준호)이라는 인물을 통해 끄집어낸다. 어려서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웃으며 응대하는 걸 보고 ‘거짓 웃음’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딘지 마음에 들어온 천사랑이 하는 이런 VIP 고객 응대를 듣고는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방금 어디 전화 건거냐고? 아주 지극정성이네. 손수 전화까지 하고? 뭐, 인센티브 때문에 그런가? 그깟 돈이 뭐라고 지금.” 하지만 천사랑은 그것이 그저 VIP들의 매출활성화를 위해 내려온 지시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품위’ 운운한다. 이런 일을 해도 품위는 지키라고. 그는 지나치게 사적인 느낌으로 손님들에게 ‘하하호호’ 웃으며 말하는 것이 품위 떨어지는 일이라고 쏘아붙인다.

 

물론 이 에피소드에는 <킹더랜드>가 장르적으로 갖고 온 전형적인 현대판 신데렐라와 왕자님 멜로의 판타지가 들어 있다. 구원이 천사랑에게 품위까지 운운하며 쏘아붙이는 건 그런 응대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천사랑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천사랑에게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구원은 그가 다른 이에게 사적으로 응대하는 것이 마뜩찮은 것이다. 

 

그래서 <킹더랜드>를 보다 보면 구원이라는 현대판 왕자님 캐릭터의 새로운 면면을 보게 된다. 과거의 현대판 왕자님이란 신데렐라를 구원해 신분상승을 해주는 그런 존재로 그려지곤 했지만, <킹더랜드>의 구원은 여기에 감정 노동 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공감대를 더해 넣는다. 먹고 살기 위해 감정까지 넣어가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현실 속에서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일침하는 구원이 색다른 판타지로 다가오는 것. 

 

물론 그 감정 노동이 누군가에게는 생계라는 것 또한 이 구원이라는 왕자님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호텔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생산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하게 하는 이른바 ‘슈퍼파머위크’에 자기 직원들은 참여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던 구원은 생각을 바꾼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감정 노동에 해당하는 과잉 응대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인센티브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킹더랜드>는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한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조에 익숙한 클리셰들로 채워져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적어도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덜 주는 이유는 감정 노동 시대의 단면들을 가져와 그걸 거부하는 구원 같은 색다른 왕자님을 세워둬서다. 감정 노동의 웃음을 경멸하는 이 왕자님과, 어쩔 수 없이 그 웃음을 지어야 하는 신데렐라의 멜로는 이 시대의 새로운 계급을 드러낸다. 마음껏 웃거나 화낼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 <킹더랜드>는 바로 그 ‘감정의 계급’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그리고 있다. (사진:JTBC)

'앨리스'의 시간여행, 예언서와 클리셰에 담긴 메시지들

 

시간여행에 평행세계. 다소 복잡한 세계관을 갖고 있지만 9회까지 방영되면서 SBS 금토드라마 <앨리스>의 세계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간단하게 보면 2050년 시간여행 시스템 앨리스를 가진 미래인들이 과거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평행세계의 부딪침을 다루는 드라마다.

 

이야기 구조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이는 이유는 순방향으로만 흐르던 시간이 앨리스 시스템에 의해 역방향으로도 돌아가게 된 세계관 때문이다. 미래인인 윤태이(김희선)는 연인인 유민혁(곽시향)과 함께 2050년에서 1992년으로 온다. 예언서를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예언서를 갖고 있는 장동식(장현성)이 살해되고 윤태이는 그의 어린 딸을 구해낸다. 그런데 윤태이가 구해낸 그 딸은 바로 어린 나이의 자신이다.

 

그런데 그 딸을 구한 미래인 윤태이는 마침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간여행으로 방사능에 노출될 것을 꺼려하며 그 시간대에 남아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윤태이는 박선영이라는 이름으로 아이 박진겸(주원)을 낳고 홀로 키운다. 그러니 미래에서 온 윤태이(박선영)와 장동식의 딸로 성장하는 과거인 윤태이가 그 세계에 공존하게 된다. 과거인 윤태이가 자라나 대학생이 되던 2010년 거대한 달이 뜨던 날 박선영은 살해당한다. 박진겸은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 고형석(김상호)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 형사가 되고 어느 날 드론을 쫓다가 교단에 선 괴짜교수 윤태이를 만나고 놀란다.

 

만일 세계가 하나만 존재한다면, 이 이야기는 계속 빙빙 도는 이상한 세계가 되어버린다. 즉 미래에서 과거로 와서 구해낸 윤태이가 자라서 다시 미래인 윤태이로 성장하고 그는 앨리스 시스템을 만들어 다시 과거로 가는 그런 과정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말한다. 평행세계의 이론이 그러하듯이 여러 가능성의 세계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미래에서 과거로 와 과거를 바꿔놓으면 다른 선택지의 미래 세계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 복잡한 세계관을 <앨리스>는 의외로 쉽게 풀어냈다.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박선영과 박진겸의 모자관계, 그리고 과거인 윤태이를 다시 만난 박진겸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연인으로서의 애정이 묘하게 얽힌 감정 변화, 시간여행을 경험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의 그리움 같은 다소 익숙한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의 코드들을 활용한다.

