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맨>과 <남격>, 투표 소재 참신하네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하였거늘, 뽑아준 백성들의 은혜는 잊은 듯, 그래도 백성들에겐 언제나 투표의 힘이.’ <런닝맨> 왕의 전쟁 편에 나온 이 짧은 자막은 대선에 즈음하여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게임 속에서 잘 표현해냈다. 이름표를 떼도 죽지 않는 왕과 오로지 투표를 통해서만 왕을 바꿀 수 있는 백성의 대결. <런닝맨> 특유의 게임으로 보여진 1시간 반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있는 유권자들에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런닝맨'(사진출처:SBS)

왕(王)자를 완성해 가는 ‘맛 대 맛 선택 레이스’는 최종 대선을 앞두고 펼쳐지는 후보들의 레이스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예능적으로 장작을 패고, 기와를 깨고, 콩을 옮기고, 브로콜리를 멀리 불어 보내는 경기를 통한 은유였지만 막판에 한효주와 이광수가 왕 유력후보가 되어 양자대결을 벌이는 모습은 작금의 대선 구도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왕의 전쟁’이라는 본격적인 게임에서 왕과 백성의 대결을 그린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것이 대결구도를 이루는 것은 권력 관계 때문이다. 왕은 백성들의 투표에 의해 뽑혀지지만 막상 왕이 되서는 백성들을 잡아먹는 권력자로 변모한다. 초대 왕(?)이 된 광수는 권좌에 올라 이렇게 말한다. “왕을 시해하고 이름표를 떼려했던 그 모든 역적들. 투표를 통해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의 왕 권력을 탐하는 자들. 내 반드시 하나하나 잡아내서 기필코 뿌리째 뽑아 버릴 것이다. 나는 광해다. 김종국 넌 죽었다.”

 

물론 웃음을 위해 설정된 연기지만 왕의 변심은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을 잘 드러내준 말이다. 이것은 투표에 의해 교체된 새로운 왕 한효주나 유재석도 마찬가지다. 백성으로서는 도망 다니기 바쁘다가 막상 왕이 되자 걷는 태도나 말투부터 바뀌는 그 모습은 보는 이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결국 투표용지를 찾아서 새로운 왕으로 바꾸라는 이 <런닝맨> 게임의 룰은 왕을 견제할 수 있는 백성의 유일한 힘이 투표에서 나온다는 걸 말해준다. 이만한 예능의 투표 독려법이 있을까.

 

한편 <남자의 자격>에서는 ‘남자 그리고 절대권력’이라는 주제로 역시 대선에 즈음하여 의미심장한 소재를 선보였다. 즉 새로운 리더를 뽑는 선거를 통해 절대 권력을 잡기 전의 모습과 잡은 후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투표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줬던 것. 투표 전에는 “촬영을 쉬게 하겠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확실한 과거 청산. 과거의 잔재를 모조리 불사르겠다.”고 각오를 보이던 후보들이 막상 리더로 뽑혀 절대 권력을 쥐게 되자 전횡을 일삼는 모습은 웃음 뒤에 쓰디쓴 현실을 실감하게 했다.

 

대선 막판에 즈음하여 <런닝맨>이나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것은 결국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막상 쥔 권력은 국민을 잊기 일쑤다. 그러니 국민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투표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 수밖에. 이번 대선이 그 국민의 힘을 가장 크게 보여준 선거가 되길 기원한다.

'MB의 추억', 유인촌도 울고 갈 명연기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하고 지럴 에이 우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겄어.”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가 이렇게 맛깔난 욕을 툭툭 쏟아냈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시 선거 광고를 기억한다. 뜨거운 국밥을 연거푸 입에 넣으며 욕을 듣는 이명박 당시 후보.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의 욕들은 조금씩 뉘앙스를 바꿔나간다. “청계천 열어놓고 이번엔 뭐 해낼껴, 밥 더줘? 더 먹어 이놈아.” 이제 욕은 욕쟁이 할머니의 진술과 행동을 통해 밥이라는 격려로 바뀌게 된다. “밥 쳐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이 말은 설사 욕먹을 짓을 했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데 밥이라도 챙겨주자는 경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를 끌어낸다. 밥은 여기서 표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

