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국민 예능으로 거듭나고 있을 때, 또 그 여파를 몰아서 '해피선데이'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남자의 자격'이 하모니 특집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때, 그 뒤에서 실질적으로 이 남자들의 예능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이 있었다. 프로그램 전면에 나와 있는 이명한 PD나 나영석 PD가 한창 주목을 받을 때, 그들 옆에 앉아 있던 인물. 바로 이우정 작가다. 그녀는 당시 이 두 남성적인 예능의 14명의 남자 MC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안방마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8년 KBS 연예대상 쇼 오락부문 방송작가상, 2010년 한국방송작가상 예능 부문을 거머쥐면서 그녀는 예능 작가계에서는 드물게(드물지만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새로운 스타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오른쪽부터 이우정,모은설,이현희 작가(사진출처:시사저널)

하지만 업계에는 이처럼 이미 스타 작가로서 자리매김한 이우정 작가였지만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예능의 대세였던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성격상 예능 작가라는 존재는 어딘지 드러나면 안되는 비밀스러운 어떤 것이었으니까. 당시 터졌던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 논란은 리얼 예능에 있어서 그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대본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상황이었고(그것이 그저 가이드라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따라서 대본을 쓰기 마련인 예능 작가도 숨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또 달라졌다. 이제 예능에 있어서 대본은 반드시 필요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인식이 생기고 있고, 예능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대중들의 선망도 생기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예능 작가의 세계. 도대체 이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스타 작가들은 어떻게 그 위치에 오르게 되었을까.


이우정 작가는 무역학과 출신으로 사회의 첫발은 광고 카피라이터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MBC아카데미에서 작가 교육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에 방송작가들의 등용문은 MBC아카데미 같은 방송사 산하 교육기관이나 방송작가교육원 같은 곳이 하나의 거쳐 가는 길로 정해져 있었다. 아카데미 같은 교육기관으로 방송사에서 인력을 요청하면, 예비 작가들이 자신의 이력서와 간단한 포트폴리오(대본구성안)를 제출하고 거기서 발탁되면 일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이우정 작가는 2000년도에 MBC의 파일럿 프로그램인 '백만 송이 장미'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서바이벌 형식을 따와 만든 연예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을 쌓은 이우정 작가는 '21세기 위원회'로 사실상 입봉(?)을 했고, 후에 KBS로 와서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운명(?)적인 두 PD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이명한 PD와 나영석 PD다. 그 후로 나영석 PD의 '여걸파이브', '여걸식스' 작업을 했고 후에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으로 우뚝 섰다. 현재는 이명한 PD와 '더 로맨틱'을 하고 있고 또 '남자의 자격'을 함께 했던 신원호 PD와 시트콤 '응답하라 1997'을 준비 중이다.


어찌 보면 이우정 작가의 성공은 좋은 PD를 만났던 것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예능 작가의 성공이 어떤 PD를 만나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우정 작가의 경우는 어떤 면에서는 PD들을 확실히 뒷받침해줌으로서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작가로 이름나 있다. 같이 작업을 한 PD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이 한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으로 서슴없이 이우정 작가를 지목하곤 한다. 그만큼 확실한 자기 역량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우정 작가가 주로 리얼 예능쪽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점도 그녀의 성공에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마침 리얼 버라이어티가 예능의 대세로 자리하면서 예능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자질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우정 작가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예능 작가들이 하는 일이 다르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주로 하는 일이 게임을 개발하는 거였어요. 그게 예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거의 하는 일이 PD와 비슷해요. 물론 PD의 고유영역이 분명 존재하지만 기획에서부터 심지어 편집에까지 예능 작가가 들어가지 않는 곳은 없죠." 또 리얼 예능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대본을 쓰는 일보다는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일과 후반작업이 더 중요해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대본은 분명 존재하지만 대본을 상세하게 쓰거나 아니면 느슨하게 쓰는 것은 작가와 프로그램의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했다. '1박2일' 같은 프로그램의 경우 작가들은 대본을 쓰기 보다는 현장을 읽고 발견하는 작업에 더 집중한다고 한다. 예능 작가라고 하면 '작가'라는 타이틀이 의미하듯이 무언가를 집필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리얼화된 예능의 트렌드 속에서 이런 역할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리얼 버라이어티 같은 예능이 아니라 토크쇼 같은 주로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예능작가들은 어떨까. 작년 KBS 연예대상 방송작가상 쇼 오락부문을 수상한 '김승우의 승승장구'의 모은설 작가는 이 분야에서 베테랑이다. 96년도에 기자시험을 준비하던 그녀는 선배의 권유로 'TV는 사랑을 싣고'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이 길로 들어섰다. 당시에는 아르바이트였어도 너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이 길을 계속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프로그램 성격 때문에 재연대본(과거 이야기를 재연하는 대본)과 추적대본(실제 과거 인물을 쫓아가는 대본)을 써내는 게 당시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그램을 관장하시던 PD분이 바로 개그맨 김준현의 아버지인 김상근씨였는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알던 분들이 연결이 되어 그 후로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 '뮤직플러스', '감성채널' 등을 한 후 '비타민'과 '미녀들의 수다'는 기획부터 참여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역시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부터 인연이 된 이기원 PD와 줄곧 같이 작업을 했다고. 그 후로 윤현준 PD와 '상상플러스', '승승장구'를 하게 됐다고 한다.


