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이 보여주는 시트콤에 가까운 ‘패떴’

리얼 버라이어티를 두고 마치 대본이 부재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물론이고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는 대본이 있다. 대본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최근 방송작가협회에서 발행되는 잡지, ‘방송문예 12월호’에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패밀리가 떴다’의 ‘강골마을편’ 대본이 게재되었다. 이 잡지는 방송작가들과 예비생들을 위한 콘텐츠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매번 방송 프로그램의 대본을 부록처럼 수록해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소개된 ‘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구성 대본 이상의 디테일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주어진 상황(이것은 사실 모든 대본들이 가진 것이다)과 그 상황에서의 대사까지 각 캐릭터별로 자세하게 적혀져 있다. 대본에는 처음 패밀리가 집을 찾아갈 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는 내용은 물론, 갔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응대까지 적혀져 있다. “이따 밤에 닭들 뒤에 돌아다니니까 한 마리 잡아서 먹어!”하고 할아버지가 얘기하면 윤종신이 “근데 저희가 잡아서 먹어야 되는 거죠? 못 잡으면 못 먹는 거죠?”하고 묻는 식의 대사들이다.

물론 대본이 제시하지 않는 대사와 행동도 있다. 예를 들면 닭을 요리하는 과정은 ‘못 잡으면 진짜로 못 먹습니다. 열심히 잡아주세요’정도의 미션제시로 끝난다. 하지만 상황에 따른 각자 캐릭터들의 반응은 정해진 멘트의 분위기를 따른다. 초반부터 유재석과 이효리의 국민남매 관계설정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때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이효리가 죽비로 유재석의 ‘X침’을 놓는 장면 역시 대본에 예시되어 있는 바다. 이것은 두 사람의 유난히 친한 관계를 위해 설정된 것들이다.

물론 대본대로 딱딱 맞춰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 세세한 대본이 말해주는 것은 ‘패밀리가 떴다’가 하나의 시트콤처럼 철저히 꾸며진 상황과 지시된 리액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점이다. 이것은 또한 ‘패밀리가 떴다’만이 가진 판타지의 이유가 된다. ‘패밀리가 떴다’는 가상 버라이어티쇼에서 출발했던 것이며,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인 것처럼 오인되면서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상황극이 리얼리티처럼 보일 때, 즉 시트콤이 진짜처럼 보일 때, 그것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반면 ‘1박2일’의 대본은 ‘패밀리가 떴다’처럼 세세하지 않다. 미션 제시를 팀원들과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강호동의 대사가 구체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 팀원들은 거기서 나름대로의 애드립을 쳐야 하는 대본이 거기에 있다. 즉 캐릭터 설정은 각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과 방향성은 정해져 있으되 그 가는 방식은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다큐멘터리를 닮았다. ‘1박2일’의 리얼리티는 따라서 늘 보고싶은 것을 보여주는 쪽으로만 움직이지는 않게 된다. 그것은 분명 리얼이지만, 때론 적나라한 상황 자체를 보여줘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대본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 때문에 실망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주는 말랑말랑한 가상현실의 판타지에 매혹되는 반면, ‘1박2일’이 보여주는 리얼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TV를 통해 원하는 것이 그저 보여지는 리얼함이 아니라, 보고싶은 리얼함이라는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요즘처럼 쳐다보기 싫은 현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TV를 통해 망각적이고 퇴행적인 판타지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버라이어티쇼의 경우일 뿐이지만, 거기서 우리가 TV에서 원하는 것을 유추해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리고 요즘 TV에서는 그것이 드라마든 예능이든 실제로 상당부분 이 유추에 맞아떨어지듯, 퇴행하거나 판타지 편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개인 브랜드화 되어가는 예능인들, 그 숙제