기가 막힌 이 이미지 광고는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경제대통령의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주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MB의 추억>은 이 광고를 다시 끄집어낸다. 당시 광고에 자막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아직 배고픕니다”라는 말은 그러나 이제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것이 사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 의지의 배고픔이 아니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탐욕의 배고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게 거짓 이미지였다.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는 사실 연기자였고, 광고 속 내용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제작진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산 코미디’라고 붙였고, 그래서 이명박 당시 후보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 웃음이 빵빵 터지지만 절대 웃을 수만은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MB의 추억>이다. 그 화면 속에는 유인촌 전 장관이 등장해 “지금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한 시절, 그분은 누구인가”하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 유명한 747공약(7% 성장, 4만 달러 시대, 7대 강국)을 설파한다. 유인촌은 90년에 방영되었던 KBS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역할(이 드라마는 이명박을 모델로 했다)을 했던 연기자. 그런 그가 ‘영웅의 시대’를 말한다. MBC에서 당시 방영되었다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를 미화했다는 논란을 일으켰던 <영웅시대>를 끄집어낸 것. 이미지는 그렇게 당시 힘겨웠던 서민들의 눈을 현혹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당시 대선의 풍경을 조목조목 잡아내가며 그것이 일종의 쇼였음으로 상기시킨다. 대선 후보들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주는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는 장면은 실로 압권이다. 여기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수를 두 그릇이나 뚝딱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동영 당시 야권 후보가 연설 도중에 한 유권자가 자꾸만 먹으라는 음료를 “연설 끝나고 먹겠다”고 버티는 장면과 병치된 이 국수 시퀀스는 당시의 야권의 무능까지도 포착해낸다. 당시 야권은 이 정치쇼에서 연기조차 출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반면 이명박 당시 후보는 안 해본 것 없는 백전노장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뭐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그는 풀빵 장수에게 자신이 어설프게 만들어 잘 익지도 않은 풀빵을 서민들에게 건네면서 불이 약하다고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우리가 강제한 것이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거야.’ 이 괴벨스의 어록으로 시작해서 이 어록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를 혐오하고 그래서 무관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각종 거짓말과 연기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호도되어 치렀던 그 대선이 가져온 대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 아픈 꾸짖음을 감독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시 선거운동을 하며 소리쳤던 이명박 후보의 목소리로 전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잘한다고 할 게 아니라 지난 5년간 잘했어야지, 어제 못한 사람이 내일 잘할 수 있어요? 정권을 바꿔야 합니다." 이 당시 유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은 2012년 <MB의 추억>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온다.

 

“국민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데,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국민을 마음대로 하는 건 줄 알아요. 기가 막혀요, 정말.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만들어놔야 합니다.” <MB의 추억>을 통해 보여주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당시의 이 유세 발언은 지금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또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X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문제”라고 한 전여옥 전 의원의 발언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MB의 추억>은 우리에게 거짓말과 명연기로 코미디가 되어버린 당시 대선의 풍경을 아프도록 웃기게 보여준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 명연기.

오디션 프로그램과 투표가 해줄 수 있는 일

 

바야흐로 '투표의 시대'. 우리는 이제 어디서든 투표를 만나고 투표를 행하고 그 투표가 미치는 영향을 목도하며 살고 있다. '슈퍼스타K2'는 투표로 우리들의 스타를 우리들의 손으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허각 같은 스펙은 없어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를 당당히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위대한 탄생'의 투표는 백청강 같은 조선족 동포를 그 맨 꼭대기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고, '나는 가수다'의 청중평가단들은 투표를 통해 임재범이나 박정현, 윤도현, 김범수 같은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드를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슈퍼스타K'(사진출처:엠넷)

우리는 이 투표 시스템을 통해 투표가 가진 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슈퍼스타K2'에서 우리가 허각에 투표한 이유는 세상이 얼마나 스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처절히 느꼈던 탓이었을 게다.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했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음악을 놓지 않았던 그 진심을 우리는 봤고, 그래서 적어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그가 오로지 실력만으로 공정하게 정상에 서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투표가 실제로 현실이 되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무대에 선 그를 통해 보고 있다.

 

또 겉으로는 투표 시스템을 세워두고 마치 공정하게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결국은 연줄에 의해 제 자식 챙기듯 이뤄지는 영향력 있는 자들의 사심에도 우리는 문제제기를 해왔다. '위대한 탄생'에서 멘토들이 동시에 심사를 하면서 빚어진 '내 자식 챙기기'에 대해 비판여론이 들끓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의 줄과 관계에 의해 구조화되는 권력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실력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조성되는 그 유착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그만큼 우리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자주 그런 상황에 좌절했던가를 말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투표 시스템을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대중들은 분개했다. '나는 가수다'에서 김건모가 투표에서 탈락이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도전을 하려던 것을 우리는 여론을 통해 거부했고, 그렇게 김건모와 재도전을 결정했던 PD 역시 동반 하차하게 했다. 물론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투표란 어쩌면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그 규정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대중정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큼 투표를 대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전성시대는 어쩌면 투표에 갈급한 대중들의 갈증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힘 있는 자들의 권력에 의해, 또 그들이 공고하게 만들어놓고 그 누구도 진입하기 어렵게 구축해놓은 네트워크에 의해, 또 어쩌면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선별된 정보의 힘에 의해 제멋대로 농단되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들은 어쩌면 이 자그마한 프로그램 안에서라도 자신들이 투표한 이가 그 꼭대기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거꾸로 대중들이 투표를 통해 누군가를 지지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좌절되곤 했던 현실의 욕망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투표가 물론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어도 적어도 자그마한 현실을 바꾼 것만은 분명하다. 그만큼 투표는 일상화되었고, 그 일상화된 투표는 현실이 되었다. 이제 이렇게 우리가 축적해온 경험들을 통해 이제 좀 더 큰 현실을 꿈꾸어야 하는 시간이다. 누군가에 의해 기획되고 주어진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기획하는 삶을 살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렸다. 큰 꿈에 좌절했기에 작은 꿈에 투표해왔던 우리들이라면, 이제 그 작은 꿈이 투표를 통해 실현되었듯이, 큰 꿈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걸 알 것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투표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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