스튜디오물에 있어서 작업은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예전과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과거에도 섭외와 대본 작업이 주였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토크쇼라면 특히 섭외, 조사, 큐시트 작업이 거의 주라는 것. 하지만 연차가 달라지면서 하는 일은 거의 전방위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다. 기획에서부터 편집 자막 작업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방송국이 파업을 하는 와중에도 방송이 그나마 나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이런 모든 작업에 관여했던 예능작가들이 있기 때문이죠. 방송사에서는 그 작업 자체를 외주를 주겠다는 생각이지만 그렇게 하면 방송 자체가 망가질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예능작가들이 그 편집 작업까지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죠."


사실상 거의 모든 일을 하는 등 전방위에서 뛰어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그래도 예능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과 관계된 것이라 한다. 결국 예능의 핵심은 그 안에 담겨진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토크쇼 같은 경우에는 섭외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모은설 작가는 심지어 쇼에 나오기로 하고 대본 작업도 다 끝났는데 촬영 하루 전에 게스트가 못나오겠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이유가 황당했죠. 작업한 대본을 보냈더니 자기 인생이 이렇게 초라한 줄 몰랐다며 이렇게 자신이 비춰지는 게 싫다는 거였어요. 결국 밤새 설득해서 다음 날 촬영을 할 수 있었죠." '안녕하세요'의 이현희 작가는 그래도 연예인들은 준비된 이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는 낫다는 말한다. '안녕하세요'는 일반인들이 게스트로 출연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그들이 나중에는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모든 걸 다 체크할 수가 있겠어요. 사실 증명서 같은 걸 떼어서 보자고 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현재 tvN에서 일반인들의 러브 리얼리티쇼인 '더 로맨틱'을 하고 있는 이우정 작가 역시 일반인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프로그램 성격상 그들의 속내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방송으로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점에 있어서 늘 고민을 하게 되죠."


