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꿈에 언니 인생을 걸어?” 조선호 ‘청설’

영화 '청설'

대학을 졸업했지만 별다른 하고픈 일이 없던 용준(홍경)은 어느 날 엄마의 분식집 도시락 배달을 나갔다가 이상형 여름(노윤서)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다. 여름은 수영장에서 동생 가을(김민주)이 단축해낸 수영 기록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동생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꿈에 부풀어 있다. 청각장애를 가져 말 대신 수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용준에게는 별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 배웠던 수어로 여름과 대화하며 점점 다가가고, 그런 용준의 용기를 가을도 응원한다. 

 

조선호 감독의 ‘청설’은 동명의 대만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로 청각장애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대사보다는 수어가 더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워낙 말의 홍수와 공해(?) 속에서 살아가는 탓인지, 이 작품에서 말이 아닌 수어로 전달되는 마음은 오히려 더 가슴을 건드린다. 특히 용준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자기 말고 늘 남을 챙기는 여름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현실과 맞물려 관객들 역시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남을 먼저 챙기려는 여름의 마음은 정작 자신의 꿈과 인생을 지워버림으로써 동생을 힘겹게 한다. 동생의 꿈이 자신의 꿈이라 말하는 여름은, 다가오는 용준에 대한 마음까지 애써 밀어내고 이별을 고한다. “언니 꿈은? 언니 꿈은 뭐냐고? 언니는 내 꿈밖에 모르지?” 동생의 질책에 여름은 “네 꿈이 내 꿈”이라고 말하지만 동생은 그 말이 못내 부담스럽고 아프다. “왜 내 꿈에 언니 인생을 걸어?”

 

지난 주 수능이 끝났다. 안타깝게도 꿈을 선뜻 이야기하기 어려운 교육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제 아이들이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꿈을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아이의 꿈이 내 꿈이라며 살아온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 '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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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라’, 이방원 이야기로 풀어낸 민초들의 역사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가 종영했다. 이방원(장혁)은 형제들이 흘리는 피로써 자신의 나라를 만들었고, 서휘(양세종)와 남선호(우도환)는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지켰다. 서휘가 꿈꾸는 나라는 배곯지 않고 사는 나라일 뿐이었지만 이방원은 자신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서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지만, 그는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위해서는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다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서휘의 아버지 서검(유오성)이 그의 무술 스승이었지만 그가 군량미를 착복했다는 누명을 씌워 죽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서검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자신이 만인지상에 서야 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두려운 존재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정점에 설 수 있게 하는 권력. 그것이 이방원의 나라였다.

 

자신의 나라를,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이성계(김영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검의 부하들을 자극해 이방원을 밀어내기 위한 이른바 ‘상왕의 난’을 계획했다. 서검의 부하들을 자극하기 위해 서휘가 이방원에 의해 죽은 것처럼 꾸미려 했다. 이방원도 이성계도 사람보다 권력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그들의 나라였다.

 

하지만 자신이 지켜야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알고 있고, 또 자신이 죽지 않으면 저들마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서휘는 홀로 이방원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 서휘와 함께 한 건 남선호였다. 남선호는 서얼 출신의 벽을 넘기 위해 심지어 친한 동무였던 서휘까지 배신했었던 인물이지만, 결국 알게 됐다. 자신이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의 나라가 바로 서휘 같은 동무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자신들을 막아서는 관군들을 뚫고 가까스로 이방원 앞에 서게 된 서휘는 자신의 사람들을 놓아달라고 했고, 이방원은 그 뜻을 들어주는 대신 서휘의 목숨을 요구했다. 기꺼이 죽겠다는 서휘의 말에 이방원은 “네가 모두를 살렸다”고 함으로써 이 치열한 싸움이 끝이 났다는 걸 알렸다. 서휘는 남선호의 곁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했다.

 

<나의 나라>가 이성계와 이방원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이야기를 가져와 하려던 이야기는 뭘까. 그건 역사에 기록된 저들의 나라가 있었다면 역사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들도 저마다 지키려 했던 저마다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신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큰 위험에 처하지 않고 배곯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민초들이 원하는 나라는 그것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현재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누가 대권을 잡고 어느 정당이 의석 수 과반을 차지하는가가 우리네 보통의 서민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매일 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면서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저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되지 않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싸워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지켜야 할 나라고 있다. 비록 깨지고 부서져도 각자의 나라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곧 삶이기에 그렇다.’ 희재(김설현)가 서휘를 그리워하며 생각한 것처럼, 우리에게 각자의 나라는 우리의 삶이고 생계이고 밥이다. 소중한 사람들의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때로는 제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정도로 포기 못하는.(사진:JTBC)

‘황금빛 내 인생’ 천호진과 김병기, 두 가장의 너무 다른 행보

슬퍼도 너무 슬픈 가장의 희생이다.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서태수(천호진)는 우리 시대 희생하는 가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너무 가시밭길만이 이어져 심지어 시청자들로부터 원성을 듣기까지 하는 이 가장은 한때 상상암을 진짜인 줄 알고 오히려 ‘축복’이라 여긴 바 있다. 하지만 가족의 남다른 사랑으로 이제 조금씩 다시 살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차에 그것이 진짜 암이었다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삶이 너무 힘들어 암 통보조차 ‘축복’이라며 웃음을 짓던 이 아픈 가장은 그것이 진짜 암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늘을 원망했다. 하지만 이 가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끝까지 챙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암 진단으로 받은 보험금을 딸 지안(신혜선)의 핀란드 유학비로 건네주고, 아픈 와중에도 서지안과 서지수를 걱정했다. 