올해 방송3사의 연예대상은 강호동 유재석 투맨쇼의 연속이었다. 비록 강호동은 KBS와 MBC, 두 방송사에서 대상을 받았고, 유재석은 SBS에서 대상을 받았지만 이 두 인물은 방송3사 연예대상에서 늘 중심에 앉아 있었다. 시상식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마지막 대상 시상을 할 때면 누가 상을 타게 되든 서로 박수를 쳐주고 상대방이 상을 타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경쟁자이면서 진정한 동료였고, 친구이자 스스로 말하듯 스승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올해 연예대상을 거머쥔 강호동, 유재석의 투맨쇼는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이제 예능의 트렌드에 있어서 방송사가 가지던 변별력을 이제는 한 개그맨에 의해 나눠질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매년 각 방송사마다 흔히 말해 미는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올해도 다르지 않다. 방송3사가 강호동과 유재석을 연예대상에 앉힌 것은 각 방송사들의 미는 프로그램을 이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MBC의 ‘황금어장’, KBS의 ‘1박2일’, SBS의 ‘패밀리가 떴다’가 그것.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과연 강호동과 유재석 없이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무릎팍 도사’는 면전에서도 상대방의 곤란한 질문을 천연덕스레 던질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강호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프로그램이었고, ‘1박2일’ 역시 강호동의 강한 리더십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패밀리가 떴다’는 모든 제작진들이 인정하듯이 늘 든든한 유재석이라는 개그맨이 있어 비로소 빛을 본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황은 이제 거꾸로 되었다. 한 개그맨의 능력은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고 때론 한 방송사의 예능을 웃기고 울리기도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유재석과 강호동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방송3사의 연예대상을 통해 볼 수 있었듯이 이제 한 방송사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예능인들은 바로 다른 방송사 시상식에서도 상을 받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개인기량이 뛰어난 예능인들, 예를 들면 유재석, 강호동을 비롯한 김구라, 신정환, 윤종신, 박미선, 신봉선 등등은 방송사를 넘나들며 활약을 했다. 예능인 개개인들의 브랜드가 방송사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이든 이들이 투여되면 모두 성공을 장담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연예대상을 탄 ‘1박2일’, ‘무릎팍 도사’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는 모두 형식실험이 가지는 파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프로그램들이다. ‘1박2일’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여행이라는 코드를 가져와 야생 버라이어티로 거듭나게 한 프로그램이며, ‘무릎팍 도사’는 리얼 토크쇼로서 게스트의 지평을 넓혔으며, ‘패밀리가 떴다’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와 여행이라는 코드에 판타지 설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쇼를 보여준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 실험적인 형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전적으로 유재석, 강호동 같은 스스로를 브랜드화 시킬 정도의 능력을 가진 예능인들의 기량에 힘입은 바가 크다. 프로그램들은 점점 캐릭터쇼와 리얼리티쇼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캐릭터를 프로그램마다 바꾸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고정된 캐릭터 속에서 조금씩의 변주가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예능인 개개인의 브랜드는 그만큼 중요해졌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방송사의 차원을 넘어서 올 한 해 예능의 트렌드이자, 지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함께 한 인물들을 새로운 브랜드가 되게 끌어준 것은 더 중요한 공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걸출한 두 예능 영웅들의 연예대상 수상은 반갑고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바로 한 예능인의 기량이 한 프로그램, 나아가 한 방송사의 예능을 살릴 수도 있다는 점을 연예대상을 통해 보여준 이들의 수상은 하나의 숙제를 던져준다.

유재석과 강호동만큼 그 뒤를 이어줄 새 예능인들의 발굴이 그것이다. 당장의 유재석과 강호동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역시 언젠가는 이경규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브랜드화된 예능인들의 방송사를 넘나드는 활약은 그만큼 캐릭터 소비를 빠르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 이 최정상에 섰을 때가 오히려 위기가 될 위험성도 있다. 새로운 모습을 늘 준비해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올해를 빛내주었던 가수들이나 배우들 같은 새로운 예능인들을 끄집어내 프로그램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것이다. 최고의 순간에 이 같은 걱정이 앞서는 것은 이들의 롱런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드는 기우다.

여름에 빛나는 ‘패떴’, 겨울에 돋보이는 ‘1박2일’

날씨와 여행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소풍 전날 다음날 비가 온다는 기상정보에 잠 못 드는 밤을 지낸 적이 있는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여행이 산다. 만일 출사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날씨는 절대적이다. 수백 킬로를 달려가 일출을 찍으려 했는데, 마침 먹구름에 해가 가려버렸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날씨는 그림(사진 혹은 영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날씨가 여행에, 특히 영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여행버라이어티 역시 날씨와 상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여행 버라이어티로 주말 저녁을 즐겁게 해주는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는 날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단지 그림의 변화가 아닌 이들 버라이어티쇼들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의 변화다.

‘패밀리가 떴다’에 드리워진 추위라는 야생
석모도에 간 ‘패밀리가 떴다’에게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칼바람을 맞으면서 하는 게임은 과거 이 프로그램의 최대 강점이었던 그저 웃고 즐기던 분위기를 변모시킨다. 이전만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정도의 추위 앞에서 그나마 프로의식을 발휘한 건 유재석이다. 그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떠들어대면서 사리지 않는 몸 개그를 보여줘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한다. 이러한 날씨의 침공은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심적인 아이템인 저녁 차려 먹기에서도 이어진다.

야외에서 밥을 지어먹는 즐거움은 차가운 날씨 속에서는 고역으로 변모한다. 문제는 이 버라이어티쇼가 지금껏 지향해온 것인 리얼리티 자체가 아니라 설정을 통한 유쾌한 즐거움이었다는 점이다. 야외에 나가서도 대외적인 접촉이 주는 스트레스를 피해, 저들만의 관계가 주는 폐쇄적인 즐거움에 몰두해온 그들에게 차가운 날씨란 꼭꼭 닫아놓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야생 그 자체다. 그들은 여전히 이 프로그램의 성격대로 설정된 즐거움을 보여주려 노력하지만 그 설정을 파고드는 차가운 날씨 앞에서는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충남 보령시 외연도를 찾아간 ‘1박2일’에게 추운 날씨는 오히려 그림을 살린다. 야생과 리얼리티를 주창하고 있는 ‘1박2일’은 사실상 이러한 도전상황이 없으면 그림이 생기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에게 추위라는 상황은 어떤 사건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심지어 아무런 사건이 없어도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어준다. ‘혹한기 대비캠프’편은 아무런 외부적 상황 없이도 날씨 하나만으로 ‘1박2일’이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확실히 겨울은 ‘1박2일’에게는 제철이다.