예능작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만큼 그들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궁금증도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예능작가들은 현재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 이들의 직업은 향후 어떤 비전을 갖고 있을까. 99년 스크립터로 시작해 2001년 '동물농장'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스펀지', '상상플러스', '미녀들의 수다', '안녕하세요'를 작업해온 이현희 작가는 최근 예능 작가들의 활동 영역이 과거에 비해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주변에도 예능작가출신의 드라마 작가, 시트콤 작가, 뮤지컬 작가까지 다방면에서 예능작가의 영역이 많아지고 있죠." 실제로 예능작가 출신으로 현재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전체 시청률 1위(36%에 육박)를 기록하고 있는 박지은 작가도 예능작가 출신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작가도 초기에는 '사랑의 스튜디오'의 예능작가를 해던 인물이다. 이현희 작가의 경우 네이버와 합작으로 '환타스틱 어른백서'라는 책을 쓴 적도 있고, '서태지 8집 다큐' 작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여러 모로 다양한 분야에서 예능작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우정 작가가 시트콤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전 같으면 예능작가의 영역이 거의 음지에서 예능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에만 국한됐다면 요즘은 범위가 거의 무한대로 넓혀지고 있다는 것. 이렇게 된 것은 예능작가라는 특성상 다방면에 대한 경험이 많다는 점과, 또 늘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 자질로서 중요하게 어필되는 지점이다. 물론 이것은 현재 방송 트렌드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즉 '드림 소사이어티'로 접어들면서 삶의 가치로서 펀(fun)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콘텐츠가 펀을 지향하는 흐름이 방송에도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드라마들은 상당 부분 코미디를 필요로 하고 있고, 대다수의 교양 프로그램들은 이른바 인포테인먼트로 전환되고 있다. 모은설 작가는 이런 변화 때문에 예능작가들의 영역이 점점 넓혀지고 있는 반면, 교양작가들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교양작가들이 했던 것들을 지금은 예능작가들이 하고 있죠. 예를 들어서 '비타민' 같은 경우 이제는 교양이 아니라 예능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점점 교양작가들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예능작가들의 처우는 하는 일에 비한다면 결코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보다는 확실히 좋아진 게 사실이고, 그 비전은 앞으로 방송 전체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장밋빛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이 분야에 뛰어든다고 처음부터 이런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 이우정 작가나 모은설 작가 그리고 이현희 작가 모두 '적어도 10년'을 버틸 수 있는 예능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세상과 인간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은 필수이고, 사람들과 서슴없이 친근해질 수 있는 친화력도 중요하며, 또 예능이라고 해서 그저 웃고 떠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름의 철학과 생각을 갖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펀 사회로 접어들면서 예능의 시대의 문은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존재들로서 그간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예능작가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나갈 드림 소사이어티는 어떤 세계일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예능작가 얼마나 벌까-------------------------------------------------------
예능작가의 벌이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마치 연예인들 중에도 A급의 수입과 B급의 수입이 천지차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그 능력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반향에 따라서 예능작가들의 수입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충의 기본적인 수입의 수준은 분명 존재한다. 보통 처음 들어온 예능작가의 경우에는 주당 30만 원 정도를 번다고 한다. 한 주에 한 프로그램을 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10년차 정도가 되면 주당 100만 원 이하의 수입을 벌고, 메인급이라면 100만 원 이상 200만 원 이하의 수입을 번다고 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예능작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메인급 작가들은 한 주에 한 프로그램만 하는 게 아니라 이른바 두 탕을 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물론 한 편에 집중하는 것만큼의 수입보다는 낮게 책정되지만 두 편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수입이 많아진다는 것. 이런 기본적인 수입 구조를 통해 볼 때 최고로 잘 나가는 작가들은 연봉 1억을 넘긴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예능작가의 메인 잡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버는 수입만을 추산한 것이다. 여기에 때때로 들어오는 강연 수입이나 책 출간으로 생기는 인세수입, 혹은 각종 원고료를 더하면 수입은 더 많아진다. 게다가 시트콤 같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면 수입의 단가가 달라진다. 시트콤은 드라마의 영역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쳐주기 때문이다. 향후 예능작가들의 비전은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재는 방송사와의 문제 같은 풀어야할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법률적인 조항이 생긴다면, 향후 예능작가들은 이른바 '포맷' 장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자신이 만든 포맷과 아이디어를 팔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지게 되면 예능작가들처럼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분야의 향후 비전은 훨씬 좋아지게 되는 셈이다.

 

예능대본 과연 어떤 걸까----------------------------------------------------
리얼 예능으로 접어들면서 대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마치 리얼리티가 없는 것처럼 오인되곤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예능대본은 모든 방송대본이 그러하듯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심지어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나가도 미리 사전 인터뷰를 통해 대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부분 현장에서 작업하면 대본대로 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리얼 예능에서 대본이란 하나의 설계도 같은 것이다. 그 안에 목적이 있고 목표도 있지만 거기에 집착해서는 리얼 예능의 재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예능 작가들은 대본대로 움직이는 방송분량은 사실상 건진 게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의 경우 PD의 성향이나 프로그램의 성격 상 좀 더 상세한 대본이 만들어지고 실제로 행해지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토크쇼 같은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좀 더 상세한 대본이 만들어진다. 물론 충분한 사전 인터뷰를 통해서다. 이렇게 대본이 충만해야 토크쇼도 다양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해진다. 예능 작가들은 이처럼 상황에 따라 프로그램에 따라 보다 상세한 설계도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능대본이 반드시 존재하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대로 방송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프로그램 살리자는 명분, 왜 자가당착일까

 

