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대중문화와 마케팅

'애정남'이 말해주는 공감 마케팅

728x90


공감 없는 상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승승장구'(사진출처:KBS)

최근 이른바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애정남'이 대세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의 줄임말인 '애정남'. 도대체 뭐가 애매하다는 것이고, 그는 또 그걸 어떻게 정해준다는 얘기일까. 먼저 간단한 몇 가지 애매한 상황을 제시해보자.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한 개가 남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그냥 버리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덥석 먹자니 좀 그렇고. 또 누군가를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스킨십은 언제부터 해야 상대방이 당황하지 않을까. 이런 애매한 상황은 너무 사소해보여서 안 보이는 것뿐이지 사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지하철에 앉아 가는데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탔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양보를 해줄 것인가. 하다못해 영화관에서 팔걸이는 어느 쪽으로 해야 옆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사실 너무 소소한 일이라 이런 고민은 전혀 쓸 데 없어 보인다. 실제로 남은 음식을 누가 먹든, 팔걸이를 어떻게 하든 '애정남'이 늘 코너에서 말하듯 '쇠고랑을 차거나 경찰이 출동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건 정말 쓸 데 없는 고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애정남'이 건드린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왜 이런 자잘한 것들은 고민의 대상에 끼워주지 않는 걸까. 꼭 쇠고랑을 차거나 경찰이 출동하는 지극히 공적이고 법제화된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중요한 의제로 제기될까. 왜 우리가 늘 생활하는 사소한 일상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그걸 조금만 심각하게 얘기해도 좀스러운 사람 취급을 하는 걸까. '애정남'이 열어놓은 것은 바로 이 거대담론들에 의해 가려지거나 소외되었던 자잘한 일상들의 소중함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 따위 거대담론들이 도대체 내 살림살이를 얼마나 낫게 해주었는가 하는 냉소적인 시선도 들어있다.

거대담론들은 늘 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에게 던져져왔다.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 틈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디 이런 상명하복식의 혹은 일방통행식의 거대담론으로 굴러가는 시대인가. 이제 우리는 소소한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엮어서 세상을 만들어가려 한다. 선거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공약들이 공염불이 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온 유권자들은 이제 '우리들만의 소중한 약속'이 더 중요해졌다. 그 실천 가능한 것들이야말로 어쩌면 실제로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깨달은 탓이다.

물론 '애정남'은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그런 코너가 아니다. 이것은 개그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통해 웃음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애정남'이 이런 애매한 상황에 내리는 일종의 지침이나 해법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마지막에 하나 남은 음식은, 밑반찬일 경우에는 아무나 먹고(리필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류는 집게를 가진 사람이 먹으며(일한 사람이 먹는다), 나머지 기타 음식은 돈 내는 사람이 먹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애정남'이 건네는 답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상황들이 곤란하고 애매하다는 것을 똑같이 공감한다는 것 그 자체다. 그 상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고 "맞아 맞아"하고 공감하며, 일종의 해답을 찾으려는 그 노력 자체에 수긍하고 동조하게 되는 것. 이른바 '공감 개그'라고 불리는 '애정남'이 갖고 있는 대단한 경쟁력의 실체다.

따라서 '애정남'의 힘은 대중들이 현재 어떤 가려움을 갖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에 있다. 지난 추석 다음 아고라에 애정남이 올린 글은 그 단적인 사례다. 추석이나 명절에 시댁에 가는 것을 좋아할 며느리가 몇이나 있을까. 제사 지내고 나면 친정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애정남'은 그런 며느리들에게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내고 아침 먹고 설거지가 끝나는 순간 출발입니다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며느리를 탐탁찮게 여길 수 있을 시어머니에게도 한 마디 공감어린 충고를 곁들였다. "잘 생각하세요. 시어머니들. 이게 지켜져야 따님도 빨리 볼 수 있는 겁니다잉." 이 글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 내용을 따다가 쓴 기사에 무려 천 개가 넘는 댓글이 붙었고, 그 내용도 대부분 "공감 백프로"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좀스럽고 어쩌면 곤란해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애정남이 살짝 끄집어내는 순간, 빵 터지는 웃음과 함께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졌던 것. 물론 이렇게 인기발언을 제 맘처럼 해주는 '애정남'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졌다.

사실 '개그콘서트'에서 이런 현실 공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개그는 '애정남'뿐만이 아니다. '생활의 발견'이나 '불편한 진실'도 모두 현실에서 지나쳤던 일상을 가져와 공감을 바탕으로 웃음을 주는 소위 '공감개그'들이다. 하지만 이들 개그들과 '애정남'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 현실에 대한 태도다. '생활의 발견'이나 '불편한 진실'은 그 부조리한 일상의 현실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이라면, '애정남'은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지침(?)을 준다. 물론 애정남의 말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 일이지만 '서로 지킴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행동을 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저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걸 강조한다.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우리들만의'라는 한정이다. 저들의 쇠고랑 차고 경찰 출동하는 거대담론이 있다면, 우리들만의 자잘한 상황 속에서의 아름다운 약속이 있는 셈이다.

'애정남'이 구획하는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왜 이 개그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누군가 정해놓은 것들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대중들은 언제부턴가 저 스스로 약속을 정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국가나 세계가 주창하고 따르기를 바라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비록 작고 소소하다고 하더라도 나와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개그 속에는 저들의 법칙으로 구획되어 좀체 바뀌지 않는 단단한 세상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들어있지만, 그 안에는 또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대안도 들어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약속'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동어반복일 지 모르지만 그것은 바로 '공감대'다. '애정남'이 애매한 상황에 던지는 지침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만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어느 사안에 대해 특별히 수사적인 설변이 없어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 어찌 보면 상식적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지키지 않아 더더욱 돋보이는 그런 상식. 마음과 마음의 교감 혹은 동감. 거기서 생겨나는 동류의식. 이런 것들이 이 작은 코너 속에서는 번뜩인다.

마케팅이 단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라면 아마도 '애정남'이 주는 교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이제 상품보다는 문화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애정남'이 보여주는 그 공감이라는 장치를 통해 만들어지고 공유되고 전파되는 것이다. 만일 공감이 없다면 문화도 없다. 그러니 이를 확대해서 얘기하면 공감 없는 상품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아마도 마케팅의 기본일 것이다. 고객의 마음을 얻는 것이나 공감하게 한다는 것이 그다지 달리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미는 약간 다르다. 공감은 단순히 물건 하나에 심어진 이미지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좀 더 총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상품이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드는 회사나 장인의 진심이 더 중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만일 그 진심을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다면, 상품 판매는 특별한 프로모션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게 될 테니 말이다. '애정남'은 바로 그런 달라진 대중들의 시선을 슬쩍 보여주고 있다.