 

중요한 건 이 세계관 속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무얼 지향하고 있고 그것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기 위함인가 하는 점이다. 그 지향점이 없다면 이야기의 동력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앨리스>에는 과거인들이 있고 앨리스 시스템으로 시간여행을 통해 미래에서 과거로 온 미래인들이 있다. 그리고 역시 미래에서 온 알 수 없는 어떤 세력이 윤태이와 박진겸을 위협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드라마 초반부터 지금까지 찾고 있는 건 바로 '예언서'다. 도대체 이 예언서가 뭐기에 이렇게 모두가 집착하는 걸까

 

예언서는 말 그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역사처럼 기록된 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빼앗기 위해 괴한이 찾아들었을 때 장동식 박사는 예언서의 맨 마지막장을 찢어 어린 딸(윤태이)에게 준 바 있다. 왜 책의 어느 특정 부분도 아닌 마지막장을 찢어 줬을까. 그것은 시간여행이라는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또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을 자유자재로 여행할 수 있게 되는 세계라면 가장 중요한 건 그 끝이다. 보통의 삶은 어떻게 끝날지 모른 채 시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하지만 끝을 알게 된다면 그 운명을 바꾸려는 욕망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저마다의 욕망의 부딪침은 혼돈과 파멸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윤태이도 박진겸도 박선영이 남기고 간 타임카드를 가진 채 우연한 사고를 겪으면서 시간여행을 경험한다. 박진겸은 2010년 자신의 어머니인 박선영이 죽던 날로 돌아가지만, 그는 그 살인을 막지 못한다. 윤태이는 2021년으로 넘어가지만 박진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절망한다. 과거로 가도 미래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다만 일어날 일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이미 벌어진 일을 알고는 절망하는 걸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2020년 현재로 다시 돌아온 윤태이와 박진겸은 모두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미래로 갔던 윤태이는 거기서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지만 그들 사이에는 1년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2020년으로 되돌아온 윤태이는 현재를 함께 겪어가는 자신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정으로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애초에 시간여행을 소재로 가져오면서부터 어쩌면 <앨리스>는 그런 시간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행위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많은 일들을 겪고 또 시간을 넘나들어도 이들에게 남은 소중한 것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나눴던 어찌 보면 틀에 박힌 가족드라마나 멜로드라마 속 클리셰 같은 일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지배하고 그 끝을 알려고 하는 건 오히려 그 일상들을 모두 헛되게 만들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게 만들 뿐이니.(사진:SBS)

‘벌새’, 이 작은 영화가 세계를 쏜 까닭

 

벌새는 현존하는 새 중 가장 작은 새들로 가장 작은 건 몸길이가 5cm에 몸무게는 2.8g에 불과하다고 한다. 가만히 보면 마치 헬리콥터처럼 정지해 서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능한 건 엄청난 속도의 날갯짓 때문이다. 빠른 벌새는 초당 55회의 날갯짓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영화 <벌새>에는 벌새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제목을 단 건 아무래도 여기 등장하는 14살 중학생 은희(박지후)라는 인물과 그 인물을 들여다보는 카메라가 마치 벌새와 그 벌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선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게다. 아주 작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며 세계와 대결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그런 위대한 존재.

 

<벌새>가 다루는 이야기의 시공간은 1994년 대치동이다. 이 영화에서 이 시공간이 중요한 건, 그 시점에 벌어진 성수대교 붕괴 같은 거대한 사건과 은희가 대치동 아파트에서 당대의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그 일상이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 일상은 사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극적인 사건 같은 것들을 끌어오지는 않는다. 방앗간을 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때론 지나치게 권위적인 남편과 맞서기도 하지만 결국은 순종적인 어머니,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오빠와 그런 집안에서 탈출하듯 부모가 원하는 반대방향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언니.

 

어찌 보면 당대의 여느 집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집안 풍경들은 그러나 은희라는 섬세한 인물의 시선으로 아주 자세히 천천히 들여다보자 무수한 감정들을 품어낸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은희가 남자아이와 연애를 하고 유일한 친구인 지숙과 때론 탈선을 하기도 하며 자신을 따르는 여자 후배와도 연애 감정을 갖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자잘하게 보여진다.

 

그 평이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사건이랄 수 있는 건 힘겨워 하는 은희가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유일한 어른 영지 선생님(김새벽)을 만난 일이다. 마음을 다치고 찾아온 은희에게 항상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며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말해준 인물. 영지라는 인물의 존재는 이 평이해 보이는 일상과 대비되면서 그것이 평범하지 않은 폭력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준다.

 

디테일이 클리셰를 극복하게 해준다는 건 영화를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벌새>는 평이한 일상들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좀 더 오래도록 들여다봄으로써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인물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감정 같은 것들을 찾아내게 해준다. 그건 마치 멈춰서 있는 것 같지만 무수한 날갯짓에 의해 버텨지고 있는 것들이라는 걸 카메라의 ‘오래 들여다보는’ 시선이 보여준다.

 

이 부분은 <벌새>라는 작은 영화가 외국 영화제에서 20여개가 넘는 상을 받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작은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에게 잔잔하지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일 수 있다는 걸 영화는 은희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같은 사건 또한 당대의 가족과 사회의 공기로 자리 잡던 가부장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결과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거대한 사건이 사실은 우리의 이런 작은 날갯짓들이 전하는 항변과 버텨냄을 무시함으로써 생겨난 비극이라는 것.

 

요즘처럼 현란하고 빠른 속도감의 영상들이 마치 콘텐츠의 금과옥조처럼 되어 있는 시대에 <벌새>는 그래서 정반대로 가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수하고 너무나 느려 심지어 정지된 영상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는 장면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여백이 많은 만큼, 그 영상을 통해 저마다의 추억과 생각들이 더해지면서 더더욱 풍부해지는 영화. 역주행하며 10만 돌파를 눈앞에 둔 <벌새>의 작은 날갯짓이 의외로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사진:영화'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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