제철 만난 ‘1박2일’, 새로운 재미 보여주어야
야생을 피하고 안전한 즐거움을 찾는 ‘패밀리가 떴다’와 야생 그 자체가 주는 생고생을 통해 웃음을 주는 두 프로그램의 다른 분위기는 겨울이라는 도전을 만나 시청자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혼자 버려져 있다가 팀과 합류하려 새벽에 어선을 타고 팀에 합류하는 이승기의 모습은 ‘1박2일’에서는 그다지 독한 영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패밀리가 떴다’에서 잠깐 벌어진 야생 상황이 주는 불편함 그 이상이지만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 속에서는 편안한 상황일 뿐이다. 추운 날씨라는 도전 앞에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두 프로그램에 대한 편안함은 이렇게 달라진다.

이것은 거꾸로 이번 여름시즌 내내 ‘패밀리가 떴다’가 승승장구할 때, 작년 겨울 혹한기에서의 잠자리 복불복으로 승승장구하던 ‘1박2일’이 추락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도전상황이 없을 때, ‘1박2일’의 영상은 단조로워진다. 그러니 무언가 인위적인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되는 그림을 무리하게 찾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룻밤의 야외 체험을 담아내는 여행 버라이어티쇼에 날씨는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겨울을 맞이하여 ‘패밀리가 떴다’는 추운 날씨에 무리한 야외 게임과 취사로 일관되는 그 패턴을 바꿔줄 필요가 있다. 만일 그 패턴을 유지한다면 자칫 ‘1박2일’을 넘어설 수 있었던 그 편안함을 무기로 하는 차별점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반면 제철을 만난 ‘1박2일’에도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 겨울에 재미를 보았던 패턴의 유혹이 그것이다. 이미 한 해를 보낸 상황에서 ‘1박2일’은 한 단계 나아가는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어야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을 맞아 두 여행 버라이어티쇼들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어딜 보나 다 불황이다. 거의 모든 경제지표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TV는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을까. 1,2년 전만 해도 TV의 화두는 리얼리티였다. 드라마에서 트렌디를 벗어나 좀 더 디테일과 현장감을 살린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꽃을 피웠고, 예능에서는 버라이어티 쇼 앞에 '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발빠른 케이블TV에서는 리얼리티쇼들을 서둘러 수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드라마가 나왔으며,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낸 페이크 다큐가 하나의 대세처럼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 프로그램이 하는 얘기는 이랬다. "이거 리얼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리얼이라는 수식어는 과거에 비해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까지 과거의 수식어 그대로 전문직 장르 드라마,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게 진짜 리얼이 맞는가 싶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먼저 드라마쪽을 보면 올 한 해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보였던 방송가 소재 드라마들의 경우,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두 드라마는 '온에어'와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온에어'는 방송가의 뒷얘기를 리얼하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스타들의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삶에 대한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로 그려졌다. 결과는 20%에 달하는 시청률이 말해줬다. 하지만 너무 리얼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우, 시청률은 좀체 1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맞붙은 '에덴의 동쪽'은 시대극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욕망과 복수를 그리는 판타지극을 선보이면서 30%대에 이르는 시청률로 월화를 평정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드라마들은 점점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양상이다. SBS에서 새로 시작한 '떼루아'는 그 전문적인 세계보다는 트렌디한 남녀 관계에 더 몰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바람의 화원'이 끝나고 시작할 '스타의 연인'은 본격 트렌디 드라마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TV의 판타지 편향은 드라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 강자로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그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 설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상한 경우다. '패밀리가 떴다' 속의 캐릭터나 상황은 대부분 설정이다. 초반부터 관계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 속의 상황을 통해 웃음을 주었던 이 쇼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거의 시트콤에 가까운 성격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1박2일'이 가졌던 야생의 리얼리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즉 '1박2일'은 날것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는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은 이 쇼가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설정 버라이어티 쇼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예능의 판타지 편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상 부부, 가상 가족 같은 개념은 사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늘 상 빠지게 되는 판타지의 하나이다. 우리는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서 그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되는 판타지를 경험하고, 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 있는 가족을 또 하나의 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상 버라이어티 쇼는 바로 이런 드라마적 설정과 예능의 웃음코드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처럼 TV의 판타지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힘겨워진 현실에서 TV는 정보와 의미를 통해 말 그대로 멀리 있는(tele) 것을 가까이 보여주는(vision)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잊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TV 앞에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마음, 너무나 이해되고 공감 가는 것이지만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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