최재형 PD가 잠정 복귀를 선택했다. 명분은 프로그램이 망가지는 걸 더 이상 못 보겠다는 거다. 실제로 '1박2일'은 최재형 PD의 파업 이후 파행으로 치달았다. 2회 분량 내용을 3회로 늘려서 편집해 내보냈고, 그러니 본래 '1박2일'만이 가졌던 색깔도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게다가 최재형 PD의 파업에 대해 사측에서는 중견 PD를 투입해서라도 촬영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시스템이 우선이고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는 지극히 KBS적인 사고방식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그러니 최재형 PD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수 있다. 파업의 와중에도 프로그램은 버젓이 나가게 되고, 그 프로그램은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망가지게 되니 그걸 보는 게 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잠정 복귀를 결정하면서도 파업 불참에 대해 껄끄러운 마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복귀하면서 "파업 불참은 전혀 아니며, 사측의 회유나 설득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또 "대체 인력이 투입되면 프로그램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아 잠정적으로 연출 복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파업에서 나오게 되는 상황이지만 '파업 불참'이 아니며, 또 복귀하는 것이 맞지만 그저 '잠정 복귀'라는 표현에는 최 PD의 고민이 묻어난다(요즘은 '잠정'이라는 표현이 유행이라도 되는가 보다). 하지만 고민 끝에 선택한 이 '잠정 복귀'가 과연 묘수가 될 지는 미지수다. 물론 제 자식 같은 프로그램이 망가지는 걸 보기 힘든 부모 같은 PD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 자식이 잘 되려면 그 자식이 잘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방송 프로그램은 그것이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사의 환경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송사의 풍토 내에서는 당연히 좋은 프로그램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관제적으로 무언의 압력 속에 만들어지는 프로그램들은 자기 검열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은 방송의 사유화 혹은 정치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중들은 동원되고 호도될 수 있다.

 

결국 좋은 프로그램이란 프로그램의 내적인 환경으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외적인 환경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결국 최재형 PD의 선택은 나무가 아니라 가지를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가지 살리려다가 나무를 죽게 하면 결국 가지가 살 수 있을까.

 

또한 요즘처럼 프로그램 제작자에 대한 팬덤이 프로그램의 성패에 작용하는 시기도 없다. '무한도전'이 무려 13주째 결방을 하고 있지만 대중들은 방송 복귀보다는 그런 선택을 한 김태호 PD를 응원하는 쪽이다. 만일 김태호 PD가 방송에 복귀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면 대중들은 '무한도전'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대중들이 현재의 파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1박2일'은 프로그램의 성격이 '무한도전'과는 다르다. '무한도전'이 어딘지 마니아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면, '1박2일'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예능적인 속성(여기서 국민 예능이라는 표현이 좋은 의미만 갖는 건 아니다)을 갖고 있다. 그러니 파업에 대한 호불호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제작자만은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중들은 어쩌면 최PD의 선택 때문에 '1박2일' 그 자체에도 실망할 수 있다.

 

결국 '1박2일'을 구하겠다는 최재형 PD의 선택은 자칫 잘못하면 '1박2일'을 죽일 수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최재형 PD가 복귀해서 만들어낸 '1박2일'은 대체 편집진들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완성도가 높을 것이고, 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추락하기 시작한 시청률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선택에 의해 그간 그래도 '개념 있는 예능'으로 생각되던 '1박2일'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작진에 대한 호불호가 프로그램의 성패를 가르기도 하는 요즘 같은 환경에서, 최PD의 선택은 과연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

'1박' 대체 인력으로 충분? 시청자가 바보인가

 

KBS는 정녕 방송이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노조 파업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도, 여전히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답변만을 내놓고 있다. 제작인력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대체 인력이 충분하다는 얘기이고, 이 말은 지금 현재 파업을 하는 PD들은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다.

 

 

'1박2일'(사진출처:KBS)

여기에는 KBS가 인력을 보는 시선이 담겨져 있다. 방송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PD가 몇 명 빠진다고 해도 시스템이 공고한 한에는 프로그램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생각. 하지만 과연 그럴까. '1박2일'은 아마도 이 KBS의 잘못된 인력 운용의 대표적 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다.

 

'1박2일'을 초기 만들었던 이명한 PD가 CJ로 간 후(그가 간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KBS의 처우와 관련이 있다), 프로그램이 잘 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실질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나영석 PD와 이우정 작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영석 PD와 이우정 작가가 '1박2일'에서 빠져나가고, 또 은지원과 이승기가 멤버에서 빠진 상황에서도 KBS측은 '1박2일'이 건재할 거라는 낙관론을 고수했다.

 