서지수(서은수)의 친부모인 노명희(나영희)와 최재성(전노민)이 노진희(전수경) 부부에 의해 주주총회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중소주주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이 노진희의 차명계좌와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다닌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서지안의 물음에 서태수는 그것이 자신의 딸 서지수의 친부모 일이고 또 딸 서지안이 사랑하는 사람 최도경(박시후)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주주총회에서 위기에 처한 노명희와 최재성 그리고 최도경은 서태수의 결정적인 증거로 상황을 반전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실 너무 가시밭길의 연속이기 때문에 서태수의 희생을 바라보는 것이 힘겹다는 시청자들의 원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가족을 위한 가장의 희생을 굳이 집어넣은 건, 어떤 면에서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해성그룹 노양호(김병기) 회장과의 대비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노양호 회장 역시 여러 차례 의식을 잃는 위기를 겪지만 깨어날 때마다 각성은커녕 자신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인다.

노양호 회장은 해성그룹을 자신이 홀로 일궈왔다며 딸 노진희가 모든 걸 가로채려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노진희의 그건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틀린 건 아니다. 창업자의 가족승계가 아닌 전문경영인의 시대가 지금의 변화된 기업문화의 바람직한 양태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갖고 있는 두 인물의 이토록 다른 양상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금수저든 흙수저든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인간의 운명이다. 그런데 그걸 접한 이들의 반응은 너무나 다르다. 없는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챙기려 한다. 하지만 가진 이들은 가족보다는 자신을 챙기려 한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달라서 달라지는 반응일 수밖에 없다. 

서태수와 노양호 회장의 서로 다른 가장의 모습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느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가를 생각해보면 서태수의 희생이 주는 느낌은 숭고함까지 갖게 만든다. 하지만 그 삶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일까. 시청자들은 이런 선택을 하는 서태수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가족들과의 행복을 함께 누리길 바란다. 비록 기적 같은 일이 필요할지라도.(사진:KBS)

빈틈 많아도, 상상력을 끝까지, <W>의 가치

 

우리에게도 이런 드라마가 가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종영한 MBC <W>는 지금껏 우리네 드라마에서 좀체 보기 힘든 시도를 보여줬다. 웹툰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뒤엉켜버리는 어찌 보면 빈틈도 많고 복잡한 이야기는 어떻게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든 걸까.

 

'W(사진출처:MBC)'

<W>의 가장 가치는 결국 상상력이다. 만일 우리가 웹툰의 세계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시작은 거기서 부터였을 것이다. 웹툰의 주인공인 강철(이종석)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허구의 캐릭터가 각성하는 걸 자신을 삼켜버릴 괴물로 인식한 작가 오성무(김의성)가 맥락 없이 그를 죽이려 하고, 오로지 강철에게 강력한 동인을 심어주기 위해 그의 일가족을 몰살시킨 얼굴 없는 진범역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각성하게 되면서 <W>라는 웹툰의 세계는 상상력이 폭주하는 세계가 되었다.

 

죽었던 인물을 꿈으로 설정해 되살리고, 진범이 작가의 얼굴을 빼앗아 오히려 작가를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며, 총에 맞아 죽어가는 실제 인물 오연주(한효주)를 웹툰의 세계로 옮겨 다시 살려내는 등, <W>는 기존의 드라마 문법을 상상력으로 뛰어넘겠다는 듯 반전스토리로 이어갔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건 웹툰의 세계라는 허구의 공간이 실재하고 그 안의 인물들도 저 마다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움직인다는 이 드라마의 가정 덕분이다.

 

결국 결론은 오성무라는 작가의 희생으로 강철과 오연주가 살아남아 사랑을 이루는 해피엔딩이었지만 그런 끝은 사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아니다. 또한 굉장히 복잡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이야기 전개들 하나하나를 그것이 왜 벌어졌는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따져보는 일도 사실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건 그래서 <W>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 하는 점일 게다.

 

웹툰의 인물을 마치 현실처럼 받아들이고 거기에 빠져드는 세태. <W>는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저 황당하게만 읽히는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다. 가상의 세계가 더 이상 그저 가짜로만 치부되지 않고 마치 진짜처럼 여겨지고, 심지어 그 가상의 인물들과 사랑에 빠지는 <W>의 이야기는 그래서 콘텐츠의 시대가 보여줄 미래의 세계를 슬쩍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이미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같은 기술들이 가상을 통해 현실을 바꿔가고 있는 것처럼 <W>의 세계는 그저 한 편의 드라마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의 가상이 갖는 무게감을 잘 드러냈다고 보인다.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W>의 세계였다. 가상의 인물들은 창조되고 설정된 이후에는 그 고유의 힘에 의해 끝까지 움직이기 마련이다. 작가의 개입은 오히려 세계를 망치고 자신을 망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 <W>의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결국 이 캐릭터들과 작가의 싸움에서 비롯됐던 일들이다. 허구라고 해도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계. 우리는 이미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

 

<W>는 허구의 시대가 현실을 압도하고 바꿔나가는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그려냈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끝까지 엔딩을 이뤄냈고 물론 허점도 많은 이야기지만 시청자들의 욕망을 추동시킴으로써 그 빈틈을 채워 넣는 기발함과 능숙함도 보여줬다. 결국 작품은 작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이제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의 자생력과 그걸 보는 독자와의 긴장감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 되었다. ‘잡아먹히느니 잡아 먹겠다는 경구는 지금의 작가들이 처한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일 뿐, 이제 작품은 온전히 작가의 것이 될 수 없는 시대다.

 

그저 잠깐 상상으로만 했을 수 있는 세계. 하지만 송재정 작가는 그것을 끝없이 발전시켜 상상력이 폭발하는 세계로 만들어냈다. <W>의 가치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늘 드라마라고 하면 머릿속에 공식처럼 떠오르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 그걸 <W>는 우리 눈앞에서 펼쳐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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