최재형 PD 체제로 꾸려진 '1박2일'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지만 실상 예전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백아도에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고립되게 되자 해경경비함에 구조요청을 한 것은 큰 구설수를 만들었다. 그래도 새로운 '1박2일'이 여전히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거기 새로운 멤버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태현은 그 중심에 있었고, 김승우도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1박2일'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영석 PD 체제에서 최재형 PD 체제로 넘어오면서 느껴지던 아쉬움은, 최PD마저 파업으로 빠져나간 상태에서 일부 편집 인력에게 맡겨지면서 총체적인 부실을 드러냈다. 전남 강진에서의 추격전(?)은 '추노'를 패러디한 것처럼 편집되었지만, 오히려 '런닝맨'을 따라한 듯한 인상을 만들었다. 심리전이라고 포장되었지만 지루하게 보여지는 자동차 추격전의 영상은 차 안에 거의 머물러 있어서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1박2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여행지를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이 전남 강진 편이 본래 2회 분량에서 3회 분량으로 편집될 거라는 KBS측의 발표는 왜 이 첫 회의 추격전이 이토록 지루하게 보여졌던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즉 분량 늘리기가 의심되는 대목이란 얘기다. 전남 강진 편을 본 시청자들이 "이럴 바엔 차라리 스페셜 방송을 해라"라고 얘기하는 반면, 어떻게든 건재함을 보이려 그저 방송 분량을 뽑아내는 식의 대처방식은 '1박2일'이라는 브랜드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대충 만들어도 '1박2일'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볼 것인가. 제작진들이 그토록 많은 카메라로 엄청난 양의 영상을 찍는 것은 양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고, 선별을 통한 질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 질을 위한 양을 양으로만 활용하면서, 여전히 좋은 시청률 운운하며 전혀 차질은 없다고 말하는 태도는 어찌 보면 시청자를 너무 가볍게 보는 처사라고 생각된다. 작금의 '1박2일'이 보여주는 인력 운용의 문제는 그래서 KBS의 파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식의 인력 운용은 결국 KBS 방송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방송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까.

'더킹 투하츠', 이승기에 맞춤인 이유

 

'더킹 투하츠'에서 재하(이승기)는 왜 항아(하지원)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걸까. 자신을 거부한 항아에게 철저히 복수하겠다며, 그 마음을 빼앗은 후 헤어져 평생 잊지못할 상처를 주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실행에까지 옮기지만 재하는 막상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항아를 보고는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진다. 거기서 진심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려는데, 불쑥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하자 또 마음이 바뀐다. "너랑 왜 내가 약혼을 하겠냐"며 독설을 날린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도대체 왜 재하는 이토록 변덕이 심한 걸까. 사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의 제목하고도 관련이 있다. 재하의 갈등은 항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재하는 제목처럼 두 개의 심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 하나는 남한의 왕제로서의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다.

 

그가 모의 훈련 중에 항아를 향해 총을 쏘는 상황은 이 재하라는 인물이 가진 두 개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자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나라의 왕제로서 인질이 되어 국익에 손실을 줄 바에는 총을 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물론 모든 게 모의훈련으로 드러났지만, 후에 재하는 항아와 행군을 하면서 그 때 상황을 얘기한다. 자기의 마음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이것이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 전하는 말이다.

 

재하는 이 두 개의 심장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남자로서 항아라는 알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에게 흔들리다가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오래도록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점, 게다가 복잡한 정치적인 사안들과 맞물려 있는 결혼이라는 문제에까지 다다르면 또 마음 한 구석이 흔들리게 된다. 자신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제로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그는 또 개인이 아닌 왕제로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갑자기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발표해버리자, 그 즉시 부인할 수 없는 게 왕제로서의 그의 마음이다(거부하면 이것은 남부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이어진다).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역할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때론 완전히 개념 없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떤 순간이 오면 왕제로서의 근엄함을 유지하는 진중함으로 돌변해야 한다. 이것은 멜로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날라리처럼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마음을 찡 울리는 진심이 묻어나야 하는 인물이 재하라는 캐릭터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이미 이승기는 드라마와 예능, 가수 활동을 하면서 겪었다는 점이다.

 

그의 첫 이미지는 '황태자'였다. 그것도 누나들의 로망으로서의 황태자. 하지만 그 황태자가 '1박2일'이라는 예능을 통과하면서는 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가 되기도 하고, 때론 허술함이 드러나는 허당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찬란한 유산'을 통해서는 개념 없던 황태자가 진솔한 청년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는 사랑을 알아가는 순수한 청춘을 연기하기도 한다. 또 홀로 '강심장'을 맡았을 때는 이제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짓궂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킹 투하츠'는 이승기에게 이 황태자의 진중함과, 막내이자 허당으로서의 가벼움을 동시에 품게 하는 드라마다. 이 작품 속에서 이승기는 때론 지독할 정도의 악동의 모습이었다가 또 순간 진중한 모습으로 돌변해 그 악동 이면에 있는 왕제로서의(황태자의 삶으로서의) 쓸쓸함을 드러낸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통합은 '더킹 투하츠'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캐릭터의 연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더킹 투하츠'는 지금껏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MC로 활약하며 다양한 모습을 끄집어냈던 이승기에게 이 이미지들을 통합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진중함과 가벼움,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황태자의 탄생. 이것이 '더킹 투하츠'에 이승기가 맞춤인 이유다. 이승기는 지금 진정한 '킹'이 되기 위한 '투하츠'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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